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림혜숙이 어린 딸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
농장주인 김 씨의 절도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 형사는 신경질이 삐죽 솟아났다. 없어진 물건들을 그때서야 찾고 있었는데 사라진 것은 온전히 림혜숙과 일곱 살 딸아이뿐이었다.
단순가출 같은데. 더군다나 애도 데려갔다면서.
아니, 갈 데가 없는 사람이라구요. 북한에서 온 지 얼마 안 됐다니까요. 제발 좀 찾아주세요.
이름도 가짜일 가능성이 크고, 주민번호도 모르는 사람을 어디 가서 찾아 이 사람아. 그리고 왜 찾아. 없어진 것도 없다면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으면 어떡해요? 어린아이도 있는데.
농장주인 김 씨는 말없이 다급하게 돌아서는 강 형사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김 씨는 머뭇머뭇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강 형사는 대수롭지 않게 김 씨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김 씨는 포기하지 않고 다음 날에는 간첩신고를 했고, 며칠이 지나고선 실종신고를 했다. 수배라도 떨어지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 해서였다. 강 형사가 마지못해 다시 농장을 찾았다.
림혜숙. 730228-2443215. 글쎄, 잘못 적었는지 그런 사람 주민번호는 없다니까. 답답하네.
맞다니까요. 봐요 그렇게 적혀 있잖여요.
자꾸 귀찮게 할 거야? 실종은 가족들만 할 수 있는 거 몰라? 당신, 가족 아니잖아. 아, 빨리 단순가출란에 서명해. 나 바빠.
아니, 그건 아는데, 하도 동네에 이상한 소문들이 돌아서, 그거와 연관이 있지 않은가 싶어서 그려요. 나한테 온다 간다 말 안 할 이유도 전혀 없고 말여요.
이상한 소문?
사거리 약국 앞을 지나는 사람들 치고 안을 힐끔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황 약사는 자신이 꼭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 일 없는 듯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를 썼다.
황 약사는 거울 앞에 서서 가지런히 머리를 정돈했다. 포마드를 발라 가르마를 나누고 한 올의 머리카락도 일어섬 없이 단정히 빗어넘겼다. 이미 칠순을 훌쩍 넘겨버린 나이였지만 새까맣게 염색을 해서 흰머리 한 가닥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직도 연락 없지요?
황 약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젠 손님들이 건네는 인사마저도 비아냥거림처럼 들렸다. 이미 소문은 소문을 낳아 금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사거리 병원집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 약사는 대꾸 없이 천천히 가운을 걸쳤다. 하얀 가운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며 남자가 등지고 선 창 너머 거리를 흘끗 쳐다보았다.
…뭐 줄까?
황 약사가 무덤덤하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근래 약국을 찾는 손님의 대부분이 그런 식이었다.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뭔가 새로운 소식을 얻기 위한 제스처.
목이 좀 아파서요.
어떻게 아픈데?
들으셨죠? 저기 구이 쪽에 농장이 있는데, 거기서도 한 달쯤 전에 한 여자가 없어졌대요. 어째 동네가 뒤숭숭한 것이…
남자는 병원이나 약국의 단골손님도 아니었는데도 아는 척을 해왔다. 그것이 황 약사는 영 못마땅했다.
약 사러 왔으면 약이나 사가지고 가.
황 약사는 기계적으로 서랍에서 편도선 약을 꺼내 재빠르게 진열장 위에 내려놓았다.
이천 원.
설마 얌전하고 예쁜 새댁이 그러기야 했겠어요? 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일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남자가 돌아서 약국을 나갔다. 황 약사는 그가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창 너머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황 약사의 며느리가 조용히 사라진 것은 한 달쯤 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어느 날이었다. 친정도 지척에 있고 근처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나온 며느리가 볼일도 많고, 갈 곳도 많다는 것쯤을 식구들은 알고 있었다. 종종 있어온 늦은 귀가일 거라고 황 약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문제는 아침이 되고서도 장 약사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장 약사의 외제차는 평소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지난밤 늦게 돌아왔거니 가족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차만 있었고 장 약사는 보이지 않았다. 차를 놓고 외출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사라진 며느리를 대신해 은퇴했던 황 약사가 약국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달, 황 약사가 사라진 며느리를 대놓고 찾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는 것은 모두 다 흘러다니는 소문 때문이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금구 사거리엔 병원집 며느리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는 농협에 모여 소일 삼는 사람들로부터 빠르게 퍼져나갔다. 소문의 서사는 그럴듯한 것이 퍽이나 구체적이었다. 가장 먼저 읍내에 떠도는 소문을 들고 온 사람은 정 간호사였다. 차마 남편인 병원장에게는 말하지 못하겠다면서 소문의 요지만을 간략하게 황 약사에게 전했다. 정 간호사의 말을 듣자 황 약사도 어렴풋이 그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며느리와 바람이 났다는 사내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소문이 아들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업무를 보는 아들을 보니 이미 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황 약사는 생각했다. 이쯤 하니 며느리에 대한 걱정보다도 바람나서 집 나간 며느리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생전처음, 자신의 체면이 집 나간 며느리 때문에 구겨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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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백가흠
소설가. ‘나비’ 편집위원.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우리 시대의 극단적인 정신세계와 불편한 현실을 아이러니와 판타지로 녹여내는 개성적인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소설집으로 『귀뚜라미가 온다』, 『조대리의 트렁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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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 사거리에 떠도는 추잡한 소문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장 약사의 친정식구들뿐이었다. 하지만 추문을 뺀 믿고 싶은 소문만을 가장 맹신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을 빼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생성되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모두 진실로 받아들였다. 남의 일이기에 이왕이면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았다.
농장주인 김 씨는 어딜 가나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몸집이 커서가 아니라 오히려 작은 키 때문이었다. 김 씨는 언제나 바지 끝을 여러 번 접어 입었다. 걸을 때마다 바지가 팔랑거렸는데 뒤에서 보면 바지가 사람을 이고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김 씨가 바지를 팔랑거리면서 림혜숙을 찾아다닌 지도 한 달이나 지나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는 농장일도 내팽개치고 김 씨는 북한에서 온 림혜숙을 찾아 틈만 나면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다.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소문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다. 소문은 무성했고 무서웠다. 전국 사방곡곡에서 그녀를 봤다는 사람들이 제보를 해오기 시작한 것은 현상금이 적힌 전단지를 뿌린 후였다. 사람들의 제보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찾아다닐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김 씨는 포기하지 않고 힘을 아끼지 않았다. 제일 황당한 제보는 그녀를 영국에서 봤다는 사람의 얘기였다.
김 씨는 사람들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몸과 맘이 모두 지친 후에야 깨달았다. 지칠 때로 지친 몸과 한없이 낙담한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힘이 이젠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게 꼬여버린 것은 모두 다 작은 키 때문이었다.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으로 언제나 오버했었던 과장된 몸짓과 말이 후회스러웠다. 필요 이상 당당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마흔이 훌쩍 넘어 늦장가 들었던 베트남 부인이 얼마 살지 못하고 도망친 것도, 좋아했던 림혜숙이 떠난다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모두 다 자신의 작은 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만큼 키 작은 동생이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자신의 뒤치다꺼리만 하는 것이 가여웠고, 림혜숙이 데리고 떠난 그녀의 어린 딸이 보고 싶어 서러웠다. 김 씨는 밤마다 돼지축사에 앉아 서럽게 소리 내어 울었다. 축사 안 돼지들은 되레 자신들이 화풀이 당할라 김 씨 반대쪽으로 몰려들어 서로의 품을 파고들며 머리를 감췄다.
간혹 전화를 받고 재빠르게 달려가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특수한 환경 때문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도움을 주고받아 그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헌데 어떻게 된 일인지 림혜숙은 딸과 함께 하늘로 증발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무도 그녀를 봤다는 사람이 없었다. 함께 국경을 넘었던 사람을 어렵사리 수소문해 찾았지만 그도 최근의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다만 큰 수확이라면 림혜숙이 생각보다 큰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김 씨도 그것은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국경을 넘은 그녀가 중국에서 돼지를 키워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 사실이 김 씨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황 약사는 사돈식구들이 번잡하고 떠들썩하게 동네를 수소문하고 다니는 것이 탐탁스럽지 않았다. 삼대를 이어 동네 유지로 살아온 체면이 행실이 바르지 못한 며느리 탓에 날아간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남우세스러워진 것이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 약사는 모든 것이 그냥 조용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의사인 아들이 이혼을 한다고 쳐도 재혼을 못할 리 없었고 며느리가 다시 돌아온다고 한들 예전같이 살가운 마음이 들까 자신도 없었다.
황 약사는 경찰들이 약국과 병원을 드나드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찰들마저도 장 약사가 실종된 사건을 단순가출로 보고 수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친정식구들만이 소문을 좇아 진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친정식구들은 매일 아침 일찍 아예 금구 사거리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새로이 떠다니는 말들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나고 있었지만 어디에서도 장 약사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친정식구들만 애간장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친정식구들은 소문을 좇아가다 보니 은근히 장 약사의 남편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 얘기는 사거리 별다방 미스 정로부터 흘러나온 얘기였다. 친정식구들이 약국과 병원에 발길을 끊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제가 어제 공업사에 배달 갔다가 컴퓨터집 민 씨 아저씨한테 들은 얘기인데요. 그 아저씨는 대학도 나와서 꽤 똑똑한 사람으로 동네에서 유명하거든요. 가끔 티켓 끊어줘서 같이 놀러다니기도 하고, 그래서 속엣말도 간혹 잘 나누는 편인데요.
미스 정은 자꾸 말려 올라가는 짧은 미니스커트 자락을 끌어내리며 더듬거렸다. 마주 앉은 장 약사 남동생의 시선도 자꾸 밑으로 떨어졌다. 남동생이 테이블에 바짝 붙으며 간절하게 미스 정을 쳐다보았다.
저도 좀 사정이… 이렇게 오래 잡아두시려면 저는 티켓을 끊어야 하거든요. 지금도 배달이 밀려 있어설랑. 여기서, 사람들이 많은 데서 말 전하는 것 같아서 누가 들을까봐 부담스럽기도 하고…
창밖으로 며느리의 친정식구들이 사거리를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황 약사는 사돈식구들을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약국과 병원에 찾아와 난리를 친 것은 이 주 전이었다.
병원 문을 열기 전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친정식구들은 노골적으로 황 원장에게 적개심을 드러냈다. 장 약사의 남동생은 다짜고짜 매형의 멱살을 잡고 늘어졌다.
다 듣고 왔어 이 자식아. 마누라가 없어졌는데도 니가 이렇게 무사태평인 이유가 있었어. 경찰 불렀으니까 꼼짝 말고 있어.
처남, 이거, 일단 이 손 좀 풀지…
친정어머니는 이미 실신 직전이었다. 대성통곡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딸의 이름을 연거푸 부르짖었다.
어이, 사돈총각. 이거 환자들도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어쩌자는 겐가. 며느리의 치부가 뭐 그리 자랑할 거라고… 사람들 알아듣기 전에 당장 목소리 낮추게. 우리들 얼굴도 생각해줘야 할 것 아닌가.
얼굴? 사람 죽여놓고 체면치레를 하시겠다?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리며 여러 대의 경찰차가 사거리 약국 앞에 도착했다.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속속 사거리로 모여들었다.
누가 신고를 한 건가?
황 약사는 흠칫 놀라 밖을 내다보았다. 한 무리의 경찰들이 병원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때 아닌 구경거리의 횡재를 만난 환자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한쪽으로 비켜섰다.
조용히 소문 안 나게 수사해달랬더니 이렇게 요란하게 설레발을 치면 어쩌자는 건가.
황 약사가 점잖게 강 형사를 나무랬다.
살인사건 신고가 들어와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살인?
남동생은 미스 정에게 들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친정어머니의 통곡 소리 때문에 병원 안은 다시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남동생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컴퓨터집 민 씨가 미스 정에게 말하길 장 약사가 사라진 날 그녀의 외제차가 한밤중에 저수지 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동네에서 유일한 외제차인데다가 창문을 내리고 있어 운전자를 볼 수 있었는데, 운전을 하고 있던 사람이 황 원장이 분명하다는 얘기였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자세한 사실을 말하긴 뭐하지만, 그때 황 원장은 부인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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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형사가 남동생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순간 병원 안에 있던 소란스러움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위치추적을 해보니 그 시간에 저수지 쪽으로 누님이 간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 남편 분은 타 도시에 계셨습니다. 알리바이가 확인됐어요. 새벽까지 다른 도시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한 무리를 이끌고 여길 왔단 말인가.
황 약사는 분에 겨워 이를 악물었다.
그럼, 누나가 누구랑 거길 갔다는 거예요?
행실이 나쁜 자식 부끄러워하지는 못할 망정, 어디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거요. 그래도 한 번 맺은 인연, 사돈이라 아무 말 안 하려 했더니만, 으흐흠.
아버지…
내동 가만히 소란에 빗겨서 있던 황 원장이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남세스러워서 점잖이 기다리려 했더니만, 바람나가지고 살림 차려 나간 애를 우리보고 찾아내라 하면 그건 도리가 아니지요, 사부인. 듣자하니 사람들 하는 얘기로는 대전 유성 어디에 방 얻었다고도 합디다.
친정식구들도 맨 처음 떠돌았던 소문의 실체를 모를 리 없어 잠잠해졌다. 친정어머니는 한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소리 내지 않으려고 속으로 끄윽끄윽 삼켰다. 남자 형제들 틈바구니서 외동딸로 애틋하게 키운 딸이 생사도 모른 채 시댁식구들에게마저 버림받은 것이 서럽고 서러웠다.
장모님, 아버지도 걱정되고 화가 나서 그런 거니 이해하세요. …처남, 그날 밤 누나하고 통화했었어. 혼자 생각할 게 있어서 외국으로 여행을 좀 간다고. 갑작스러워서 나도 놀랐는데. 그렇게 얘기만 해서. 그래서 그런 줄 알고 기다리는 것이니까. 좀 기다려보자고. 별일 없을 테니까.
다, 매형이 바람피워서 이렇게 된 거라면서요. 제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살림을 차린 건 매형이라면서요.
남동생은 어깨에 얹혀 있던 황 원장의 손을 매몰차게 떨어냈다. 황 약사는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폈지만 이미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는 그새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황 약사는 쓴 입맛만 다셨다.
약국 문을 닫는다는 것은 완고했던 자존심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황 약사는 생각했다. 흘깃 약국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약국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단골이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시내 다른 곳을 찾는지 발길이 뜸해졌다. 평생을 동네에서 인심 잃지 않고 살아온 것치곤 되돌아온 인정이 너무 초라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버지에서 시작해 자신을 거쳐 며느리까지 수십 년을 한자리에 약방을 열어온 것에 존경을 아끼지 않던 사람들도 황 약사의 깔끔하기만 했던 자존심에 흠집을 내기 위해 찾아오는 듯했고, 평생을 동네에서 함께한 친구들마저도 숨기고 있었던 시기와 질투를 위로라는 이름으로 핑계 삼았다.
김 씨는 무슨 소식이라도 들어보려고 매일 읍내 농협에 나갔다. 그곳에서 매일 새로운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터무니없는 전화보다 그편이 오히려 나았다. 일손이 바쁜 철이었음에도 농협 안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김 씨도 슬쩍 사람들 사이에 끼어 림혜숙에 대한 소문은 없는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 사거리 약국 여자에 관한 것이었다.
제가 경찰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다니까요. 이혼 안 해줘서 부인을 죽이고 저수지 근처에 묻었다고 하더라구요. 알리바이 때문에 핸드폰도 여러 개나 가지고 있었다네요.
김 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사람은 장 약사가 아니라 림혜숙과 어린 딸이었다. 땅에 산 채로 묻히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둘의 모습이 눈앞에 훤했다.
아, 아니. 정말 그랬대요?
김 씨가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지만 누구도 김 씨의 말에 대꾸를 해준 사람은 없었다.
황 원장 젊은 사람치고는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더니만…
다, 그 아부지가 박복해서 그런 거야. 그 양반 평생 인정이라는 것도 없이 말이야. 그래서 부인도 일찍 죽었잖아.
그게 이번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황 약사가 사람들에게 피해준 것은 또 뭐고. 이 사람도 참…
왜 상관이 없어요? 그렇게 돈 많이 벌면서 동네를 위해서 뭘 한 게 있어요?
아니, 돈 좀 벌면 마을에 뭘 해야 된대?
모여 앉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제각각 한마디씩 늘어놓았다.
매일 아침, 전에 있던 소문에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져서 서사는 점점 완벽해지고 방대해져갔다. 그러다 보면 금구마을의 하루는 금세 지나갔다.
에이, 아니에요. 제가 지지난주에 경찰들 몰려오고 난리 났을 때 병원 안에서 다 들었거든요. 그 여자 바람나서 남자랑 외국으로 도망갔어요. 영국이라던가. 황 원장이 하는 얘기 직접 제가 들었어요.
그거 헛소문이라면서… 언제 적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야. 그렇다면 출국했는지 알아보면 되잖아. 그게 확인이 안 되니까 여기서 찾고 있는 거지. 사람도 참. 내 생각엔 틀림없이 죽었어.
맞어. 이건 누가 봐도 납치 살인이야. 범인들이 카드도 썼다드만.
살인? 남편이요?
그야 모르지 무슨 사연이 있겠지. 내연관계인 남자가 있었다거나. 납치당했을 수도 있고. 남편이야 범인이 아니니까 경찰이 가만있는 걸 테고.
그럼, 그 영업사원이라는 사람이 죽였나?
아니, 그 사람도 며칠 전에 보니까 여전히 돌아다니던데.
김 씨는 그새 자신이 읍내에 왜 나왔는지를 까먹고 장 약사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에 빠져들었다.
아직 확실한 얘기는 아닌데, 제가 어제 사거리 다방 마담에게 들은 얘기인데요. 그게 꽤 설득력이 있더라구요.
그 여자 하는 얘기를 어떻게 믿어.
아니 마담도 손님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대요. 그날 장 약사 차에 실려 간 여자는 장 약사가 아니라. 다 알죠? 저수지에서 그 차를 봤다는 사람이 있었던 거요. 차에 타고 있던 여자가 장 약사가 아니라 돼지 키우는 북한 여자였대요.
…뭐, 뭐요?
김 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버럭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사람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 씨를 쳐다보았다.
그, 그럼 애기는, 딸애는 어쨌대요?
딸아이? 무슨 딸아이?
아니, 자세히 좀 말을 해보시오.
김 씨는 당장 싸움이라도 붙을 태세로 과수원 장 씨에게 다가섰다.
근데, 누구요? 당신은.
그 여자와 같이 살던 사람이요, 난. …분명히 여자아이도 같이 있었을 텐데. 도대체 저수지로 가서 어쨌다는 얘기요?
아니, …나도 들은 얘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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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씨가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 했지만 작은 체구의 김 씨가 길을 가로막았다. 앉아 있는 장 씨와 김 씨의 일어선 키가 비슷했다. 농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다.
아니, 들은 얘기는 그게 전부요. 궁금하면 마담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쇼.
말이 안 되잖아요. 느닷없이 얼굴도 본 적 없었을 사람의 차에 타고 있었다니.
어, 사람 참, 글쎄 난 잘 모르는 이야기라니까.
과수원 장 씨가 김 씨를 밀치며 자리를 떴다. 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고대했던 사람들은 싱겁게 마무리된 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하나 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김 씨는 서둘러 문을 나서는 장 씨를 뒤따라 달려나갔다.
야야, 칠십 넘게 살면서 별별 소리들이 다 오고간다, 야. 며느리 니가 숨겨놨다매. 으허허허.
이런, 미친놈이 실성을 했나.
한 마을에서 나고 자라 초중고를 같이 다녔던 죽마고우 박한의원 박 씨가 황 약사를 찾아왔다. 한의원은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가업을 잇고 있었다. 박 씨는 동네에서 유일한 황 약사가 상대해줄 만한 수준의 오랜 친구였다. 그러나 박 씨도 황 약사를 찾아오는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이 새롭게 떠도는 말을 전하려고 온 듯했다.
또 무슨 약을 또 올리려고 뜸을 들이냐, 넌.
한의사인 아들이 어린 나이에 연애 결혼한 탓에 평범한 며느리를 들인 박 씨는 며느리마저 약사로 들인 황 약사에게 부러움이 많았다. 동네 유지의 주도권을 빼앗긴 것 같아 시샘은 날로 더했다. 황 약사는 언제나 모르는 척 며느리 자랑으로 박 씨의 샘을 골려먹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반전되고 있음을 박 씨가 놓칠 리 없었다.
하도 희한하고 이야기가 웃겨서 너한테 전해주려고 왔다. 으허허허.
박 씨는 호탕하게 웃어재끼며 밑으로 주욱 처진 배를 쓰다듬었다. 황 약사는 박 씨에게 드링크제 한 병을 내밀었다.
내가 아들놈 한의원에서 심심풀이 침이나 거들어줄까 앉았는데, 침 맞으러 온 늙은 무당이 하도 기이한 말들을 내려놓는 거라. 나야 니 며느리가 여행 간 줄 너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좀 과하다 싶음서도 일리는 있되 사실은 아닌 듯해서 너 보러 온 거라. 전쟁 때 너이 아부지가 해코지한 원혼들이, 일제 때 너이 할아버지가 해코지해서 억울히 죽은 귀신들이 니 며느리에게 달라붙어, 밤에 꼬여냈다는 거야. 정신이 완전 돌아서 저수지에 뛰어들었다고 하는 거라. 굿을 해야 한다는 거라. 내가 노망 난 늙은 무당을 혼쭐내긴 했다만, 집안내력까지 들추며 말하는 꼴이 얼렁 니 며느리가 돌아와야 한다 싶어, 내가 너 보러 왔다니깐.
황 약사의 얼굴에 일순 경련이 일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그 따위 말을 지껄이고 다닌다는 거야?
야야, 흥분하지 마라. 사실이 아닌데 분을 낼 필요 뭐 있겠는가 말이야. 근데 거서 끝이 아니라니깐. 말 들어보니 구이에서 탈북한 여자도 한 명 없어졌다 하두만, 니 며느리에 쓰인 국군 귀신들이 그 북한 여자를 같이 안고 저수지로 빠졌다는 거라. 조그만한 애도 있었던 모양인데 그 애도 물로 들어가더란다.
황 약사는 부들부들 손까지 떨고 있었다. 박 씨는 여유롭게 강장제 한 병을 들이켰다.
야, 좋다.
…일제 때 창씨개명 안 한 사람이 어딨고, 전란 중에 부역 안 한 사람이 어딨다고. 뭐가 어디로 들러붙어?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소문이 흉흉하니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갖다붙이는 거라. 이제 그만 돌아오라 기별을 넣으란 말이다. 말 들어보니 다 니 아들이 잘못해서 집 나간 거라드만. 나무라도 니 자식 먼저 해야지…
그런 소리 지껄이려면, 당장 나가. 니 심보가 쳐나온 배만큼이나 고약스러운 줄은 내 알고 있었지만, 나이를 하도 먹어 고꾸라질 나이에 주책을 어디 와서 부리고 앉았느냐, 이놈아. 나가 당장.
하따, 그놈 성질은… 기껏 친구라고 걱정이나 해줄라 쳤드니만.
박 씨가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문을 나섰다. 돌아서는 박 씨의 뒤통수에 분하고 분해서 뭐라도 던져주고 싶은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내 이놈을 그냥.
황 약사는 이 층 병원으로 냅다 올라가서 원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내 암말도 안 하고 너만 믿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찌 된 거냐?
병원에 있던 환자들과 간호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 약사에게로 모아졌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황 약사는 자신에게 일치된 시선을 알아보고는 조용히 원장실 문을 닫았다. 진료받고 있던 환자는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에 아쉬움이 큰 듯, 바쁜데 사람을 나가라 마라 한다며 툴툴거리면서 원장실을 나갔다.
너, 사돈총각 말대로 장 약사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니가 이렇게 태평하게 앉아 있으니 사람들이 수군수군 말들이 많잖냐. 오늘은 내가 무슨 말까지 들은 줄 아니?
다 헛소문인 거 아시잖아요. 아버지까지 그러시면 어떡해요. 장 약사하고 아무 문제도 없었어요. 저도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라구요.
그런데 왜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야? 나가서 찾아보기라도 해야지. 살림을 차렸다면 가서 머리채를 휘어잡고라도 들어와야 할 것이 아녀.
황 약사는 이제껏 참았던 굴욕을 터뜨리기라도 하듯 고함까지 지르며 아들을 나무랐다.
경찰이 가급적 아무 말 말라고 해서요. 마을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아무래도 납치를 한 것 같다고. 저희 집을 잘 아는 사람들일 거라고…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는 거야? 그럼 소문대로 정말 장 약사가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이냐? 너하고 나하고 이제 식구가 둘뿐인데 나한테까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말이 되냐?
그게… 아버지에게도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첩보가 들어왔다고.
첩보? 첩보라니?
…아버지가 장 약사를 숨겨놓았다는. …말도 안 되는 거 알고 있는데, 말이 안 되는 거 아니까 말씀 안 드렸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왜. 며늘아이를… 그런 소문이 왜.
김 씨는 무작정 저수지 주변을 훑고 있었다. 저수지의 사방 둘레만 해도 몇십 킬로미터가 넘는 곳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수색을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손에는 자신의 키만 한 작대기 하나를 쥐고 있었다. 말이 수색이지 김 씨는 저수지 주변을 터덜터덜 마냥 걸을 뿐이었다. 김 씨는 과수원 하는 장 씨를 따라잡아 모녀가 저수지로 걸어 들어가더란 말을 들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냥 들은 이야기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이런 흉흉한 이야기들이 떠도는데도 경찰은 뭘 하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억울해서 죽을 판이었다. 팔랑거리는 바짓자락이 자꾸 수풀에 걸려 걸음을 보챘다. 몇 걸음 걷다가 밑으로 미끄러지길 반복했다. 김 씨는 허위자수라도 할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면 경찰이 수색이라도 할까 싶어서였다.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물빛이 푸르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김 씨는 텁석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잔잔한 수면에 간혹 번지는 물무늬를 바라보며 김 씨는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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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암흑이 사방을 모두 먹어버린 후였다. 저수지 주변을 헤매다가 길을 잃어 한참을 돌아와야만 했다. 집에 오니 김 씨보다 더 키 작은 동생이 하루 종일 기다렸다며 지친 김 씨의 손목을 잡고 다급하게 끌었다.
청소하다가 봤다니까. 신고라도 해야 하나 해서…
김 씨 동생이 내민 것은 아이 옷이었다. 언뜻 보아도 여자아이의 옷이었다.
어디서 난 거야? 이거.
그게… 돼지축사에서 들러붙어 새끼들이 찢어 먹고 있더라고.
뭐, 뭐야? 그럼. 돼, 돼지들이 먹어치우기라도 했단 말이야?
…아, 아니, 설마 그러기야 했겠어?
김 씨보다 더 키 작은 동생이 유난히 더 왜소해 보였다. 다리가 땅으로 푹 꺼진 듯 자꾸 밑으로 흘러내려가는 바지춤을 동생은 연신 잡아 올렸다.
내 이놈들을.
김 씨는 작대기를 찾아들고 닥치는 대로 돼지들을 패기 시작했다. 돼지축사는 순식간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때 아닌 봉변에 놀란 돼지들이 그야말로 멱따는 비명을 질러댔다. 우르르 한쪽으로 몰리며 어미건 새끼건 머리를 감추기 바빴다.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황 약사는 박 씨의 농담을, 약국 앞을 지나다니며 흘깃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황 약사는 자신이 더러운 소문의 주인공이었다는 것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퇴근도 미룬 채 약국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앉아 사거리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어떤 이의 입에서 소문이 시작된 것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살의를 황 약사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동네 사람 전부의 혀를 잘라내고 싶었다. 그사이 하나 더 늘어난 소문은 황 약사가 며느리랑 붙어먹어서 난처하게 되니까 살해해 저수지에 묻었다는 얘기였다. 하나씩 늘어가던 서사가 헛소문으로 밝혀질 때마다 비어버린 칸을 모두 황 약사가 메운 꼴이었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언제나 진실보다 앞서 있었다.
무엇보다 아들마저도 이런저런 황당한 소문을 완전하게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에 황 약사는 경악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아들 탓만은 아니었다. 자신마저도 며느리에 대한 여러 말들에 현혹되어 믿어왔으니까.
김 씨는 돼지축사에 앉아 넋을 놓고 돼지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면서도 자꾸 돼지들이 모여들어 어린아이를 잡아먹는 모습을 눈에 그리고 있었다. 몇백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돼지들을 어린아이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림혜숙이 아이를 구하러 축사로 뛰어들었다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김 씨는 쥐고 있던 옷가지를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 씨는 읍내로 나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복수하듯 우적우적 제육볶음을 씹어 삼켰다. 동네 어딜 가나 그렇듯이 앉으면 없어진 여자 얘기들뿐이었다. 김 씨의 한 손에는 축사에서 나온 옷가지가 여전히 쥐어져 있었다. 그러다 번쩍 정신이 드는 얘기를 들은 건 소주를 막 두 병째 마신 뒤였다.
허허, 내가 신기한 얘기를 우리 애들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고놈들이 앉아서 짐짓 심각한 거야. 귀신 얘기를 하나 해서 골려줄 셈으로 타이밍을 보고 앉았는데, 이놈들이 괴상한 얘기를 하는 거야.
커서 소설가가 되겄어. 자네 애들들은.
그렇게 따지면 동네 사람 전부가 다 기지. 허허허.
에에, 말을 들어보라니깐. 저기 농장에서 없어진 모녀 있잖아, 탈북자. 글쎄, 그 모녀를 돼지들이 먹어치웠다는 거야. 하하하하. 농장 주인이 죽여가지고 돼지밥으로. 그래서 찾을 수 없는 거래. 애들 하는 얘기가 정말…
무슨 애들이 그런 무시무시한 얘기를 해. 진짜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야.
김 씨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술잔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김 씨가 비틀비틀 사내들의 자리로 걸어갔다.
야, 이 새끼들아, 내가, 그 돼지주인이다. 나아쁜 새끼들, 남의 말이라고. 뭐가 어째? 돼지가 먹어?
김 씨는 사내들의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김치며 찌개국물이 사방으로 튀어 농을 주고받던 사내들이 뒤집어썼지만 누구 하나 키 작은 김 씨에게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동생과 자기밖에 모르는 일을 그 어린아이들은 어찌 알았을까, 김 씨는 소름이 돋았다. 혹시 아이들이 그 광경을 목격이라도 한 것일까. 당장에 달려가서 돼지들의 멱이라도 따버리고 싶었다. 김 씨는 터덜터덜 저수지 쪽으로 걸어갔다.
차라리 물에라도 빠져 죽지. 돼지밥이라니. 으허허헉.
림혜숙이 없어지기 전 김 씨와 그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가지고 있던 감정을 그녀에게 말한 적도 없었다. 김 씨는 그녀에게 애틋한 말 한 마디 못하고 헤어진 것이 안타까웠다. 김 씨는 달빛 먹은 물을 보며 목 놓아 울었다. 달로 이어지는 길이 저수지 한가운데 나 있었다. 달빛 위로 몸을 던져 잔잔한 물결 위에 큰 파장이라도 일으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김 씨는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저수지를 향해 걸어갔다. 한 손엔 여전히 아이의 옷가지를 꼭 쥐고 있었다.
으흐흑. 내가 죽인 거라. 내 돼지가 먹었으면 내가 먹은 거랑 똑같은 거라.
팔랑 찰랑 다리 사이에서 바람이 일었다. 미친 사람처럼 저수지를 향해 김 씨가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걸음 내딛지도 못해서 김 씨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이고. 뭐야, 이건.
걸려 넘어진 돌부리를 찾았지만 돌은 없고 희부연 하니 사람 손 같은 것이 땅 위로 솟아 있었다.
포마드를 발라 빗어넘긴 가지런한 황 약사의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이 났다. 황 약사는 몇 시간째 꼼짝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밤중 사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간혹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입을 앙다문 황 약사를 비추곤 사라졌다. 황 약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거울 앞에 서서 다시 머리 손질을 했다. 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어둠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 약사는 천천히 평생 입었던 흰 가운을 가지고 와서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흰 가운을 망토처럼 걸친 다음 양쪽 소매로 목에 매듭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예정돼 있었던 일처럼 황 약사는 망설임 없이 자연스러웠다. 황 약사가 조심조심 진열장 위로 올라가더니 형광등에 목덜미를 걸었다. 다음,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 허공으로 발을 굴렀다. 흡사 흰 망토를 걸친 슈퍼맨 같았다. 이내 일 분도 되지 않아 황 약사의 몸이 밑으로 주욱 처지기 시작했다.
김 씨가 발견한 시신은 림혜숙이 아니었다. 그것이 김 씨를 더욱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김 씨는 여전히 아이의 옷가지를 품에 꼭 쥔 채 시신발굴작업을 지켜보았다. 경찰 말로는 발견된 여자가 한 달 전 사라진 장 약사일 거라고 했다. 많이 부패된 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황 원장이 달려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강 형사가 현장지휘를 하다 말고 멍하니 앉아 있는 김 씨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내일 찾아가려고 했더니만. 여기서 만나네.
김 씨는 미동도 하지 않고, 대답도 없이 서서히 드러나는 장 약사의 시신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시신의 입, 손목, 발목에 테이핑이 되어 있었다.
그 여자. 이름이 뭐였지? 림혜숙… 하여튼 그 여자 찾았어.
김 씨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차, 찾았어요? 돼, 돼지 뱃속에서?
무슨 말이야? 돼지라니. 그 여자 영국 난민촌에서 찾았어. 영국으로 망명신청을 했었다는데 어떤 놈이 사기를 쳤다나봐. 망명해서 영국 가서 살자고 꼬신 거지. 거기까지 데려가서 여권, 주민증, 그리고 돈을 훔친 다음, 그곳에 그냥 버려버린 거지. 그야말로 탈북자가 탈북자에게만 칠 수 있는 사기야. 국정원에서 연락이 왔어. 사기 친 탈북자 여기 어디 산다고 잡아놓으라고. 그쪽도 출동했으니까 아마…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그럼 아이는? 우리 집, 돼지가… 본 사람도 있다고 했는데…
아이도 같이 있대. 여하튼 한국으로 이송되고 있는 모양이니까 시간 좀 걸릴 거야. 돌아올 수 있다니 다행인 거지, 정말. …아니, 영국까지 가 있으니까 사람을 찾을 길이 없지. 아니면 이렇게 묻혀 있거나…
잔잔한 수면 위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물무늬가 소문처럼 고요히 번져나갔다. (*)
<현대문학> 2008년 10월호, 통권 646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