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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아빠를 찔렀다. 벌써 다섯번째였다.
집에 들어오면 즉시 엄마를 찾아 인사부터 해야 했다. 그게 우리집 법도였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에서 훤히 보이는 주방에도, 그 뒤에 있는 다용도실에도, 항상 열려 있는 내 방에도 엄마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는데, 바닥에 붉게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방 안에 펼쳐진 세상은, 참으로 고요했다.
아빠와 엄마는 모두 북태평양에 있었다. 하지만 지도 위에서 그들은 극과 극이었다. 아빠는 아시아의 오른편 바다를 죄다 차지한 채 이불도 없이 잠들어 있었고, 엄마는 북미 대륙의 좌측 연안에 술상을 차려놓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번에는 팔뚝이었다. 다행히 셔츠 밑으로 드러난 상처는 이미 스무 바늘쯤 단단히 봉합되어 있었다. 아빠는 현명했다. 엄마가 처음 아빠를 찔렀을 때 아빠는 검시관에게 찾아가 바느질부터 배웠다. 쌍시옷을 고통스럽게 한입 가득 물고 눈물을 글썽이며 상처를 꿰맸을 아빠의 애처로운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다녀왔습니다.”
잽싸게 인사하고 소인 물러나려는데 마마가 술상 위에 소주잔을 탁, 내려놓았다.
“어디 가, 이년아.”
“방에 가는데요.”
“닦고 가, 이년아.”
나는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와 걸레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피를 닦을 때는 걸레를 꽉 짜야 한다. 물기가 많으면 바닥에 피가 번지거나 스민다. 잘 지워지지 않는 피를 닦다보면 발바닥이 짜릿짜릿해졌다. 내게도 엄마의 피가 흐르고 있겠지. 생물 시간에 본 유전자의 모습은 단단한 사슬 같았다. 엄마 것은 다른 사람의 것보다 열 배는 더 단단할 거였다.
“받아라.”
마마가 잔을 건넸다. 나는 핏물 어린 손으로 잔을 받았다. 콸콸, 경쾌한 소리를 내며 술이 채워졌다. 꿀꺽. 난 단숨에 비웠다. 마마가 말했다.
“여자는 항상 조신하게 살아야 한다.”
나는 ‘조신하게’를 ‘좆이 나게’로 들었다. 엄마가 어떻게 ‘조신하게’ 같은 말을 안단 말인가. 얼결에 대답했다.
“저는 좆… 같은 거 싫은데요?”
그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사실 별을 아주 많이 봤다는 것밖에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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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노희준
1999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중편소설 「캔」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장편소설 『킬러리스트』와 소설집 『너는 감염되었다』, 『X형 남자친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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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마. 엄마 있는 게 어디야.”
남치가 말했다. 놀이터 벤치였다. 하늘이 충혈되어 있었다.
“미워할래. 그래야 안 닮지.”
“그러니까. 미워하면 닮아.”
“어째서?”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말야…”
나는 남치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알았어. 쉽게 설명할게. 누가 너한테 초콜릿을 먹지 말라고 한다. 어떻게 할 거야?”
“그 새끼 숨 막혀 죽을 때까지 처먹일 거야.”
“너는? 너는 어떡할 건데?”
“안 먹어. 졸라 재수 없어.”
“먹고 말고는 네 자윤데 왜 걔 때문에 안 먹어?”
“그럼 먹으면 되지.”
“먹고 말고는 네 자윤데 왜 걔 때문에 먹어?”
“그게 같아? 초콜릿은 맛있고, 엄마는 싫은데?”
남치는 손가락으로 감히 내 관자놀이를 슬쩍 밀었다.
“잘 들어. 너 선생님한테 혼날 때 웃음 나온 적 있지?”
“있지.”
“웃지 말아야지 웃지 말아야지 할수록 더 웃기지?”
“웃기지.”
“똑같아. 닮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 더 닮게 돼.”
녀석은 정말이지 천재였다. 나는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녀석의 잔등을 성의 있게 후려쳤다. 우와 따따따-, 남치는 괴성을 지르며 등에 불붙은 원숭이처럼 벤치 주변을 뛰어다녔다. 미안해. 어쩔 수 없어. 때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할수록 나는 너를 더 때리고 싶은걸.
남치로 말하자면…, 그러니까 내 남치였다. 남친으로 두자니 부실하고 깔치로 삼자니 창피해서 그냥 남치라고 불렀다. 남치는 전교에서 노는 성적짱이었고, 나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몸짱이었다. 아이큐는 남치가 두 배쯤 높았고, 몸무게는 내가 두 배쯤 더 나갔다. 왕따인 건 똑같았다. 애들은 우리를 ‘왕커’라고 불렀다. ‘왕따 커플’인데다 머리까지 ‘왕 크’다는 뜻이었다. 남치의 그림자는 숟가락 같았다.
모든 애들이 남치를 표 안 나게 건드렸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심지어 선생들도 손끝 하나 안 댔다. 남치의 계모는 봉투를 들고 교장실을 방문하지만, 마마는 각목을 들고 교무실을 습격하기 때문이었다.
“넌 혁준이 싫어하잖아. 근데 왜 전혀 닮지를 못해?”
내가 물었다. 혁준은 매일같이 남치를 괴롭히는 학교 폭풍간지였다. 얼짱에 몸짱에 성짱까지. 옛날 양아들은 못살고 못나서 범생이들을 괴롭혔다던데 요즘엔 정반대였다.
“요즘엔 안 맞아. 일주일 동안이나 안 맞았어.”
손이 저절로 올라가는 걸 참았다.
“자랑이다. 나 같으면 한번 지대로 맞고 끝내겠다.”
“맞고 들어가면 아버지한테 또 맞게 돼.”
“또 맞아. 평생 할부로 맞는 것보단 낫지.”
“혁준이한테 맞으면 아플 뿐이지만 아버지한테 맞으면 아예 죽게 돼.”
남치 꼰대는 단란주점 사장이었다. 말이 관광업자지 실은 조폭이었다.
“아예 죽어. 설마 무덤까지 파헤쳐서 때리겠어?”
“군사적 제재로 끝나면 그만이게. 금융 제재가 뒤따를 거야. 용돈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책값과 학원비까지 동결될 수 있어.”
또 아홉시 뉴스였다. 아무리 들어도 웃음이 나왔다. 남치는 종종 자신의 일을 역사적으로 보도해서 나를 웃겼다. 남치 집은 더 웃겼다. 딴 집은 오토바이 안 사주면 공부 안 한다고 개기는데, 남치네는 공부 안 시켜준다고 아빠가 아들을 위협한다. 나는 한동안 피식거리다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집만 이상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놀이터를 빠져나오며 남치가 말했다.
“내가 엄마 칼 피하는 방법 알려줄까?”
“말해봐.”
“삼촌들이 그러는데 전문가들은 몸통을 잡고 정확히 쑤신대. 근데 아빠가 매일 경상에 그치는 걸 보면 너네 엄만 칼에 서툰 거야. 아니면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든지. 당연히 칼을 잡은 손에 힘이 없겠지. 칼이 날아올 때 살짝 피하면서 손목을 잡아 쭉 당겨. 몸이 딸려오면서 칼은 이렇게 네 뒤로 갈 것 아냐. 손목 있는 데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팔뚝을 꽉 잡은 다음 반대편 손으로 요래요래, 졸라 패주는 거야. 그럼…”
나의 남치는 정말 별걸 다 알았다. 나는 존경심에 복받쳐 남치의 팔뚝을 꽉 잡은 다음 요래요래, 뒤통수를 졸라 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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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항상 여자다워야 한다.”
마마는 항상 말씀하셨다. 요는, 엄마와 반대로 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나는 아빠에게 자주 물었다.
“왜 엄마랑 안 헤어져?”
“미안하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좋아?”
“잘못했다.”
“이게 대화야?”
“엄마 말 잘 들어라. 엄마가 저리된 건 다 나 때문이다.”
물론 나는 아빠 말을 잘 듣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 말을 잘 들으려면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나는 아빠를 ‘씹새’라고 불러야 했다.
“누가 아빠야? 저 새끼는 씹새야 씹새. 앞으로는 씹새라고 불러.”
아빠는 씹새가 아니었다. 아빠는 짭새였다. 그것도 강력반 형사였다. 하지만 엄마한테는 쨉도 안 됐다. 엄마는 강도나 조폭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다.
그런 엄마가 젊을 적에는 간호원이었단다. 그때는 예쁘면 간호원이 될 수 있었단다. 반면 사회적 지위는 지금보다 높아서 의사가 할 일을 간호원이 대신 하기도 했단다. 엄마는 무서운 동네에 홀로 핀 꽃이었다. 워낙 ‘여자다워서’ 이력서 취미란에 수놓기라고 썼다가 싸우다 다친 동네 양아치들을 지겹게 꿰매는 신세가 되었다.
아빠는 엄마의 청순함에 뻑 갔다. 자신만을 치료해주는 천사로 만들고 싶었다. 주위를 둘러싼 불량하고 거친 남자들이 문제였다. 아빠는 어디까지나 엄마를 구출해주기 위해 권총을 들고 엄마의 집을 방문했다. 엄마를 내주지 않으면 빵빵! 머리를 쏴서 자살해버리겠다고 외쳐댔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었다. 일대 경찰들은 아빠한테 꽉 잡혀 있었다.
엄마의 증조 외할아버지가 ‘빨갱이’였다. 처가의 ‘나쁜 피’를 정화하기 위해 외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모녀를 두들겼다. 엄마가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는 관공서의 ‘관’ 자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인물이었다.
아빠의 난동에 시달리다 못한 외할아버지는 이거야말로 가문의 빨간 물을 완전히 없앨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외할아버지의 강압으로 엄마는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열 살이나 많은 짐승과 결혼했다.
짐승은 매일같이 엄마를 두들겼다. 다른 남자를 만날까봐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다. 임신을 못 한다고 때리더니, 임신을 하니까 언 놈의 자식이냐고 때렸다. 그래도 나를 품고 있었던 칠 개월 정도의 기간은 행복했다. 엄마 인생 최초로 한 번도 안 맞았다. 하지만 나를 낳자, 구타는 다시 시작되었다.
엄마는 술을 배웠다. 술을 먹자 엄마는 아빠가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훨씬 더 과격하다는 거였다. 아빠가 된 엄마 앞에서 아빠는 엄마가 되었다. 아니, 어린애가 되었다. 맞다가 지치면 엉엉 우는가 하면 마지막 필살기로 귀여운 척까지도 했다. 백 킬로그램의 거구가 오십 킬로그램도 안 되는 여자 앞에서.
“넌 순전히 권총 때문에 태어난 년이다. 권총한테 감사해라.”
‘권총’에 두 가지 뜻이 있다는 건 초경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생리대를 내주며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전혀 일관성 없게 말했다.
“여자는 모름지기 그놈의 권총을 조심해야 한다.”
남 얘기였다. 눈 삐면 이십대 후반으로도 착각할 완벽동안에, 신의 은총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34-26-36의 몸매를 자랑하는 마마라면 몰라도. 턱까지 흘러내리는 다크서클 올드 페이스에, 뭘 입어도 쫄티에 스키니, 온몸 풍만하다 못해 발가락까지 볼륨 있으신데도 가슴만 보면 목 돌아간 것 같더라는 울트라 H라인 왕커녀에게는, 바바리맨들조차 쌩을 까고 지랄들이셨다.
엄마는 계모였다. 일 퍼센트라도 유전자를 챙겼다면 내가 이럴 수는 없었다. 혹시 진짜 나는 살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일까? 존재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짜 나를 찾아 얼짱마녀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착한 괴물로 남을 것인가.
내 속에 정말 엄마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남치에게 물었다. 소주 다이어트가 짱이라는 답이 나왔다.
“술 마시면 살찐다는 편견을 버려. 알코올은 지방을 축적시키지 않아. 백 킬로칼로리의 술을 분해하는 데 백이십 킬로칼로리의 열량이 없어지니까. 반면 고열량이라 충분한 에너지원이 돼. 단, 안주는 절대 금지야. 술이랑 같이 먹으면 그게 뭐든 바로 지방이 되니까. 깡소주만 불어. 너는 특히 쌓아둔 열량이 쌀 열 가마니쯤 되니까 영양제랑 비타민만 잘 챙겨 먹으면 쓰러질 일은 없어.”
나는 아니지만 남치는 쓰러져야 했다. 쌀 열 가마니의 무게에 눌려.
아주 매를 버는 남치였지만 정확도는 네이버를 능가했다. 포장마차를 몇 군데 찍어 주 오일제로 달렸다. 타고난 겉보기등급 덕택에 뻰찌먹는 일은 없었다. 남치를 극중 친동생, 실제로는 트레이너이자 안주처리반으로 달고 다녔다. 한 달 만에 약 삼십 근의 기름이 알코올과 함께 휘발했다. 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남치는 츄파춥스 같았다.
서서히 거울 속에 엄마가 나타났다. 바위를 조각하듯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모습에 흥분을 느끼기도 했지만, 문득문득 두려움과 혐오감에 치를 떨기도 했다.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짜릿한 공포였다.
밥상이 커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반찬을 두 가지 이상 올리지 않는 엄마였다. 두번째 규칙. 한번 차려진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야금야금 늘어나기 시작한 접시들이 급기야는 임금님 수라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부쩍 야위었다는 거였다. 밥상은 세계만큼 넓었고, 접시는 나라 수만큼 많았다. 엄마가 밥을 많이 주면 줄수록, 나는 밤마다 술을 더 퍼야 했다. 아침이 되면 뱃속이 버려진 소주팩 같았다. 엄마는 구겨지고 찢어진 내 위장에 세상의 모든 먹을거리들을 죄다 쑤셔넣을 셈인가. 눈앞에 펼쳐진 하얀 접시들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는 바퀴벌레 알 같았다. 나는 현기증을 느껴 수저를 내려놓았다.
“뭐야 이년아.”
“못 먹겠어요.”
“뭐야 이년아?”
“다이어트중이에요.”
내가 꼬챙이처럼 말랐다는 엄마의 말은 사실이었다. 엄마는 머리채를 잡아 나를 들다시피 화장실로 끌고 갔다. 나를 욕조 속에 던져넣고 샤워기를 틀었다. 물방울들이 얼굴 위로 촘촘하게 쏟아져내렸다. 엄마가 나를 몸소 씻겨주는 기분이 꽤 삼삼했다. 당최 숨을 못 쉬겠다는 것만 빼고.
“내가 밤새 한 음식을 뭐? 안 먹어? 먹어 안 먹어 이년아.”
얼굴에 난 모든 구멍으로 물을 먹으며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우주에 몇 번 나갔다 오니 욕조 안이 출렁이고 있었다. 엄마가 내 얼굴을 물속에 처박았다. 용솟음치는 물방울 사이사이로 무지갯빛 해초와 열대어가 보였다. 심청을 봤던가 인어공주를 봤던가, 용궁에 다다르기 직전 입에서 검은 마녀들이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죽기 직전 물 밖에 나와보니 어제 먹은 갈비와 그제 먹은 삼겹살, 머릿고기 편육 잡채와 개구리 뒷다리, 메뚜기튀김, 바퀴벌레조림, 훈제생쥐가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엄마는 그 죽음의 바다에 내 머리를 다시 처박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뚜껑 신라면 와플 오감자 가루비 프링글스 가나 카카오56 부산오뎅 비비큐 켄터키프라이드 파파이스 버거킹 맥도날드 던킨 크리스피 피자헛 탐앤탐스 파스타리오 스파게띠아 델리 파리바게뜨 크라운베이커리 나뚜루…가 와륵 와르르륵 잭폿으로 쏟아져내렸다. 그것들은 욕조를 넘고 화장실과 복도를 넘어 거실까지 밀려갔으나 엄마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머리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다 죽어가는 마당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크게 외쳤다.
“머… 머… 먹을게요!!!”
“진작 그럴 것이지.”
엄마가 손을 놓았다. 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거실까지 밀려갔던 음식물들이 내 입속으로 와구와구 되돌아왔다. 초고속 리와인드를 한 것처럼 나는 다시 왕커녀가 돼 있었다. 욕조 물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맑기만 했다. 나는 한동안 소리 죽여 웃었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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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원 앞에서 벼르고 별렀다. 나를 물고문당하게 만든 남치를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선수를 쳤다.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얼굴을 들어봤더니 엉망이었다. 남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열시 반의 놀이터에는 애들이 없었다. 하긴 대낮에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소주가 담긴 생수병을 꺼냈다. 종이컵에 따라 남치에게 건넸다. 남치는 한참 캑캑거렸다. 두번째부터는 괜찮았다. 한 병이 금방 비었다.
“왜 맞았는데?”
“내가 사등 했거든.”
“뭐야. 사등도 안 돼?”
“꼭 이등이어야 해. 그리고 걔, 삼등 했어.”
나는 두번째 생수병을 꺼냈다. 뒷맛이 썼다. 혁준은 남치를 재미로 때리는 게 아니었다. 폭풍간지가 왕따를 상대하는 것 자체가 쪽이었다. 무서워서 누르는 거였다. 딸이 예뻐질까봐 얼짱마녀가 두려워하듯이.
“뿐이야?”
“뭐가?”
“다음번엔 사등 하면 되는 거냐고.”
“주말에 스키장에 보내달래. 수행평가도 대신 하래.”
남치의 입술이 나트륨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남치네도 잘살았지만 혁준네에 비할 건 아니었다. 혁준네 꼰대는 국회의원이었다. 혁준은 숙제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전문가한테 맡긴다는 걸 선생들도 알았다. 성적이 떨어져서 스키장이라는 상 대신 수행평가를 직접 하는 벌을 받은 게지.
남치는 엄마까지 혁준에게 달렸다. 남치 엄마는 오래 전에 죽었다. 유품이라곤 먹고 남은 수면제뿐이었다.
남치 꼰대는 몇 년 전 이십대 중반의 마담과 재혼했다. 말이 마담이지 완전 개빠순이였다. 젊은 년을 앉혀놓고도 성이 안 차 꼰대는 자주 외박을 했다. 그럴 때마다 계모는 집에서 술을 왕창 처먹었다. 무섭다는 이유로 남치를 종종 침대에 끌어들였다. 어릴 때 못 해준 엄마 노릇을 늦게나마 해주는 거라고 했단다. 남치도 남자였다. 가슴에 얼굴 묻는 게 좋아서 못 이기는 척 받아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년이 남치를 꼰대로 착각했단다. 덩치가 세 배는 차이나는데,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단다. 남치는 엄마도 아닌, 엄창한테 동정을 잃었다. 아무래도 꼰대가 눈치깠나봐. 남치는 시도 때도 없이 불안에 떨었다.
“수행평가는 그렇다 치고. 스키장은 어떡할 건데?”
남치는 소주를 병째 가져갔다. 물처럼 꿀꺽꿀꺽 마시더니 얼굴에 붓기까지 했다. 얼굴 전체가 불빛에 번들거렸다.
“난 걔랑 친해질 거야.”
“뭐?”
“지금은 어려서 그렇지만 나중에는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뭐?”
“친군데 그 정도 노력은 할 수 있어.”
“뭐?”
“걔도 나한테 정이 있어! 애들 눈치 보느라 표현 못 할 뿐이야!”
남치는 주먹까지 불끈 쥐고 말했다. 애나 어른이나 맞는 것들은 다 똑같다. 개새끼나 매한가지다. 맞다보면 의지하게 되고, 의지하다보면 사랑하게 된다. 맞아서 사랑한다. 아니, 맞을수록 사랑한다. 어쩌면 나도 엄마를 사랑하게 될까?
“아 완전 한심해 진짜. 차라리 죽어버려 이 빙신아. 아님 평생 혁준이 깔치나 하든지!”
술에 취한 아저씨 두 명이 실실 쪼개면서 이쪽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내가 생수병을 구기며 눈에 불을 켜자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하여간에 씨발 죄다 비겁한 것들. 목이 타서 생수병을 말끔히 비웠다. 속이 더 뜨거워졌다. 등짝을 막 후려치려는데 남치가 말했다.
“나만 맞은 거 아냐. 이번 일등도같이 맞았어. 다음번엔 걔가 이등을 하고, 내가 삼등을 해야 한대.”
“…”
“찌직이가 될 수는 없어.”
언젠가 남치가 해준 어떤 불쌍한 개 얘기였다. ‘찌직이’는 우리가 그 개한테 붙여준 별명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 개처럼 될 수는 없지.
“나는 어차피 버린 몸이지만 다른 애 건드리는 건 못 참아. 다시는 아무도 못 건드리게 할 거야, 다시는.”
처음으로 남치가 멋있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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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겐 오래된 친구가 있었다. 원래는 하늘 같은 애인이었는데 결혼한 후에 친구 먹었단다. 그 아저씨를 만나면 엄마는 날밤을 새워 술을 마셨다. 너 때문에 생이별했잖아, 설사 바람을 피워도 넌 할 말 없어.
엄마는 나름 논리정연했다. 나는 스물한 살, 첫사랑도 제대로 못 해보고 결혼했다. 너는 서른한 살, 젊고 탱탱한 년들을 이미 실컷 안아봤다. 공평하려면 여러 번 연애를 해야 할 판이다. 아빠는 찍소리도 못 했다. 바람나서 도망갈까봐 오히려 엄마한테 더 잘했다. 참 공평한 세상이었다.
토요일에도 그랬다. 새벽까지 달리시느라고 매우 피곤하신 마마를 위해 해장국을 사서 두시쯤 들어오겠다고 했었다. 그런 아빠가 강력반에 급한 일이 생겨 많이 늦겠다고 열두시쯤 전화를 했다. 나는 그때 마마 옆에 꿇어앉아 있었다. 옛 애인과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식 때문에 뼈마디가 쑤신다는 마마의 다리를 벌써 두 시간째 주무르고 있었다. 엄마도 양심은 있는지, 일 잘 처리하고 들어오라고 아빠에게 모처럼 화창하게 말했다. 그러나 전화기를 들고 있는 엄마의 얼굴은 점차 흙빛이 되어갔다.
세번째 규칙. 먼저 전화를 끊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도 아빠도, 끊겠다고 말한 뒤 전화기를 그냥 내려놓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의 야유회에서도 아빠는 하던 대로 했다. 규칙을 지켰을 뿐이니까 아빠는 잘못이 없었다. 다만 아빠를 집에 못 가게 붙잡은 김형사와, 재주 좋게도 강력반 야유회에 영계들을 잔뜩 동원한 이형사와, 마침 그 잠깐을 못 참고 영계 중 한 명과 요란하게 수작하고 있었던 박형사가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전화기를 통해 고스란히 생중계되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칠면조 한 마리 길게 울었다.
엄마는 다른 폭력중독증 환자와 달리 술에 취했을 때만 폭력적인 게 아니었다. 다만 감정적이고 충동적일 뿐이었다. 그건 술이 깨면 냉정하고 이성적인데다가 여전히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의미였다. 그게 엄마가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엄마는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벌떡 일어나 핸드폰으로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경찰서에 전화해봤자 외근중이라고 할 게 뻔했다. 유일하게 친한 이형사 부인한테 전화를 했다. 한참 동안 수다를 떨다가 넌지시 물었다.
―오늘인가 다음준가 모르겠네. 토요일에 야유회라던데 그게 혹시 오늘이야?
―응응, 무슨 단합대회라던데? 무슨 산으로 간댔는데? 어라, 어디라더라. 기억이 통 안 나네.
인터넷에 접속했다. 경찰서를 중심으로 야유회 가기 좋은 산들을 물색했다. 오 분도 안 돼 가능 지역은 세 군데로 좁혀졌다. 피식, 하고 웃더니 이번에는 음식점을 검색했다. 마마 왈, 칠면조는 아무 데나 있는 동물이 아니라는 거였다. 도대체, 누가 경찰이람.
어쨌든. 수사 시작 세 시간 만에 엄마는 현장에 잠입했고, 형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엄마의 조그마한 선전포고를 들었다. 딱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모두 영계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하면 살려준다. 저항하면 죽는다.”
왜 하필 그날 집에 있었을까. 나는 얼결에 끌려가 열심히 현장 사진을 찍어야 했다.
토요일 오후라 음식점에는 ‘민간인’들이 바글바글했다. 하필 대청이 여러 개 있는 야외음식점이었다. 오십대 박형사가 구두를 신는 둥 마는 둥 마당으로 내려와, “어이고 이게 누구야, 어서 오십시오” 너스레를 떨었다. 막내 형사가 잽싸게 내려와, “아이고 사모님 왜 이러십니까, 잠깐 저랑…” 하면서 등에 손을 살짝 댔다. 그러자 엄마는 “어딜 만져 이 변태 새끼야” 속삭이면서 곧바로 팔을 꺾어버렸다. 김형사는 뺨을 맞았고, 이형사는 조인트를 제대로 까였다. 박형사는 가뜩이나 없는 머리털을 한 줌이나 뽑혔고, 두 명의 이십대 형사는 은밀한 곳을 은밀하게 얻어맞았다. 어떻게 도합 오백 킬로그램은 족히 나갈 강력반 형사 여섯 명이 고작 오십 킬로그램짜리 여자 한 명을 못 당해냈을까? 아빠는 무슨 생각으로 도망가지 않았을까? 왜 대청마루에 끝까지 앉아 엄마가 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까? 아빠는 시종일관 천하절색의 가무를 감상하는 선비처럼 태평하고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빠의 태도는 엄마를 더욱 난폭하게 만들었지만, 아무리 목소리가 커도, 아무리 손버릇이 험악해도, 사람들 눈에 엄마는 남편 잘못 만나 인생 망친 가녀리고 불쌍한 여인이었다. 그 여인이 처음으로 크게 소리질렀다. 이 천하의 깡패 새끼들아. 남의 남편 물들이지 말고 오입질은 너네끼리 해.
아빠와 아빠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우락부락하지, 나이대별로 위계질서 확실하지, 여자 한 명씩 죄다 꿰차고 있지, 누가 봐도 ‘깡패 새끼들’ 맞았다. 나조차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렇게 보였다. 졸지에 깡패가 된 아저씨들 중 그 누구도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이 경찰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오입질하는 경찰보다는 오입질하는 깡패가 훨 낫지. 낫고 말고.
영화에서처럼, 경찰차는 엄마가 깡패들을 일망타진한 후에야 경박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출동했다. 한 손으로는 권총집을, 다른 손으로는 진압봉 손잡이를 짚고 근엄하게 걸어오던 두 명의 경찰은 깡패들의 신원을 파악하자마자 마당 한가운데 어설프게 멈춰 섰다. 젊은 짭새는 두 눈을 끔벅끔벅했고, 나이든 짭새는 한쪽 뺨을 자꾸만 실룩거렸다. 날씬한 다리를 다소곳이 모은 엄마는 깡패와 경찰 사이에 군계일학처럼 서 있었다.
어디선가, 칠면조 한 마리 길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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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가 죽었다. 아빠가 사건을 맡았다. 남치는 밤 열한시쯤 수면제를 잔뜩 먹었다. 하필 그날 꼰대는 외박을 했다. 엄창은 억병으로 취해 잠들었다. 다음날 점심때까지 아무도 남치를 깨우지 않았다.
동기가 성적 비관이란다. 계모의 증언에 의하면 스키장에 보내달라고 했다가 안 된다고 하자 꼰대와 언성을 높여 싸우기까지 했단다.
조금만 일찍 병원에 갔더라도 살았을 거라고 아빠는 말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래된 수면제라 구토제 성분이 없었단다. 나는 가슴이 싸늘해졌다.
“유서는 없었어?”
“그게 이상해. 없었다는 건지 있었다는 건지…”
나는 유서가 없었을 리가 없다고, 남치는 정말 죽으려던 게 아니라고, 만약 그랬다면 완벽한 방법을 택했을 거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유서가 있음 뭘 해? 왕따 찌질이, 계모한테 따먹히고 자살했다고 해?
어쨌거나 남치는 죽었다. 죽는 척하려다 정말로 죽었다. 죽어서도 아홉시 뉴스에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정말이지 존경스러운 남치였다. 나는 녀석의 잔등을 후려갈기고 싶어 아주 미칠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열흘 만에 집에 들어온 아빠는 죽겠다고 생난리였다. 엄마 때문에 징계를 먹었단다. 형사한테 징계는 겁나게 무서운 것이었다. 연타를 치면 강등될 수도, 잘릴 수도, 퇴직금을 뺏길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퍼질러 앉아서 눈물 흘리고, 어깨 흔들고, 심지어 발차기까지 할 건 없잖아. 엄마가 마지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빠는 좀 전보다 더 요란하게 칭얼거렸다.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형사질을 해. 차라리 그냥 콱 죽어버릴래.”
“당장 죽어. 자신 없으면 내가 죽여줄까?”
나는 울컥, 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인사도 없이 집을 나와버렸다.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이었다.
남치가 꿈에 나올까 무서웠는지 장례식장에는 생각보다 애들이 많았다. 생전 처음으로 남치한테 절을 두 번씩이나 하고 나왔다. 희희덕거리던 애들이 나를 보고서야 표정을 굳혔다. 애들이야 철이 없으니까 그렇다 쳐도 엄창의 모습은 좀 거슬렸다. 새로 산 듯한 검은색 명품 정장에 싼 티 나는 스모키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다. 옆방의 상주가 손님들을 바래다주고 들어오며 엄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엄창은 엉덩이를 흔들며 나한테로 다가와서는 꽤나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니가 왕커녀니?”
안녕, 엄창? 하려다가 말았다. 내가 대답을 않자 엄창은 갑자기 나를 껴안더니, 정확히 말하면 매달리더니, 내 등과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서로의 몸을 어설프게 안은 채 엄창과 나는 오래 울었다. 울다가 지쳐 쉬는 타임에 나는 마스카라가 번진 엄창의 얼굴을 변기 속에 처박아 깨끗이 닦아주었다.
혁준은 오지 않았다. 대신 혁준의 꼰대가 왔다. 남치의 꼰대는 그를 욕하지도, 때리지도 않았다. 짧게 인사를 하고, 수행원과 함께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놀이터에 들렀다. 소주 한 모금을 마실 때마다 하늘이 붉어졌다. 붉은 하늘이 보기 싫어 소주를 그만 마시기로 했다. 일 분도 안 돼 소주가 몸서리치게 마시고 싶어졌다. 붉은 하늘을 수십 번도 더 봤다. 그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나는 남치네 가게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혁준 꼰대가 나의 벗은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었다. 아빠는 신경도 안 썼다. 형사 아저씨들과 함께 새파란 영계들을 꿰차고 좋아하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엄창이 나를 노려봤다. 유리벽에 비친 나를 보니 장난 아니게 예뻤다. 그 누구보다도 젊고 그 누구보다도 쭉빵했다. 혁준 꼰대가 왜 나를 택했는지 알 만했다. 연달아 술을 받아먹다보니 사타구니가 뜨뜻해졌다. 가만 보니 사타구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룸 바닥이 우리집 안방 장판으로 바뀌었다. 바닥에 세계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렸는데도 나는 하나도 안 아팠다. 다른 사람들도 개의치 않고 웃고 떠들어댔다. 남치 꼰대만이 바닥의 피를 치운다고 들통에 물수건을 빨아오고 난리였다. 손님 맞을 때 생리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화를 냈다. 아무리 노력해도 생리는 멈추지 않았다. 남치 꼰대가 피를 지우고 또 지워도 세계지도는 또다시 그려졌다.
나는 한밤중의 놀이터에서 눈을 떴다. 몹시 추웠다. 이불 속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집 안의 풍경은 더 추웠다. 거실에 발을 디뎠을 때 엄마는 막 식탁에서 일어나는 참이었다. 한 손에는 소주병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나비처럼 안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방문을 잠그고 벌벌 떨었을 터였다. 오늘은 달랐다. 식탁에 앉아 엄마가 먹다 남은 술상을 받았다. 어차피 못 죽인다. 아빠가 없으면 엄마도 재미없어 죽을걸. 난 아빠가 얼마든지 엄마를 이길 수 있다는 걸 이미 알아버렸다. 남치가 혁준이 다른 애 건드리는 걸 못 참겠다고 말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찌직이’라는 개가 있었다. 개는 철판 중앙의 기둥에 묶여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과학자는 하루에 두 번 개를 감전시키고 끝난 뒤에는 반드시 밥을 주었다. 처음에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으나 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조용해졌다. 조신하게 참다못해 나중에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도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지.
엄마의 술상을 깨끗이 비우고 일어섰다. 나는 이백 근짜리 왕커녀였다. 55사이즈쯤은 우스웠다. 내 다이어트를 방해한 건 분명 그녀의 실수였다.
『X형 남자친구』에서 전재 (노희준, 문학동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