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종이봉투를 열 때면 나는 언제나 굳은 땅에 튼튼히 뿌리 박은 느티나무의 수령을 생각하게 된다. 비록 허세일지라도 나는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젊다는 이유로 나도 한때 상대를 매끄럽게 타넘은 적이 있다. 어느 길목에서 나도 그렇게 타넘어졌다.
내일이면 마흔. 새로운 나이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종이봉투에 외눈처럼 박힌 쇠단추의 실끈을 천천히 푼다. 늙은 자들도 역시 미숙하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아무도 세월보다 미리 손쓸 수 없다는 걸 안다.
풀리는 실끈에 쇠단추의 녹이 묻어난다. 이제 내 육체와 정신은, 미세한 주름 하나가 열두 가지도 넘는 의미를 잣던 풍요로운 은유의 세계에서 벗어나, 파안대소와 대성통곡이 구별되지 않는 둔탁한 사물의 세계로 접어들 것이다. 늙은 자는 사물처럼 덜 들키니, 나는 비록 허세일지라도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
십 년 전 그날 약속시간은 네 시였다.
서점에 들어섰을 때는 네 시 오 분 전이었다. 밖은 몹시 바람이 불고 쌀쌀했지만 서점 안은 동화책 갈피처럼 따뜻했다. 나는 김이 서린 안경을 벗었다. 가까운 진열대 쪽이 선명해진 대신 책장 너머는 뿌옇게 멀어졌다. 내가 먼저 그녀를 알아보려는 마음에 다시 안경을 썼지만 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전 그녀의 전화를 받은 건 뜻밖이었다. 저녁 무렵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나는 강의를 마치자마자 내 오피스텔이 아닌 부모님이 계신 삼선교 쪽으로 차를 몰았다. 혜화 로터리를 돌 때였다. 옆 차선에서 경승용차가 날쌔게 끼어드는 바람에 급정거를 했다. 미간에 쐐기꼴이 패려는 순간 앞차의 창문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양쪽으로 서넛의 팔들이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와 제각기 미안하다는 손짓을 보냈다. 신호가 바뀌어 스무 살 안팎의 젊은 남녀를 빼곡히 태운 앞차가 멀어지는 순간 나는 늘 곁에 두고 아끼던 어떤 사물의 임종을 맞을 때처럼 손을 살짝 흔들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전해 제사가 있은 직후에 집에서 나왔으니 독신 생활을 꾸린 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학원에서의 위치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결혼이 좀 늦어질 거란 예감을 제외하면 내 삶은 꽤 만족스런 편에 속했다. 아니, 결혼을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느긋함이 오히려 일상을 평온하게 만드는 요인인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취해 나는 이런저런 생각의 바퀴를 굴렸다. 제사도 일종의 축제이다. 할아버지도 손자가 당신 제사에 참례하러 가면서 이토록 신이 난 걸 알면 기쁠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난 후였다. 여자들의 속살거림과 기름진 음식 냄새가 범벅이 된 부엌 쪽의 소란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거실 탁자에서 엄숙한 자세로 붓펜을 쥐고 지방(紙榜)을 쓰고 있었다. 곁에서 신문을 보던 나는 전화벨 소리에 무심코 수화기를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 전화가 내게 걸려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거기 안영준 씨 계시면 좀 바꿔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날 저녁, 내가 삼선교에 있으리라는 걸 알고 전화를 넣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가 안영준인데 누구십니까?”
“그럴 줄 알았어.”
다짜고짜 여자의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이어지는 여자의 말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아직 장가도 못 가고 집에서 후식이나 축내고 신문이나 보고 그럴 줄 알았다고.”
누군가 카메라를 몰래 돌리고 있거나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말대로 거실 탁자에는 과일 접시가 놓여 있었고 내가 먹다 만 배 한쪽이 꽂이에 꽂혀 접시 가장자리에 갸웃이 기대어 있었다.
“죄송하지만 누구십니까?”
내 말에 오히려 상대방 여자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나 몰라?”
나는 몰랐다.
“나 혜원이야. 내 목소리 안 변했는데.”
“뭐? 혜원이라구? 민혜원이?”
내 목소리가 다소 높았던지 아버지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붓펜을 쥔 손을 잠시 멈추었고 부엌에서 호기심 많은 사촌 여동생이 얼굴을 내밀었다 집어넣었다.
“그래 나야.”
듣고 보니 그녀의 목소리였다. 약간 빠르고 톤이 높은 예전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아무리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해도 내가 그녀의 목소리를 잊었다는 건, 잠시나마 못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건 갑작스런 그녀의 전화에 버금가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 하필 내 입에서 어리석은 물음이 튀어나왔다.
“너 결혼했잖아?”
“했지.”
침착하고 야무진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야 나는 내 질문이 얼마나 한심한 내용인지 알아차렸다.
“결혼했으면 전화하면 안 돼?”
그녀가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공격해왔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니라 뭐?”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지.”
“그래. 정말 오랜만이긴 하네.”
그녀가 내 말을 순순히 긍정하는 순간 나는 작은 경이로움과 따스한 안도를 느꼈다.
“정말 오랜만이다.”
이 년 만이었다. 정확히 말해 육 년 만이었다. 이 년 전의 짧은 부딪침은 도저히 만남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더 이상 삼선교 집에 살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전화를 걸었다. 그날 그 시각 내가 거기 없었더라면 그녀는 전화를 그냥 끊었을 것이고 오피스텔 전화번호까지 물어 연락해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를 만나게 된 건 오로지 산타처럼 고마우신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산타의 선물은 받을 때보다 받기 전이 더 가슴 설레긴 하지만, 그 설렘이야말로 선물에 덧붙여진 보너스가 아니라 바로 선물의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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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권여선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한 이래, 솔직하고 거침없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와 일상의 균열을 해부하는 개성있는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다.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와 소설집 『처녀치마』가 있다. 2007년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도 제32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사랑을 믿다」는 남녀의 사랑에 대한 감정과 그 기복을 두 겹의 이야기 속에 감추어 묘사하여 호평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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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쿵!
서점의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손가락으로 안경알을 문질러 닦고 보니 문을 미어지게 닫은 중학생이 힘차게 뛰어가는 뒷모습이 서점 유리를 통해 보였다.
“쟤가 아주 문을 부수고 가누만.”
서점 남자가 이렇게 말할 때 나는 곁문으로 들어서는 그녀를 보았다.
“깜짝이야. 왜 저런대요?”
그녀는 무릎까지 오는 롱부츠에 체크무늬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파마 머리에 두 개의 작은 핀을 꽂고 화장을 한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놀라셨어요? 바람이 확 불면 그럴 때 있어요.”
“애가 젊으니까 기운이 남아도나 봐요.”
서점 주인이 껄껄 웃었다. 줄곧 쳐다보고 있던 나를 향해 그녀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서점 진열대를 돌아 그녀 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자줏빛 가죽장갑을 벗고 진열대 너머로 악수를 청해왔다.
“잘 지냈어?”
우리는 책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악수를 했다.
“너도 잘 지냈지?”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가에 잔주름이 조금 잡혀 있었다.
“참, 나이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누가 나이 얘기를 했다고 서점 남자는 진열대 양쪽에 갈라서 있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의 개입으로 우리는 본격적인 상봉의 감격을 나눌 기회를 놓쳤다. 나는 진열대를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늦추고 정확히 그녀와 나 사이, 진열대의 꼭지점에 버티고 선 그를 바라보았다.
“손님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몇 살쯤으로 보입니까?”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중요한 면접시험을 보는 사람처럼 사뭇 긴장한 표정이었다.
“서른둘? 서른셋?”
나는 그녀가 서점 주인과 수작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어이구, 손님은 더 적게 보시네요. 손님은 어떠세요?”
잔뜩 기분이 좋아진 그는 나를 향해서도 대답을 재촉했다. 나는 그가 도저히 서른둘이나 셋으로는 보이지가 않아서 난감한 얼굴로 안경을 들썩거렸다.
“글쎄요.”
나는 진열대에 놓인 책을 들어 앞장을 되는대로 넘겼다.
“어제 어떤 손님이 저를 마흔으로 보더라고요. 내 참.”
“그래서 아저씨 진짜 나이가 몇인데요?”
그녀가 가죽장갑을 모아 쥐고 팔짱을 끼며 묻자 그는 묘한 숨소리를 섞으며 흐흐흐 웃었다.
“그냥 서른셋으로 해두지요.”
“서른넷이나 다섯쯤 되나 보다.”
그녀는 놀랍게도 시장에서 주로 통용될 법한 반말 투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예, 그쯤 됩니다.”
아까 어물어물 넘기길 잘했다. 머리가 벗어지고 뺨에 푸른 얼룩무늬가 있는 그는 아무리 잘 봐줘도 서른예닐곱은 되어 보였다.
“마흔은 너무했다.”
“저도 처음엔 너무 놀라서 딴 손님들께도 여쭤봤거든요. 다들 서른대여섯 보시더라구요. 많아야 예닐곱 보시고요.”
한살 한살의 촘촘한 간격이 서점 주인에겐 건널 수 없는 대륙간처럼 넓게 생각되는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달력 서너 권 뗄 분량의 세월인 것을. 그때만 해도 나의 이십 대는 끝나지 않았고 일곱 시간 반가량의 여분으로 나는 한껏 오만해 있었다.
“그게 정상이죠.”
“손님이 제일 적게 보시네요.”
“살만 좀 빠지면 이십 대로도 보겠는데요.”
“나이가 드니까 자꾸 살이 찌네요. 아 손님, 그 책 좋아요.”
내가 책장에서 소설집을 뽑아내는 순간 그가 소리쳤다. 말이 무척 하고 싶어 못 견디겠는 사람이었다.
“보는 분들은 꼭 그 작가분 것만 보시더라고요.”
“여기 도서상품권 됩니까?”
“네. 그럼요.”
그녀가 팔짱을 풀고 드디어 내 쪽을 향해 다가오며 장갑을 탁탁 털었다.
“너 도서상품권 있어?”
나는 가방에서 민정이 준 도서상품권을 꺼냈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면 다들 그렇게 도서상품권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지 몰라도 민정은 도서상품권을 돈 묶음처럼 다발로 갖고 다녔다. 그 덕에 나도 돈 들이지 않고 책을 마음껏 구입할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서 싸하고 새콤한 향수 냄새가 났다. 대학 때만 해도 저물녘의 송아지처럼 장뇌 냄새와 담배 냄새를 옅게 풍기던 그녀였다.
“읽고 싶은 소설 있으면 골라봐.”
“요즘 소설은 도대체 읽고 싶은 맛이 없어.”
한때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그녀가 툴툴대며 시집 코너로 갔다.
“그럼 시집을 몇 권 사든지.”
내 말을 듣고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웃는 그녀는 내게 대학 때 모습을 상기시켰는데, 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고 안타깝게도 그 사이의 거리를 일깨웠다. 그 거리가 바로 이만큼이라고 알려주듯이 그녀는 시집이 꽂힌 서가 아래쪽으로 몸을 구부려 차곡차곡 쌓인 유아용 그림책을 뽑아 들었다.
“이거 우리 애들한테 하나 선물할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책 몇 권을 꼼꼼하게 검토하더니 한 권을 골랐다.
“애 엄마라 다르지?”
“좋은 엄마처럼 보이는군.”
“흉내 정도는 낼 줄 알지.”
그녀는 잠시 새침한 얼굴로 그림책 표지에 그려진 커다란 느티나무 둥치의 단면을 손끝으로 동그랗게 훑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인 책 한 권을 가리키며 흥분했다.
“어쩌자고 저런 글을 쓴단 말이니? 기껏 나무를 잘 키워서 읽으면 뭔가 도움이 될 지점을 하나같이 삭삭 피해가는 저런 쓰레기를 찍어내다니, 이게 이게 말이 안 되는 세상인 거야.”
변함없는 그녀의 냉소에 처음으로 나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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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누런 서류용 종이봉투에 책을 담아 안고 나오면서 나는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책방 주인, 정말 서른두세 살로 보여?”
“아니.”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학교 다닐 때 저 아저씨 학번을 들은 적 있어. 그래서 나이 맞춰준 거야. 더 먹은 걸 보면 재수나 삼수했나 봐.”
“그랬구나. 난 전혀 몰랐어.”
그녀의 입에서 학교 때 얘기가 나오자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늙어 보였잖아? 그래도 저 양반, 나이 많이 따라잡았네.”
나는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스물에 그녀를 안 후부터 쭉 견지해온 버릇이었다. 그녀는 실내에서도 서성거리길 좋아했고 훌쩍 밖으로 나가기도 잘했다. 그녀가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옆모습을 흘낏거리면서 묵묵히 따라 걸었다. 멋쟁이 여학생이 많기로 유명한 불문과에서 그녀는 그닥 예쁘지도 않은 편이었고 말투나 태도도 냉정한 편이었다. 친구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나는 줄곧 그녀만을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다. 신입생 시절 그녀와 같은 서클에 들었고 그녀가 서클을 그만둔 후에도 그녀와 함께 스터디를 했고 거의 매일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셨다. 알토란 같은 사 년의 세월을 오직 그녀와 함께.
“여기 신호등이 생겼네.”
그녀는 복개 중인 개천 다리 앞에 멈춰 섰다.
“그러게 말이야.”
“이런 데 신호등이 있어서 뭐 하나?”
신호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우리 말고도 몇 명의 남자들이 착실하게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신호등 앞에 선 보행자처럼 그녀를 향한 내 마음도 순순히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을 알지 못했다. 집요하게 구애를 한다든지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그런 열렬한 구애를 해본 적이 없다. 무엇에든 ‘적’자를 붙여 우스꽝스런 말을 만들기 좋아하는 민정은 그렇게 미지근한 내 사랑법이 ‘순 노친네적’인 거라고 폄하했다. 네모적 얼굴, 발랄적 모드, 노친네적 사랑법. 민정에게 ‘적’자를 붙이는 일은 그저 놀이였다. 민정은 적(的)의 강박도 적(適)의 의미도 몰랐다.
“그런데 이 횡단보도 말야.”
그녀가 내 팔꿈치를 살짝 쥐었다.
“새로 생긴 게 십 년쯤 된 것같이 왜 이러냐?”
십 년 전 그때는 이 다리조차 없었건만 그녀 말대로 횡단보도의 흰 페인트는 거뭇하게 닳아 흐린 잿빛을 띠고 있었다.
“아마 다른 데서 쓰던 거 가져왔나 봐.”
“몰랐네. 요즘은 횡단보도를 그리지 않고 갖다 붙이니?”
그녀가 쥐었다 놓은 팔꿈치에 가벼운 전류가 흘렀다. 대학 시절 스물두엇의 나는 내 나름대로 충실히 그녀에게 애정을 암시했다고 믿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녀가 내 마음을 알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건 어쩌면 잘못이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내 마음을 모른 척했고, 그 무렵 다소의 격정을 주체하지 못했던 나는 몇 달간 휴학계를 품고 다니며 그녀를 야속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다른 선택이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내 쪽에서 먼저 그녀를 향해 다가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냥 건너자.”
그녀가 성큼성큼 앞서 갔다. 나는 좌우를 힐끔거리면서 그녀의 갈색 부츠 뒤를 따라 짧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다음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이번에도 무단횡단을 할 작정인지 목을 길게 늘이고 달려오는 차들을 넘겨다보았다. 차들은 꼬리를 물고 달려오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 무전기를 든 경찰 두 명이 서 있었다. 나는 긴장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둘이서 쑤군덕거리느라고 우리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디로 갈까 망설이며 횡단보도 쪽으로 다가섰다 물러섰다 주춤거리더니 다리 아래쪽을 향해 내려갔다.
“젠장! 틈을 안 주는군.”
그녀가 발을 동동거리며 나를 향해 웃었다. 기울기가 낮은 겨울 햇살을 받아 그녀의 화장이 낯설고 창백하게 들떴다.
“이제 곧 바뀌겠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호가 바뀌었고 우리는 길을 건넜다. 그녀가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던 것은 정말 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일까. 그녀에 관한 한 나는 이런 생각 따위에 몰두하는 편이다. 어쨌든 그녀가 취한 적당한 거리감 덕분에 나는 친구로서 그녀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각별한 우정을 유지했다. 그녀가 설정한 간격, 아니 어쩌면 내가 지레짐작으로 그녀가 그어놓았다고 상상한 건지도 모르는 그 아슬아슬하고 지워지기 쉬운 페인트 자국을, 나는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녀처럼 무단으로 월경하는 법을 몰랐다.
“배고프니까 치킨 맛있게 하는 데로 가.”
그녀의 주문이 떨어지면 내 머리는 바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 동네에서 가장 닭을 맛있게 튀기는 집이 어디였던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마치 요술처럼 아래쪽으로 내려간 줄 알았던 경찰 두 명이 우리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입술이 허옇게 트고 ‘네모적’ 턱으로 무장한 경찰이 우리에게 도로교통법 몇 조 몇 항을 위반했으니 신분증 좀 보여달라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옆에 있던 녀석은 우리를 속여 넘긴 게 그렇게도 재미있는지 두툼한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모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붉은 뺨에 실없는 웃음을 띠웠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내가 웃는 낯으로 부탁했지만 입술 튼 녀석은 대꾸도 없이 벌금고지서에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신호등이 생긴 줄 몰랐어요. 봐주세요.”
그녀의 말에 실없는 녀석이 고개를 홰홰 저었다.
“생긴 걸 모르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서서 신호 기다리는데 단독으로 횡단하셔놓고.”
“다시는 안 그럴게요. 반은 어겼지만 반은 지켰잖아요?”
“어서 신분증이나 주세요.”
무뚝뚝한 쪽이 독촉했다.
“좀 봐주십시오.”
내 말에 무뚝뚝이는 이런 실랑이라면 신물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서 주세요.”
그는 허연 입술을 달싹거려 짧게 말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먼 산을 보았다.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앞으론 신호 잘 지킬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 네?”
예전 같으면 벌새처럼 따지고 들었을 그녀에게 감탄하면서 나도 있는 힘껏 그녀를 거들기로 했다.
“신분증을 안 가져와서 그럽니다. 봐주십시오.”
“그리고 여기 신호등 있을 필요도 없는 데잖아요? 봐주세요.”
실없는 녀석이 그녀를 돌아보며 붙임성 있게 웃었다.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니까 민원을 넣든지 하시고, 경찰이 버젓이 보는 데서 그렇게 막 건너고 그러면 경찰 체면이 뭐가 됩니까? 두 분이 삼만 원씩 육만 원인데 합쳐서 사만 원짜리 끊어드릴 테니까 얼른 아가씨 신분증이라도 내놓으세요.”
훈계조로 큰 선심을 쓰며 살갑게 말하는 쪽이 무뚝뚝이보다 왜 더 그녀를 자극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열어젖혔다.
“여기 있어요, 여기!”
그녀는 순식간에 신분증을 내밀었다. 성급한 포기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순 함정 단속이야!”
“이 아가씨가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쭉 여기 서 있었는데?”
“아까는 아저씨들이 우리 잡으려고 서 있는 거 아닌 것처럼 굴었잖아요? 우리가 바보예요? 잡으려는 거 알았으면 중간에 도망가버리지 멍청하게 신호 바뀌기 기다렸다가 나 잡아라 하며 건너오게? 시침 뚝 따고 딴청 피우다 쏜살같이 달려와서 잡는 게 함정 단속이지 뭐예요?”
“이 아가씨가 누가 딴청을 피웠다고 이래?”
“왜 반말해요? 나 아가씨 아니고 애 둘 키우는 아줌마예요. 왜 반말해요?”
실없는 쪽이 주춤했다. 내가 말리려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약간은 과장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영준아, 진짜 너무 아깝지 않냐?”
“오늘 마실 맥주 값 다 날아갔지 뭐.”
내가 시무룩하게 장단을 맞추자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 한복판을 쳤다.
“아니, 이까짓 사만 원 말고 좀 전에 이 아저씨들 연기, 명배우 뺨치던데 너무 아깝지 않냐고?”
나는 그녀가 어디로 말문을 트려는지 알았기에 공연히 경찰들 비위를 덧들여 벌금 수위를 올려놓지 않을까 불안했다. 그러나 그녀는 태도를 일변하여 집요하게 비아냥거렸다.
“할당받아서 실적 올리려면 우리나라 경찰들 연기 연습도 맹렬히 해야겠지? 생각해보면 별것 아냐. 까짓 사만 원에 죽고 사는 것도 아닌데 이 아저씨들 탤런트를 봐서 기쁜 마음으로 내가 헌납하지 뭐.”
결국 무뚝뚝이가 끊어준 벌금고지서는 에누리 없는 육만 원짜리였다. 고지서를 받아 든 그녀는 경찰들의 탤런트를 다시 한 번 상찬하면서 까짓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이만 원 정도의 추가비용은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끝까지 이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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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졸업 후 입대한 내가 제대를 1년 앞두고였다. 그때 나는 한 잔의 소주에 취해, 하루치 저녁노을에 미쳐 탈영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내가 탈영하지 않을 위인이란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죽을 용기가 없는 사내만이 죽지 않을까 근심하는 법이다.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만이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듯.
이 년 전 선배의 결혼식에서 그녀와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둘째를 가져 배가 불러 있었고 나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했다. 하필 그날 오후 민방위 훈련이 있었다. 허둥지둥 찾아든 예식장 근처 지하 레스토랑에선 낯모르는 신혼부부의 피로연이 왁자지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출입구 대기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녀의 배부른 모습을 오래 곱씹었다. 결혼한 그녀와는 오늘이 두 번째였다.
“결혼해서 사람 된 줄 알았더니 성질 여전하다.”
“그게 잘 죽더냐 어디?”
“난 키 크고 딱딱거리는 녀석이 더 맘에 안 들던데.”
“아냐 난. 처음부터 느물거리는 놈이 밥맛이었어. 꼭 그런 식이라니까.”
“무슨 식?”
“어물쩍 봐주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 꿍꿍이 완벽하게 다 차리는 식. 그런 놈들 역겨워서 진짜 세상 살기가 다 싫어.”
그녀가 살짝 이를 갈아붙였다.
“그래도 삼 초만 참았으면 이만 원이 굳는데.”
“아, 그 얘기 그만 하자.”
처음 들어간 맥줏집은 굴속같이 껌껌해서 우리는 되돌아 나왔다. 두 번째 가게에는 주인은 없고 주인이 벗어놓은 기름 묻은 앞치마만 의자에 걸쳐 있었다. 화장실에 다니러 갔나 싶어 몇 분 동안 앉아서 기다렸지만 주인은 오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경찰 둘이 아직도 연기 대결을 벌이고 있는 횡단보도 쪽으로 내려왔다.
“저기로 가.”
그녀가 모퉁이에 있는 건물 2층의 호프집을 가리켰다.
“저긴 치킨 안 할 텐데.”
“다른 거 먹지 뭐. 저 인간들하고 마주치기 싫다.”
그녀는 좀 추워 보였다. 우리는 2층 호프집으로 올라갔다. 호프집은 생각보다 넓고 깨끗했고 팝콘을 튀기는 버터 냄새가 고소했다. 그녀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자 은빛 머리띠를 한 아가씨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너 아직도 돈가스 좋아해?”
그녀는 윗도리를 벗어 뒤집어 개켜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하지. 우리 큰애도 나 닮아서 돈가스 얼마나 잘 먹는데.”
가슴께에 작은 풍차무늬가 있는 적갈색 손뜨개 스웨터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이름은 무슨 부티크 앞에 붙어도 손색이 없는 그녀였지만 대학 때는 옷을 무척 단순하게도 입고 다녔다. 청바지나 면바지에 흰색 아니면 베이지색 티셔츠가 고작이었다. 가끔 괜찮은 반품 옷을 입고 올 때도 있었지만 가을이면 점퍼, 겨울이면 반코트가 교복이었다.
“돈가스랑 맥주 어때?”
“안주 말고 식사로 시키자. 여기 맥주 마시면서 식사하는 데 맞죠?”
그녀의 물음에 은빛 머리띠가 공손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돈가스 식사로 하나 주시고 피처 하나 주세요.”
“네.”
“빵 말고 밥으로 주시고, 여기 후식도 나온다고 써 있는데, 커피로, 나중에 달라 그럴 때 주세요.”
“네.”
“포크와 나이프도 각각 주시고요.”
“네.”
“물도 좀 주세요.”
“네.”
내가 담뱃갑을 꺼내 탁자 위에 세워놓는 걸 보고 그녀가 덧붙였다.
“재떨이랑 성냥도 주세요.”
“네.”
은빛 머리띠가 계산서를 냅킨꽂이에 꽂고 주방을 향해 갔다. 과연 그녀의 복잡한 주문을 죄다 외우고 가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창밖으로 횡단보도가 내려다보였다. 경찰들이 느릿느릿 파출소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저 작자들 이제 철수하는군.”
“그 얘기 하지 마. 짜증 나니까. 앞으로 그 얘기 할 때마다 오백 원씩 내. 벌금에 보태게.”
“고지서 줘. 내가 낼게.”
“아냐. 넌 술 사. 이건 내가 낼래. 어쩐지 마지막 액땜이 될 것 같애.”
마지막 액땜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나는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입 밖에 내어 말할 수는 없는 느낌이었다. 나는 담배를 뽑으며 물었다.
“지금도 피우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짓으로 내 뒤편을 가리켰다. 뒤로 한 자리 건너에 양복 차림의 오십 대 남자 둘이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술집에서 담배를 피우다 봉변을 당했던 그날을 나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3학년 가을 무렵이었던가,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남자 셋이 그녀에게 담배를 끄라고 고함을 쳤다. 그녀가 꼿꼿이 한 대를 다 피우고 새로 한 대를 붙여 물었을 때 소주병이 날아왔다. 다행히 병은 그녀의 어깨에 맞고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의자를 번쩍 들고 펄펄 뛰는 나보다도 술집 주인을 불러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는지 안 되는지 묻고 경찰을 불러달라고 청하는 그녀의 또박또박한 말투에 더 두려움을 느낀 중년들은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분하게도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되었다.
“그냥 피워. 이만하면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아직도 그런 걸로 눈치까지 보고 그래?”
“나이 먹을수록 더 눈치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젊었을 때야 뭘 모르니까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는 담배를 피워 물긴 했다. 은빛 머리띠는 피처를 가져오면서 모든 걸 챙겨 왔다. 재떨이와 성냥은 테이블 가운데, 물컵과 포크와 나이프와 맥주컵은 각각 그녀와 내 앞에 놓였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며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내게 언제쯤 결혼할 생각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다.
“애인은 있어?”
나는 민정이 나의 애인인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설사 민정이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한 애인이라 하더라도 내가 그녀 앞에서 애인이 있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인은 그렇고 가끔 만나는 사람은 있어.”
“그래?”
그녀는 맥주를 마시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입가를 닦았다.
“사실 결혼 빨리 할 필요 없지. 마누라한테 정말 잘해줄 자신 없으면 하지 마.”
“넌 별로 재미없나 보지?”
“재미? 그런 거 절대 없어.”
그녀는 내 표정을 힐끔 살피고는 손끝으로 허공을 긋는 시늉을 했다.
“원래 결혼이란 게 다 그런 거야.”
“그럼 넌 도대체 왜 한 거야?”
“나도 몰라. 열심히 말려주는 사람 있었으면 안 했겠지. 아마 회사 다니기 끔찍해서 그랬나 봐.”
그녀는 졸업하자마자 기업체 홍보실에 입사했지만 잘 적응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제대한 후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물어 그녀의 결혼에 대해 모든 걸 알아냈다. 그녀는 회사에서 만난 노총각 공학도와 결혼했다고 했다.
“계속 공부했어도 잘했을 텐데. 석 선생이 너 많이 칭찬했잖아? 너도 공부하고 싶어 했고.”
“공부할 처지는 아니었지. 꼭 하자면 못 할 것도 없었는데 다 핑계겠지만 동생들도 걸리고 언젠가 유학도 가야 할 텐데 형편도 그렇고. 공부란 건 조급하지 않게 자기가 좋아서 느긋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
항상 그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번역 솜씨도 꼼꼼했다. 다만 그 당시 학교에 계속 머물며 공부를 한다는 건 결벽적인 그녀로서는 약간의 고통과 죄의식을 동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하는 게 어때? 요즘은 늦게 시작하는 것도 유행인가 보던데.”
“지금? 저 끔찍한 혹들을 달고?”
“봐줄 사람 없어? 어디 좀 맡기든가.”
나는 내 말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탈출구를 찾기를 바랐다. 늙은 공학도에 대한 원한도 한몫 끼여 있었다.
“누가 봐주겠어? 다 돈인데. 유행은 뭐 아무나 따라가니?”
그녀는 초조한 듯이 포크로 맥주컵을 두드렸다.
“조심해야 돼 진짜. 셋까지 되면 난 정말 돌아버리고 말 거야.”
돈가스와 밥과 샐러드가 왔다. 그녀가 튀긴 고기를 먹기 좋게 잘랐다.
“이제 뜬구름 잡는 얘긴 지겨워. 문학이란 거 사실 유아 문화 아니니? 어른들이 누가 시를 읽고 소설을 읽어?”
“나 읽는데?”
“그래. 너같이 어른 덜 된 애들이나 그렇지. 아니면 아주 노인네거나. 이제 먹어.”
내가 집은 돈가스 조각은 끝이 까맣게 타 있었다. 나는 포크 끝으로 탄 부분을 떼어내려 애쓰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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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랑같이 제대로 된 어른은 절대 그런 거 안 읽어. 문학 나부랭이 얼마나 경멸한다고. 세상을 움직이는 건 그런 철든 무리지.”
그녀는 돈가스를 맛있게 먹고 샐러드의 오이를 찍었다. 대학 때도 그녀는 오직 내 앞에서만 이렇게 명랑했고 내 앞에서만 이렇게 수다스러웠다. 이런 식의 믿음이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 고시공부를 해볼까 하는데 너도 학원 그만두고 나랑 같이 고시 안 할래? 후년부터 엄청 증원된다잖아?”
내가 헛웃음을 웃자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조심해야 돼. 진짜 조심해야 돼. 셋까지 되면 아, 난 죽는다.”
그들 부부의 구체적인 피임을 화제로 삼는 게 나를 거북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는지 그녀는 계속 셋이란 숫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화제를 바꾸고 싶었다. 그녀가 최근에 본 전시회라든가 문화원에서 본 단편영화 같은 것. 그러나 내 물음은 의지에 부응하지 않았다.
“아기들은 어떡하고 나왔어?”
“남편이랑 시댁에 갔어.”
“같이 안 가도 시어른들이 뭐라고 안 해?”
“뭐라긴? 둘이 싸우는 꼴 안 보게 돼서 다행이다 하시겠지.”
“남편이랑 원만하지 못한 모양이지?”
나는 놀리듯이 물었다.
“원만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쌍방 간에 아무 관심도 없는걸 뭐.”
내가 괴상한 표정을 짓지 않아서인지 그녀는 제법 솔직하게 답변했다.
“시어른들도 그런 짐작은 하시나 보지?”
“응. 제발 이혼만은 말아다오야. 그리고 이혼하더라도 제발 애들만은 데려가다오고.”
“그거 이상하네.”
“뭐가?”
“난 결혼은 안 해도 애는 하나 키우고 싶던데.”
“이 인간 용이히 철 안 드는군. 애 하나가 월 오십만 원짜리 적금이라고 보면 돼. 난 오히려 드라마에서 죽어도 애들만은 못 준다, 그런 얘기 나오면 이해가 안 가. 애 둘 맡으면 적금 백 만원짜리 이십오 년 붓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럼 그게 얼마니?”
그녀는 바쁘게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애 하나에 매달 오십이나 들어?”
“그럼! 그것도 애 키우는 데 드는 애 엄마 노동력은 아예 치지도 않은 건데. 그 정도 들어봤자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빠지지는 않는다 하는 수준이지. 일 년에 천이백, 천이백 곱하기 이십오 하면 얼마니?”
“삼 억쯤 되겠는데.”
“그러니까 이혼하고 싶으면 나보고 그 삼 억을 부담하라는 거지.”
“그래도 애들 귀엽지 않아?”
“됐어. 너 유심론자니? 너하고까지 이 문제로 싸움하고 싶지 않다.”
5
우리가 피처 하나를 더 시켰을 때는 여섯 시가 넘어 있었다. 새로운 안주로는 그녀가 굳이 우기는 바람에 김치볶음밥 하나를 더 시켰다. 그녀는 옛날부터 구두쇠였다. 자기 돈만 아끼는 게 아니라 내 돈도 자기 멋대로 아껴버렸다. 그녀 입에 비싼 밥을 밀어 넣기 위해서 나는 보통 즐거운 고심을 거듭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가끔 만나는 아가씨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서 나는 민정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민정의 높은 이직률이며 술만 먹으면 얼굴빛이 완전히 처절한 붉은색으로 바뀌는 얘기며 알레르기성 비염이어서 먼지가 많은 곳에 가면 어김없이 재채기를 하는데 한번 터졌다 하면 보통 대여섯 번은 줄달아 한다는 것 등등을 얘기했다. 물론 언젠가 섹스 중에 터져 곤혹스러웠던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녀가 불현듯 내 말을 가로막고 물었다.
“가만. 그 아가씨 몇 살인데?”
“내일이면 스물다섯 될걸.”
“그럼 오늘은 스물 넷? 그런데 무슨 직장을 그렇게 많이 옮길 틈이 있었어?”
“전문대 나왔어.”
“그렇구나.”
“응.”
“무척 예쁜가 보다.”
“그냥 그렇지 뭐.”
“이 순 도둑놈아.”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예쁘다는 건 언제고 내게 중요해본 적이 없었다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나는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다. 동창 녀석이 빨리 안 오고 뭐하냐고 고함을 쳤다. 나는 금방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디 약속 있어?”
그녀는 나를 쭉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고등학교 놈들 망년회 하자고 해서. 이 근처거든.”
나는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다.
“싫어. 안 그래도 나 일어설 참이었어. 벌써 일곱 시야.”
“일곱 시밖에 안 됐잖아?”
“너 가봐야지.”
“시간 맞춰 갈 필요는 없는 데야. 실은 안 갈까 했는데 여기까지 나온 김이라 전화나 한번 해본 거야.”
“나온 김에 가봐.”
“너 간다면 가고.”
“난 안 가.”
그녀는 도르르 말아 쥐었던 가죽장갑을 펴서 한쪽씩 착착 끼었다.
“같이 가자. 별 부담 없는 자리야.”
“나 니 애인인 줄 알라고?”
“좋지. 노총각 위해서 오늘 하루 애인 노릇 좀 해라.”
“그 재채기 아가씨는 어쩌고?”
“참 쓸데없는 소리 한다. 같이 가.”
“정말 안 돼. 오랜만에 그런 자리에 가면 내가 날 주체하지 못할지 몰라.”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 자줏빛 가죽장갑을 낀 손을 마주 잡는 순간 나는 목이 컥 막혔다.
“가자…”
“아냐, 됐어.”
“나중에 데려다 줄게.”
“너 그러다가 내가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떼쓰면 어쩌려고 그러니? 나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녀의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몹시 눈치 빠른 여자라는 걸 깜빡 잊었다. 내 얼굴이 심각해졌던 게 틀림없다. 재빨리 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이렇게 얼버무렸다.
“그게 아니라 갑자기 늙은 우리 신랑이 불쌍해져서 도저히 안되겠다. 애새끼들도 보고 싶고.”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자기 말에 조용히 낄낄거렸다. 나도 조금 웃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보다 아홉 살이나 연상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입맛이 씁쓸했다. 내일이면 서른아홉이라니, 폐광 같은 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할 수 없지. 완력을 쓰는 수밖에.”
“안 된다니까 자꾸 이러시네.”
“내가 옛날에 너 무지하게 업고 다닌 거 기억나지?”
“진짜 얘가!”
그녀가 낮게 비명을 질렀다. 취기가 오른 그녀는 아름다웠다. 여전히 미소를 띠운 채였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나와 더불어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더 유혹해야 하는지 아니면 이쯤에서 그만 그녀의 고집에 진 척하고 섭섭한 얼굴로 놓아주어야 하는지 나는 결정짓지 못했다.
대각선 방향에서 은빛 머리띠가 새로 온 손님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녀가 가죽장갑을 벗고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물었다. 그녀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유리창 밖 건너편 소문난 돼지구이 간판에 불이 반짝 켜졌다. 그녀도 그 집 간판을 보고 있었는지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소문난 돼지구이… 돼지구이… 구나.”
“저 집 고기 괜찮아. 가서 먹을까?”
“아니.”
“그럼 뭐 다른 거 먹을래?”
“그게 아니라 여기 창문에 붙은 호프의 ㅎ 자 있잖아?”
예전에도 그랬다. 내게 뭔가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때의 그녀는 항상 소년처럼 귀여운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쌀쌀맞고 공격적인 데가 조금도 없었다. 엄마가 공장에서 집어 온 반품 스웨터 두 벌에 대해 설명하던 어느 날의 아침처럼 그녀의 손동작은 아주 열심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창가에 붙은 ‘호프’의 ㅎ을 가리켰다. 그녀는 ㅎ의 꼭지를 뗀 동그라미를 손으로 둥글게 아울렀다.
“가운데 여기 양쪽 있지?”
그녀는 괄호처럼 둥근 동그라미의 양쪽 선을 가리켰다.
“여기에 가려서 돼지구이에서 두 글자가 안 보였거든. 돼 자랑 이 자가 안 보여서 난 이제껏 소문난 지구가 뭐 하는 집일까 궁금하고 있었어.”
저런 말투. 궁금하고 있었어 하는 식의.
“하하, 소문난 지구? 그거 멋있다.”
“고깃집 이름이 그 정도면 놀랍지.”
나는 팔을 옆구리에 딱 붙이고 어깨를 오싹 떨었다. 어린 물고기의 파닥임이 셔츠의 봉제선을 타고 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마치 새로운 연인처럼 다감했고 오래된 연인처럼 박자가 잘 맞았다.
그녀가 고집하면 나는 그녀를 망년회에 데려가지 않고 집에 보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면 나도 그녀를 집에 들여보내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예전엔 그녀가 나의 돌진을 적당히 막아내면서 관계의 거리를 잘 유지했지만 정작 그 거리가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그녀는 그렇게 할 의지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그녀가 아기 둘을 안고 내게 뛰어온다 하더라도 내게는 도저히 그녀를 막을 힘이 없을 것이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여 아내가 있다면 아내가 대신 나서서 그녀를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나의 약점이었지만 불행히도 그 약점을 안다는 것이 나의 강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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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후식용 커피를 마시고 호프를 나왔을 때가 여덟 시 반이었다.
그녀는 길가에 늘어선 포장마차를 보자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소주와 닭꼬치를 조금씩 먹고 가자고 했다. 쇠고기보다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더 좋아하는 그녀의 식성은 변함없었다.
포장마차 안은 젊은 대학생들로 가득했다. 다만 맞은편 코너에 쥐색 코트를 입은 중년 남자와 연분홍 반코트에 안경을 낀 삼십대 여자가 아는 사이인지 모르는 사이인지 어정쩡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다. 남자는 맥주를 마셨고 여자는 소주를 마셨다. 안주 두 접시가 그들 사이에 그들만큼이나 모호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우리는 좁은 목재 의자에 앉아 추위에 몸을 떨면서 소주를 마셨다.
“너랑 가끔 만난다는 그 아가씨 말야.”
“응.”
“너랑 결혼할 생각은 있어 보여?”
“모르지.”
“그런 얘기 안 해?”
“별로 안 해.”
민정은 결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민정이 결혼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지를 안다면 그녀는 필경 다이어리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오래도록 ‘우울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소주잔을 내게 부딪치며 말했다.
“우리 동네에 뻥튀기를 파는 여자가 있거든. 그 소리 왜 끔찍스럽게 크잖아?”
그녀는 입가를 찡그리고 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그래. 간 떨어지지.”
“지나가다 놀란 적 많아. 그런데 그런 우렁찬 소리를 내는 그 여자 말야, 정작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무심히 지나다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건데 그 여자 정말 뻥튀기 한 알 들어 올릴 기운도 없어 보여. 그런 여자가 뻥튀기 기계를 눌러 뻥튀기를 튀기다니, 이게 이게 말이 안 되는 세상인 거야.”
그때 맞은편 연분홍 반코트가 발딱 일어나 돈을 계산하고 나가버렸다. 쥐색 코트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그 여잘 보면…”
나는 기다렸다. 곪은 상처라도 들여다보듯 골똘히 손가락 끝을 응시하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마음이 좀 그래.”
톡톡 쏘던 그녀가 이젠 내게조차 말을 분명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남자 몫까지 계산했는지 어쩐지 내가 액수를 가늠하고 있는데, 지독한 매질을 버텨내다 마침내 잘못을 시인하는 오달진 계집애처럼 그녀가 불쑥 퉁명스럽게 똘똘 뭉친 소리로 내뱉었다.
“그동안 너 많이 생각했어!”
7
“데려다 줄게.”
“아, 됐어. 싫어.”
“왜?”
“몰라. 여기서 그냥 헤어져.”
“그럼 택시 타는 거라도 보고.”
“아, 제발 싫다니까! 싫다고! 싫단 말야 내가!”
그녀가 이 정도로 고집을 부리면 무슨 수를 짜내도 꺾기 어려웠다. 몇 시쯤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전희를 거부했다. 뜨거운 음식을 식기 전에 해치우듯 우리는 땀을 흘리며 급히 섹스를 했다. 사정하는 순간 내가 본 것은 여관 창밖에서 쾅쾅 터지는 폭죽 빛에 드러난, 그녀의 턱과 목을 가르는 부자연스러운 화장 선이었다. 어느 방에선가 짧게 고함을 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해가 시작된 것 같았다.
상대의 마음이 변할까 두려워 막무가내로 도장을 찍고 돌아서는 계약자들처럼, 우리는 아무 휴식도 미련도 없이 서둘러 옷을 입고 여관방을 나왔다. 총총 앞서 가는 그녀를 따라잡느라 큰길로 나오는 어두운 길목에서 나는 핑 도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부츠 굽을 울리며 잠시 서 있었다. 고개가 들리고 추위에 굳은 그녀의 입가가 힘들게 벌어지며 작별의 웃음을 만들어냈다.
“잘 지내, 영준아.”
“아… 그래.”
그녀의 왼쪽 머리핀이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너도, 잘 지내 혜원아 해.”
“잘 지내 혜원아.”
“응.”
왠지 그녀가 악수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손을 내밀지 못했다. 한쪽 핀이 없는 그녀의 얼굴이 기우뚱해 보였다.
“안녕. 안녕.”
단풍잎이 햇빛과 희롱하듯 그녀가 두 번 흔드는 자줏빛 가죽장갑이 가로등 불빛에 반딱반딱했다. 그녀가 돌아설 때 출렁 핸드백 끈이 그넷줄처럼 흔들렸다. 문득 나는 그 속에 들어 있을 벌금 고지서를 떠올렸다. 그녀의 파마 머리가 사람들 속에 묻혀갔다. 마지막 액땜과도 같은 벌금을 내면서 그녀는 나를 생각할까. 내가 사 준 책을 딸에게 읽어주면서 나를 기억할까.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 속에 그녀에게 주었어야 할 유아용 그림책이 있었다. 그녀가 그깟 책을 돌려받자고 전화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헤어지는 순간 그녀의 전화번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