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에 소개될 김병덕의 단편소설 「지식인의 언어생활」은 미발표작입니다. 다음은 이 단편을 추천한 백가흠 편집위원의 소개말입니다. “완강한 언어의 틀. 그 속에 틈새를 만들려는 청춘들의 재기 발랄한 신조어와 기성세대들의 어설픈 흉내. 그 틈바구니의 어딘가에서 말은 말처럼 뛴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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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민 교수님께서 맡으시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학과장의 최종 결재가 났다. "강사들 좀 먹고 살게 놔두시지 민 선생님 왜 그러세요?" 성 교수의 농담에 다른 교수들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말마따나 벌이가 시원찮은 시간 강사들의 강의를 가로채지 않았나 싶어 민망했고, 이 일로 제자이자 후임 교수인 학과장을 꽤나 귀찮게 했다. 벌개진 얼굴로 민 교수는 얼른 자리를 떴다.
다음 학기를 끝으로 이십오 년간 봉직한 대학을 정년퇴직하는 민 교수가 계절학기 교양 강좌를 맡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학과 사무실 게시판에 붙은 계절학기 공고에서 <지식인의 언어생활>이라는 과목을 처음 보았을 때는, 과목명부터 고루한 이런 과목을 요즘 학생들이 수강할까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융통성 없는 교수 혼자 열강을 하고 학생들은 책상 아래서 문자 메시지나 날리는 풍경이 그래서 훤하게 그려졌다. 아울러 시대 조류에 늘 두세 발짝 뒤처지는 대학 당국의 안일한 작태에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그런데 학과 사무실 앞을 오가며 본 그 강좌명이 이제껏 살아온 자신의 삶 전체를 압축한 용어일 수 있다는 생각이 줄곧 떠올랐다. 코앞으로 다가온 퇴직은 요새 민 교수의 이러저러한 일상에 끼어들었다. 친구, 제자, 친지를 만나도 정년 타령은 빠지지 않아 그때면 자기도 모르게 굽이진 이력을 돌이켜보게 되는데, 때마침 목도한 <지식인의 언어생활>은 적지 않은 세월을 소설가와 교수 신분으로 살아온 한 인간의 생애를 간결하게 함축하고 있음을 민 교수는 확인했다.
'지식인의 언어생활이라…' 민 교수는 연구실 의자에 앉으며 되뇌었다. 계절학기 개강까지 보름가량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전에 <지식인의 언어생활>을 수업했던 강사들의 강의계획서를 인쇄했다. 강의 개요는, '지식인'에 무게를 두어 지식인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하고 언어적 측면을 부가한 것과 '언어생활'에 방점을 찍고 다양한 글쓰기와 말하기 방식을 가르치는 쪽으로 대별되었다. 하지만 전자는 대명천지 대중사회에서 지식인의 역능(役能) 자체가 이물스러울 수도 있었다. 민 교수도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나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정도는 예전에 읽었다. 서구와 한국 사회에서 두 권의 저작물이 나름의 기여를 한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갖가지 모순이 여전히 국내외에 산재하는 것도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은 '지식인의 종언'을 고하는 시대이기도 하지 않는가. 한술 더 뜬 『지식인의 종말』이라는 책도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다. 한편으로 후자는 너무 효율성에 치중한 냄새를 풍겼다. 한 예로, '프리젠테이션 잘 하기'의 경우 시청각 기자재를 활용해 대학이나 사회에서 발표 잘 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일 터였다. 그것은 진리탐구라는 대학 교육 본연에서 벗어난 도구적 성격이 짙었다. 요즘 대학이 취직시험 준비소로 전락한 상황은 민 교수도 익히 알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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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병덕
2007년 <문학나무> 여름호에 「인간과 다른 인간」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대학에서 강의 중이며, 지은 책으로는 『한국소설에 나타난 일상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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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수업 시작했어요." 과대표였다. "아이쿠, 미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만. 내 뭐 좀 하다 보니…" 수업은 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설창작론2>이었다. 발표 학생이 써온 소설에 대해 토론하고 민 교수가 최종적으로 평가·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중구난방, 좌충우돌, 종횡무진한 설전이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대개는 작품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발표자에게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이 수업은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았다. 열기가 너무 뜨거워 수업 후 발표 학생이 간혹 술에 곤죽이 되거나 토론자와 치고받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런 방식이 당사자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약이 된다는 점은 기왕의 선배들이 입증했다.
열띤 토론이 끝나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민 교수가 최종 강평을 할 차례였다. 그의 에누리 없는 평가를 학생들은 수업 시간마다 경험한 터이지만, 오늘은 학생들이 여느 때보다 풀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종강 수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물을 한 잔 마셨다. "이건 아니잖아." 추상적인 문장이 난무하고 구성은 황당무계해 글쓴이 아니면 줄거리조차 파악이 어려운 습작품에 민 교수의 질타는 매몰찼다. 그런데 강의실 여기저기서 키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아니잖아!" 민 교수는 목소리를 더 높였는데, 몇몇 학생은 일정한 리듬에 맞춰 "이건 아니자않아, 이건 아니자않아…"를 합창했고, 한 학생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팔과 몸뚱이를 요상하게 흔들어대는 춤을 추었다.
학생들의 행동에 민 교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저토록 까불고 장난을 치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어이없는 작품에 모욕적일 수 있는 한마디를 던진 것이 강평의 전부이지 않은가. 민 교수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학생들은 "이건 아니자않아. 이건 아니자않아…"를 연발하며 촐랑거렸다. 발표 학생만 민 교수의 뜻을 알아채고 시무룩했다.
한바탕 소동으로 술렁거린 강의실에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민 교수는 실내를 훑어보았다. "발표자에게 매서운 채찍을 내리쳐 마음이 아픈데 자네들은 왜 그리 웃어대는지 모르겠네." "교수님께서 웃긴 말씀을 하셔서요." "내가 뭐라고 했는데?" "이건 아니자않아, 이건 아니자않아… 예전에 웃찾사에서 나왔어요."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흉내를 냈다. "웃찾사?"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란 개그 프로그램이에요. 지대 웃겼어요." "지대?" "저희들 말로 매우라는 뜻이에요." 민 교수는 중단되었던 강평을 계속했다. 대체로 작품의 흠을 지적하는 차원이었으나 심사가 편치 않았다. 소설의 기본을 차근차근 쌓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라는 말은 왠지 공허했다. 기초를 좀 연마한 학생은 케케묵은 소설 고유의 형식을 답습할 뿐이고 아예 제멋대로 쓴 학생은 시시콜콜한 잡설로 일관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대학원생들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 교수는 자신의 작품에서도 언제부터인지 그런 답답증을 느꼈다. 최고의 문장으로 완벽한 구성을 기한 장인의 작품이라는 평가나 삶의 세목을 과장 없이 그려내는 데는 당대 제일이라는 평론가들의 상찬을 받았음에도, 보이지 않는 어떤 완고한 틀에 갇힌 듯 지리한 작품에 넌덜머리마저 날 때가 있었다. 그런 불만은 요즈음 더욱 심해 이제껏 자신이 무엇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예술의 새로운 내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직 형식에서 새로움을 확보할 수 있다는 오르테가 이 가제트의 언급을 주목해 설화문학이나 역사에서 모티프를 차용해 판타지적인 요소도 도입하고 이즈막 젊은 세대의 소설처럼 경쾌한 어법으로 서술 방식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낯만 화끈거렸다. 지금껏 구축한 고유의 작품세계에 손상만 입힐 만큼 신통치 못한 그 작품들은 책상 서랍에 고이 잠들어 있다.
제자가 편집장으로 있는 신예 문학 잡지사의 청탁으로 쓴 소설 초고 역시 그 밥에 그 나물 같았다. 입때껏 쌓은 평판을 업고 마뜩지 않은 불량품을 들이밀어야 하나? 원고 마감까지는 여유가 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교수님, 오늘 종강이지요?" 다음 주는 쉬고 시험만 치르면 이번 학기도 어느새 끝이었다. 수업을 갈무리하고 그는 <지식인의 언어생활> 과목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지루해요." "재미 없어요." "쨩나요." 종강으로 긴장이 풀어진 학생들이 떠들어댔다. "뭐? 쨩나? 그건 또 뭔가?" "짜증난다는 뜻이에요. 킬킬킬…"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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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에 놀러온 딸 내외와 저녁 식사를 마친 민 교수는 서재로 들어갔다. 재롱이 한창인 손녀와 놀아주고 싶었지만 소설과 계절학기 강의 준비로 부담이 컸다. 책상 좌우 벽면의 책장에 책들이 빼곡했다. 이사 때마다 성가셨지만 읽은 책은 정이 들어, 읽지 않은 책은 언젠가 읽겠다는 무모한 욕심으로 꾸리고 다녔다. 자신의 소설집 일곱 권도 책장 한 귀퉁이에서 좀내를 풍겼다. 민 교수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썼던 작품들인데 누런 종이 위에 들어앉은 활자는 맥이 없어 보였다.
소설가로서의 지난 삶에 후회는 없었다. 작품으로 대중과 친밀하게 호흡하지 못했지만 서운하지 않았다. 해찰하지 않고 소설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에 결여된, 민 교수가 어릴 적 대본소에서 빌려 읽었던 무수한 소설에 빠지게 했던 재미에 있어서만큼은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주인공의 행로와 사건 전개에 가슴 조이며 책장을 넘기던 긴장과 흥분이 자신의 작품에는 부족했다. 그 점에 있어 자신의 작품은 철저히 비대중적인, 바꿔 말해 지식인을 위한 소설이었다. 정밀한 문체를 구사해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 따라서 고등교육을 받은 고급독자들만이 참뜻을 해석할 수 있는 진지한 소설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한국 사회 도처에 미만한 정치적 억압의 문제를 우의적으로 작품화할 때, 민 교수는 어이없는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 무지막지한 80년대의 격랑은 대학사회를 뒤흔들었다. 학생들은 거의 날마다 시위를 했고 그 물결은 사회 각 분야로 넘쳐흘렀다. 교수사회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의 대학에서도 교수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고 서명자 명단이 대학신문에 발표되었다. 민 교수는 성명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작가로서 그는 작품을 통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쓰고 있던 작품들은 실제 그런 의식의 산물이었다.
퇴근을 하려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제자 셋이 들어왔다. 다섯시 삼십분 통근 버스를 타려면 연구실을 나가야 했지만 학생들과 소파에 앉았다. 그들 모두는 <민주쟁취>라는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용건을 묻기 전에 하나가 말을 꺼냈다. "저희들은 교수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작가로서나 교육자로서요. 하지만 이번 성명에 교수님이 빠지신 것에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과의 다른 분들은 모두 서명을 하셨는데 왜 교수님은 빠지셨는지요?" 인문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학생이었다. "이런 비민주적인 상황에서 많은 교수님들이 동참하셔서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말입니다." 3학년 여학생이었다. 나머지 하나가 뚫어지게 민 교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작품으로 사회 모순에 맞서고 있다고 말하려다 민 교수는 그만두었다. "불의에 투쟁하지 않는 지식인을 참다운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민 교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교수님들의 2차 서명이 곧 있을 거라고 합니다.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인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민 교수는 웅크리고 있었다. 온갖 설익은 구호가 난무하고,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강경한 투쟁과 방어, 나는 절대선이고 너는 절대악이라는 이분법적 도식, '결사항전' 따위의 지키지도 못할 언어 인플레이션, 저주와 불신의 언어로 가득한 세상. 저마다 결연한 포즈로 입만 살아 떠들어대는 살풍경은 사회에 넘쳐나고 있었다. 민 교수는 그런 직설적 방법 대신 작의를 에둘러 말하는 알레고리 기법으로 작품을 썼지만 문학 전공자인 젊은 지식인 친구들은 그런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하긴 문학판의 내로라하는 몇몇 평론가들도 참뜻을 읽어내지 못했다. 그들 또한 시대의 혼란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품에만 눈길을 돌리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공공의 이익이 최고의 선이라는 틀을 규정해놓고 그 안에 포함된 작품들만 재단하고 분석했다. 민 교수는 그것을 격동의 시대 탓으로 돌리면서도 한편으로 지식인의 편향된 시각을 회의했다. 그 밑바탕에는 물론 부족한 작품에 대한 냉철한 자기비판이 전제되어 있었다. 열시가 넘은 시각에 민 교수는 연구실을 나섰다. 교정 곳곳에서 사물놀이 장단이 시끌벅적했다.
그 제자들과 동문 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깍듯이 민 교수에게 인사를 했다. 이십여 년 저쪽의 일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학생회장 출신은 삼겹살집을 한다며 명함을 주었다. "교수님은 언제든지 무룝니다. 수원에 오시게 되면 한번 들러주세요." 학생회장은 활짝 웃었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에 기반을 잡은 제자가 보기 좋아 민 교수도 미소로 화답했다.
돌이켜보면 학생회장들과는 지식인관의 견해차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시대 상황이 워낙 엄혹했으니 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이 시대에는 예전처럼 참여적 지식인만을 원하지 않는다. 요즘 학생들에게 체 게바라 같은 혁명적 삶을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새로운 지식인상 모색이 필요했다. 민 교수는 그것을 계절학기 시간에 가르치기로 마음 먹었다.
"좀 나와보시구려. 선혜 재롱이 눈에 밟히지도 않수?" 아내였다. 반나마 열린 문틈으로 왁자한 웃음꽃이 스며들었다. "응, 안 그래도 나가려던 참이오." 민 교수는 멋쩍게 일어섰다. 거실을 온통 휘젓고 다니다 엉덩방아를 찧은 선혜가 민 교수에게 손을 흔들어댔다. 민 교수는 얼른 선혜를 안고 소파에 앉았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딸 내외는 연신 웃음을 터뜨려댔다. 민 교수도 텔레비전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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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프로그램은 아닌 듯했다. 남녀 사회자와 초대 손님격인 젊은 친구들 넷이 시답잖은 경험담을 까발려댔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딸 내외는 키드득거렸다. 아내는 뚱한 표정이었다. '코드가 영 다르구먼.' 민 교수는 생각했다. 그들의 이야기 도중 '안습'이라는 낯선 말을 민 교수는 여러 번 들었다. 흑인처럼 머리를 가닥가닥 꼰 친구가 그 말을 입에 달고 써먹었는데, 평생 언어를 다룬 민 교수지만 그런 단어가 있는지 긴가민가했다. 아내에게 선혜를 잠깐 맡기고 서재로 들어가 사전을 뒤적였다. 손때 묻은 두 권짜리 국어사전에 '안습'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어휘 배열 순서로 '안습'이 들어갈 위아래 자리에 '안 슬프다'와 '안승(安勝)'이라는 인명이 수록되어 있었다. 저 단어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왕따'나 '얼짱' 같은 신조어일까?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고어일까? 그는 다시 거실로 나갔다. 딸 내외는 여전히 텔레비전에 빠져 있었다.
"저 친구가 입에 달고 사는 '안습'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냐?" "네에?" 딸과 사위가 킬킬거렸다. "평생 소설가로 살아온 우리 아버지께서 왜 저 말을 모르실까요?" 딸은 장난을 쳤다. "예. 요새 애들이 쓰는 말인데요. '안습'은 안구에 습기찼다라는 말을 줄인 겁니다. 뭐 좀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할 때 '안습'이다 하지요. 맞지? 선혜 엄마." 사위의 대답이었다. "'캐안습'도 가르쳐드려." 딸이 말했다. "캐안습?" 민 교수는 중얼거렸다. "'캐안습'은요 매우 안습이다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매우 슬프다 뭐 이런 뜻이지요." "아하, 그러니까 '캐안습'의 캐는 강세를 나타내는 접두어구먼!" 민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역시 우리 아빤 언어감각이 탁월하시다니깐." 딸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 애들이 요새는 이런 말도 써요…" 중학교 영어 선생답게 딸은 학생들이 쓰는 어휘를 많이 알고 있었다. '쌩얼'이라는 뜻도 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열라'나 '졸라'는 매우, 이런 말씀 하기는 좀 뭐하지만 학습의 차원에서 말할게요. '조낸'도 매우라는 뜻이에요. 애들이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는 이렇게 표현하죠, '대략 난감'. 그리고 관용어법 식으로 이런 말도 쓰더라구요. '얼굴이 이기적'은 얼굴이 예쁘다, 등등 뭐 이런 식이에요. 아휴 선생은 어딜 가나 설명하기를 좋아 하는 게 병이라니까." 딸이 호호 웃었다. "아버님, 이런 것도 있어요." 사위도 거들었다. "'가격이 착하다'는 말은 값이 싸다라는 뜻이래요. 우리 공대 출신들은 상상력이 딸려서 그런지 이런 말에는 대책이 안 서요."
민 교수로서는 모두 처음 듣는 말이었다. 골방에 쭈그려 앉아 홀로 언어를 세공하는 동안 저잣거리에는 새로운 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했어요'를 '했어여' 정도로 쓰거나 갖가지 이모티콘을 재치있게 이용하는 따위는 익히 알고 있었다. 교정의 학생들 게시판에서 '~하삼!' 따위의 말투도 많이 보았다. 예전에 '아햏햏'으로 상징되는 외계어는 언론을 통해 접했다. 그러나 딸이 알려준 말들은 모두 금시초문이었다. "참, '썩소'라는 말도 있는데. 그건 썩은 미소의 준말이에요. 썩은 미소가 어떤 건지 상상이 되세요?" 썩은 미소를 짓는 표정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미소'에 '썩은'이라는 관형어는 적합하지 않고, 두 어절을 역설로 보기에도 어색했다. "썩은 미소란 대체 어떻게 지어야 하는 거냐? 여보, 당신은 썩은 미소를 지을 수 있겠소?" "이이가. 내 우아한 미소를 평생 보고 살았으면서도…" "그래도 선혜의 웃음꽃보다는 못하잖아. 선혜야, 이리 와라." 그런 말들은 인터넷에 무수히 떠다닌다고 딸은 일러주었다. 민 교수는 낮의 일을 말해주었다. "아하, 웃찾사요? 지금은 안 할 텐데. 언어의 유희라고 해야 하나 언어를 농락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말들은 더 많아지겠지요." 학생들에게 새로운 말을 익히면 일러주겠다는 농담도 덧붙이고 딸 내외는 돌아갔다.
민 교수는 서재로 들어갔다.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거나 메일 확인할 때를 제외하고 별로 사용하지 않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는 수신된 메일을 확인했다. 아이디가 <천사의 별>인 발신자는 오늘 소설 발표자였던 여학생이었다. 괴로웠던 수업 시간에 대한 소회와 엉망진창인 작품에 대한 반성과 읽어주신 교수님께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민 교수 또한 학창 시절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은사님의 엄한 질책과 따뜻한 격려가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고 민 교수는 평소 생각했다. 학생의 속마음도 그래서 충분히 헤아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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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던진 말이 코미디 프로의 유행어와 같아 어수선했던 수업 분위기에 더욱 주눅 들었을 학생에게 민 교수는 "소설이 '대략 난감'에다 '비호감'이었으나"로 시작되는 위로와 격려의 글을 간략히 썼다. 말미에 평소 써보고 싶었지만 완고한 내부 검열에 걸려 한 번도 쓰지 않았던 '^ ^'를 붙였다. 학생들의 그것과 달리 자신의 그것은 왠지 깜찍하지 않아, '?'를 달았으나 역시 어색했다. 이제 보내기만 하면 되는데 선뜻 마우스 버튼을 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대략 난감'이나 '비호감'이라는 단어가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대변했고 학생과의 소통에도 윤활유 역할을 하리라 의심치 않지만, 이게 무슨 주책이냐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민 교수는 글을 다 지우고 평소대로 표준어법에 맞게 다시 썼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어투의 글을 얼마나 많이 썼는가. 완강하게 지속한 고루한 어법에는 신물이 날 대로 났다. 민 교수는 애초대로 글을 복원했고 과감하게 '^ ^'도 붙여 메일을 보냈다.
악전고투 끝에 산정에 오른 듯 민 교수는 숨을 몰아쉬었다. 예기치 못한 자신의 언어적 변신에 스스로도 놀라웠지만, 한편으로 '모국어를 가르치는 훈장으로서 이 무슨 망령된 짓거리인가?' 싶은 자책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교수님…"으로 시작되는 학생의 재빠른 답신에 민 교수는 작은 기쁨을 맛 봤다.
<… 교수님, 어떻게 그런 유행어를 아세여? 교수님 메일이 처음에는 솔직히 '대략 난감'이었는데 갑자기 막 웃음이 터졌어여. 꿀꿀한(이런 말 써도 되죠? ^ ^) 기분도 풀렸구여. 방학 동안 '열공'해서 좋은 소설 쓸게여. 교수님과도 '열라' 친해진 느낌이에요. 평소에 교수님 무서웠는데 지금은 '오나전' 통하는 것 같아요. 교수님 쵝오! 안녕히 계세여.>
민 교수는 킬킬거렸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내가 곁에 있었다. 차를 내려놓는 표정이 뜨악했다. "왜?" "치신 없이 웃음이 그게 뭐유?" "이봐. 당신은 '열공'이나 '오나전'이란 말 알아요?" "뭐 먹는 거유? 오늘은 왜 모르는 말이 이렇게 많아요?" "글쎄, 나도 모르겠소. 내 이 참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어요. 그러니 당신은 어서…" 아내를 내보낸 민 교수는 학생이 보낸 말뜻의 해석을 위해 골몰했다. 문맥상 '열공'은 대충 '열심히 공부' 정도가 아닐까 싶었으나 '오나전'은 명징하지 않았다. 아내 말마따나 무슨 부침개인가?
민 교수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네이버에 들어가 일단 '열공'을 검색했다. 무수한 '열공'이 쏟아져 나왔다. 뜻은 민 교수의 짐작과 다르지 않았다. 놀란 것은 그 말을 쓰는 엄청난 사람들의 숫자였다. 그 말은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완전이라는 의미의 '오나전'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었다. 민 교수는 이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듯한 기분이었다. 강의실에서 간혹 학생들 말을 잘 못 알아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는 검색창에 유행어를 쳤다. 거기에는 요즘 떠도는 무수한 말의 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딸애가 가르쳐줘 알게 된 말은 반가웠고 처음 마주하는 말은 몹시 생경했다. 특히 '므흣'이라는 말이 그랬는데 아무리 가늠해도 뜻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민 교수는 개별 말들의 용례를 훑었다. 일단 그런 단어가 사용되면 전체적으로 문장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주었다. 아울러 그 말을 아는 사람들만의 세대적 일체감도 엿보였다. 또한 그 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사용자는 언어를 매개로 배설의 쾌감을 만끽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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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부터 내리는 비로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오전에 학부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대학원 수업을 해야 하는 오늘은 일정이 빡빡했다.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선 민 교수는 통근버스에 올랐다. 인근 동네에 사는 학과장이 인사를 했다. 민 교수는 그의 곁에 앉았다. 서울 톨케이트를 벗어나면서부터 장대비가 쏟아졌다. "'지대' 비가 오는군." 민 교수는 중얼거렸다. "예?" 학과장이 물었다. "'지대' 비가 온다구요." 학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민 교수는 껄껄 웃었다. 머릿속에서는 어제 인터넷에서 알게 된 몇 개의 말이 뱅뱅 돌고 있었다.
3학년생 수업 시간에도 민 교수는 슬쩍 '지대'를 써봤다. 처음에는 몇몇만 알아듣고 미소를 흘렸으나 두어 번 계속하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웃음에 "'대략 난감'하구먼." 하고 던진 한마디는 메가톤급 폭소탄을 터뜨렸다. 모국어를 갈고 닦는 일을 평생 업으로 삼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민 교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자신에게도 던졌다. 늙다리의 세상을 향한 추파인가? 고결한 언어를 희롱하는 짓거리인가?
대학원 수업을 할 때도 폭우는 계속되었다. 바짝 긴장한 학생들이 진지하게 <80년대 한국 소설>에 대해 토론을 했다. 토론에는 민 교수 이름도 종종 거론되었다. 정치적으로 좀 조용한 시대가 되어서야 민 교수 작품은 새롭게 조명된 편이었다. 어떤 평론가는 민 교수의 작품이 어쩌면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서 가장 적극적인 저항의 한 형태였다는 평을 했지만 당사자로서는 그 말이 유효기한이 지난 허사로 여겨졌다. 강의를 끝낼 무렵, 민 교수는 슬쩍 "'조낸' 비가 오네." 했다. "네?" "응, '조낸' 비가 온다고 그랬어." 민 교수는 일부러 넉살을 부렸다. 몇몇이 잠깐 미소를 띠었을 뿐 학부생마냥 박장대소는 없었다. 대학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지적인 이미지에 그런 천박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할지 몰랐다. 아니면 사회물께나 먹은 그들에게는 그 따위 말장난이 시큰둥할지도 몰랐다. "이번 학기 모두 '열공'해줘서 고마워. 방학 때도 모두들 '지대' '열공'하라구." 원생들은 대답도 없이 뜨악한 낯빛이었다. 민 교수는 강의실을 나왔다. "교수님께서 왜 이러시냐?" 등등의 말을 민 교수는 화장실에서 들었다.
홀가분하게 계절학기 강의를 준비하고 소설에 몰두할 일만 남았다. 민 교수는 강의계획 초안을 살펴보았다. 일단 한국과 동서양을 아우른 지식인론을 가르치는데 일곱 시간을 할애했다. 대중사회이기에 지식인의 역할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는 역설적인 발상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다. 문제는 아무래도 언어 쪽에 있었다. ‘언어는 존재의 집’ 따위의 가르침은 전공자들에게나 호소력이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실용적인 측면만 강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학생들과 생생한 언어를 공유하고 싶었다. 생동감 넘치는 언어의 실체가 딱 잡히지는 않지만, 아무튼 촌철살인의 언어로 명징한 의미를 발하면서도 꿈틀거리는 그런 말들을 수업 시간에 써보고 싶었다.
자신의 소설에 그런 언어를 시험해보려는 생각은 거기에서 연유했다. 젊은 작가들의 경쾌한 어법이야 어렵겠지만, 시중의 말들로 어휘 변화를 시도해 볼 수는 있을 터였다. 민 교수는 자신의 원고를 들여다보았다. 감정의 과잉이나 과장 없이 정치한 언어들의 조합으로 구축된 철옹성의 문장들이 정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민 교수는 조탁된 자신의 문장에다 슬그머니 인터넷에서 익힌 어휘들을 삽입했다. "그는 지쳤던 모양이었다."라는 문장은 "그는 '지대' 지쳤던 모양이었다."로 바뀌었다. 또 본래 문장의 단어를 대체해 "피곤이 엄습해 왔다."는 "피곤이 '조낸' 엄습해 왔다."라는 표현을 썼다. '지대', '열라', '졸라', '조낸' 따위는 수식의 기능을 담당해 문장에 맥이 풀렸지만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고 그 표현은 구어적이라 독자에게 친밀하게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소설 전체에서 딱 하나가 발견된 '슬펐다'라는 형용사를 '안습'으로 고쳤다가 '캐안습이었다'로 다시 바꿨다. 단어 변환으로 그 문장은 민 교수에게 좀 더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알고 있는 인터넷 용어를 총동원해 문장을 변형시켰다. "그는 버티기가 어려웠다."는 "그는 버티기가 '대략 난감'이었다."로, "… 결과에 불호령이 떨어졌다."는 "이건 아니자않아."로, "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그들은 '?'"로 대체했다.
인터넷 용어를 거의 사용했으나 두 개의 말은 적당한 자리를 찾기 못했다. '샤방'이라는 말이 그랬다. 어감이 부드러운 이 말은 대체로 '좋은', '멋있는' '괜찮은', '아름다운' 등등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인터넷에서 "누구의 노래가 '지대' '샤방'해요." 따위의 용례를 봤으나 민 교수로서는 그 단어를 적소에 배치하기가 말 그대로 '대략 난감'했다. '므흣'의 경우는 처음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다. '분위기에 알맞지 않은 말이나 행동에 대한 반응' 정도로 민 교수는 그 말뜻을 이해하고 있는데 막상 그것을 문장에 넣고 보면 어색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용례를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마음이었다. 하여 '므흣'을 넣을 자리는 일단 보류했다.
아울러 민 교수만의 조어도 과감하게 문장에 집어넣었다. 음식 '샤브샤브'의 이름에서 늘 약빠른 느낌을 받던 그는 '샵샤브'란 단어를 만들어, "그는 눈치가 '샵샤브'했다."라는 문장을 썼다. 또 음식 이름 '스키야키'를 들으면 '새끼'가 연상되어, "이런, 개스키야키!"라는 없던 문장을 만들어놓고 킬킬거렸다. "이이가 또 왜 이러실까? 뭐 혼자만 재미 보는 일 있수? 늘 세상 고민은 혼자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이더니만…" 차를 들고 온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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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장마와 함께 계절학기 강의는 시작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민 교수는 강의 계획서를 살폈다. 지식인 부분의 강의 내용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지행합일'이나 '도가도비상도'를 추구하는 동양적 지식인의 세계와 '참여적 지식인론'을 주장한 사르트르를 위시해 푸코의 '보편적 지식인'과 '특수적 지식인'에 대한 개념, 학문 수양의 엄결성을 보여준 '선비 사상'과 한완상의 저작, 그리고 김대중 정부 시절 발표된 '신지식인론' 등을 시대 상황과 연결해 논의할 예정이었다. 특히 대중사회에서 지식권력의 문제점과 오늘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지식인상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살필 생각이었다.
문제는 역시 언어 쪽이라 기존 강사들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계획서를 일단 만들었다. 언어에 대한 개괄적 논의, 언어와 의사소통, 언어와 이미지, 토의, 토론, 프리젠테이션, 영어 공용화론, 인터넷 언어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언어와 이미지나 인터넷 언어 항목을 제외하고는, 애초에 의도한 언어의 생동감과는 거리가 먼 항목의 나열이었다.
대학 홈페이지에서 확인한 수강생은 열다섯 명이었다. 다행히 폐강은 면했지만, 첫날 강의를 듣고 신청을 철회할 수도 있으니 실제 수강생은 더 줄어들 수도 있다. 민 교수는 강의실로 향했다. "어머, 교수님. 안녕하세요?" 과의 학생이었다. "방학인데 웬 일이세요?" "계절학기 수업을 하러 왔네." "교수님께서요?" "그럼, 선생도 '열공'해야 하니까." "네에? '열공'이요?" 학생이 깔깔거렸다. "무슨 과목을 하세요?" "지식인의 언어생활." "제 친구도 그 과목 듣는데 죽어나겠네…" "뭐라고?" "아, 아니에요."
"안녕하세요." 민 교수는 강의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학생들의 인사. 그러나 저마다 의아한 낯빛이었다. 젊은 강사가 들어오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민 교수는 자신이 이 과목의 선생이라는 점을 확실히 못 박았다. 강의 계획서를 나눠주고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열세 명의 학생이 전부였다. 첫날부터 결석한 두 명은 아예 수강을 포기했을 터였다. 여기서 더 빠져나갈지도 모른다. 민 교수는 일단 자기소개를 했다. 강의를 맡게 된 배경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칠판에 지식인의 언어생활이라고 큼지막하게 썼다. 이 수업으로 '지식인'과 '언어생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토로했다. 학생들의 반응이 없었다. "하늘이 '조낸' 흐리지요? 이런 겁니다. 이 강의는." 격의 없이 쉽고 재미있게 공부하자라는 뜻이었으나 학생들의 표정은 뚱했다. "아니, 그러니까 '지대' 흐리다는 겁니다." 두꺼운 안경을 쓴 백발 노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게 뭐냐?" 하는 말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이러면 내가 꽤 '므흣'해지는데." 그제서야 맨 앞자리의 여학생 두 명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연이어 강의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이렇게 하자는 겁니다. 수업을 쉽게 재미있게." 몇 개의 인터넷 용어는 경직된 분위기를 완충시키는 효과를 발휘해 강의 개요 설명으로 진행된 첫 수업은 무난히 끝났다. 학생들의 "감사합니다." 하는 목소리가 크고 밝았다.
학생들의 반응은 민 교수의 송고에도 영향을 끼쳤다. '샤방'과 함께 적절한 용법을 고르기가 어려웠지만 이제는 용처를 이해할 수 있는 '므흣'까지 구사한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더 이상의 퇴고 없이 작품을 잡지사에 보냈다. 막상 발송하고 나니 꺼림칙하던 마음도 말끔히 사라졌다. '이러면서 소설의 외연이 확장되는 것 아니겠어.' 민 교수는 배포를 부렸다.
강의 첫날 만난 과 학생의 "친구가 교수님 강의 재밌대요." 하는 인사처럼 수업은 잘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즐기는 인터넷 용어를 민 교수가 쓰면 더욱 즐거워 했다. 표준어가 아닐지라도 그 말들은 세대간의 단절을 봉합하는 기능을 했다. 그 말들은 도저한 언어의 권위를 훼손하지도 못했고 언어의 사회성을 붕괴하기에는 위세가 약했다. 젊은 친구들의 애교 있는 말부림은 그저 미소로 넘길 정도의 차원이었다.
문제는 지식인으로서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이 옳으냐의 것이었다. 토론 수업을 위해 준비한 영상자료에서, 토론 참가자들은 공식적이고 격식 있는 언어만을 사용했다. 실제 입사 면접과 팀 토론에서 비공식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민 교수의 물음에 학생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학생들이 입학 면접 자리에서 '지대', '비호감', '므흣' 따위를 남발한다면 민 교수도 어떻게 반응 할지 자신할 수 없었다.
잡지사의 제자 편집장에서 걸려온 전화에서도 그런 문제점은 명확했다. "교수님, 확인할 게 있어 전화 드렸습니다. 보내주신 원고가 교수님 것이 맞나요? 작품을 읽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저희 쪽이 실수를 해서 원고가 뒤바뀐 거겠지요? 도대체 어떤 작자가 이 따위 소설을 보낸 건지. 그나저나 교수님 원고 빨리 보내주세요. 마감 날짜가 닷새나 지났습니다…" 제자의 말에 민 교수는 "응.응." 하고 얼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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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어느새 반환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중간고사 대신, 오늘은 학생들과 그간 공부한 내용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었다. 첫날 수업에서 학생들 대개는 지식인에 대한 정의를 막연하게나마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두 학생은 그것을 시대의 모순을 개조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식인인가요?" 민 교수는 질문을 던졌다. "저희는 아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식도 적고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아직은 기여하는 바가 없거든요." 학생들의 이구동성이었다. "그렇다면 여러분을 가르치는 저는 지식인입니까?" "네." "왜지요?" "한국사회에서 교수나 작가는 여전히 지식인이잖아요. 푸코의 이론은 이론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언어생활의 측면에서는 어때요? '지대'나 '므흣' 같은' 말을 쓰는 제가." "그건 그냥 강의를 좀 재미있게 하시려는 의도 아닌가요? 그런 말 몇 개를 제외하면 교수님께서는 결국 기존의 학술적인 용어를 사용하시잖아요." 학생들은 스스럼없이 말했다.
결국은 그랬다. 학생들은 이쪽의 실체를 정확히 꿰뚫었다. 몇 단어를 조물락거려 말장난을 한다고 이제껏 살아온 양태가 바뀌지는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민 교수는 지금껏 사용했던 언어에서 탈피하고픈 욕망이 출렁거렸다. 하여 수업 후, 민 교수는 편집장 제자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 자판을 꾹꾹 찍었다.
<그 작품 내 것이 맞네.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뭔가를 '조낸' 바꿔보고 싶었어. ^ ^> (200*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