16
장례식이 끝난 후, 할머니는 늘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었다.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항아리 뚜껑을 닦는 것도 잊지 않았고, 현관에 서서 학교 다녀올게요, 하고 말하는 내게 종합비타민을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할머니 방의 창문은 일 년 내내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할머니는 창틀 하나만은 늘 깨끗하게 닦아놓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소녀 시절에 어느 잡지에서 창틀에 걸터앉아서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는 여자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에 반한 할머니는 무엇인가 생각할 때면 늘 창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곤 했다. 할머니가 더이상 창틀에 걸터앉아서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더이상 꽃무늬 잔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것을, 텔레비전 리모컨이 일 년 내내 늘 똑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새색시였을 때 할머니는 시집살이를 시키는 증조할머니 때문에 장롱 깊숙한 곳에 보따리를 싸두었다. 거기에는 옷 두 벌과 돈 몇 푼이 숨겨져 있었다. 그 보따리를 볼 때마다 난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어, 하고 할머니는 다짐을 했다. 할아버지는 월급을 타면 증조할머니에게 모두 드렸고, 그래서 할머니는 돈 몇 푼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시장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대문 앞에서 쪼그려 잠을 자고 있는 거지를 보았다. 할머니는 거지를 깨우면서 대문을 가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 그러자 이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거지가 두 손을 내밀었다. 마치, 돈을 주면 비켜주겠다는 듯이. 할머니의 주머니에는 깨진 달걀을 반값에 주고 산 후 남은 돈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는 만들어놓은 지 며칠이 지난 두부를 헐값에 사거나, 시금치를 한 단 산다고 하고는 반 단만 사거나 하는 식으로 증조할머니 몰래 비상금을 만들었다. 할머니는 당연히 그 돈을 거지에게 줄 마음은 없었다. 할머니가 저리 비켜, 하고 말했다. 거지가 대문에 문을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손바닥은 여전히 내민 채였다. 할머니가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밀었다. 거지의 몸이 휘청 뒤로 젖혀졌다. 할머니는 재빨리 거지의 몸을 뛰어넘었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고무줄을 가장 잘하던 소녀였다. “에이 씨.” 거지가 욕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거지가 대문을 발로 걷어차면서 침을 뱉었다. “평생 재수없어라.” 할머니가 아버지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새벽이었다. 뱀이 옹달샘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꿈을 꾼 할아버지가 자고 있는 할머니를 깨웠다. 꿈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아무래도 태몽이 아닌지 모르겠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제야 할머니는 몇 달 동안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장롱에 숨겨놓은 보따리를 풀었다. 옷 두 벌은 반듯하게 개서 서랍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비상금을 들고 시장에 가서 순대를 한 접시 사먹고 임신복을 한 벌 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태몽인가봐, 하고 말했을 때 할머니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입덧이 심해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면 할머니는 자리에 누워 일 년 내내 눈이 내린다는 어느 도시를 상상해보았다. 아이들 키보다 더 높이 쌓인 눈을,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낭떠러지인지 알아차릴 수 없이 쌓인 눈을 상상하다보면 어느새 메슥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할머니는 아, 팥빙수 한번 먹어봤으면, 하고 중얼거렸고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할머니는 이 모든 게 그때 그 거지에게 동냥을 주지 않아서 생긴 일인 것만 같았다. 돈을 주지 못할 거면 밥이라도 먹이는 건데. 할머니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또 했다. 그러다보니 할머니는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돈을 줬어야 해, 줬어야 해, 중얼거렸다. 밥을 먹다 말고, 세수를 하다 말고, 그리고 길을 걷다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