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나가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허공으로부터 음성메시지 여섯 개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영우의 것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은석이 보낸 것들이었다. 한나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한나 맞지? 꺼져 있네.
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나는 그가 여전히 그라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고 사과를 베어물었을 때 입안의 그것이 사과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듯이. 기억이 세월의 흐름 따라 희미해지다가 사라지기도 하는 반면 고통은 상처로든 깨달음으로든 나름의 주소를 남겨 인생 안에 정착한다. 은석은 한나의 기억이 아니었다. 은석은 한나의 흉터였다. 담담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상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은석에게 한나를 찾을 만한 염치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계속 꺼져 있네. 설마 죽은 것은 아니겠지요?
한나는 욕이 아까워 헛웃음이 났다. 어제 나흘간 단신으로 지리산 종주를 마친 한나는 뱀사골의 한 음식점 야외 평상에서 반주(飯酒)를 하였다. 평소 술을 즐기기는커녕 체질에 맞지 않아 꺼려하는 편이었으니 그녀 자신에게조차 의외의 행동이었다. 소주병의 마개를 열자 소주 향이 주변 꽃향기에 섞여들어 부드러운 햇살 속으로 번졌다. 서른다섯 살의 봄날이 한나에게는 이제 막 사춘기를 벗어난 듯 아련했다. 정작 사춘기가 언제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다만 삶의 핵심 비슷한 것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비등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음이 어지럽지는 않았다. 도리어 점점 차분해지는데 그랬다. 선을 넘는 것에 달려 있어. 모든 게. 극기도 사고를 치는 것도. 변하는 게 아니야. 강을 건너는 거지. 누군가의 그런 말들이 떠올랐다. 누구지? 누구였지? 누가 그런 못된 얘길 나한테 했었나? 그리고 소주 한 병을 마저 비운 것 같지도 않은데 구름 위를 걷는 기분 속에서 의식이 스르륵 지워져버렸다.
눈을 떴을 때 한나는 펜션 객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양말조차 벗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등산복이 수의(壽衣)였더라면 염(殮)을 마친 시체라 속여도 믿을 만큼 얌전한 모습이었다. 머리가 아프지도 속이 쓰리지도 않았다. 지갑 속의 돈과 신용카도 그대로였다. 다만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방 안은 깨끗했다. 둥근 탁자 옆에 의자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조금 비껴 나와 있어 누가 거기 앉았었나 싶은 것이 긴가민가했다. 아, 이게 바로 필름이 끊겼다고 하는 것이로구나! 워낙 적은 주량을 각별히 조심하여 과음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한나로서는 그 나이에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가 않았다. 그 음식점 야외 평상에서 혼자 반주를 하고 있다가 훌쩍 아무런 과정 없이 거기 그렇게 혼자 누워 있게 된 셈이었다. 못 말리겠다, 진짜. 채 한 병도 안 되는 소주에 이 지경이 되다니. 그런데 한나가 더 한심스럽고 어이없게 여긴 것은 꼭 천천히 설득당한 것만 같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감정상태였다. 뭐랄까. 황당하기는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아니 더 솔직하자면 손톱 밑에서 가시가 빠진 듯 후련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귀신에 홀렸다고 한들 이럴 수가 있나. 핸드폰 베터리는 바닥이 나 있었고 시계를 보니 거진 하루가 실종돼 있었다. 한나는 복도에 서서 102호실의 문을 닫았다. 그것보다 조금 이르게 302호실에서 나온 어떤 여자가 층계를 다 내려와 한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여자는 산행과는 거리가 먼 검은 원피스 정장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당연히 한나는 의아했다. 여자가 한나 앞에서 주춤하더니 멈춰 섰다. 유별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잊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어두운 구슬이 박힌 것 같은 눈동자.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정적이 임했다. 서로에게 그 사람 말고는 어느 누구도 있어선 안 되는 그런 정적이. 한나는 자기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여자가 꿈틀, 움직였다. 한나를 스쳐지나갔다. 머릿결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몸 전체에서 지독한 락스 냄새가 났다. 한나는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출입구 쪽 역광에 눈이 부셨다. 한나는 현기증이 일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저앉지 않으려 애썼다. 주저앉지 않았다. 여자가 열고 나간 미닫이 유리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나는 한참 눈을 뜰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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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이응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1990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왔다」 외 9편의 시로 등단하였고, 1994년 계간 <상상> 가을호에 단편소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시집으로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소설집으로 『무정한 짐승의 연애』, 『약혼』, 장편소설로 『국가의 사생활』, 『전갈자리에서 생긴 일』, 소설선집으로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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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펜션 프론트에 열쇠를 반납하며 지배인의 반응을 살필 참이었다. 자기가 투숙할 당시의 형편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혹시 큰 실수라도 저질렀으면 어쩌지? 그냥 시치미 뚝 떼고 가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이게 웬걸. 프론트에는 어른이 아니라 기껏해야 고등학교 졸업반이나 되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앉아 있었다. 여자애는 한나가 열쇠를 건네자 무심히 돌려받고는 보내고 있던 핸드폰 문자메시지에 계속해서 집중했다. 여자애 앞 책상 위에는 일본어 회화책이 펼쳐져 있었다. 한나는 고자누룩해졌다. 어른이 미성년자에게 묻기에는 무조건 창피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보다 먼저 한나는, 여자애가 인도인 내지는 그 계통과 한국인 사이의 혼혈인이 아닐까 싶은 것에 몹시 당황하였다. 여자애 입에서 과연 한국말이 튀어나올지조차 의심이 가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한나는 그러한 환타지적 상황을 돌파해 목적을 달성할 만큼 영웅적인 여성이 아니었다.
예쁜 펜션이었다. 그 펜션은 등산로의 초입에 있었다. 한나가 소주에 정신을 잃었던 음식점으로부터 도보로 십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거기에서 저기까지 멀쩡히 와서 숙박비를 치루고 방문을 닫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거 참, 음모론이 따로 없네. 한나는 혹시 아까 그 묘한 여자가 어디 없나 두리번거려도 보았다. 한나는 아무래도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아 용기를 내었다. 펜션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프론트가 비어 있었다. 여자애도 없고 일본어 회화책도 없었다. 한 십 분쯤 콩닥콩닥 뛰는 가슴으로 기다렸을까. 차라리 그 음식점에 가 볼까? 아니다. 아냐. 한나는 마음이 돌변해 어서 그곳을 떠나고만 싶어졌다. 이상한 공간이었고 이상한 시간이었다. 한나는 제 인생의 일부분을 유기하고는 도망쳤다.
한나가 광화문 부근 작업실에 도착한 것은 환한 초저녁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기대어 한나는 칼날 모양의 낮달을 잠결에 보았다. 그랬던 거라고 여겼다. 지난 주 내내 아무도 없는 작업실에서 저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을 라디오를 끄자 고요가 밀려왔고 그 고요 안으로 창 밖 길가의 소음이 차츰 스며 자리를 잡아갔다. 집이 아니라 곧장 작업실로 온 것은 어쩌면 영우가 돌아와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좀 쓸쓸했다. 영우가 없다는 것이 여기저기 어지러진 사물들로 티가 났다. 영우는 깔끔했다. 그리고 영우는 순수했다. 한나는 벽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벽거울에는 먼지가 두껍게 묻어 있었다. 그것 역시 영우의 부재였다. 깔끔하고 순수한 영우가 한나의 곁을 떠난지 거의 백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우가 없으니 영우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무도 없다는 것을 한나는 간신히 깨닫는 중이었다. 좌우가 비대칭인 얼굴의 여자가 한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얼굴의 좌우가 비대칭인 것은 한나의 은밀한 콤플렉스였다. 스물다섯 살. 한나는 영우 나이 때의 자신을 회상해보았다. 그녀에게도 영우와 같은 시절이 있었다. 물론 남자의 스물다섯 살과 여자의 스물다섯 살은 이것저것 많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싱그러운 스물다섯 살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리라. 남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어도 그 나이가 지니고 있는 어쩔 수 없는 아름다움은 있었을 것이다. 그게 현재의 한나에게는 없었다. 청춘이란 무엇일까?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 고통 속에서도 고통이 뭐냐고 물어보며 밀고 나아갈 수 있는 천진함. 그것이 청춘 아닐까? 그때가 지금보다 행복했었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사방에는 모르는 것들 투성이였고 지금보다도 훨씬 가진 게 없었다. 그야말로 좌충우돌이었으며 오죽하면 매일매일 무엇을 하면서 지내야 하는지조차 막막하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스물다섯 살의 머릿속에는 늘 뭉게구름이 있었노라고 한나는 생각했다. 먼지 자욱한 벽거울 속의 여자는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았다. 편하게 살아오지 못한 여자로서의 흔적이 얼굴 곳곳에 고스란히 베어 있었다. 한나는 영우가 보고 싶었다.
이게 뭐지? 한나는 입고 있는 등산복 외투 왼편 가슴께에 작은 핏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온몸을 아무리 뒤져봐도 상처가 없으니 한나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정한나 왜 이러세요? 정말 왜 자꾸 이러세요? 왜요? 그럴 수도 있죠. 그냥 멋지게 우주의 피라고 해둡시다. 이따 세탁하죠, 뭐. 아아, 네에. 그럼 그러시든가요. 한나는 자문자답이 영 재미없었다. 작업실을 나와 분식점에서 라면을 먹은 한나는 그 사이 편의점에 충전을 맡겨두었던 핸드폰 베터리를 도로 찾고는 원두커피전문점 발코니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한나가 핸드폰의 전원을 켜자 허공으로부터 음성메시지 여섯 개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영우의 것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은석이 보낸 것들이었다. 영우의 음성메시지에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한나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고 욕이 아까워 헛웃음이 났다.
─나 지금 한국에 있거든? 서울에 있거든? 들었으면 얼른 연락 좀 하지?
미친 새끼. 한나는 종이잔을 휴지통의 분리수거구멍 속으로 밀어넣다가 파라솔 너머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이런. 저무는 하늘에 뭉게구름이 아주 촌스러운 구도를 유지하며 떠 있었다. 또 헛웃음이 났다. 스물다섯 살 때 저런 게 내 머릿속에 있었단 말이야? 아이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한나는 아까 벽거울 속으로 들어가 잔뜩 감상에 젖어들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은석에 관한 작금의 이 상황이 가끔 상상했던 바와는 달리 엄청난 분노를 자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뭐야? 지리산에서 필름 끊기고 도통한 거 아냐? 비정상적으로 높아 뵈는 가정집 담벼락 위로 살짝 올라온 목련나무가지 그 흰꽃들이 한나는 자길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덧 사 년 전 일이 되었다. 은석은 결혼식을 한 달 남짓 남겨놓고 신부가 될 여자를 버려놓은 채 다른 여자와 함께 사라졌더랬다. 한국에 있다고 녹음한 내용으로 봐서 신주쿠 어디서 놀고 있는 걸 누가 봤다는 오래 전의 그 소문이 맞는 거였나 보다. 은석의 명랑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한나는 그가 여전히 그라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고 사과를 베어물었을 적에 입안의 그것이 썩은 사과 말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어쨌거나 은석이 제 발로 나타나 한나를 찾고 있는 거였다. 은석이 미쳤건 미치지 않았건 한나는 상관없었다. 준비해놓은 수많은 방법들 중에 무엇을 쓸까? 아, 즐거운 선택도 이럴 땐 성가신 숙제구나. 한나는 웬만하면 은석을 살해하기로 새삼 다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다. 성격이 다소 소심하다고 해서 원한을 죽음으로 못 갚는 것은 결코 아니니까. 사람이 수영을 못한다고 해서 생선요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잖나. 사 년 전쯤 하마터면 은석의 신부가 될 뻔 했던 한나는 그날 마침내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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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은 극심한 고통의 벽 앞에 홀로 서면 자기의 분신을 마주하게 된다. 한나는 그렇다고 믿었다. 한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자기의 분신을 본 적이 없었다. 한나는 카프카에게서 위안을 받던 특이한 소녀였다. 내용을 깊이 이해하진 못하면서도 그 설명할 수 없이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마냥 좋았다. 하긴 어쩌면 그게 카프카인지도 몰랐다. 이 세계가 어둡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어둠 말고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어둠에 잠기는 것보다 어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는가. 헤비메탈에 열광하는 소년처럼 한나는 카프카에 빠져들었다. 한나는 화가 나거나 초조할 때 카프카를 읽으며 환각 같은 안정을 구했다. 심지어는 생리통에 시달릴 적에도 카프카를 뒤적거리면 그럭저럭 견딜만해지곤 하였다. 한나에게 있어 카프카는 단순한 취향을 넘어선 일종의 향정신성의약품이자 진통제였던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부터 시작 된 이러한 한나의 카프카에 대한 변태적 사용은 스물다섯 살 여름까지 지속되었다. 순정만화를 멀리했던 카프카 소녀가 훗날의 TV주말연속극을 혐오하는 카프카 아가씨였다. 카프카는 위대했다. S가 셰익스피어를 뜻하지는 않았다. D가 도스토예프스키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K는 카프카와 카프카적인 모든 것들을 연상시켰다. 알파벳 철자들 중 하나를 온전히 자신의 상징으로 소유해버린 작가는 오직 프란츠 카프카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고작 카프카의 유명한 한두 편을 읽었거나 그마저도 제목만 구경해놓고는 카프카를 요리저리 들먹이기 일쑤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알고 있지만 막상 『자본론』을 읽은 사람은 희귀한 것처럼. 카프카의 소설 「시골의 결혼 준비」의 주인공 에두아르트 라반은 자기의 분신은 결혼을 하기 위해 시골로 보내놓고 스스로는 갑충으로 탈바꿈해 집에 머물러 있다. 시골의 신부와 신부의 어머니는 신랑 라반이 오기를 기다린다. 소설은 라반의 분신이 시골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중단된다. 이 작품은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한 마리 거대한 해충으로 변해버린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변신」보다 오년 가량 앞서 씌여졌다. 한나는 자기의 분신으로 하여금 삶을 대리케 한 것도 부족해 스스로는 벌레 속으로 숨어버린 에두아르트 라반의 세속에 대한 환멸을 수긍했다.
“토리를 여기에다 묻었단 말이야?”
“그렇다구.”
“대단하다. 한나. 대단해.”
토리는 은석과 한나가 동거할 때 키우던 새까만 푸들이었다. 원래 토리는 유기견이었던 것을 은석이 거두어 돌보던 터였다. 대여섯 살 정도 먹은 놈이 트럭 바퀴 안쪽에서 혀를 내뺀 채 땡볕을 피하고 있었다고 했다. 한나는 그 얘기를 듣고는 은석이 더욱 좋아졌었다. 길에서 마주친 미물의 생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해 책임지는 따뜻한 남자라면 몸과 마음을 맡겨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토리는 은석이 종적을 감춘 뒤 한나와 단 둘이서 삼 년 가까이를 더 살았다. 그중 거의 이 년간 한나는 저 자신도 추스르지 못하는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에 하물며 토리를 챙겨준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점이 한나는 요즘도 문득문득 가슴 아팠다. 침대 밑에 딱딱하게 굳어 있기 전날까지도 현관에 엎드려 은석을 기다리는 버릇을 그치지 않았던 걸 보면 개에게 주인은 하나라는 얘기가 맞는가 싶었다. 은석은 사람에게만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다.
“담요에 싸서 가방에 넣고 데려와 묻었다. 양심이 없을 테니까 가책 같은 건 하지 마.”
만나자마자 은석은 대뜸 토리의 안부부터 물어왔다. 완전 또라이가 아닌가? 결혼식을 앞두고 다른 여자랑 도망친 작자가 사 년도 넘게 실종상태로 있다가 다시 나타나서는 제일 먼저 한다는 소리가 함께 기르던 개가 어디 있냐는 거였다. 토리는 죽었다니까 아예 한 술 더 떠 그럼 무덤이 있다면 그거라도 보고 싶댔다. 한나는 궁극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들은 참아낼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 얼마간의 침묵 끝에 한나는 토리를 고명도에 묻었다고 말했다. 강화도 인근의 작은 섬 고명도에서 한나와 은석은 처음 만났더랬다. 살인과 그 뒤처리는 물론이요 우연을 가장한 악연이 비롯된 곳이라는 점에서도 그 이상 최적의 장소가 없다고 한나는 결론 내렸던 것이다. 토리는 동물병원 냉장고 안에 잠시 보관되었다가 곧바로 애완견사체처리업자에게로 넘겨졌다. 불에 태워졌거나 개고기집에 팔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눈물 나는 일이겠으나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한나는 뜬금 없이 지독하고 무정하였다. 인격의 규칙이 허물어진 것이다.
“한나 늙었네.”
“우리 이러는 거 알면 비웃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야.”
“나한테 화 내지 않는 까닭은? 죽인다 어쩐다 나리가 날 줄 알았는데.”
“넌 인간이 아니니까. 기대가 없으니까. 너라면 이 마당에 무슨 생각이 있겠냐?”
둘은 섬에서 유일한 식당에 들어가 마주앉았다. 한나는 아까 은석이 화장실에 갔을 때 은석의 가방을 뒤져보았다. 여권과 달러 뭉치가 눈에 띄었다. 뭣 때문에 돌아왔을까? 아니. 왜 나를 찾아왔을까? 명탐정 한나는 궁금하였다.
“나도 늙었지?”
“넌 그대로야. 잘 지내셨나 봐?”
“…”
“뭘 그렇게 빤히 봐? 누가 빤히 보는 거 싫어하는 거 잊었어?”
“…왜 그랬지?”
“…”
“아아. 얼굴이 비대칭이라서 신경 쓰인다는 그거?”
“기억해주니까 눈물이 다 난다. 알았으면 재수 없으니까 그만 쳐다 봐.”
“그동안 연애는 했냐?”
“결혼한다.”
“엉?”
“결혼한다구. 한참 연하랑.”
“부라보.”
보조작가 모집 광고를 보고 작업실을 찾아온 영우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한나는 영우의 이력이 그의 분위기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영우는 과학고등학교를 나오고도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는데 가지고 있는 1급 어학자격증만 다섯 개였다. 이 아이는 지금 불안하구나. 한나는 정작 가슴 뛰어하고 있는 쪽이 자기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영우는 길을 일부러 잘못 든 소년 같았다. 생활인이 되기에는 현실감이 부족해 보였고 예술가가 되기에는 욕망이 희미해 보였지만 재능이 오롯하기에 고독해 보였다. 영우는 매사에 뛰어나지만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부분에서 너무 어른스러워 무엇을 해도 끝까지는 못 갈 사람이었다. 한나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왜 만화가가 되려 하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만화를 그리면 생각하는 게 좀 편해집니다. 한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지만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영우는 한나의 팬이었다. 그리고 만화를 그리지 못하는 만화가 곁을 할 일 없는 보조작가는 묵묵히 지켜주었다. 한나는 삶의 감각들이 전부 무시 못할 만큼 마비되어 있었다. 한나는 영우와 연애를 하면서도 그것이 연애라고 느끼지 못하였다. 심지어는 단 한 번 함께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한나는 그 일은 아예 없었던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한나의 무기력과 분열증으로 인해 영우는 몹시 상처받았다. 영우는 이 년만에 한나를 떠났다. 원두커피전문점 발코니에서 들었던 영우의 녹음된 목소리는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 하는 이의 그것이었다.
─저에요. 만나고 싶어요.
한나는 이후로 걸려오는 영우의 전화를 감히 받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은석의 등장에 정신이 산란해서라고 치부했지만 그것은 솔직한 견해가 못 되었다. 한나는 뭔가를 두려워 하고 있었다. 두 남자가 동시에 한나에게 돌아왔다. 한 남자는 사랑하고 싶은 남자이고 한 남자는 죽이고 싶은 남자였다. 한나는 어지러웠다.
“너도 잘 지냈을 것 아냐. 신나게.”
“글쎄, 잘 지냈다기 보다는 초능력을 얻는 과정이었지.”
“웬 초능력?”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거든.”
“아하, 그래?”
“너 나 확 죽이고 싶지?”
“허이구. 초능력이 맞구나.”
“요망해졌네, 한나.”
조금 전부터 TV에서는 뉴스가 흘러가고 있었다. 검찰에 출두하는 부패 국회의원이 없어지자 모자이크가 처리된 살인사건 현장이 있었다. 모 대학교 의대 신경정신과 여교수가 자신의 남자 제자를 지리산의 한 펜션에서 엽기적으로 죽였다. 경찰은 사라진 여의사를 수배했다. 한동안 한나와 은석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한나는 TV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었고 은석은 그런 한나와 TV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한나가 신음을 내뱉듯 말했다.
“나 저 여자 알아.”
“뭐?”
“저 여자 안다구.”
“뭐라 그러는 거야?”
“…”
“…”
“…날 구해줬어.”
인간이 극심한 고통의 벽 앞에 서면 자기의 분신을 마주하게 된다고 믿는 한나는 정작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자기의 분신을 본 적이 없었다. 한나는 극심한 고통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일까? 분신이란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스물다섯 살 여름 한나는 작은 섬에서 한 남자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더랬다. 은석은 희귀한 꽃이 있다는 소문을 따라 와 사진을 찍고 있었고 한나는 아르바이트로 인구와 풍물을 조사하고 있었다. 은석은 한나에게는 없는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세상을 싫어하는 만큼 자신감이 넘쳤고 자제력이 완강했다. 한나는 카프카를 더 이상 읽지 않게 되었다. 에두아르트 라반이 결혼식에 분신을 보낸 것은 세상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는 어두운 직관만이 오래 된 치즈처럼 남았다. 한나는 은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간 여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알 수 있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그것 말고도 견딜 수 없는 것들은 너무 많았다. 한나가 사랑했던 은석은 지금 그녀가 죽이려고 하는 은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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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경찰이 한나 널 찾고 있단 소리야?”
“가만 있어 봐. 나 복잡해 지금.”
한나와 은석은 민박을 하게 되었다. 그들을 싣고 왔던 통통배의 엔진이 고장 나서 내일 아침 다른 배가 도착해야 그걸 타고 섬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데 별 도리가 없었다. 한나는 휴지를 접어 침을 뱉고는 거기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 대신 쓸 단어가 없길래 민박이지 둘이 누우면 딱 알맞은 방 안에는 컵과 쟁반도 없이 달랑 놓여진 낡은 양철주전자와 먼지냄새가 쾌쾌한 군용담요 서너 장이 전부였다. 그 쪽방을 끼고 있는 구멍가게 자체에 전기시설이 없어 삐쩍 마른 촛불을 켜놓고 있는 지경에 TV나 라디오를 바라는 건 지역사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날씨만 화창하면 육안으로도 강화도가 빤히 보이는 곳이 이렇다니 한나는 도통 어이가 없거니와 그보다 훨씬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남자와 단 둘이 동숙을 하게 된 천인공노할 상황이었다. 구멍가게 주인은 숙박비를 챙기자마자 문명의 혜택과 다정한 가족이 있는 안채로 가버리고 없었다. 이보다 비참한 코미디가 또 어디 있을까. 있지도 않은 개무덤으로 복수의 덫을 놓다가 되려 시골개만도 못한 처지에 갇히게 됐다는 자책에 한나는 은석 몰래 입술 안쪽을 아프게 깨물었다. 아까 뉴스는 경찰이 유력한 살인용의자인 여의사 외에 공범일 가능성이 있는 신원미상의 여자 하나를 더 추적하고 있다고 보도했더랬다. 자연히 한나는 펜션 프론트에 앉아 있었던 소녀를 떠올렸다. 증언은 오해를 낳았지만 그것은 또한 정당한 추측이었을 터, 한나는 그 여자애도 경찰도 원망할 자격이 못 되었다. 대체 이 일을 어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범일 가능성이 있는 신원미상의 여자? 날이 밝으면 섬부터 벗어나는 게 급선무일 거였다.
“무슨 사고를 쳤길래? 널 경찰이 왜 보자는데?”
“죽을래? 좀 닥쳐.”
탈수까지 마쳐진 그대로 캄캄한 세탁기 속에 구겨져 있을 등산복 외투. 거기 묻어 있던 그 피는 그럼 여의사의 애인이 뿜어낸 피라는 얘기? 여자는 이미 독살된 남자를 난도질한다. 분이 덜 풀린 것이다. 그러다 여자의 몸 어딘가에 피가 튀었고 그게 다시 한나의 등산복 외투 왼편 가슴께로 옮겨 묻었다는 거? 한나의 머릿속에서는 끔찍한 장면들이 신속하게 나름대로 재구성 되고 있었다. 인사불성이었을 나를 부축해 방으로 인도해줄 때 묻었던 것일까? …혹시 애인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상처 입어 나게 된 여의사의 피가 아닐까? 명탐정 한나는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신이 내려다본 사실은 이러했다. 그 피는 피살된 남자의 피가 맞았다. 여자가 수면제와 독약을 몰래 타놓은 맥주를 마시고 남자는 이미 사흘 전에 숨져 있었다. 여자는 애인의 주검을 향해 잠시 바람이나 좀 쏘여야겠다고 웅얼거린 뒤 펜션 밖으로 나가 부유하다가 뱀사골 쪽 한적한 길에 만취해 쭈그려 앉아 있는 한나를 발견하였다. 여자는 한나를 도와주었다. 다시 302호실로 돌아온 여자는 부패가 진행 중인 애인 옆에 하루 가까이를 더 누워 있었다. 여자는 자기 몸에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기어다니길래 욕실로 들어갔다. 우연찮게 세면기 아래에는 파란 락스통이 있었다. 쥐고 있던 비누를 내던진 여자는 발가벗고 락스로 온몸 구석구석을 씻어댔다. 벌레들이 활동을 멈춘 것 같았다. 트렁크에서 새옷을 꺼내 갈아입은 여자가 방을 나서려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하다고 선생님은 왜 그렇게 내 맘을 몰라 주냐고 침대 위 애인의 시체가 외쳤다. 여자는 차분하게 애인의 심장에 칼을 박아 깊이 눌러주었다. 애인은 이제야 좀 편해졌다고 말하였다. 여자는 애인에게 마지막 키스를 해주었다. 그때 그녀의 오른편 가슴과 어깨 사이로 그의 곪아가는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여자의 검은 원피스는 검붉은 피를 감춰주었고 여자의 감각은 지옥의 불길도 뜨거워하지 않을 만큼 시들어 있었다. 한나는 복도에 서서 102호실의 문을 닫았다. 그것보다 조금 이르게 302호실에서 나온 여자가 층계를 다 내려와 한나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산행과는 거리가 먼 여자의 차림새가 한나는 의아했다. 여자가 한나 앞에서 주춤하더니 멈춰 섰다. 유별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잊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어두운 구슬이 박힌 것 같은 눈동자.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정적이 있었다. 서로에게 지금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그런 정적이. 한나는 자기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의대 여교수는 한나를 알아봤다. 어제 자기가 숙박계에 자기 이름을 대신 써주고 숙박비를 대신 지불해주고 102호실 침대까지 부축해 곱게 눕혔던 바로 그 여자였으니까. 한나는 베개 위에 바르게 놓여진 제 얼굴을 스르륵 왼편으로 떨궈 둥근 탁자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멍하니 보았더랬다. 한나는 소리 없이 우는 눈으로 무슨 말인가를 내뱉으려는 것도 같았지만 결국엔 침묵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한나는 잠들어 있었고 여자는 102호실을 나갔던 것이다. 여자가 꿈틀, 움직였다. 한나를 스쳐지나갔다. 머릿결에는 물기가 배어 있었다. 몸 전체에서 지독한 락스 냄새가 났다. 한나는 메고 있던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출입구 쪽 역광에 눈이 부셨다. 한나는 현기증이 일어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주저앉지 않으려 애썼다. 주저앉지 않았다. 여자가 열고 나간 미닫이 유리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등산복 외투에는 피가 묻어 있었지만 한나는 그걸 인지하지 못했다. 두 여자는 영원히 헤어지기까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자, 여기서 신에게 질문이 하나 있다. 여자는 왜 한나를 보살펴주었는가? 신이 대답한다. 여자는 한나가 자신처럼 극심한 고통의 벽 앞에 홀로 서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한나를 자기의 분신으로 착각했나? 아님 그녀가 한나의 분신이었나? 아무리 신일지라도 추측을 해야만 하는 망신스러운 경우가 가끔씩 있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짐승에 한해서이다.
좁은 창으로 달빛이 번지고 있었다. 어둠을 가물가물 견디고 있는 촛불보다 그 은은한 달빛이 한나는 한결 의지가 되었다. 촛불과 달빛, 한나는 거기에 섞여 어른거리는 은석의 얼굴이 믿기지 않았다. 그 시절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그 얼굴이 정말 이 시간 이 공간 이 인연 앞에서 점멸하고 있는 저 얼굴인지가 믿기지 않았다. 한나를 매혹시켰던 은석의 이미지는 해박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뒤 슬쩍 흘리는 외롭고 신랄한 미소였다. 진실과 거짓이 중요하지 않은 미소. 그냥 그대로의 느낌과 색깔이 전부인 미소. 한나는 자기가 그 이미지에 지배당하면서 청춘의 그릇들 중 가장 예쁘고 깨끗한 것들만 골라서 모조리 깨뜨려먹었다고 믿었다. 실제의 카프카는 우리가 당연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온통 내성적인 감정으로만 염색체까지 염색된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노동자 착취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옹호하는 글들에 열광했으며 생 시몽과 크로포트킨을 연구했다. 김나지움에 다닐 적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모임에도 가담했다. 게다가 카프카는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갈망했던 시온주의자였다. 그러한 그가 우울증의 황제 K로 등극한 것은 스페인독감을 앓아 뇌가 쇠약해져서도 나치수용소에서 죽은 누이들이 자꾸 꿈에 나타나서도 아니었다. 꼬마 카프카는 한밤 중 아버지에게 물을 달라고 칭얼댔다. 아버지는 카프카를 속옷 바람으로 발코니에 내쫓고는 문을 잠가버렸다. 이 체험이 카프카를 평생 괴롭히는 끔찍한 이미지로 자리 잡아 불쑥불쑥 상징으로까지 폭발했는데 그게 바로 카프카 문학이다. 오죽하면 「선고」에서 아버지가 느닷없이 아들에게 너를 익사형에 처하노라고 하니까 아들이 곧장 집 밖으로 나가 다리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강에 빠져죽는 장면이 나오겠는가. 카프카의 어둠은 체험이 아니라 이미지에 시달린 결과라는 것이 재야 카프카 학자 정한나 선생의 통찰이었다.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대단한 거구였다. 프란츠 카프카는 수영장 탈의실에서 댐처럼 버티고 선 아버지의 나신(裸身)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에 비해 깡마르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을 혐오하는 카프카의 고질병은 아버지가 가하는 억압이 아니라 그 억압의 나무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미지, 바로 대홍수처럼 완전히 쓸어버리는 심판의 이미지에서 기인하였던 것이다. 진실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진실은 우리가 이미지라고 부르는 진실인 것이다. 촛불과 달빛, 한나는 거기에 물들어 기이해진 은석의 얼굴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나가 원하는 것은 저 얼굴이 세상 속에서 속히 삭제되는 것뿐이었다. 저 이미지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웃고 떠들어대는 것을 한나의 고통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나에게는 그 이미지의 만행을 감당할 만한 힘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아, 용서라는 것은 그가 저지른 죄를 용서하는 게 아니었구나. 용서라는 것은 그가 계속해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이미지를 용서하는 것이로구나. 한나를 미움에 관해 도통하게 만든 대가로 은석은 곧 죽어줘야 했다. 아까 은석이 소변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을 때 한나의 청바지 주머니 속에는 더 이상 독약이 없었다. 한나는 염세에 찌든 소설로 아버지를 원망이나 하다가 폐가 까맣게 타서 죽은 카프카와는 적잖이 달라야 했다. 적어도 살인자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것이다. 한나는 위대한 카프카를 경멸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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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말이야.”
“엉?”
“사람 빤히 쳐다보면서 딴 생각은.”
“어. 뭐?”
“치정살인 말이야. 낮에 뉴스에 나왔던.”
“치정살인?”
“그럼 그게 치정이지 뭐야?”
“그게 뭐?”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한나 너 정말 뭐 있냐? 정말 뭔데?”
“웃기지 마. 신경 꺼. 네 꼬라지나 신경 쓰셔.”
“호시노 오사무라고 내 친구야. 최면술사지. 걔한테서 들은 얘기거든?”
한 아가씨가 있었다. 유명 화장품 회사의 전속모델이니 미모야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오로지 자기만 느끼는 어떤 냄새에 시달리고 있었다. 형용하기 어려운 악취가 언제 어디서나 진동해 두통이 그치질 않는다는 것이다. 호시노 오사무는 심사숙고 끝에 연령퇴행을 유도하는 최면을 걸었다.
“이 아가씨가 털어놓기를 어려서 숨박꼭질을 하다가 더러운 재래식 화장실에 숨었었다는 거야. 숨박꼭질에서 이길려고 그곳에서 한참을 버텼는데 냄새 때문에 머리가 너무 아팠었다는 거지.”
호시노 오사무는 이 사실을 토대로 암시를 부여해 치료를 시도했지만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사실은 사실이 맞는 것일까? 호시노 오사무는 뭔가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석연치가 않았던 거지. 환자들이 최면 중에도 연막을 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결국 더 깊이 들어갔지.”
호시노 오사무는 전생퇴행 최면을 걸었다.
“전생에서 사랑하는 남자한테 배신을 당하자 그 남자를 독살했다는 거야.”
“…”
여자는 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의 시신을 집안에 간직해두었고 부패가 진행되자 대단한 악취가 코를 찔렀던 것이다.
“그래서 현생에서 어디를 가나 이 아가씨는 그 냄새에 늘 시달리게 된 거야. 전생에서 자기가 죽인 애인의 시체가 썩는 냄새.”
“…”
“재밌지?”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네 일본인 퇴마사 친구가 어떻게 했는데?”
“아. 두 가지의 해결방법이 있었대. 하나는 최면으로 전생을 바꾸어버리는 것. 즉 남자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혹은 독살에 성공은 했지만 남자의 시신을 곧바로 화장해버렸다는 식으로. 이렇게 되면 증상의 원인이 제거됐으므로 여자는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거지. 다른 하나는 전생은 그대로 두고 현생과 전생을 완전히 구분지어버리는 것. 전생은 전생이고 현생은 현생이라는 점을 최면으로 강하게 주입시키는 거지.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치료가 이루어지는 거야. 호시노 오사무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했대. 전생은 전생이요 이승은 이승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그 아가씨, 치료가 됐지. 재밌지? 치정이란 다 그렇지. 어리석고 한심한 거지.”
“넌 뉴스에 나왔던 그 여자가 웃기냐? 재밌어?”
“응. 웃겨. 재밌어.”
“잘 났다. 그래서 결혼식 앞두고 딴 여자랑 바람이 나서 도망쳤냐?”
한나가 눈을 떴을 때 양초는 바닥까지 흉하게 녹아내려 있었다. 여전히 밤이었다. 은석이 창가에 서 있었다. 한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길고 깊게 졸았던 것이다. 희미한 어둠 속의 양철 주전자는 주둥이의 방향이 그대로였다. 은석이 그것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왜냐하면 한나가 물에 탄 독극물은 황소가 마셔도 즉사하는 위력을 지닌 거였으니까. 한나는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방금까지 자기가 깜박 잠들었던 동안 은석이 조갈이 났었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하니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한나는 다시금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죽이는 거다. 죽여버리는 거다.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버리는 거다. 은석은 달빛에 젖은 손가락을 입에 갖다댔다. 영우의 버릇을 은석이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은석의 버릇을 영우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을 왜곡하고 착종시키고 망각하며 상처를 지우려 했던 가련한 무의식을 한나는 문득 깨우치고 있었다. 은석은 한나의 기척에도 한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창 밖에서 짐작도 안 가는 어느 짐승의 울음이 들렸다. 이 좁은 섬 안에 대체 무슨 짐승이 있어서 우는 것일까? 하긴 모든 어둠 속에는 짐승이 있다. 슬픈 것들이 있다. 한나와 은석은 이렇게 쓸쓸한 밤이면 섹스를 했더랬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완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두 육신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웠다. 우리의 사랑은 전생의 것이 아니라 현생의 것이다. 우리의 치정 또한 그러하다. 여의사는 죽어 내생에 그 치정으로 인해 고통 받을까?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어 고통받을까?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되어 많이 아플까? 한나는 어둠과 달빛에 절반씩 몸을 주고 있는 은석을 보았다. 우리는? 전생에 한나는 은석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은석은 한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학덕과 계행이 뛰어난 승려 조신은 서라벌 세규사에 속해 있는 논밭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연히 태수의 딸을 본 조신은 그녀의 미색에 매혹되어 사모의 정을 가누지 못한다. 조신은 낙산사 관세음보살에게 빌고 또 빌었다. 부디 태수의 딸과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는 한시도 그녀를 잊을 수가 없나이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후 다른 이에게 시집을 가버렸다. 애통한 조신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관세음보살 앞에서 날이 저물도록 울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수의 딸이 법당 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저는 일찍부터 스님을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억지로 다른 사내와 혼례를 치룬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죽어서라도 스님과 한 무덤에 묻히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것이니 거두어주세요. 조신은 기뻐 어쩔줄 몰랐고 결국 그녀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십 년을 숨어 살아간다. 그들은 다섯 자식을 두었으나 찢어지게 가난하여 열다섯 살 큰아들은 굶어죽고 열 살 된 딸아이가 구걸한 음식으로 온 식구가 연명하지만 그 딸마저 마을의 개에게 심하게 물려 자리에 눕는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음에도 천지에 고통 아닌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울었다. 부인이 문득 울음을 거두며 조신에게 말했다. 예쁜 얼굴 고운 웃음은 풀잎의 이슬과 같고 굳은 맹세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와 같습니다. 당신에겐 내가 짐이 되고 나 또한 당신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각자 아이를 둘씩 나눠 데리고 헤어지기로 하였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세요. 아내의 이 말을 듣고 잡았던 손을 놓으며 돌아서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젊은 날의 조신이 대법당 관세음보살 앞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은석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한나는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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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나는 내가 어른이 되면 해외를 떠돌다가 죽을 거라고 믿었어. 한나라는 이름이 서양여자애 이름이잖아. 그래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나? …문스트럭(Moonstruck)이라는 게 달빛에 미쳤다는 뜻이거든? 그런 제목의 아주 짧은 만화가 있어. 작은 별에 혼자 살아가던 남자가 있었어. 너무 고독했지. 그 남자가 어느 날 망원경으로 우연히 다른 작은 별을 보았는데, ”
“외국을 떠돌다 죽는 건 나일 것 같은데?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아무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인생이란 게 과자보다 못해. 참 사소한 걸로도 부서져. 내가 예전에 늘 그랬지? 선을 넘는 것에 달려 있어. 모든 게. 극기도 사고를 치는 것도. 변하는 게 아니야. 강을 건너는 거지. 강을 건너면 강 건너에 있던 나는 아주 없는 거야. 너무 쉽지. 너무 쉬운데 대가가 커. 고해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그건 신이나 신부에게 하는 게 아닐 거야. 고해라는 건 죄인이 죄인에게 하는 걸 거야.”
한나는 은석과 사 년여 전의 그 느낌으로 대화하고 있다는 것에 소름이 돋았다.
“부서진다고?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했다는 건 알아? 나 이젠 아무도 못 믿어. 아무도. 그게 제일 힘들어. 나 이젠 사랑도 못해. 그래서 날 사랑해보려고 그렇게 노력하던 사람도 떠났고, 뭐, 지금 다시 돌아왔다지만 여전히 난 불가능해. 사랑이 중요한 게 아니야. 인간이라는 거 자체를 못 견디겠어. 못 믿겠어. 아무에게도 의지를 못하겠다고. 다 너 때문에 이렇게 됐어. 너는 내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상상도 못해. 아니. 상상해선 안 돼.”
“알아. 넌 나 때문에 그렇게 됐어.”
“…”
“…”
“그걸 알면서 왜 찾아왔어?”
은석은 달빛의 영역에서 사라졌다. 한나는 어둠 속에서 무릎을 꿇은 은석을 보았다. 은석은 어둠 때문에 보이는 한나를 보았다. 둘은 똑같은 어둠 속에 있었다. 은석이 양철주전자의 손잡이을 잡고 들어올려 물을 마시려 하였다. 한나가 양철주전자를 빼앗았다.
“…줘”
“마시지 마.”
“나 미안하다는 말 같은 거 안해. 그럴려고 온 거 아니야. 몰랐어. 그냥 몰랐던 거야.”
“뭘?”
“다. 전부 다. 이럴 줄 몰랐어. 내가 이런 사람인 줄도 몰랐어.”
은석의 눈이 울고 있었다. 표정은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의 눈물만 강을 건너고 있었다.
“…진심이야. 마시고 싶어. 다시는 만나지 않는 거야. 내가 그렇게 할게.”
한나는 양철주전자를 들고 일어나 쪽방 문을 열어젖혀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나는 그 양철주전자를 어떤 짐승이 울고 있는 지옥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쭈그리고 앉았다. 그것은 한나의 오랜 습관이었나 보다. 고통의 벽 앞에서 쭈그리고 앉는 것. 한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명심해. 용서하는 게 아니야. 그런 건 없어. 그냥 보내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목놓아 울었다.
4
해가 뜨자 한나와 은석은 한 배를 타고 고명도를 빠져나와 강화도에 내렸다. 배 위에서의 시간은 서로에게 어색하기가 그지없었다. 한나는 등 뒤의 섬을 뒤돌아보기가 싫었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한나는 은석과 따로 따로 고속버스를 이용할 요량이었지만 난데없이 은석이 대기하고 있던 렌트카의 뒷문을 열었다. 뭐야? 일단 타. 손해 날 것 없잖아. 거부하려고 했지만 어쩌면 그 편이 가장 어색한 짓이 될까봐 한나는 머뭇머뭇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운전을 하고 있는 은석의 뒤통수를 보면서 한나는 영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전화가 없어서 많이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공중전화로 이야기를 나눠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은석과 한나는 두 시간쯤 뒤 강남의 한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다.
“뭐하자는 거지?”
“여기 내가 묵고 있어.”
“그래서?”
“잠시만 어디 가서 음료수라도 마시고 와. 오 분만.”
“왜 그래야 되는데?”
“마지막 소원이라 여기고 제발 그냥 시키는대로 해줘. 부탁이야.”
한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마지막 소원이라는데 야박하게 구는 것 같아 눈 딱 감고 그래주기로 하였다. 한나가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서는데 은석이 한나를 불렀다.
“왜? 어디든 다녀오라며? 뭐가 또 있어?”
“너 여전하더라.”
“뭐가?”
은석은 여태 핸들을 붙잡은 채 한나 쪽이 아니라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사람 얼굴은 다 비대칭이야. 얼굴이 대칭이면 그게 어디 사람이야? 괴물이지.”
“…”
한나는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그렇지 않아도 들르고 싶었던 화장실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발걸음을 프론트로 옮겼다. 거기서 핸드폰 배터리의 충전을 맡길 수 있냐고 물어볼 셈이었다. 그때 갑자기 한 중년의 사내가 나타나 한나의 팔목을 잡아끌고는 비상구 쪽으로 데리고 갔다. 한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그가 형사임을 밝히기 전부터 딱 보는 순간 그가 형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냐고? 그는 정말 형사처럼 생겨먹었던 것이다. 우선 한나는 자기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침착해질 것을 스스로에게 강력히 주문했다. 그리고 형사에게 당당하고도 차근차근하게 모든 사정을 설명할 작정이었다. 어제와 오늘의 알리바이는 은석이 증명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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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나 씨 맞죠?”
“저기요, 그게요,”
“예전에 오은석 애인이었죠?”
“네?”
“오은석이랑 같이 있는 거요? 오은석이 여기 숙박하고 있던데.”
“왜죠? 은석이를 어떻게 알아요?”
“경찰입니다.”
“알아요.”
“안다고요?”
“은석이는 왜요?”
“몰라서 묻는 거 맞아요?”
“내 참.”
“그 친구 사람 죽였어.”
“네?”
“변심했다고 여잘 죽였어. 일본에서.”
한나는 머릿속이 온통 새하얘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는 불현듯 또 다른 자기가 되어 있었다. 한나는 은석이 지금 어디에 있다는 사실 대신 오 분 뒤 은석이 로비에 오기로 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능숙하고 대담한 거짓말이었다. 한나는 화장실에 가는 척 하면서 호텔 뒷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가슴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한나가 은석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단 하나였다. 어서 떠나라는 그 말뿐이었다. 정말 다른 어떠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가 당도했을 때 은석의 렌트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은석의 가방도 없었다. 한나는 계속해서 그곳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나는 운전석에 놓여 있는 작은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것을 열자 거기에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예전에 은석과 한나가 함께 골랐던 결혼반지였다. 저기서 형사가 화가 난 얼굴로 마구 손짓을 해대는 게 보였다. 한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로 가버렸구나. 그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는 걸 한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한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형사의 비대칭 얼굴 위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이 떠 있었다. 한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다음날 아침 한나는 아파트 거실 소파 위에서 잔뜩 웅크린 채 눈을 떴다. 커다랗고 딱딱한 벌레로 변해 있지는 않았다. 혼자 살고 있는 집을 고작 이틀 비웠을 뿐인데 마치 십 년쯤 광야를 헤매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핸드폰의 베터리를 새것으로 갈아끼우고 전원을 켜자 음성메시지 여덟 개가 연이어 수신됐다. 전부 영우가 보낸 것들이었다. 영우는 걱정하고 있었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한나는 영우가 몹시 보고 싶었지만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영우에게 해줄 수 있는, 해줘야 하는 말들을 한나는 천천히 깨닫는 중이었다. TV를 틀자 뉴스전문채널은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의대 신경외과 여교수가 신촌의 한 관광호텔 객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애인을 죽일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독극물을 마셨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내일 기온이 예년과 비슷하겠다는 일기예보만큼도 재미가 없고 무의미한 치정이었다. 그녀는 후회해서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환멸을 견디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나는 그녀가 그래서 그랬다는 걸 알 수 있는 이 우주의 단 한 사람이었다. 어두운 구슬이 박힌 것 같던 그녀의 눈동자가 한나의 마음에 있었다. 형사는 은석과 관련하여 조만간 연락할 테니 그때 경찰서로 출두해 조사를 받으라고 했었다. 형사는 지리산 펜션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또다른, 뭔가 앞뒤가 잘 안 맞는 용의자가 한나라는 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한나는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았다. 강을 건너자 강을 건너기 이전의 한나는 소멸했다. 감정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의 역사가 변한 거였다. 한나는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린 후 베란다에 나가 화초들에게 물을 주었다. 넓은 창을 스미는 햇살이 좋았다. 한나는 세탁기 속에서 탈수가 끝난 채 엉켜 있는 옷가지들을 꺼내 건조대에 일일이 펴서 널었다. 등산복 외투에 묻어 있던 핏자국은 말끔이 지워져 있었다. 그녀가 지옥 같은 혼란을 무릅쓰고도 사랑했던 그의 피. 얼마나 많이 사랑하다가 무너지면 죽일 수 있는 것일까? 그 피는 정말 여기 이 자리에 묻어 있기나 했었던 것일까? 한나는 분말가루처럼 내리는 햇살 아래 쭈그리고 앉았다. 한나는 자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자기와 똑같은 한나를 마주보았다. 얼굴이 조금 비대칭인 그녀는 한나를 대신하여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그런 한나였다. 한나는 한나에게 은석에게 해주려다가 마저 못했던 이야기를 온전히 들려주었다. 아주 작은 별의 유일한 인간인 남자가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망원경으로 또다른 아주 작은 별 하나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녀 역시 그 별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남자는 고독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장대높이뛰기를 하면서 그녀의 별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는 자기의 아주 작은 별을 버리고 그녀의 아주 작은 별로 그녀를 찾아간 것이다.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단호히 하찮게 여기고서.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멀리서는 아름다운 여인처럼 보이는 돌무더기였기 때문이다. 한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한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한나는 낭떨어지 끝에 맨발로 서 있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한나는 그가 그의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다른 어느 누가 아니라 오직 한나를 찾아왔었다는 사실만을 남은 삶 동안 두고두고 기억하기로 하였다. 한나의 흉터가 한나에게 잠시 다녀갔던 것이다. 한나가 고통의 벽에 기대어 쉬고 있는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한나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작가세계』 2008년 가을호, 통권 78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