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세대 입담꾼으로 불리는 손홍규의 미공개 단편 「호생관 최북」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역사 소설입니다.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소재 때문에 자칫 무거워질 수 있지만, 무게를 잃지 않으면서도 해학적인 대사와 비극적인 결말은 쉽게 잊혀지지 않네요. 「호생관 최북」은 영정조 시대에 이름을 날리던 이름없는 화가 최북, 붓으로 먹고산다고 하여 호생관이라고 불렸던 최북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단편소설입니다. 눈 내리는 날이면 기억날 것 같은 소설입니다. - 편집자
여자란,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사려 깊은 존재다. 최북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릴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난 밤 꿈자리가 뒤숭숭한 게 밤새 내린 눈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벽녘 그는 볼에 와 닿는 선득한 기운에 놀라 잠에서 깼다. 볼에 손을 대보니 차가운 눈물이 만져졌다. 그렇게 깨어난 최북은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눈은 그치지 않고 한낮이 다 되도록 내린다. 그가 앉은 자리 주위로 들이닥친 눈이 벌써 홑이불처럼 쌓였다. 어지러운 붓질 같은 눈발이 허공을 가득 채워 평소라면 가깝게 보였을 목멱산마저 아득하다. 그는 애꾸다. 오른쪽 눈은 감겼는데, 눈두덩이 제멋대로 졸아붙은 듯한 모양이다. 두 눈썹은 짙고 이마에 파인 주름은 깊다. 얼굴에는 검버섯이 피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파리하다. 손보지 않아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때문에 더욱 초췌한 몰골이다. 그는 성한 왼쪽 눈동자를 굴려 눈 내리는 세상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좁은 마당에는 벌써 무릎 깊이로 눈이 쌓였다. 솜을 풀어놓은 듯 민틋해진 마당을 바라보던 최북의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깃과 고름 그리고 겨드랑이에 회장을 두른 푸른색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여자는 머리에 얹은 가체 탓에 조금 힘겨운 듯했지만 서푼서푼 걸어 그에게 다가왔다. 손을 뻗어본다. 손끝이 갈애로 푸드득 떨린다. 그러자 여자가 눈발에 잠기듯 사라진다. 최북은 끌끌 혀를 찼다. 이젠 헛것마저 보이는구나. 이내 그는 모든 걸 보는 듯하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처연한 눈빛이 된다. 그는 다리를 오므리고 손을 뻗어 두 발을 주물렀다. 지난 밤 감발을 풀지 않아 뻣뻣하게 굳은 탓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고개를 돌려 대문을 보기도 한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얇은 홑겹의 저고리가 들썩거린다. 그럴 때마다 팔뚝이 드러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굵은 팔뚝은 그가 젊은 시절 힘깨나 쓰던 사람이었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지난 밤 최북은 폭포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젊은 시절 금강산에 갔다가 그 풍경에 매료되어 이곳이 바로 자신이 죽을 곳이라며 구룡연에 뛰어들었던 적은 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린다. 저 눈 내리는 소리가 폭우처럼 크게 들릴 줄이야. 하늘은 여전히 희끄무레하다. 해가 어느 만큼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다. 방에 들어가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온 최북은 툇마루 아래 내려섰다. 눈 속을 헤집어 짚신을 찾아내 꿰어신고 발이 푹푹 빠지는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대문을 열고 나서던 그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화선지가 만져졌다. 그걸 꺼내 보았다. 눈발이 화선지 위로 떨어졌다. 매화가 피어났으되 살아있지는 않다. 그는 물감을 구하러 갈 생각이다. 어쩌면 오늘 도화서에 가면 물감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몽당치마를 입고 머릿수건 위로 잔뜩 눈을 이고 있는 노파와 마주쳤다. 노파의 눈이 샐쭉해졌다.
"소낙눈이 내리는데 그림은 안 그리고 어딜 가?"
노파는 그가 품에 집어넣는 화선지를 보며 실쭉거렸다.
"그림 그려달라며 맡겨놓고 간 비단들은 다 기생집에 날렸어? 아무튼 난 모르겠네."
최북은 대꾸도 없이 골목길을 절뚝절뚝 걸어 사라졌다. 노파는 그의 등 뒤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귀신들은 뭐하나 몰라. 에라 이 빌어먹을 최칠칠이야, 눈구덩이에 처박혀 죽어봐라."
노파는 잰걸음으로 마당을 질러 그가 나왔던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 오후 무렵 성에 들어갔다가 눈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명례방에서 주막을 하는 이의 집에 묵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파루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나서려 했으나, 새벽 손님을 맞느라 부산스러운 걸 못 본 체 할 수가 없어 일손을 거들어주느라 늦었던 거였다. 저 무뚝뚝한 최북을 만난 건 이태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굴신도 힘들 만큼 만신창이 신세였다. 그런 걸 거두어주고 먹여준 것만으로도 노파는 극락왕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위인인지라 그러려니 했지만, 밤새 별일 없었냐는 말 한 마디쯤은 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앵도라진 노파는 축축한 버선을 벗고 두 손으로 발을 문질렀다. 핏기가 돌며 온 몸이 나른해졌다. 노파는 벽에 걸린 족자를 보았다. 눈이 침침한 노파는 방문을 열었다. 희끄무레하나마 옅은 빛이 방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산수화 한 폭이 그 빛을 빨아들였다가 은은하게 되쏘았다. 노파는 태어나서 한 번도 저런 풍경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세상에 저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곳이 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족자를 볼 때마다 노파의 마음은 봄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마냥 한없이 들뜨는 것이었다. 노파의 눈가에 맺힌 결기도 삭아내렸다. 으이그 저 화상, 그림 그리는 재주 하나는 용하다 못해 승천을 하는구나. 노파는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쓱 문질렀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다. 불이라도 때고 잘 것이지. 노파는 혀를 찼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 솥을 살펴보았다. 불기가 없으니 끓여먹은 흔적이 있을 리 없다. 노파는 물동이를 기울여 솥에 물을 붓고 삭정이를 끌어모아 불을 피웠다. 얼마 전 최북이 그림 한 장을 팔아 장작과 쌀을 들여놓은 덕에 아직은 견딜 만하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굴뚝으로 빨려들어가며 아궁이 밖으로 연기를 밀어냈다. 노파는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아궁이 앞을 떠나지 않고 부지깽이로 삭정이를 들쑤셔댔다. 그러다 노파는 부지깽이를 놓고 부엌 바닥에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노파는 고개를 돌려 부엌문 밖을 보았다. 눈은 쏟아지고 있다. 잘게 찢은 종잇조각 같은 눈송이들이 바람을 타고 이따금 부엌까지 밀려들어왔다. 칠십 평생 동안 남의 집 물일을 하느라 갈라터지고 쭈그러든 노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람이고 짐승이고 오래 묵으면 귀신만 드는 법이지. 노파는 자신을 찾아온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갈 때가 되면 가야하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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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손홍규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2004년 대산창작기금을, 2005년에는 문예진흥기금을 받았으며, 2008년 11월부터 경향신문에 <손홍규의 로그인>이라는 코너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소설집 『사람의 신화』, 『봉섭이 가라사대』,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청년의사 장기려』가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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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총 걸음으로 가던 최북은 골목 어귀에서 젊은 사내를 만났다. 솜으로 누빈 두툼한 저고리와 솜바지를 입고 짚신을 끌다시피 하며 오는 젊은 녀석도 애꾸다. 늘 패랭이를 쓰고 다니는 탓에 이패랭이라고도 불리는, 몇 해 전 어느 시사회에서 만나 알게 된 이단전이라는 녀석이었다. 중인 출신들만 모인 자리인지라 서로가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그 자리에 처음 참석한 이단전에게 농을 걸었다. 첫 출석한 사람치고 맹랑하다는 게 다른 이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자네 이름이 이상하기 짝이 없군. 단(亶)은 ‘진실로’이며, 전(佃)은 ‘머슴’이니 자네 이름은 진짜 머슴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이단전이 불쾌하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내 이름이 무어 그리 새삼스럽소? 내 아는 이들은 잘 처먹는다고 도야지(都也之)가 있고 인물이 훤하다고 두꺼비(?去飛)가 된 이도 있고 어미가 측간에서 났다고 뒷간이(厠間)도 있고 태몽이 개꿈이라 이름이 똥개(?加伊)가 된 이도 있소이다. 대충 살다 가면 그만인 인생들, 그까짓 이름이 뭐가 그리 중하단 말이오?" 최북은 이런 수작을 그저 가만히 보고 듣고 있었다. 이단전은 마치 오래 전부터 벼르던 사람마냥 이제 그런 최북을 향해 이기죽거렸다. "이보시오, 씹 본 벙어리마냥 왜 기분 나쁘게 웃고 그러시오? 당신 오른눈이 병신이고 내 왼눈이 병신이니, 우리가 함께 다니면 비익조가 따로 없겠소이다." 이단전이 이렇게 말하며 껄껄껄 웃었다. 그때 최북의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분노이거나 연민이거나, 뭐라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최북은 자신이 난폭해지고 싶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단전은 젊은 나이지만 이미 한양성내에 이름이 파다하게 퍼졌다. 유언호 대감의 비(婢) 소생으로 시를 퍽 잘 짓는다고 알려졌다. 어미는 비록 상전에 매인 몸이지만 아비는 도화서의 화원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서출에, 게다가 비의 소생인 이단전에게는 그런 독기가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세상이 그런 관계를 용납해 준 이유는 비의 주인들이 그걸 바라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비가 당상관이라 해도 어미가 비라면, 그 어미가 낳은 자식은 어미의 임자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다. 제집 강아지가 새끼를 치듯 제집 종이 새끼를 쳐서 재산을 불려주는데 마다할 사람 있으랴. 최북은 젊은 이단전에서 자신의 젊은 날을 보았다. 최북은 다짜고짜 이단전에게 달려들어 주먹질을 했다. 술상이 뒤집히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으레 있는 일이려니 싶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불시에 습격을 받은 이단전이 얼굴을 가리며 고꾸라지자 최북은 이단전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했다. "젊은 놈이 할 게 없어 대낮부터 술에 취해 비실거려? 그 기세가 얼마나 가는지 보자." 이단전은 최북에게 얻어맞아 피곤죽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최북은 그를 죽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단전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흥, 네놈이 바로 호생관이라 자처하는 최칠칠이렷다. 그림으로 일가를 이루지 못했다면 얌전히 고개 숙여 먹이나 갈고 붓이나 빨며 살 것이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중뿔나게 구는 게냐? 양반들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려고 눈깔을 뺐던 게로구나." 최북은 헛웃음을 흘렸다. 감긴 오른쪽 눈마저 번쩍 떠질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여보게 최칠칠이, 저 사람이 평소에는 그렇지 않다네. 오늘 제 아비를 만나겠다며 견평방에 찾아갔다가 하인들에게 내침을 당한 모양이네. 젊은 속이 얼마나 상했겠는가. 그러니 자네가 눈 한번 질끈 감고 모른 척 해주게." 참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이단전이 죽어버리겠다며 깨진 사기 접시를 쥐고 제 목을 그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달려들어 이단전의 손에서 접시 조각을 빼앗았다. 이단전은 엉금엉금 기어 다니다가 제 분을 못 이겨, 혹은 제 설움을 못 이겨 벌렁 자빠지더니 통곡을 했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물러나며 자리를 정리하고 떠나버렸다. 최북은 홀로 그 자리에 남아, 울다 웃다 기어이 지쳐 잠이 든 이단전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쓸모없는 눈이 자신은 오른쪽, 이 젊은 사내는 왼쪽이라는 사실만 다를 뿐,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심정이었다. 날이 이슥해지자 최북은 이단전을 업고 자신의 거처로 데려갔다. 이단전은 헛소리를 하며 앓았고, 최북은 그 옆에서 물수건을 짰다. 새벽녘 이단전은 언제 앓았냐는 듯 멀쩡하게 깨어났다. 그리고 최북을 보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고맙수." "뭐가 고맙다는 게냐?" "죽도록 얻어맞고 싶었소. 안 그랬다면, 내가 누구든지 한 놈쯤 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정말로 죽여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훌훌 털고 나서려던 이단전에게 최북은 그림 한 장을 건넸다. 소에 올라탄 목동이 내를 건너는 풍경이었다. 화면 중앙에 자리잡은 검은소는 터럭 한올한올이 성글고 굵게 표현되어 마치 잔뜩 화가 나 있는 듯했으나 그 잔등에 올라탄 목동은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이단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건 기우귀가 아닙니까? 어째서 이걸 내게…" "잘 보아라. 소등에 올라탄 녀석을 말이다. 그 녀석이 바로 너다." "이걸 지난 밤에 그렸단 말입니까, …나를 위해서?" 최북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주먹 쥔 손을 이단전 앞에 을러대 쫓아냈다. 그들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최북을 만나기 위해 왔던 듯 이단전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최북과 이단전은 원래 수인사 따위를 나누며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딜 가시는 게요? 또 도화서에 가시려는 게요?"
"그럼 어디 가서 물감을 구하겠나?"
"그 숱한 화방은 두고 굳이 도화서까지 가는 이유가 뭐요?"
"거기에 가면 내가 원하는 물감을 구할 수가 있다네."
"남동석 (藍銅石)이니뭐니 하는 걸로 만든 그 잘난 도화서 물감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말씀이오?"
최북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북의 병적인 성격을 잘 아는 이단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최북 자신이 원하는 물감으로 그려야 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최북이 지나쳐 가려 하자 이단전은 자신이 찾아온 용무를 깨달은 듯 서둘러 덧붙였다.
"남공이 최화사가 지난 번에 말한 조맹부의 그림을 몹시도 보고 싶어 하더이다."
"어린 자식한테 공(公)자를 붙여줄 건 뭐냐? 아무튼 그렇지 않아도 수일 내로 내 한번 찾아갈 생각이네. 만나거든 그리 일러주게나."
"헌데, 조맹부의 만마도를 어떤 연유로 간직하고 계시우?"
그 물음에 최북은 엉뚱하게 답했다.
"자네는 여전히 용서(傭書)를 하러 다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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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란 남에게 고용되어 글을 필사해주고 몇 푼의 수고비를 받는 일이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수? 최화사가 내게 얻어먹은 술도 다 그렇게 번 돈이외다."
"눈물겨운 돈으로 사준 술이라 시금털털했나 보구나. 자네가 용서를 하는 것이나 내가 조맹부의 만마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나, 매 한가지 아니겠나?"
그 말에 이단전이 씽긋 웃었다. 진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마도 최북은 언젠가 모방하여 그려두었던 조맹부의 만마도를 처분할 생각이 든 것이리라.
"애꾸 주제에 눈웃음을 치다니, 도성에 불가사리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겠구나."
"소문이야 어떻든 불가사리는 두 마리 아니겠수?"
이단전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킨 뒤 최북을 가리켰다.
"어쨌든 오늘은 최화사와 흉금을 터놓고 나눌 이야기가 있어 왔으니 떨궈 낼 생각은 마시오."
"발정난 망아지 날뛰는 걸 뉘라고 말릴쏘냐?"
"망아지인지 준마인지는 두고 보면 알게 아니우?"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골목을 빠져나가 목멱산 기슭을 에돌아 도성으로 향했다. 눈은 그칠 줄을 몰랐고 두 사람이 뿜어낸 입김이 눈발과 뒤섞여 허공으로 가뭇없이 사그라들었다. 눈길 진창에 빠진 우마차를 끄집어내려는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진흙으로 뒤발을 한 두 사람은 명례방에 이르러 기어이 단골 주막집을 지나치지 못하고 그곳으로 기어들어갔다.
"최화사, 사능이라는 애송이가 그린 호랑이 그림을 보셨소?"
탁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켠 이단전이 최북에게 물었다. 최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을 보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집디다. 터럭 한올한올이 바늘처럼 눈을 찔러오는데, 호랑이가 이토록 영물이었나 싶은 생각이 듭디다."
"강세황이 아니었다면 어린 녀석이 그만한 성취를 이뤘을꼬?"
"왜 표암 어른을 운운하시우? 김홍도라는 녀석이 속화에 능하다던데, 사실 그 속화의 인물들은 모두 최화사 어른을 베낀 게 아니겠수? 녀석이 최화사의 기우도를 보고 느낀 바가 많았노라 했다는 건 한양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우."
"객쩍은 소리 말게. 술이나 마시자구."
"술 좀 작작 드시구려. 언젠가처럼 경을 치지 않으시려거든. 노 젓는 게 지겹지도 않수?"
이단전이 능글맞게 웃었다. 임진년 대흉년 뒤 영조는 금주령을 내렸다.그때만 해도 혈기왕성한 최북이 금주령 따위를 무서워할 리 없었다.몰래 술을 마신 최북은 포도청에 끌려갔고,고분고분했더라면 곤장이나 몇 대 맞고 풀려났을 것을,양반이란 작자들은 대청마루 아래 온갖 술독을 묻어놓고우리 같은 백성들은 술도 마시지 말라는 게 말이나 되느냐어쩌구 항변을 하다가 기어이 전라우수영의 수군으로 끌려가고 말았다.세 해 꼬박 노잡이로 강제군역을 치르고 돌아왔을 때 최북의 몸은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정조가 즉위한 뒤 금주령은 풀렸지만,그 시절 이미 최북은 총기를 잃었다.이단전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쉰소리 그만 하고, 진짜 용무나 털어놓아 보게. 흉금을 터놓고 어쩌고 하는 것도 그렇지만 요즘 자네 안색이 좋지 않네."
"최화사 눈치는 귀신 뺨치겠소. 나 필한(疋漢) 이단전이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놈 아니겠소. 지난여름…"
이단전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지난여름 이단전은 양반들이 모인 어느 야유회에 시객으로 갔다가 눈이 번쩍 뜨일 미인도를 보았다. 도화서의 화원이 그린 솜씨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문인화를 주로 하는 사대부들의 솜씨도 아니었다. 속화와 문인화의 경계에 걸쳐있다고나 할까. 북화를 따라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지만 경박하다거나 천박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선이 살아있으면서도 그 선에 그림이 갇히지 않은, 남화와 북화의 수법이 교묘하게 얽힌 그림이었다. 서양의 화법이 그렇다던가. 이마와 눈두덩, 콧날과 입술, 그리고 두 볼의 음영이 두드러져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대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단전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림에 사용된 이채로운 화법이 아니었다. 바로 그 인물이었다. 소략하게 묘사되어 사람꼴만 갖춘 인물화도 아니오, 판박이로 둥그스름한 얼굴에 눈코입을 찍어 이상적인 미를 표현한 미인도도 아니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듯한, 그러나 사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묘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내 그 인물을 직접 보았소이다. 아니, 보았던 걸 기억해 냈소이다."
최북이 눈빛으로 물었다. 어디서?
"기방에서 보았소이다."
"자네가 기생에게 마음 한 자락을 준 게 어제오늘일이 아니잖은가?"
"보통 기생이 아니오. 물론 지금은 기생이 아니오. 참판의 첩으로 들어간 지 꽤 되었지요. 기생시절에는 정향이라고 했다지요."
"뭐라고?"
최북의 안색이 변했다. 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그게 대체 어떻다는 거냐?"
"동방삭을 속여도 이단전은 속일 수 없소. 선묘가 정확한 인물화라면 도화서의 화원이 그렸다는 걸 나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요. 하지만 이 미인도는 한양성에서, 아니 조선팔도에서 최북의 붓끝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오. 안 그렇소?"
최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다면 안 해도 좋소이다. 그런데 알고 계시오? 참판의 본처가 강짜가 심한 인물이라고 합디다. 정향이 후실로 들어가기 전에도 남촌의 한 가난한 선비의 딸이 첩으로 들어간 적이 있는데, 불구가 되어 쫓겨났다고 합디다. 소문으로는 본처라는 작자가 마루 끝에서 밀었다고들 하던데, 사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소문이 날 정도니 정향이라고 배겨날까 싶소이다. 어찌 생각하시오. 나는 정향이 최화사의…"
이단전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최북이 휘두른 탁주 사발이 이단전의 관자놀이에 맞고 떨어져나갔다. 최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동안 부들부들 떨다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거리로 달려나갔다. 다른 손님들과 히히덕거리던 중노미가 다가와 깨진 사발을 그러모으며 투덜댔다. 이단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출입문에 늘어뜨린 가마니발이 출렁이는 걸 보았다. 뜨뜻한 핏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젠장, 성질머리하고는. 곧 죽어도 나 같은 녀석은 안 된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단전은 알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최북이 저토록 화를 내는지. 정작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이단전은 정향을 처음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소나기가 내렸고 비를 긋기 위해 어느 집 처마 아래 몸을 피했다. 물안개가 피어났고 물비린내가 자욱하게 퍼져갔다. 비에 흠뻑 젖은 한 여인이 그가 선 처마 아래로 들어왔다. 그 여인이 바로 정향이었다. 정향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걸 보세요." 이단전은 흠칫 놀라 정향이 가리킨 쪽을 보았다. 저 먼 하늘에 한 마리 용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때 주막의 낡은 서까래에서 외줄에 의지한 채 거미 한 마리가 내려왔다. 거미는 이단전의 상념을 따라 들어왔다. 한겨울에 웬 거미란 말이냐. 이단전은 고개를 들어 거미를 보며 중얼거렸다. 울음기가 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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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집을 뛰쳐나온 최북은 눈 속을 허청허청 걸어갔다. 최북은 자신과 정향의 관계를 아무도 몰라주길 바라고 또 바랐다. 아니, 사실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최북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서는 안 되었다. 성을 나와 한강에 다다랐을 무렵 눈발은 그쳤지만, 칼날 같은 바람이 몰고 온 추위가 그를 난도질했다. 얼어붙은 강 위로 눈이 쌓였다. 최북은 모래밭을 달려 강가로 갔다. 취기도 사라지고 공포도 사라졌다. 그는 아무렇게나 쓰러져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 매향이가 있었다.
수군으로 끌려갔다 한양에 돌아온 최북은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붓 잡은 손이 떨렸고 술에 의지해 그려보려 해도 되지 않았다. 그제야 최북은 깨달았다. 자신이 그림에 흥미를 잃은 게 아니라, 삶에 흥미를 잃었음을. 상처받은 그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시를 읊어도 책을 읽어도 서화첩을 보아도 술을 마셔도 모든 일이 부질없게만 여겨졌다. 옛 지인들을 찾아가 술을 얻어마시는 것도 더는 염치가 없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밥을 먹는 것도 오줌을 누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귀찮았다. 그저 멍하니 앉았다가 정신을 잃듯 잠에 빠졌고 눈이 떠지면 일어났다.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듯했다. 그렇게 마음먹자 평온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았고 시간이 멈췄다. 산수의 본질은 와유(臥遊)라고 했겠다. 그래서 그는 눈을 떠도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누운 채 비스듬히 세상을 보았다. 이따금 지난 날 자신이 그렸던 그림들이며 왕유나 황공망의 그림들이 떠올랐으나 생의 의지를 되새겨줄 만큼 강렬한 추억들은 아니었다. 사흘을 굶자 몸이 가벼워졌다. 닷새를 넘기자 몸이 무거워졌다. 이레를 넘기자 다시 몸이 가벼워지며 세상과 혼연일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열흘이 되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최북은 허깨비처럼 도성을 걷다가 지인들과 함께 드나들곤 했던 어느 기방 앞에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최북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매향이라는 기생의 달짝지근한 숨결을 들이켰다. 가체를 얹지 않은 맨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매향이 고개를 숙였을 때 하얀 가리마가 눈에 시리게 들어왔다. 그 순간 최북은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매향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화원 어른, 괜찮으십니까? 꼬박 사흘을 이렇게 누워계셨습니다." "화원은 무슨 화원. 나는 화원이 아니오. 그냥 그림으로 먹고 살던 화공에 지나지 않소. 그런데 왜 내가 굶어죽지 않은 거요?" "제가 이따금 미음을 떠먹여드렸습니다. 혼절 중에도 미음은 받아 드시더군요." 매향은 입을 손으로 가렸다. 눈가에 살풋 주름이 잡혔다. 웃는 게로군. 최북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미소가 자신의 가슴 속에 묵향처럼 스며드는 걸 느꼈다. "자네는 내 이 못생긴 얼굴이 무섭지 않은가?" "어머 왜요?"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있어서 묻는 거네. 보통 사람들은 내 외눈만 보고도 놀라 자빠질 테니 말일세." "그러고 보니 조금 징그럽군요. 하지만 지금까지는 내내 주무시고 계셨기에 몰랐습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군. 껄껄껄." "저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안대를 쓰면 좀더 인상이 부드러워질 것 같아요." 최북은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가늠해 보았다. 북악산 자락 아래 자리잡은 기방인 게 분명했다. 젊은 시절 서평군 이요와 함께 드나들 때만 해도 꽤나 규모가 있고 번듯한 기방이었건만 그새 쇠락하여 늙은 기생 한 명과 찬모 그리고 두엇의 젊은 기생만이 있는 곳이라는 것도 떠올렸다. 그곳에서 최북은 매향의 정성스런 보살핌을 받으며 기력을 회복했다. 자신은 돈이 없다고 해도 매향은 괜찮다고 했다. 기운을 차려 그림을 팔아 갚으면 될 게 아니냐고 당돌하게 말하기까지 했다. 웃어넘길 수밖에. 그는 자신을 다잡아보기 위해 매향에게 붓과 먹을 부탁했다. 그러나 붓을 손에 쥐는 순간 구역질이 솟았다. 마음과 달리 몸이 거부했다. 몇 번이나 붓을 쥐어보려 애써보았으나 그의 몸에 각인된 고통이 재빠르게 되살아나곤 했다. 기어이 그는 붓을 내던지고 말았다. 매향의 통통하고 부드럽던 두 볼이 핼쑥해지고 거칠어졌다. 그가 머문다는 소문이 나돌자 지인들이 서넛 왔다갔다. 그들이 몇 푼 놓아두면 그는 슬그머니 돈꾸러미를 방문 앞에 내놓았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불편해 이따금 뒤란으로 돌아가 장작을 패기도 했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면 매향은 기겁을 하면서 그의 손목을 잡아 이끌어 방으로 밀어넣곤 했다. 자신의 손목에 와닿는 부드럽고도 완강한 힘. 최북은 그때 처음으로 외유내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매향이 그럴 때면 최북 역시 못 이긴 척 이끌려갔다. 부드럽고도 완강한 두 힘이 밀고 당기는 실랑이 속에 보름이 훌쩍 지나갔다. 그의 가슴 속에 생의 의지가 새로이 고인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볼 여유는 찾아온 듯했다.
어느 날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림 부탁을 하러 온 거였다. 그가 젊은 시절 잠깐 도화서의 학생으로 있을 적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다. 그 무렵 화원직도 세습화되다시피 하여 몇 몇 가문들이 도화서를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최북을 찾아온 이는 그런 가문 가운데 하나인 양천 허씨 사람이었다. "자네가 죽다 살아났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있다네. 도화서에서도 자네 이름이 들릴 정도니 말야. 그래도 이처럼 기방에 들어앉아 기생오래비 노릇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기생오래비 아니라 기생할애비라도 상관없지." "하긴, 천하의 최칠칠이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평범한 곳이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모르네. 어쨌거나 참판댁 부름이니 깊이 생각해 보게나." "참판 아니라 상감이 부른대도 싫으면 어쩔 수 없네." "그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겠네. 어쨌든 자네는 언제라도 다시 삼남의 수군으로 끌려갈 수도 있는 임시복귀자 아닌가. 나는 자네가 허락한 걸로 알고 가겠네. 참판 댁에서 곧 사람이 올 거야. 내 낯을 봐서라도 못 이긴 척 하고 가주게나."
그렇게 말한 뒤 화원은 돌아갔다. 그림 따위 그려서 무엇하랴. 말 한마디 잘못하여 세 해를 강제군역에 처했다가 돌아왔는데, 대체 누굴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한단 말인가. 그로부터 이틀 동안 최북은 방안에 꼼짝도 않은 채 틀어박혔다. 웬일인지 매향 역시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설핏 잠에 들었다 깨어난 그는 입맛을 다시며 방문 쪽으로 돌아누웠다. 실눈을 뜨고 보니 아직 대낮인 듯, 창호문이 환했다. 옆방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향의 목소리가 유난히 컸다. "애가 들어선 것도 아닌데 먹고 싶은 게 왜 그리도 많아?" 이건 늙은 기생의 목소리였다. "그러게 말예요. 게장이 먹고 싶어 죽겠어요. 저 마당에 뛰노는 검둥이가 게로 보일 정도라니까요." 그러자 타박하는 늙은 기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그, 게장은 무슨 게장이누. 그렇게 먹고 싶으면 저 방에 누워있는 화상한테 게 한 마리 그려달라고 하려무나. 하긴 저 화상은 붓을 잡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킨다지?" "흥, 붓을 안 잡으면 그림을 못 그리나?" "붓없이 어찌 그림을 그리누?" "심사정이라는 화사는 손가락으로도 잘 그린다던 걸." "망측해라. 왜 그림을 손가락으로 그린다니?" "언니두 참, 그런 그림을 지두화라고 한답디다. 역사에 남을 화사들은 모두 지두화에 능했다고들 합디다." "저 화상이 역사에 남을 화사나리가 될 것 같아?" 그런 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최북은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마치 속내를 들킨 사람처럼 얼굴까지 홧홧 달아올랐다. 그는 머리맡의 벼루를 슬그머니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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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는 참판 댁에서 보낸 하인을 따라나섰다. 그는 대문을 나서기 전 매향에게 말했다. "자네가 먹고 싶어하던 것이 저 방에 있을 터이니, 이웃들과 사이좋게 나눠 먹게나." 매향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최북은 속으로 너털웃음을 웃었다. 여자란, 심사숙고하지 않아도 사려 깊은 존재다. 매향을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는 비탈길을 걸어 북촌으로 향했다. 참판댁 대문 앞에 이르자 그집 하인이 안으로 뛰어들어가 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감 마님, 최직장이 왔습니다." 하명이 내리기도 전에 최북은 성큼성큼 솟을 대문을 넘어 들어갔다. 사랑채 앞에 함께 온 하인이 시립하고 있는 게 보였다. 최북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야 이놈아, 너는 어째 나를 최정승이라 하지 않고 최직장이라고 하느냐?" 하인이 뒤돌아보며 입을 내밀었다. "언제 정승이 되셨소?" 최북이 빙긋 웃었다. "그러면 내가 언제 직장이 된 적은 있느냐? 기왕에 헛벼슬로 추켜세울 요량이었다면, 직장이 다 무어냐, 정승이라고 해야지. 안 그러냐 이놈아?" 사랑방 문이 벌컥 열렸다. 사방관을 쓰고 의복을 갖춰입은 젊은 사내가 나왔다. "자네가 최북인가?" 최북이 고개를 쳐들고 사내를 보았다. 품새를 보니 참판의 큰 아들인 듯했다. 최북은 대뜸 되받았다. "호생관 최칠칠이 아니냐고 묻는 거라면 맞네. 그러는 자네는 누구인가?" 사내는 대번에 얼굴에 노기를 띠었다. 방금까지도 실실 웃던 하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네 이놈, 그 주둥아리를 찢어놓아야 고분고분하겠느냐?" 최북은 그런 호령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딴전을 피웠다. "소문에 듣자하니 참판댁에 대국에서 가져온 범 못지 않은 개가 있어 그 소리가 벼락치는 소리와 같다더니, 정말 듣고보니 그놈의 개 짖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만하구려." 이런 수작은 끝이 없을 것만 같았으나 곧이어 사내는 방문 옆으로 물러나고 참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긴 말 할 것 없다. 안으로 들어오너라." 최북은 아무렇게나 짚신을 벗어던지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최북의 짚신을 수습하는 하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다글다글 맺혔다. 참판은 비단을 내주며 그림을 그려달라 했다. 최북은 비단을 둘둘 말아 저고리 안쪽 품에 넣었다. 최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원래 비단에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좋은 종이로 만든 족자나 주십시오. 이 비단은 사례로 챙기겠습니다." 참판도 최북의 당돌함에 혀를 내두르고는 말없이 벼루와 먹, 물감, 종이, 붓 등을 내놓았다. "내 자네 그림을 몇 번 본 적이 있지. 구륵법에 약은 자들과 달리 선염법에 통달하여 고즈넉한 멋이 풍기더군. 채색을 해도 북화처럼 요란스럽지 않고 단아한 점이 마음에 쏙 들었네. 다만 자네가 그린 산수에서 노니는 인물들의 등이 구부정하다는 점이 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네. 성현들의 말씀에 따르자면 인물은 곱사등이처럼 구부정해서는 안 되며 멀리 있는 인물이라도 의관을 갖추고 몸짓도 여유있고 우아하게 해야 참된 문인화라 이를 수 있지 않겠나. 구부정한 인물은 곧 그림을 그리는 이의 굽은 마음이오, 그림을 감상하는 이의 마음 역시 굽게 되지 않겠나." 최북이 그 말을 받았다. "나리, 성을 나가 백성들의 마을을 한번만 돌아보십시오. 아니 성 밖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육조거리만 다니지 마시고 도성의 작은 길들을 한번만 돌아보십시오. 그렇다면 알게 되실 겁니다. 못 먹어서 굽은 놈, 매 맞아서 굽은 놈, 겁 먹어서 굽은 놈, 지고 있는 짐이 무거워 굽은 놈, 그런 놈들에게 태어나 날 때부터 굽은 놈, 세상천지 온통 굽은 놈들만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가 쇠하고 정이 소진하여 뼈와 살거죽만 남은 백성들을 보게 되신다면, 굽은 등에 또 다른 심의가 깃들여 있음을 인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최북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자 참판도 더는 뭐라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최북이 물었다. "족제비, 오소리, 왜가리, 메추라기, 고양이, 못 그리는 게 없습니다. 무얼 그릴까요?" 최북은 고개를 돌려 젊은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개를 한 마리 그릴까요?" 사내의 눈에 또 다시 노기가 떠올랐다. 참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만두고 산수화나 그려보게." "알겠습니다." 그는 붓을 옆으로 밀고 소매를 걷어올렸다. "무얼 하려는 건가?" "손으로 그리려 합니다." "지두화라?" "그렇습니다." "자네 좋을 대로 하게나." 그는 화선지를 펴고 손가락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눈 덮인 산과 바람 따라 휘어진 나무들이 그의 손끝에서 살아나왔다. 초막 한 채가 지어지고 그 앞으로 검은 개 한 마리가 달려나왔다. 동자와 더불어 방한모를 쓴 사람은 지팡이를 짚었는데 등이 구부정하다. 그 앞길에는 개울이 가로놓였다. 산은 윤곽이 있으나 나무와 집은 윤곽 자체가 형태가 되었고 나머지 허공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스산한 밤임을 알리듯 군데군데 얼룩졌다. 최북은 손가락, 손톱, 손날로 그 모든 걸 표현해냈다. 물감을 써 엷게 채색을 하니, 마치 어딘가에 달이 떠 있어 길손의 앞길을 비춰주듯 눈 덮인 길만이 환하고 밝다. 참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완성된 그림을 최북이 들고 보여주자 참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이라. 필치가 거침없으면서도 산과 집, 나무, 그리고 인물의 포치가 균형을 이루어 단아한 느낌을 주는구나. 저 산 위의 거친 나무들과 아래쪽의 마른 나무들이 눈보라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어 선비의 기상을 보여주는 듯하고, 산과 하늘이 맞닿은 부분에 이르러 천지가 하나로 되는 듯 뭉개져 있어 산이 하늘이고 하늘이 산인 듯도 하구나. 동자와 함께 눈보라 치는 밤길을 걷는 길손의 등이 굽은 건 여전히 아쉽구나. 저 굽은 등에서 속기가 느껴진다. 그래, 너는 어떠냐?" 참판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소자가 그림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최북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겠다, 그럼 다른 건 알구? 껄껄껄"
최북은 그림값을 챙겨 돌아왔다. 그새 하늘은 검기울어 우중충했다. 어둠이 깔린 골목을 걸으며 최북은 자신이 예전과는 다른 사람임을 느꼈다. 예전이었다면 그림 화(畵)자도 모르는 위인들에게 그림을 그려줄 리가 없다. 산수화를 그려달라기에 산만 그려준 적도 있다. 산수화인데 물이 어딨냐고 묻기에 그림 밖은 모두 물이 아니냐고 호기를 부렸다. 아예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위인이라면 다 그렸더라도 찢어버리곤 했다. 제 눈을 찌른 것도, 그래서 이렇게 애꾸가 된 것도 양반들의 그런 무례함을 참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던가. 최북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삼 년 간의 군역이 자신을 바꿔놓았는가. 세상에 저항해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걸, 예전이라고 몰랐을까. 그렇다면 노젓는 군역에 시달린 삼 년이 자신을 변화시킨 건 아니었다. 최북은 도리질쳤다. 매향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란,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섶의 꽃일 따름이다. 하지만, 매향은 다르다.
기방에 돌아간 최북은 비단과 그림값을 늙은 기생에게 넘겨주었다. 늙은 기생의 합죽한 입이 활짝 벌어졌다. 매향은 마루에 나왔다가 그를 보자 환하게 웃었다. "그래, 게장은 잘 먹었느냐?" "아주 맛있던 걸요." 그리고 매향이 소리를 치며 손을 번쩍 들었다. "최화원님 저길 보세요!" 최북은 매향이 가리킨 서쪽 하늘을 보았다. 북악산 깊은 골에서 희뿌연 구름이 피어났다. 그 구름 속에서 한 마리 용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용이에요, 용!" "그래, 장관이로구나." "최화사님 저걸 그려주세요." "그래, 내 그려주고 말고."
한강가에서 매향을 추억하던 최북은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는 걸 느꼈다. 이러다 정말 동사라도 할 것만 같아 그는 서둘러 노파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애초에 도화서에서 물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아예 찾아갈 마음조차 사그라들고 말았다. 정향은 그에게 어미의 얼굴을 그려달라고 했다. 그러마 약속했건만, 최북은 매향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날 북악산을 타고 올라가던 용은 잠깐 보았을 뿐인데도 뇌리에 뚜렷이 남아있는 반면에 가까운 곳에서 오랫동안 지그시 들여다보기도 했던 매향의 얼굴만은 뿌연 안개 속에 잠긴 사물들처럼 아련하기만 했다. 대신 그는 매화를 그렸다. 기방에서 보낸 마지막 밤, 매향은 그의 방에 들어와 옷을 벗었다. 옷 벗는 소리가 연꽃 피는 소리처럼 은밀했다. 매향은 그의 애꾸눈을 핥아주었고 그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었다. 매향의 숨결은 방안 가득 맴돌고 있던 암향(暗香)보다 그윽했고, 한여름 연향(蓮香)보다 청초했으며, 가을 끝 무렵의 만리향(萬里香)보다 끈끈했다. 최북은 눈을 감았다. 코 끝에 그때의 향기가 감도는 듯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어두운 길을 비틀비틀 걸어갈 때, 다시 눈이 내렸다. 지붕 낮은 초가집들이 어깨를 맞댄 도성 변두리의 마을들에서 따스한 불빛들이 새어나왔다. 최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었다. 눈송이들이 그의 얼굴 위에 내려앉아 이슬처럼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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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방을 나온 최북은 서대문 밖 아현리 옛 지인의 곁방에 거처를 정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려달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 거절하지 않았다. 최북이 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누군가는 그의 앞에 엽전 몇 냥 던져놓고 노골적으로 비웃기도 했다. "호생관(毫生館) 최북이라, 붓으로(毫) 먹고 산다(生) 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하리다." 그래도 최북은 노하기는커녕 대꾸도 없이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럴 때의 그는 오른눈에 안대를 대 표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찾아오는 이가 없으면 직접 도성으로 들어가 육조거리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호객을 하기도 했다.
한동안은 그가 둘둘 만 자리를 어깨에 걸치고 다른 손에는 화구들을 들고 절룩절룩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알은 체를 했다. 그를 최북이라 부르든, 최칠칠이라 부르든, 호생관 나리라 부르든,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곤 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 파는 횟수와 날들이 늘어감에도 그는 수척해졌다. 작은 키에 야위기까지 하니 숫제 몽당 빗자루가 걸어가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였다. 애꾸라는 명백한 그의 특징이 아니라면, 그를 예전의 호생관 최북이라 여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변해갔다. 그의 의복과 체격이 남루해지고 왜소해지는데 비해, 그의 표정만은 어느 시절보다 더 온화해졌다. 술을 마시는 횟수도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술 취해 뭇사람들과 드잡이질을 하는 광경은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양반들 앞에서 목이 뻣뻣한 건 변하지 않았다. 그는 비단이 품에 가득 안길 만큼 모이면, 그걸 매향에게 가져다주었다. 매향은 원래 충청도 산골 태생인데, 부모가 한양성 어느 대감댁의 노비였다. 매향의 부모들은 신공을 바치라는 대감댁의 닦달을 못 이겨 딸인 매향을 대감댁에 올려보냈던 것이다. 매향은 그때를 이렇게 떠올렸다. "우리 부모가 대감댁에서 떨어져 나온 건 수십 년도 더 된 일이에요. 그래도 해마다 두섬의 쌀을 신공 대신으로 올려보냈지요. 그러다 몇 해 전 대감댁 도령이란 분이 하인들을 이끌고 거기까지 들이닥쳐 그동안은 계산이 잘못되었다며 열섬의 쌀과 비단, 베를 바치라는 거예요. 그걸 마련하자면, 우리 부모가 손이 갈퀴가 되도록 일구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돌보아 장만했던 논과 밭을 모두 팔아야 했지요. 그래서 제가 자청하고 나선 겁니다. 대감댁에 가서 신공을 바치겠노라고." 최북은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감댁 계집종은 갓김치종이다. 대감이 올라타고 그 자제들이 올라타고 더러는 같은 신세인 사내 종들이 질벅거리고 그러다 기방에 팔려온 것이리라. "면천(免賤)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 동기들과 어울려 살면 고만이지요." 이 소박한 희망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최북은 잘 알았다. 천하게 태어났다면,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꿈꿀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북은 자신이 그 꿈이 되어주고 싶었다. 매향의 꿈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해도 괜찮았다. 매향의 꿈을 이루어 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 화사로 쌓아올린 명예쯤 헌신짝처럼 내던져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고 호생관이라 스스로를 일컫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한양 근교의 어느 절에서 단청 작업을 할 때, 주지 스님이 그에게 붓끝에서 부처가 살아나온 듯하다며 호불생(毫佛生)이라 부르겠다고 하자, 그가 호불생은 외람되니, 호생이라 하자 했던 거였다. 스님은 호불생보다 호생이 더욱 좋다며 껄껄 웃었다. 붓끝에서(毫) 만물이 살아나온다(生). 이렇게 받아들였던 것이리라. 최북은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뜻을 버리자 그림에 더욱 깊은 뜻이 스며들어갔다. 혼신의 힘을 기울려 붓질을 할 때보다 득의작(得意作)이 쉽게 나왔다. 붓과 먹이 없으면 손가락으로 그렸다. 지문이 닳을 지경이 되도록, 손톱이 빠지면 다른 손가락으로, 그 손가락마저 손톱이 빠지면 다른 손가락으로, 그렇게 그렸다. 그의 외눈에서 광채가 나왔고 온 몸에 서기가 서렸다. 그림값으로 받은 비단이며 엽전을 주렁주렁 꿰고 기방으로 향할 때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용처럼 가뜬하기까지 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그를 둘러싼 공기들은 부드러웠다.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이 감미로웠고 코 끝을 감도는 골목길의 시궁창 냄새마저 향기로웠다.
어느 날 최북은 참판댁에 다시 불려갔다. 이번에 그를 부른 사람은 참판의 큰아들, 최북이 개를 빗대어 놀려댔던 바로 그 사내였다. 예전에 참판댁을 소개했던 도화서의 화원도 함께 있었다. 참판의 큰아들은 마루에 나와 그를 맞았다. "지난 일이 구원이라면 잊도록 하게. 자네의 풍설야귀인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네. 그래서 내 오늘 다시 한번 자네를 청했던 것이네." 사내는 예전과 달리 한결 살갑게 최북을 대했다. 최북은 여전히 사내에게 냉랭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면전에서 구박을 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하나, 그림을 그려 팔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이번에도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렸다. 지난 번과 달리 화제(畵題)도 없이 저 먼 곳에 산과 바위를 그리고 앞에 바위와 치렁치렁 가지를 늘어뜨린 버드나무를 그렸다. 먼 곳과 가까운 곳 사이에 절벽이 솟았고 그 위에 단출한 초막 하나가 세워졌다. 이 모든 배경은 화면 왼쪽으로 치우쳐 있어 그가 한창 시절 연마했던 절파풍(浙派風)의 그림이 되었다. 그는 오른쪽 아래 여백에 손톱으로 그어 물결을 표현한 뒤 작은 배 한 척과 그 배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엷게 채색을 하여 마무리를 지으니, 한 편의 조어도(釣魚圖)가 완성되었다. 참판댁 자제보다 화원 허씨의 반응이 빨랐다. 허씨는 최북의 작업을 감탄하며 보다가 그림이 완성되자 탄식처럼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참판의 큰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바위들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 이처럼 아랫부분이 굵은 선으로 표현되어 마치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된 방법이기는 하지만, 조선에서 이만큼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화공은 두엇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판의 큰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꿈속에서 본 풍경이듯 아련하고 뭉클한 감정이 치솟는군." "그렇습니다. 숱한 조어도를 보았지만, 이처럼 정중동의 기세가 아슬아슬하면서도 확고하게 표현된 그림은 처음입니다. 사물에 의탁하여 도와 진에 이르고자 하는 사의(寫意)에도 충실하여 감히 그림을 한낱 여기(餘技)로 여길 수 없게끔 하는 숭고함마저 느껴지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이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도 최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그림 한 편을 끝냈을 뿐, 그게 어떤 그림이냐 따위는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 낚시하는 사내 옆에 한 여인을 그려 넣고 싶었다. 한바탕 꿈과 같은 세상, 어차피 깨고나면 부질없을 생에 대한 집착들, 그 모든 걸 떠나 매향과 함께 저 푸른 강물 위에 배 한척 띄워놓고 눈부신 은어 한 마리쯤 낚아 올려 벼랑 위 초막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주나 마시며 시를 읊조린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림값을 두둑하게 챙긴 최북은 서대문 밖으로 향하지 않고 매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화원 허씨가 동행했다. 허씨는 견평방의 도화서에 간다고 했다. 관인방에 이르러 헤어질 때 허씨가 말했다. "자네 덕분에 나리가 이번에도 영의정 댁에 톡톡히 인사치레를 하겠네 그려." 돌아서려던 최북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몰라서 묻나? 지난 번에 자네가 참판에게 그려준 풍설야귀인도 역시 영의정 댁에 있다네. 참판 댁 큰 자제가 한직만 떠돌아다녀 이번에 도성의 내직에 들어오려고 수를 쓰는 거지. 영의정이 그림에 조예가 깊어 자네 그림에 퍽 만족했다지." 최북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럼, 내 그림을 뇌물로 쓴다는 말인가?" "두말하면 잔소리지. 돌고 도는 게 그림 아닌가. 새삼스럽게 왜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만 가야겠네. 다음에 보세." 최북은 어쩐지 기방으로 이르는 길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매향의 방에 들어가서도 최북은 한동안 넋이 빠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매향이 그런 최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화사 어른, 참판댁에 다녀오셨다더니, 그곳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최북은 고개를 돌려 매향을 보았다. 매향은 저도 모르게 놀라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의 외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눈에 평소처럼 온화한 빛이 감돌았다. "아니네. 아무 것도 아니야." 최북은 마치 자신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이렇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뒤 매향은 최북의 방문을 거절했다. 최북은 몇 번이나 기방 대문 앞에 섰다가 그냥 돌아서야 했다. 편지를 쓰고 사람을 통해 소식을 넣어도 매향에게선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어느 날 아현리 산등성이 마을 자신이 기거하는 방에 앉아 마포와 한강을 바라보던 최북은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난 매향을 보고 외눈의 눈두덩을 문질렀다. "화사 어른, 그림도 작파하시고 술만 드신다더니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요." 매향은 뒤뚱뒤뚱 걸어 최북의 방문 앞 쪽마루에 앉았다. 최북은 손을 뻗어 매향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정녕 매향이었다. "자네가 여긴 어떻게? 이렇게 나다녀도 되는 겐가?" "안 될 건 또 무어랍니까?" 그러면서 매향은 들고 온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더니 음식들을 늘어놓았다. 매향이 돌아간 뒤 최북은 두 무릎을 그러모아 앉아 서쪽에서 비껴 내려온 주홍빛 햇살들이 한강 위를 미끄러지는 광경과 그 풍경들 사이사이 우뚝우뚝 서 있는 돛배들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매향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최화사 어른, 세상을 놀라게 할 재능을 지닌 자가 스스로를 속이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림은 내 뜻에 맞으면 그만이지. 세상에는 진정으로 그림을 아는 자가 드물다네. 언젠가는 나를 알아주는 지음(知音)이 있으려니, 생을 다해서라도 기다리려네." "지음이 여기에 있는데도?" "자네가 내 그림을 안다는 말인가?" "'그림'은 몰라도 '호생관 최북의 그림'은 알지요." 최북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양반들의 더러운 손들을 거쳐 뇌물로나 소용되는 그림을 그리려고 화사에 뜻을 둔 게 아니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자네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 그림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요. 진짜 그림을 그리세요. 최화사 어른의 그림을, 최화사 어른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호생관, 이 석 자가 화인처럼 박혀 천년만년이 흘러도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를 그림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정녕,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네, 그게 저의 희망이고 소원이며 꿈이니까요." "그게 자네의 꿈이라고…?" 그리고 매향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많지요. 하지만 호생관 최북은 단 한 명이랍니다. 저는 호생관을 믿어요. 불가에서는 화사를 부처님의 어머니(佛母)라고 한다지요. 그러니 속세의 화사도, 백성의 어머니가 될 수 있어요." 최북은 한없이 부끄러웠다. 자신이 잊어버렸던 꿈을, 매향이 오롯이 되살려준 것이다. 문인화를 추구한 이유는, 중인의 자식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고자 한 것도, 사대부들의 풍취를 흉내내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사대부의 영역을 침입해 들어가, 양반과 평민, 평민과 천민, 그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싶었다. 쉰내 나는 양반들의 사랑방에 걸려 퇴색하고 말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는 매향이 돌아가고 난 뒤 어두운 방에 앉아 향을 피웠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종이를 들고 밖으로 나와 달빛에 비춰보았다. 매화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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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선잠에 들었다가 툇마루 앞에서 누군가 바짓가랑이를 툭툭 터는 소리에 깨어났다. 문을 열고 보니 최칠칠이다.
"눈구덩이에 처박혀 뒈졌나 했더니."
"처박히기는 했는데 죽지는 않았네 그려."
"못된 놈 명줄만 길다더니."
최북이 툇마루에 올라서자 노파가 손사래를 친다.
"자네 나가고 얼마 안 되어 참판댁에서 사람이 왔다 갔어.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몹시도 급한 모양이더군."
"누구였소?"
"삼월이라는 계집종이더군."
삼월이라면, 정향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향의 소식을 안고 왔던 것이리라. 최북은 다시 댓돌로 내려서 방금 벗었던 짚신을 신고 나갔다. 방문 닫히는 소리를 뒤로 하고 골목길로 나선 그는 빠른 걸음으로 성문으로 향했다. 노파는 최북의 기척이 사라지자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팔자도 저런 팔자가 다 있을까. 어미가 그러더니 딸년마저 그 꼴을 당하다니. 쯧쯧. 이 박복하기 짝이 없는 최칠칠이야."
노파는 잠시 누워 뒤척이다 일어나 등잔에 기름을 넣고 심지를 돋웠다. 불을 붙인 뒤 습관처럼 토벽에 매달린 최북의 그림을 보았다. 여느 때라면 그린 이의 성정을 따라 그림에서도 누룩 냄새가 짙게 배어 나오련만, 이번에 노파는 알싸한 풀꽃냄새를 맡았다. 노파는 그림이 걸린 벽을 향해 모로 누웠다. 노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직 성문은 열려있다. 최북은 마음이 급했다. 정향은 매향이 낳은 딸이다. 그러니까, 바로 최북의 딸이다. 그는 매향을 죽인 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참판네 담을 넘지만 않았더라도, 조어도를 되찾기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