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은 어느 날 문득 아픔을 느끼는 감각, 통각을 잃어버렸다. 당신 몸에서 통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갑작스런 기억상실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날, 당신은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에 낮잠에서 깨어났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어둠이 반쯤 들어찬 방에서 눈을 떴을 때, 당신은 주변의 모든 게 터무니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에 낮잠에서 깨어나 보니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 그때 느꼈던 까닭모를 설움과 두려움이 당신 속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당신은 사십대를 넘어섰다. 그리고 사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당신은 여전히 독신이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가지들의 스산한 움직임도 그대로였다. 침실의 벽지가 푸른색 계열이어서, 간혹 수족관이나 풀장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곤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은 한동안 침대에 누운 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윽고 당신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다가, 휴대폰이 거실 탁자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자 불현듯 전화를 꼭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막 침실 문턱을 넘어섰을 때, 거실 한 켠에 놓여 있던 오디오 스피커의 각진 모서리에 당신의 오른쪽 무릎이 강하게 부딪쳤다.
순간, 당신 입에서 반사적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스로 머쓱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무릎에서 시작하여 온몸으로 퍼져나가리라 예상했는데, 별 감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픔 대신에, 마치 무릎 부위에서 화한 느낌이 잠시 들었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당신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무릎과 스피커 모서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전화벨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휴대폰의 폴더를 열어보니, 발신자의 번호 정보가 없다고 되어 있었다. 당신은 거실 소파 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 몸에서 통각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무릎을 생각했던 것만큼 세게 부딪친 건 아닌 모양이라고 여겼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쉽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 열린 베란다 창문을 통해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어린 시절 가족 중의 누군가가 싸리비로 마당을 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계속하여 당신 속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당신은 그 소리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신은 빗소리가 창살처럼 당신을 가두고 있다고 느끼며 잠시 편안함을 경험했다. 당신과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당신은 비오는 밤에 강가에 앉아 어둠 속에서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2
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깨어난 당신은, 침대에서 내려서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부딪쳤던 무릎의 살갗이 시퍼렇게 변색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그 흉측한 타박상을 내려다보며 뒤늦게 진저리를 쳤다. 마치 무릎이 스피커에 닿아 물질의 일부로 변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당신은 손가락 끝으로 멍든 부분을 꾹꾹 눌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통증도 감지되지 않았고, 대신 약간의 이물감이 손끝에 묻어났다. 당신은 무릎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약간 근육이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을 뿐, 통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썩은 감자와 같은 흔적이 몸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제야 문득 당신은 당신의 몸이 통각을 상실했음을 깨달았다.
그날, 당신은 집에서, 거리에서, 사무실에서 수차례 당신 몸에 자극과 충격을 가해 보았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시도해보아도, 매번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심지어 송곳으로 팔을 찔러보아도, 뭔가 깃털처럼 부드러운 것이 부드럽게 살갗을 스치는 듯한 감각이 일어났다 금방 스러지는 것이었다. 때로는 박하 향 같은 것이 코끝에 감돌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은 과도한 실험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나중에 통증의 감각이 되살아날 때, 그 상처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질러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다만, 앞으로 당신이 통증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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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최수철
소설가,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맹점」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창작집으로 『내 정신의 그믐』, 『모든 신포도 밑에는 여우가 있다』, 『몽타주』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 『벽화 그리는 남자』, 『불멸과 소멸』, 『매미』, 『페스트』 등이 있다. 장편동화 『물음표가 느낌표에게』, 여행기 『사막에 묻힌 태양』 등을 펴내기도 했다. 윤동주문학상(1988년)과 이상문학상(1993년)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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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하튼 당신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심각한 고민에 빠진 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당장 어찌할 도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머릿속의 충격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당신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으로 여기고서, 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자 착잡함만큼이나 비장감이 찾아들었다. 물론 당신은 장차 통증을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게 될 삶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통증은 번거로운 것이었다. 애초에 통증이란 당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통증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당신은 통각을 상실하여 오히려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세속에서 벗어났다는 오연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전혀 개의치 않을 수 있을 것 같기까지 하였다. 이 기회에 새로운 삶을 사는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당신은 며칠 동안 편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다.
4
그러나 당신이 암암리에 우려했던 대로 마음의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육체적으로 진공상태에 빠진 듯 무력감을 느꼈다. 당신은 지상에 발을 붙인 채, 우주의 무중력 공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곧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몸의 통증이라는 덫에서 벗어나 홀가분해 하던 당신의 마음과 정신은, 마치 모래 수렁에 빠진 듯 점차 당신의 무기력한 살 속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당신은 마비된 살, 혹은 죽은 살 속에 파묻혀 질식당하기 직전의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요컨대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진 게 아니었다.
그로 인해, 그리 오래지 않아, 당신에게는 통증 없는 상태가 곧 통증이 가장 극심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당신은 세속에서 벗어났지만, 또 다른 종류의 세속으로 들어섰다. 일상의 진부함을 벗어났지만, 또 다른 진부함의 세계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당신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신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후로, 점차 당신의 몸과 마음은 깊이 잠들지 못하게 되었다. 어슴푸레 잠이 들면, 어김없이 어수선한 꿈이 당신을 뒤흔들었다. 꿈속에서 당신은 매번 막 닫히려는 문과 맞닥뜨렸다. 당신은 그 문을 다시 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지옥문이었다. 때로 공터에서 들개들에게 둘러싸이는 꿈을 꾸기도 했다. 들개들은 이빨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며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당신을 위협했다. 당신은 통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기에 그 개들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그 개들 사이에서 내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전화벨의 환청이 당신의 악몽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전화벨 소리는,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은 자의 뼈와 살로 만든 괴물에게 생명을 부여한 번개만큼이나 저주스런 것이었다.
5
어쩔 수 없이 당신은 타인의 조언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이 무통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사람들은 직업이나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하나같이 의사이자 약사,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이자 철학자로 행세했다. 게다가 당신은 항상 남의 증상인 양 시치미를 떼고 물어보았지만, 그것이 바로 당신의 증상임을 간파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무통증, 즉 통각의 상실증은 피부와 뇌 사이의 신경섬유에 이상이 생겨서 일어나는데, 이 경우에 피부의 감각이 모두, 혹은 일부가 없어지는 것이며, 그 증상은 주로 척수의 질환에서 비롯되지만, 히스테리나 자기암시에 의해서도 유발되며, 당신의 경우는 분명 후자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당신은 스트레스로 인해 몸의 감각이 교란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심지어 당신의 어린 시절을 들먹이는 자들도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당신은 병원 출입이 잦았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을 위해 약국에서 붕대와 반창고, 소독약, 근육통과 상처에 바르는 연고를 끊임없이 구입해야 했다. 당신 몸에 온갖 상처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에 따르면, 그 또한 당신이 부주의하거나 운동신경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천성적으로 몸과 마음이 자폐증과 소심증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은 대부분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내세웠지만, 놀랍게도 예외 없이 인신공격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무통증인 사람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남들이 몰래 빼내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조만간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당신은 그동안 당신이 이 정도로 인심을 잃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에 망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 당신은 마음의 병이 깊어서 조만간 정신병원에 구금되어 구속복을 입은 채로 살아가야 마땅한 인물이었다. 당신 몸의 마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얻은 그러한 정보들은, 당연히 오히려 당신의 마비를 가속화했다. 타인들의 말은 차츰 물처럼 쏟아져 들어와 당신의 목젖까지 차올랐으며, 당장이라도 당신의 생명을 위협할 기세에 이르렀다.
결국, 당신은 통증을 되살리지 않으면 망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그런 생각이 들자, 당신은 통증을 간절히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당신 몸을 떠난 통증을 되찾아야만 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통증 그 자체였다. 누구든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통증을 싫어하여 피하기 마련인데, 이제 당신은 통증을 찾아 나서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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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며칠 후, 당신은 업무차 들른 한 오피스텔 건물에서 승강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승강기가 도중에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막 다시 닫히려 할 때, 한 여인이 문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섰다.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몸이 승강기 문에 끼였다가 놓여났는데, 당황하거나 아픈 기색을 보이는 대신, 민망해 하는 표정을 잠깐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약간 멍한 얼굴로, 방금 전에 자신을 공격했던 승강기 문을 응시했다. 당신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옆얼굴을 볼 수 있되, 그녀가 당신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만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사람이 고통을 저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느닷없는 고통을 겪고도 마치 미리 준비한 듯한 의례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구나.
이윽고 승강기가 지하에 멈추고, 그녀가 앞서 걸어 나갔다. 그때 당신은 실로 기이한 풍경을 보았다. 승강기 안에서 가까이 서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그녀는 반투명한 흰색 원피스 안에 검은색 팬티와 브래지어를 입고 있었다. 자연히 속옷이 겉으로 비치면서 몸매가 확연히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선정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로테스크한 모습이었다. 마치 검은 뼈대 위에 하늘거리는 수의가 걸쳐져 있는 듯한 형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몸이 엑스레이에 투사된 채 밖으로 나와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였다. 지하 주차장의 어두침침한 조명 속에서, 해골과 수의의 그 기괴한 움직임은 당신의 눈길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당신은 당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야 당신은 왜 당신이 그녀에게 이토록 이끌리는지 알았다. 그녀가 당신에게 고통을 줄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예감한 것이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당신을 고통스럽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그녀만이 당신에게 고통을 일깨울 수 있는 존재였다. 그 여자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동안, 당신은 장차 느끼게 될 통증에 대한 예감으로, 입안에 침이 도는 것을 느꼈다. 당신은 장차 닥쳐올 고통에 대해서도 입맛을 다실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곧 당신은 그것이 사랑의 감정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당신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식으로도 한 여자에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잇따랐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건네 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서, 당신은 서둘러 당신의 차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하게 차를 몰아 그녀의 뒤를 쫓았다. 주차료를 정산하고 모퉁이를 돌았는데, 그녀의 푸른 차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당신은 심장에서 일종의 파문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미미한 것이기는 했지만, 당신은 그것을 심장의 통증이라고 간주했다. 그녀를 시야에서 놓치면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당신의 심장을 자극한 것이었다. 그 기이한 통증의 감각은 한편으로는 감미로웠다. 지금은 그 자극이 물 위의 파문 같은 것에 불과하지만, 조만간 당신 속에서 제대로 된 통증으로 발전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당신은 묘한 기쁨을 느끼며 가속기를 밟은 발에 힘을 가했다. 곧 당신은 그녀의 푸른색 자동차 꽁무니가 주차장을 막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따라붙었다.
차도로 나서자마자, 당신은 그녀의 차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급정거해야 했다. 그 바람에 미처 안전띠를 매지 못한 당신은 운전대에 가슴을 강하게 부딪쳤다. 물론 통증은 없었고, 잠깐 가슴이 잔뜩 조여들었다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느낌이 감미롭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당신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선글라스를 낀 한 남자가 그녀의 자동차 조수석 문을 열고서 막 차에 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 사내는 빠르게 달려오다가 갑자기 멈춰 서는 당신 차를 보고서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는 대신, 잠시 당신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반응에 당신은 다시금 가슴이 옥죄어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뒤이어 화끈한 열기가 가슴 속에서 일었다가 스러졌다. 당신은 그 열기가 바로 질투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당신은 그 난데없는 질투심도 이해할 수 없었고, 당신이 질투심을 느끼는 방식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입안에서 약간 매운맛이 혀를 쏘는 듯한 느낌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차가 다시 출발했고, 당신은 그 뒤를 따랐다. 십여 분간 지속된 자동차 미행은 다소 지루했다. 이윽고 그녀의 차가 길가에 멈춰 서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록 차간거리는 충분했지만, 당신은 멈출 수 없었다. 당신은 강한 자극과 통증을 원했다. 당신의 차가 그녀의 차를 추돌하는 순간, 거의 동시에 앞차의 조수석 문이 열리면서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밖으로 튕겨 나왔다.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사내는 얼굴에 비스듬하게 걸쳐진 선글라스를 황급히 고쳐 썼다. 그리고는 여전히 보도 위에 주저앉은 채 입을 반쯤 벌리고서 당신 쪽을 건너다보았다. 당신도 멍멍해진 머릿속을 추스르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윽고 사내가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당신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운전석 문을 열고 당신을 차 밖으로 끌어냈다. 사내의 완력은 대단했다. 그는 큰 손으로 당신의 멱살을 단단히 조였다가 뒤로 밀쳤다. 그리고는 당신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신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사내의 주먹이 당신에게 가하는 충격은 전혀 통증을 유발하지 않았다. 때문에 당신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내의 얼굴 또한 무표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분노가 치밀어 당신을 때리는 것도 아니었고, 구타의 쾌감이나 죄의식에 젖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격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신은 조금씩 고통의 기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당신은 점점 더 고통에 대한 갈급증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은 더 큰 고통을 원했다. 누구의 눈에든 실로 희극적으로 보일 광경이었다.
그러나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달려와 당신과 사내를 둘러쌌다. 당신의 입이 아닌 남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내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머뭇거리면서도 계속하여 주먹을 날렸다. 그때 사람들을 헤집고서 해골 차림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가 팔을 붙들자, 그제야 사내는 움직임을 멈췄다. 당신은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으나, 당신은 대꾸하지 않았다. 몇 분 후 당신이 몸을 일으켰을 때, 몸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당신은 그 무거운 느낌이 욱신거리는 통증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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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음 날, 당신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느꼈다. 상체와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는데, 짐작컨대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최소한 금이 간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마치 고장 난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이상한 소리도 들리고 동작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 통증은 없었고, 화가 나거나 굴욕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얼굴에 상처가 남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당신이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귀에 익지 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당신에게 어제 일을 상기시켰다. 당신은 그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당신 전화번호를 알았느냐고 묻자, 그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대꾸가 돌아왔다. 그러더니 곧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하고서, 자동차 앞 유리창에 붙여놓은 명함을 보았다고 털어놓았다. 이윽고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어제의 불상사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책임질 것이 있다면 기꺼이 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신으로서는 어제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라도 다시 그녀를 만나고 싶은 욕구가 당신의 무력한 몸 안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은 여자를 삼십 분가량 기다리게 했다. 그러나 당신이 회사 근처의 약속 장소에 들어섰을 때, 여자는 담담한 표정과 부드러운 몸짓으로 당신을 맞았다. 말하자면 기다림의 고통은 흔적도 없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지난번처럼 자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온몸을 단단히 조이고 있는 붉은색 원피스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폭행죄로 고소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이 쓰이나요?”
당신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그녀는 대답 대신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신이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들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진 게 없는데, 어떻게 경찰에 고발한다는 말인가요?”
그녀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고서, 당신이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 내가 당신의 자동차 번호를 적어두었다고 생각하는군요. 번호를 조회해서 당신들의 신원을 알아낼 것이라고 염려했던 거군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생각도 했어요.”
당신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헛짚었어요. 아니, 너무 멀리 앞서 나갔어요. 나는 자동차 번호를 기억하지 못했고, 알고 있었다 해도 그 일을 문제 삼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왜지요?”
“뭐라고요?”
“왜 문제 삼고 싶지 않았느냐고요.”
당신은 입술을 어색하게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건… 그날 일이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정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녀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당신을 응시하며 물었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 묻겠어요. 어제 왜 내 뒤를 따라왔나요?”
당신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남을 미행하는 것도 당신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가요?”
그 말은 당신을 약간 멍하게 만들었다. 당신도 자신이 왜 그녀를 따라갔는지 새삼스레 궁금해졌다.
그때 그녀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들고서 당신 쪽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는 그 볼펜으로 다짜고짜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당신의 손등을 힘껏 찔렀다. 그러나 당신 스스로도 놀랍게도, 전혀 아프지 않았던 건 물론이고,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당신의 반응을 보고서 그녀가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요. 당신도 피노키오 중의 하나군요.”
“피노키오라니요?”
당신의 반사적인 질문에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또한 무통증을 겪고 있다는 말이지요. 피노키오는 난롯가에 졸다가 자기 다리가 타는 줄도 몰랐지요. 무통증 환자라는 말 대신에, 피노키오라고 부르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제 당신이 첫눈에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걸 느끼고서, 나도 당신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어요. 처음부터 나는 당신이 나를 따라오는 걸 알고 있었지요. 당신 차가 내 차를 추돌했을 때, 내가 그 남자를 시켜서 당신을 폭행하게 한 거예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남자 말이에요. 그 남자는 내 부하직원 중의 하난데, 힘이 세기는 해도 평소에 폭력적인 성향은 전혀 없거든요. 당신이 일방적으로 얻어맞으면서 조금도 고통스러워하거나 굴욕스러워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옳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어요. 오늘 내가 찾아온 것도 고소 따위가 두려워서가 아니었어요. 내가 확인한 사실을 가지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였지요.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 거예요. 나도 피노키오거든요.”
그녀가 잠시 당신의 표정을 살피다가 말했다.
“그래요, 솔직히 털어놓지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당신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당신에게 깊이 이끌렸어요. 내가 폭행을 사주한 게 당신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당신은 그 누구와도 달랐어요. 아무리 무통증이 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맞는 순간에는 예전의 두려움이 습관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 당신은 마치 정말로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사람 같았어요. 그 모습은 뭐랄까, 상당히 지적이고, 글쎄요, 이렇게 말하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창조적이라고도 할 수 있었어요.”
“내가 특히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여서, 내게 연민을 느꼈다는 뜻인가요?”
“그보다는 내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연민과 당신에 대한 연민이 만났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거예요. 나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요, 나도 당신에게 끌린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가 뭘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자기 몸의 통증도 못 느끼는데, 남의 통증을 어떻게 감지해서, 함께 어울린다는 말인가요?”
“한쪽 감각을 잃으면 다른 쪽 감각이 발전하는 법이잖아요. 통각을 잃는 대신, 우리는 뭔가 다른 것,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뭔지 모를 뿐이지요. 우리가 서로에게 끌렸듯이, 이미 우리는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고 있잖아요. 내 주위에는 피노키오들이 많아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 처지가 그리 좋지 않아요. 정신적인 문제와 육체적인 문제가 서로 결부되어 생겨나는 신종 질병인 셈이지요. 게다가 증상이 아주 다양해요. 몸에 남은 상처를 느끼는 방식도 각기 달라요. 개중에 특정한 통증만 느끼는 사람들도 있어요. 일종의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대부분 예전처럼 정신적 스트레스에 심하게 시달리지 않는다는 점이이지요. 물론 정반대의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는 해요. 하지만 우리 중에는 우울증이나 자살 발생 빈도가 아주 낮아요.”
“그러다가 괴물이 되는 건 아닌가요? 피노키오도 나중에는 선하고 현명한 마음을 얻게 되는데 말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육체와 정신의 평안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나요? 평안한 마음이 선하고 현명한 마음보다 우선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피노키오의 나무로 된 마음을 얻는 게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피노키오가 인간이 되기보다, 모든 인간이 피노키오가 되는 게 낫다는 뜻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지요. 마음이 평안해지는 건 무기력해지는 것과는 다르니까요. 우리 피노키오들도 그 점을 경계하지요. 자칫하면 무감각한 상태에 깊이 빠져들어, 도피적인 성향이 강해지거나, 지나치게 야심적이고 냉혹한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매사에 수수방관하는 쪽으로 빠지는 수가 있거든요. 그러나 적어도 아직은 임상적으로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가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도 그런 위험을 서로 상기시키기 위해서지요. 우리는 특별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그런 만큼 이제 뭔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목표에도 눈을 돌려야지요. 당신도 내 사무실에 오면 그들을 만날 수 있어요.
당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곳에서는 통각을 예전처럼 되살리는 것도 가능한가요?”
“방금 내가 한 말도 당신 마음에 그다지 강한 통각을 유발하지 못한 모양이군요. 그래요, 아직은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그런데 왜 굳이 무통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녀의 말은 당신 귀에, 왜 감미로운 꿈에서 깨어나려 하나요? 라고 들렸다. 그러나 곧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물론 가능한 일이지요.”
“당신 주변에서 실제로 통각을 되찾은 사람들도 있나요?”
“그렇다니까요.”
“당신이 그들에게 통각을 돌려주었나요.”
“그건 당신이 직접 와서 보세요. 케사르의 말처럼, 와서 보고 이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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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당신은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저녁이 될 때까지, 당신은 내내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사무실은 평소보다 훨씬 좁고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사업은 번창하고 있었다. 한때 플래카드를 매달고, 입간판이나 세우던 작은 광고 업체에서, 이제는 출판사까지 거느리고 큼지막한 언론사와 줄이 닿아 있는 미디어 회사로까지 규모가 커졌으니, 꽤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사장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회사 구성원들이 존중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로 인화와 규율을 내세워 사내의 통제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 한가운데에서 거미줄 위의 거미처럼 자리를 잡았다. 그는 그 거미줄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그 민감함으로 부하 직원들을 존중하는 체하지만, 그러나 긴축재정과 이윤 창출의 명목으로 끊임없이 모두를 옥죄고 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사장은 자기 통증에만 예민하고 남의 통증에는 무심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사원들도 그 거미줄의 미세한 출렁거림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다. 심지어 서로 눈치를 보며 거미줄의 파동에 맞춰 리듬을 타고 춤을 춰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 사장으로부터 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선임 직원으로서의 대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한 일이었다. 당신은 어쩌면 그런 사람 밑에서 너무 오래 일을 하다 보니 무통의 상태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당신은 이 모든 것이 남들과 쉽게 화합하지 못하는 당신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이 장차 회사 내의 모든 사람들을 무통과 무감각으로 오염시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 거미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다 보면, 동료들의 춤을 망쳐버리고 거미줄도 끊어지게 만들 게 분명했다.
사무실에서 그와 거리낌 없이 한 몸이 되어 있는 것은 책상뿐이었다. 당신은 이미 십 년째 사용하고 있는 그 책상 앞에 앉아서, 퇴근 전까지 남은 시간을 사직서 쓰는 일로 보냈다. 당신은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당신은 일종의 장애인이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이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건 옳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당신은 사장의 거미줄 위에서 곧 당신의 장애를 들키고 말 것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사무실을 나온 당신은, 거리에서, 술집에서,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당신에게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를 그 어떤 특정한 통증을 찾는 데 몰두했다. 물론 당신은 자신의 몸에 가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 몸의 어떤 부위도 당신이 가하는 자극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 몸이라는 거미줄의 주인이 아니었다.
당신은 피로와 취기를 느끼며 침대 위에 누웠다. 이제는 피로와 취기도 예전과 달랐다. 피로와 취기가 심해질수록, 당신은 마치 당신 몸에 쥐가 나는 듯한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당신은 잠이 오기를 기다리며, 혹시라도 당신 머릿속에 심리적인 통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기억이 들어 있는지 곰곰이 돌아보았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치욕감을 되새기게 했을 법한 과거의 사건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애써 되살려 보아도 그저 덤덤한 기분이 들 뿐이었다. 심지어 항상 당신에게 아련함을 불러일으키던 첫사랑의 추억마저도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의 심장이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냉혈한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당신은 이제 눈물마저 말라붙어 울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이 자폐증 상태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잠이 드는 것 또한 자폐증의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9
다음 날, 당신은 그녀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건 아니지만, 무통의 몸으로 거리를 산책하던 중에, 당신의 발걸음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문 앞에 이르러 노크를 하려고 보니, 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문 위에는 <정다인 피노키오 네트워크>라고 쓰인 명패가 붙어 있었다. 당신은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눈에 그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머리에 헤드폰을 쓰고 창가 쪽에서 밖을 내다보며 가볍게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개인용 사무실이었지만, 꽤 넓은 편이었다. 그러나 책과 화분과 잡동사니뿐만 아니라 온갖 집기가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언뜻 발을 떼어놓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당신을 반갑게 맞이했다. 전날과 달리 청바지와 푸른색 티셔츠를 걸친 수수한 옷차림이었는데, 약간 들뜬 기색이었다.
“건물이 무척 크군요.”
그녀는 차를 끓이겠다며, 당신에게 책상 앞의 소파에 앉으라고 했다. 당신은 그녀가 찻잔을 꺼내고 물을 끓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당신은 그녀가 유난히 조심스레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당신은 무통증 사람들이 오히려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상처나 멍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집기들의 각진 모서리에는 어김없이 보호대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이 건물 안에는 주로 피노키오들이 모여 있다는 말인가요?”
당신은 당신의 말투에 본의 아니게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담겨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이 건물 맨 위 두 개 층에는 무통 전문 클리닉이 자리 잡고 있어요. 원장이 워낙 유능한 분이라 전국적으로 명망이 높지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비슷한 증상을 가진 사람들의 발길이 이리로 모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피노키오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뭐지요? 자해공갈단이나 서커스단 같은 것 빼고 말이지요.”
당신은 그녀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이 잠깐 어렸다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은 대개 당신 같은 반응을 보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무슨 위험한 돌연변인 건 아니에요. 그래요, 남들과 다소 다를 수 있어요. 무통 증상을 겪기 시작하면서, 전보다 더 뻔뻔스러워지고 낯이 두꺼워지고, 심지어 악랄해지고 교활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반대로 훨씬 총명해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심지어 선해지고 순결해질 수도 있는 거예요. 몸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면서 우리 자신도 달라질 수 있어요. 더 나아질 수도 있고 나빠질 수도 있고, 그건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요. 그렇게 전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싫든 좋든 선택된 자들이에요.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거예요. 그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인류는 지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과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지요.”
전기 포트에서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책상 끝에 걸터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이 말했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피노키오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뭘 할 수 있나요?”
“우리는 스펀지처럼 서로 부드럽게 맞닿을 수 있지요.”
“스펀지끼리 맞닿아서 뭘 느낄 수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통증이 넘쳐나는 저 고통과 폭력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나요?”
“그래도 그곳에서의 감각은 절실하잖아요?”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감각을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요. 통증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자극과 흥분도 가능한 거예요.”
당신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당신에게도 남아 있는 통증이 있나요?”
당신의 말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바싹 다가서며 물었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통증은 어떤 건가요?”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두 손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지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 말대로, 당신은 변해가고 있고, 이미 변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당신의 가슴을 밀며 말했다.
“이러지 말아요. 이런 식으로는 아니에요.”
당신은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관자놀이에 푸른 핏발이 서는 것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당당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그녀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지난번에 보았던 선글라스의 사내였다. 그는 그녀와 당신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을 보고서 헛기침을 하더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당신이 가만히 보니, 그는 손가락 관절에 염증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손마디가 굵었다.
그녀가 책상에서 내려서며 약간 지친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했다.
“당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군요. 그럼 대체 왜 나를 찾아온 거지요?”
“글쎄요, 내게 남아 있는 통증이 있다면, 그게 뭔지 알 수 있을까 해서지요.”
“그래서라면 잘 온 거예요. 위로 올라가서 원장을 만나보도록 하세요. 내 소개로 왔다고 하세요. 미리 말해 놓았으니까.”
그녀가 재킷을 집어 드는 것을 보고서, 당신은 선글라스 사내의 앞을 지나 먼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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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승강기에서 내리자, 곧바로 병원 접수대가 당신의 눈에 들어왔다. 당신은 접수대 뒤쪽으로 좁은 복도가 쭉 이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정다인 사장이 특별 진찰을 부탁한 분이 당신이군요.”
진찰실에서 당신을 맞이한 중년의 의사는 첫마디를 그렇게 꺼냈다. ‘정다인 사장이 만나보라고 한 의사가 당신이군요.’ 당신은 그렇게 대꾸하려다 말았다.
그가 몸을 뒤로 젖히고 두 손으로 목 뒤에서 깍지를 끼며 말했다.
“다인 씨는 내게 딸 같은 존재지요.”
당신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머리가 반백이고 눈 밑의 살이 늘어져 있기는 하지만, 정다인과 부녀 뻘이 될 만큼 나이 차가 크지는 않아 보였다.
“자, 시작할까요? 의사는 점쟁이가 아니에요. 환자들은 의사가 자기 증상을 한 눈에 알아 맞혀 주기 바라지만, 그랬다가는 자기 운명도 의사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요.”
그의 목소리는 쾌활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당신은 짧게 대답했다.
“도무지 아픈 데가 없어서 왔습니다.”
의사는 당신의 말이 더 이어질 줄로 알고 가만히 귀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당신의 말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뒤늦게 허허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렇군요. 아픈 데가 없어서 왔군요. 그러니 아프게 해달라는 건가요?”
이윽고 그가 정색을 하고서 당신에게 물었다.
“매운 맛은 느낍니까?”
당신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매운 맛을 느낀 기억이 없었다. 음식을 먹고 나서도 매번 미진함을 느꼈던 것도 그 때문인 듯했다.
당신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말했다.
“아시다시피 매운 맛을 느끼는 건 혀에 가해지는 통증을 감지하는 거지요. 매운 맛의 감각이 살아 있다면, 몸 전체의 통각을 되살리기가 한결 수월합니다만.”
당신이 묵묵히 듣고 있자, 그가 말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일단 우리 병원에 마련되어 있는 검사 과정을 권해드립니다. 그 과정을 거치다 보면, 당신의 무통증이 치료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 또 치료 불가능하다면 장차 어떤 식으로 이 상황에 대처할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겠지요.”
“그 과정이라는 게 복잡한가요?”
“복잡하다기 보다, 다양하지요. 이곳은 신경외과도 신경정신과도 아닌, 그냥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한 클리닉이에요. 때문에 어떤 전문 분야에 얽매이지 않고, 환자들의 특성에 맞게 여러 다양한 시술을 시도하고 있지요. 그 중에서 선택권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우선, 마룻바닥으로 된 넓은 방이 있어요. 그곳에서 환자들은 편한 자세를 취하고서, 카운슬러뿐만 아니라 다른 환자들과 한데 어울려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그리고 작은 방들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내키는 대로 이 방 저 방 드나들며 각 방에서 대기하고 있는 카운슬러와 단독 면담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고문실이라고 불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무통증의 정도에 대해 실험을 하게 되는데, 환자들이 원한다면 이를 뽑거나 손톱을 자르기도 하지요. 또 체육관도 있어요. 환자들이 복싱이나 격투기 같은 것으로 자기들 몸에 마음껏 타격을 가해보는 공간이지요. 물론 심층 심리학 전문가와 함께 하는 정신상담 과정도 있어요. 그리고 이건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는데, 환자들이나 환자들 가족과의 합의하에서 독방에 유폐하거나 구금하는 시설도 있지요.”
그가 잠시 말을 멈췄을 때, 당신이 불쑥 물었다.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
“농담 같은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농담은 아니지요.”
“그렇게 해서 통각이 원래처럼 되살아나기도 하나요?”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반대로 모든 감각이 사라질 수도 있어요. 무통증은 원인만큼이나 증상도 다양해서, 거기에 대처하려면 상상력이 필수적이지요.”
“상상력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냥 돌아가도 되겠지요?”
“물론이지요. 그러나 다인 씨가 실망할 거예요.”
당신은 정다인과 당신이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당신의 말에 의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일 것이며, 그러고 나면 어색한 침묵이 찾아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하튼 침묵이 찾아들었고, 그 침묵은 어색했다.
“그냥 돌아나간다고 해서 낙오자가 되는 건 물론 아니지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일시적으로 무통증을 겪고 있는 듯하니, 평소의 생활로 돌아갈 경우도 대비하고 있어야겠어요. 그렇기는 해도 무통증을 유발한 과도한 스트레스의 요인이 당신의 내부에 상존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게 언젠가 되살아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다인 씨는 달라요. 다인 씨가 자기 이야기를 남들에게 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니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지만, 그 사람은 어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후에, 그때 받은 통증으로 인해 다른 모든 통증을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유독 그 통증만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지고 있지요. 마치 온몸의 통각이 그쪽으로 몰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요. 나로서도 어찌 손을 써야 좋을지 알 수 없어요.”
그때 의사가 화제를 바꾸려는 듯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 떠나기 전에 나와 함께 아래층의 응급실에 내려가 보지 않겠어요? 응급처치도 내가 하는 일 중의 하나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옥에서는 온갖 고통이 넘쳐나지만, 고통이라곤 전혀 없는 지옥도 있지요. 나는 그것을 무통 지옥이라고 부르는데, 응급실에 가면 그 광경을 볼 수 있어요. 지금은 마침 환자들이 많은 시간이군요. 무통증 상태의 사람들은 하루가 시작될 때는 몸을 움직일 때 긴장하고 조심하지만, 오후 이맘때가 되면 방심하여 사고가 자주 발생합니다. 응급실에서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의사고 그들이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아요. 손가락이 잘렸는데 웃고 있다거나, 피가 흥건한 이마를 싸매고 옆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거나, 목에 깁스를 한 어린아이가 막대 사탕을 빨며 당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거나,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여하튼 다른 의사라면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에 때로 눈이 부실 정도예요. 뭐랄까, 감각의 무명에서 벗어난 보살들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그때 당신은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소음과 쿵쿵거리는 울림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 소리와 울림은 의사가 말을 시작할 때부터 당신에게 분명히 감지되고 있었다. 짐작컨대 의사도 그 소리를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멈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쫓기듯이 어조를 점점 더 빨리했는데, 그 때문에 당신으로서는 의사의 말이 점점 더 횡설수설하는 장광설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에게 이타심이 없다는 거예요. 고통을 받아도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기보호적이고 이기적이에요. 그러고 보면 이타심은 고통을 무릅쓸 때만 생겨나는 거예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쾌락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여하튼 그들은 때로 물불을 가리지 않아요. 감각이 죽어가는 중이기는 해도, 여하튼 매순간 살아 있다는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지요. 무통의 원인을 잘 모른다면, 결과나 목적이라도 분명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행동이 과격해지기도 해요. 장차 그들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장은 만만치 않을 거예요. 아래층의 어떤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특별히 무통증 사람들만 거느리고 있는데, 일처리를 아주 잘한다고 해요. 고통이 없으니 무서움도 없고, 심지어 고통을 겪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들이니까 말이에요. 그들은 결코 우리의 귀여운 피노키오들이 아니에요. 손상된 부분을 스스로 복원하는 불가사리처럼 여겨질 때도 있어요. 그럴 때면 무통증에 대해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아직은 혼란스럽고 비극적이지만, 그들 나름대로 고통을 끌어안으려는 모습이 있고, 그렇다면…”
의사는 말을 마칠 수 없었다. 소음이 더 커져서 벽을 쾅쾅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물건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속에는 여러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의사가 불안정한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놀라지 말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니까.”
의사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그의 얼굴에 피로와 환멸의 기색이 짙게 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무통증을 겪고 있나요?”
“글쎄요, 나는 무통과 고통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어요. 저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상당히 동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내게는 아직 경험해야 할 통증의 몫이 남아 있지요. 나는 저들과는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이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자 그가 말했다.
“나가지 말아요. 아직은 당신도 저들과는 다른 사람이니까.”
당신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음을 옮기면서 당신은 차츰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당신은 통각은 물론 모든 감각에서 자유로워져, 공중에 약간 떠올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윽고 당신은 장방형 홀에 이르렀다. 그때 문득 당신은 소음과 울림이 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위는 고요했다.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신은 당신이 미로 속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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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홀을 둘러싼 벽 위에는 곳곳에 문들이 나 있었는데, 그 문들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당신은 그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 방들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으로 된 넓은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기저기 요가용 매트가 깔려 있었다. 어떤 방에는 그 안에 또 여러 개의 방이 들어 있었다. 그제야 당신은 아까 원장이 말한, 다양한 시술이 이루어지는 방들을 돌아보고 있음을 알았다. 과연 어떤 방은 고문실이라고 불릴 만했다. 바닥에는 이를 뽑거나 손톱을 자르는 기구들이 떨어져 있었다. 격렬한 열기가 아직 남아 있는 체육관도 있었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최면술이 행해지던 정신의학 상담실도 있었으며, 환자를 유폐하거나 구금하기 위한 철창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방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갇혀 있던 짐승들이 모두 뛰쳐나가고 빈 우리만 남아 있는 듯했다. 그 빈 방들을 돌아다니는 동안, 당신은 다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의 마비된 신경선 속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느낌 속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때 당신은 한쪽 구석의 문 하나가 반쯤 닫혀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은 천천히 그리로 다가가서 문을 밀었다. 한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입가에는 침과 거품이 엉겨 붙어 있었는데, 그 옆에 선글라스가 떨어져 있었다.
당신이 안으로 들어서자, 한 여인이 창가에 서 있다가 당신을 향해 돌아섰다. 방안은 어두침침했지만, 당신은 그녀가 정다인임을 알아보았다. 그녀가 당신에게로 다가왔다. 당신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잔뜩 찡그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당신을 발견하고 활짝 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당신에게 자신의 몸을 밀착시키며 당신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녀가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은 신경 쓰지 말아요. 선글라스를 벗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코 벗더니 저 모양이 되었어요.”
당신은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당신의 상의를 헤치고 당신의 맨살에 입술을 비볐다. 당신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뒤로 밀었다. 당신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최소한 연민의 감정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끌렀다. 검은 망사 브래지어 속의 둥근 유방이 당신의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