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꽃이 피어 있었으나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어둠을 탓했다.
눈(雪)은 뼈를 가진 듯 크고 무거워 보였다. 차광막을 친 인삼밭과 붉은 소나무숲, 병을 앓는 나뭇가지 위로 눈은 무자비하게 쏟아져내렸다. 쏟아지는 눈을 짓이기며, 버스는 천천히 나아갔다. 눈안개가 들짐승처럼 돌연히 앞을 가로막았으므로, 버스는 자주 멈춰 섰다. 차창 가장자리 눈의 결정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한데 뭉쳐 있거나, 일그러진 채 얼어붙은 그것들로 추위를 가늠해보았다. 곱은 손이 잘 펴지지 않았다. 서서히 경계가 지워지는 풍경이 있었다. 나는 그 위에 K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그곳은 나의 고향은 아니었다. 마을 초입의 능수버들을 지나 두어 마지기의 논과 토란밭 사이의 두렁길을 따라가면 낮은 야산을 등에 업은 집이 있었다. 지붕을 새로 올린 집은 멀리서도 눈에 띄어, 안개 속에서도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산비탈에 두 개의 봉분이 있었는데, 주인을 알 수 없어, 어린아이들에게 겁을 주거나 사내아이들이 호기를 부리는 데 이용되곤 했다. 집성촌이었던 마을은 같은 족보를 갖고 있거나 서로의 계통을 꿰뚫고 있었지만, 나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었으나 나의 고향은 아니었으므로, 매해 여름 그곳에 보내질 때마다, 버려진 비석에 새겨진 한자를 손바닥에 그리거나 망초와 할미꽃을 연습장에 붙여가며 나의 계보를 만들곤 했다. 지는 해 반대편 싸늘한 낮달이 나의 시조가 되어주었다. 그것은 고독하고 불필요한 작업이었다.
할머니는 풍채가 좋고 얼굴이 맑았다. 방 윗목엔 언제나 말린 고구마나 볶은 콩, 배추전 같은 주전부리들이 떨어질 날이 없었는데, 청포도맛 알사탕이나 설탕이 범벅된 젤리는 자개문갑에 숨겨두고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비밀한 간식들보다 평상에 항상 놓여 있던 구운 개구리 뒷다리 같은 것이 더 진귀해 보였다. 우리는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다. 할머니의 어린아이 같은 식탐이나 노인 특유의 군내는, 그녀가 종종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할 때마다 흠칫 뒤로 물러서게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침묵에 익숙했다. 할머니와 나 사이의 서먹함은 마을 사람들과 나 사이의 서먹함으로 이어졌다. 나는 그곳의 가축들, 덜 여문 옥수숫대, 빌어먹고 다니는 개들과 더욱 살갑게 지냈다.
버스가 시(市)로의 진입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날 무렵, 눈은 진눈개비로 바뀌어 있었다. 눈으로 위장한 빗방울들이 쌓인 눈더미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쌓인 속도보다 더 빠르게 녹아내릴 것이었다. 뒷좌석 아이의 칭얼거림이 정적을 깼다. 버스 안의 공기는 무겁고 눅진했다. 창밖, 갓길로 소를 끄는 노인이 있었다. 얼굴이 붉고 걸음이 느렸다. 반들거리는 젖은 이마가 소와 같았다. 소 등에 짚단처럼 묶인 들꽃들이 빗속에서도 푸르렀다. 오랜 시간 계속되던 울음이 뚝 그쳐 뒤를 돌아보니 아이의 손에 약밥이 들려 있었다. 차는 속도를 올려, 이윽고 멀리 버스터미널의 간판이 보이는 듯했다. 아주 오랫동안 땅을 밟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은 질척일 것이고, 굽이 낮은 신발 탓에 바지는 금세 더러워질 것이었다. 차가 멈춰 서기도 전에, 사람들은 짐을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미 진물처럼 녹아내려 진창으로 변해버린 눈의 흔적들,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자판기 커피를 홀짝이는 버스기사를 보았다. 찢어진 차양 사이로 쉼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그 아래, 빗물을 받아내며, 정차하는 버스 주변을 서성이는 커다란 우산을 든 여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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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유진
소설가.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단편소설 「늑대의 문장」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의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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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키가 작고 얼굴이 검었다. 길고 결이 좋은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는데, 코가 아주 낮았다. 우산 끝이 자꾸만 귀에 부딪혔다. 어깨로 빗물이 떨어져 물자국이 생겼다. 내게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곧 잊었다. 나는 혈육이 아닌 그녀가 어떻게 할머니와 오랫동안 함께 살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자라 더이상 매년 여름 이 마을을 찾지 않아도 되었을 무렵부터, 나는 할머니를 이 고장의 풍경 한쪽 구석에 묻어두고 있었다. 늙거나 사라지는 법 없이, 종종 이곳을 추억할 때, 지나간 통속극의 여주인공을 기억해내듯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다. 내가 할머니에 대해 묻자, 여자는 한참 동안 입 안에서 말을 웅얼거린 후에야, 아직, 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듯 보였다. 말을 더듬진 않았지만, 발화하기까지 눈에 보이는 망설임과 결심의 긴 과정이 있었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있어 본래의 나이보다 너덧 살은 많아 보였다. 눈을 맞추는 법은 없었다.
우리는 버스터미널 주변에 밀집되어 있는 제법 큰 농협과 정육점, 양품점을 지나쳐 도로의 갓길을 따라 걸었다. 모든 길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녀는 나에게 길을 내어주느라 일부러 가장자리로 걷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자의 통굽 슬리퍼가 강아지풀이나 민들레의 목을 꺾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버스를 타야 했다. 마을까지는 터미널에서 이십여 분 이상 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인가의 수는 줄어들었다. 내 기억이 옳다면, 근방 어딘가에 작은 점방이 있었다. 그곳엔,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모든 공산품들이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우체국이면서, 물품 보관소, 지리 안내소이자 만남의 장소였다. 점방 안에는 전기장판만한 쪽방이 있었다. 주인은 칠순 노인이었는데, 기력이 없어 라면을 집어올리는 젓가락이 덜덜 떨리곤 했다. 그러나 물건의 가격만큼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허투루 계산하는 법이 없었다. 유통기한이 몇 년씩 지난 통조림과 누렇게 변색된 깍두기공책, 편리에 따라 배치된 생필품, 그리고 시간을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먼지들이 그것들을 뒤덮고 있었다. 먼지 때문에, 그곳의 모든 개체들은 이미 사라지고 남은 자취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 먼지의 나라에서 박하사탕을 사먹었다. 아주 쓰고 눅눅한 맛이었다. 주인을 잃은 소라껍데기처럼, 논과 밭 사이 폐가들이 있었다. 마을은 이미 소멸되었거나, 소멸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살아남을 것들, 다시 태어나는 것들은 꽃과 나무, 들짐승 들이 전부인 것 같았다.
사라진 것들 중에는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는 나흘 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여자는 말했다. 그녀는 또한 내가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집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널려 있던 멀고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가죽 단화의 발끝에서부터 빗물이 스며들었다. 신발은 새것이어서, 아마도 양말엔 붉은 물이 들었을 것이었다. 젖은 발가락이 아려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할머니가 실종되었다.
K는 종전 이듬해에 태어났다. K는 입버릇처럼,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세계에서 자라났다, 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K의 시절을 그려보곤 했다. 빈곤이나 기아와는 상관없이 풍부한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수목들, 그 사이에서 뛰어노는 어린 K를 떠올렸다. 불에 탄 집터를 떠나지 못하는 귀신들이 나타나 밤마다 K의 발목을 늘이고,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났다던 굶주린 노인들의 안광도 떠올려보았다. 경험한 적이 없었으므로, 상상은 대단히 추상적이고 미화되어 있었다. 내가 K에게 나의 상상을 들려주면, K는 언제나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낭만성은 K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K가 종종 들려주었던 어린 시절의 풍경들, 이를테면 어릴 적 보았던 어둠의 밀도나 별의 밝기에 관한 것들은 그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설에 가까웠다. 나는 온전히 학습을 통하여 그 시절을 이해했다고 믿었다. K가 지닌 지난 시절들은 나와는 무관한 것이었으므로, 그 시절이나 K 둘 다 아름답다고 느꼈다.
할머니의 방은 따듯했지만 퀴퀴한 냄새가 났다. 방 아랫목에 깔려 있는 두꺼운 솜이불에 코를 갖다대어 보았다. 이불보엔 조잡한 무늬의 자목련들이 만발했다. 누런 벽 가장 높은 곳에 몇 개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천장엔 파리 끈끈이가 여태껏 매달려 있었다. 몸통만 남은 파리의 주검들이 빼곡히 달라붙어 끈끈이의 몸체를 부풀렸다. 살림은 단출했다.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자개문갑과 미닫이문이 달린 텔레비전, 붙박이 옷걸이가 세간의 전부였다. 옷걸이엔 목둘레에 털을 덧대 누빈 쥐색 조끼만이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할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주인은 사라지고 체취만이 남은 방에선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모든 물건들이 지나치게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오래 전 사라졌어야 할 것들이 유령처럼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벽지의 작은 핏자국이나 모서리가 깨진 문갑의 걸쇠장식을 보며 순간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그들이 지닌 유구한 세월들이 거북스러웠으나, 정작 이 방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나 자신이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이제 막 오후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창밖 번져가는 붉고 푸른빛들만이 요동칠 뿐, 마을은 한밤중인 듯 기척도 없었다. 사방에서 나는 할머니 냄새와 정적은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매어두고 있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 한 방에서 서로 침묵을 지켰던 것처럼, 눈알을 굴려 사방을 살펴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체취는 할머니를 대신해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K의 불안으로 가득 찬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랫목의 뜨거운 온기가 발바닥과 언 발가락을 녹였다. 물이든 양말이 피처럼 붉었다. 할머니는 어디에 있는가.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물음이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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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불빛 아래 여자는 한결 온화해 보였으나 타고난 폐쇄성이 엿보였다. 까무잡잡한 얼굴에도 주근깨가 가득했다. 상 한가득 차려진 잡곡밥과 무국,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푸르고 노란 나물무침들은 생기가 넘쳐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명백히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여자는 상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문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잊고 있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입니까.
나는 그 물음이 대단히 상투적이고 전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내가 앞으로 만날 사람들마다 물어야 할 질문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실종자의 마지막 모습을 묻고 또 물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다보면, 언젠가는 그의 현재에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탓이리라. 여자는 내가 던진 몇 가지의 질문 중 단답형이 가능한 질문에만 답변을 해주었다. 이를테면, 할머니에게 치매증상이 있었나요, 라고 물으면 여자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문득 기억났다는 듯 바쁘게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 라고 대답했다. 나머지 질문은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자의 태도는 시종일관 죄지은 사람처럼 잔뜩 주눅이 든 상태였다. 나는 답변이 돌아올 때까지 같은 질문을 여러 차례 다른 방식으로 던졌다. 시간이 지나자, 나도 모르게 여자를 질책하거나 추궁하는 어투로 대답을 종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자와의 침묵이 불편했다. 내가 입을 닫자, 여자는 비로소 고개를 들어 차려온 밥상을 향해 시선을 놓았다. 그제야 단단해진 밥알과 식은 국이 눈에 들어왔다. 풍성한 밥상과 우리의 상황은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아니라면, 무엇이 움직이건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나는 대청에 앉아 집 뒤 웅크린 산 그림자와 어렴풋이 농도를 달리하는 대지와 대기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진눈깨비가 그친 뒤여서 날이 매우 찼다. 내일이면 땅이 단단히 얼어붙을 것이었다. 이곳의 어둠은, 내가 볼 수 있는 K의 어린 시절 어둠과 가장 유사한 것이리라. K의 집은 고향에서 가장 큰 인삼밭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어린 K는 저녁을 먹고 나면 하루도 빠짐없이 인삼밭을 순시해야 했는데, 전등도 없이 홀로 어둠을 뚫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밭 주변을 맴돌았다고 했다. 덕분에 지금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든 잘 볼 수 있다고 했다. K는 종종 도깨비불과 마주쳤지만, 한 번도 달아난 적이 없었다며 짐짓 자랑스레 말했다. 나는 도깨비불의 양태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으나 어린 K가 대견하다고 말해주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개가 짖었다. 그러자 조금 더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꼬리를 물고 들려왔다. 어둠 속에 구획되어 있을 논과 밭, 몇 채의 집들을 떠올려보았다. 달이 붉었다. 할머니가 숲이나 길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다면, 오늘이 다섯번째로 맞이하는 밤이 될 것이었다. 겨울 달이 붉으면 가뭄이 온다는 풍문 따위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넌방 문풍지를 뚫고 조도가 낮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림자 하나가 일렁였다. 여자 같았다. 무언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여자의 그림자 뒤에 또하나의 그림자가 비춰 보였다. 누군가 있었다.
정적 속에서 깨어났다. 낯선 천장이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곳이 나의 방이길 빌었다. 몸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방바닥은 지나치게 뜨거웠고, 공기는 차디찼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나가보지 않아도 이곳의 기후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산, 새가 울었다.
안개는 군락을 이룬 숲처럼 울창했다. 그 위용에 짓눌린 새벽 공기가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하늘이 낮았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외양간, 젖은 풀들이 썩어가는 여물통이 있었다. 주변에 널린 볏짚을 발끝으로 짓이겼다. 녹슨 대문은 쉽게 열렸다. 집 앞으로 난 좁은 두렁길을 따라 걸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었다. 길은 곧 두 갈래로 갈라졌다. 오른쪽은 마을의 바깥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내부를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그 길을 사이에 두고 집과 논이 대치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 할머니의 집과 지난밤 그림자로만 보았던 야산을 눈에 담았다. 구두 굽이 젖은 땅에 닿을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이 소음처럼 느껴질 만큼, 마을은 고요했다. 지난밤 울어댔던 개들은 기척도 하지 않았다. 대문은 대부분 굳게 닫혀 있었으나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쉽게 열 수 있을 만큼 허약해 보였다. 빈집이었다. 누구도 다시는 그 집에 세간을 들이지 않았으므로, 집은 비어 있는 상태에서 서서히 풍화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의 친척이 살았다던 집들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누구든 찾아서 묻고 싶었다. 불에 탄 집들을 지났다. 그 마당 한가운데, 과실수들만이 살아남아 커다랗게 자라났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겨울눈들이 티눈처럼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그들이 집의 주인이었다. 버섯은 어디에든 있었다. 나무둥치, 돌담 아래 이끼 사이에서도, 종을 알 수 없는 버섯은 버짐처럼 피어났다. 귀가 먹은 노인, 말린 옥수수알을 입 안에 털어넣고 우물거리는 노인을 만났다. 이가 없었으므로, 그는 단물이 빠진 옥수수를 개밥그릇에 뱉어내었다. 요강 지린내가 멀리서도 진동했다. 개집은 비어 있었다.
마을의 끝, 산으로 이어진 길은 무너진 돌담으로 막혀 있었다. 그 위로 담쟁이넝쿨이 자라났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 마을엔 할머니를 찾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무엇도, 누구도 없었다. 안개비에 머리가 젖었다. 옷에 알알이 물방울이 맺혔다. 지난밤 보았던 사진 속의 할머니를 떠올려보았다. 텔레비전의 미닫이문 안쪽에 끼워져 있던 사진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닳아 있었지만, 그 여자가 할머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 할머니는 대청에 앉아 무표정한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고리는 짧고, 치마의 폭은 좁았다. 살짝 드러난 버선이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소박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화관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관이 그녀의 머리 위에,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그 꽃이 한없이 붉으리라 짐작했다. 허리가 꼿꼿했다. 할머니는 젊고 아름다웠다. 젊었으므로 아름다웠다는 것이 옳겠다. 꽃을 두른 젊은 여자와 기억 속 할머니의 모습 사이엔 큰 괴리감이 있었지만, 둘 중 누구에게도 애정이 생겨나진 않았다. 끊임없이 자신에게 할머니를 되찾길 바라는가를 되물었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단지 의무감에 지나지 않은 곤혹의 시간들이 어서 지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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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쇠가 고장난 문은 무용지물이었다. 단지 집과 바깥을 경계짓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 철문이 문턱에 질질 끌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젖은 마당 한가운데 쓰러진 여자아이가 보였다. 모자가 달린 스웨터가 떨어진 꽃잎처럼 흩어져 있었다. 나는 크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이런 마을에 어린아이가 있으리라 생각지 못한 탓도 있었으나, 꼭 죽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꼬마야, 하고 불러보았으나 반듯하게 잘린 까만 단발머리 가까이에 놓인 손가락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긴장한 목소리 끝이 갈라져 쉰 소리를 냈다. 이 아이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앞서, 등을 보이고 죽은 듯 널브러져 있는 아이가 살아 있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몸은 차갑고 경직되어 보였다. 나는 어릴 적 만져보았던 죽은 개의 단단함을 기억했다. 어리고 약한 것들은 쉽게 죽는 법이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저 주검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동안 대문에 바짝 붙어서서 아이를 응시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흰 면스타킹을 신은 짧은 다리를, 반 뼘도 안 되어 보이는 얇은 어깻죽지를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스스로 움직여주기를 바랐다. 나는 나도 모르게 모든 상황을 쉽게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었다. 마을의 모든 요소들이 나를 자연스럽게 죽음 가까이로 이끌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안개 때문에 아이는 익사체처럼 보였다. 망설임 끝에 아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발을 떼자,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여자였다. 반가운 마음에 화색이 돌 지경이었다. 내가 여자를 바라보며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순간, 시체처럼 단단하던 아이가 훌훌 몸을 털고 일어나 건넌방으로, 빨려들어가듯 뛰어가버렸다. 황망함에 다시 여자를 바라보자, 머리에 이고 있던 채반을 허리춤에 옮겨잡고는 멋쩍게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딸이에요, 라고 말했다. 나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을 잤다. 기면증 환자처럼 주기적으로 잠이 몰려왔다. 난삽한 꿈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것이 가시지 않는 할머니의 냄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을에서 이방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할머니를 찾아야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여자는 할머니를 찾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폐허가 된 마을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여자와 그녀의 딸이 할머니의 실종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으나, 여자에게 화를 내거나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자는 식사만큼은 극진히 대접했다. 나는 하루에 두 번, 이전엔 받아본 적 없는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밥상을 받았다. 여자에게는 섬세한 구석이 있어, 손이 자주 가는 반찬은 다음번에 한번 더 올렸고, 전혀 손댄 흔적이 없는 반찬은 다음번 식사에서 제외되었다. 숭늉은 언젠가 K가 극찬했던 한정식집의 것보다 맛이 좋았다. 먹성이 좋았지만 입맛이 섬세했던 할머니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상을 물리면, 다시 잠이 쏟아졌다. 억지로 대청에 앉아 찬바람을 쐬어보았지만 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혼몽한 상태에서 여자와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여자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다정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어 딸아이의 목소리와 혼동되었지만, 그것은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두 개의 크고 작은 그림자가 한 몸처럼 엉겼다. 무력하게 떨어지는 해의 꼬리를 물고 밤이 몰려오고 있었다.
죽은 척 장난을 친 여자의 딸은 병을 앓는 K를 떠오르게 했다. K는 언제나 장난스럽게 난자당하는 자신의 신체에 대해 묘사하곤 했다. 나는 그것을 병이라고 불렀지만 K는 단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K를 찾아갈 때마다 그 상상들이 실현이 될까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K의 상상은 집요하고 세세했으며, 한계가 없었다. 늘 소파 위에 몸을 길게 누이고 있는 K를 쉽게 깨우지 못하는 것은 그 탓이었다. K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나면, 소파 밖으로 삐져나온 K의 제법 큰 발, 마디가 불거진 발가락에 박힌 검고 흰 터럭,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고 누런 발톱 들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손질되지 않은 발톱은 길고 더러웠다. K의 늙고 초라한 육체를 살필 때면, 그에 대한 애정이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았다. 나는 K보다 젊고 아름다웠으므로, 이 관계에서 우위를 선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용기가 생겨났다. 그러면 잠시나마 내면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나는 이루어지지 않은 일,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 K는 내 악몽의 원인이었다. K는 내가 죽음을 지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것이 젊은이들의 속성인 양 비웃었다. 나는 죽음을 농담처럼 소비하는 K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늙은 K는 교활했다.
어제는 다른 생각을 했어. 나의 악력이 누구보다도 세져서, 내 피부를 단지 잡아당기기만 해도 벗겨낼 수만 있다면, 머리카락이 숲처럼 울창하게 박힌 두피가 찢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귀를 살짝 잡아당기면, 귀가 떨어져나가는 그런 힘,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지거나 차에 치일 필요 없이,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내 손이 무기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손톱만으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어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오른쪽 눈이 두근대는 내 왼쪽 눈알을 관찰하고, 지친 성기를 꺼내어 핥아주고, 흐르는 피를 베고 잠을 잘 수 있다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단다.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오래 살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살해하는 꿈을 꾸진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K는 어린아이에게 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묻는 것에 대답해주지 않는 K, 언제나 기다리고 떼를 쓰게 만드는 K에게 차츰 지쳐가고 있었다. K는 또한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눈물을 흘렸고, 입을 닫고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발작적으로 불안에 떨며, 쉽게 거리를 만들고, 고자세로 나를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K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어둠이 있었다. K는 그것을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로 일반화시키려 했다. 그것은 부당했지만, 나는 그 앞에서 무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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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속삭였다.
할머니는 언제 와.
할머니는 오지 않을 거야.
저기, 꽃 핀 것 봤어?
응, 봤어. 예쁘더라.
몰려오는 졸음을 버텨내며, 내일은 읍내에 나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종신고를 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할머니를 되찾는 것이 불길하게 느껴졌다.
버스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나는 버스정류소 표지판과 버스운행표를 여러 차례 확인했다. 와야 할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버스는 좀처럼 나타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조바심이 났다.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햇빛이 긴 나무의자를 반으로 갈랐다. 나는 빛 쪽으로 몸을 옮겨 언 발을 녹였다. 구두 앞코에 달라붙은 진흙이 말라붙어 허옇게 일어났다. 바람은 여전히 차디차 볼이 얼얼했다. 그 속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마을에서 보낸 이틀이 한정없이 길게 느껴졌다. 물러나 있던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는 졸음과의 싸움에 다름아니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소를 끄는 노인을 보았는데,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격자유리로 된 미닫이문 사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할머니의 뒤통수가 일그러져 보였다.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하여 속눈썹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유리에 얼굴을 갖다댔다. 할머니는 문갑도 안심할 수 없었던지, 이불을 걷어내고 장판의 벌어진 틈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매미가 울었다. 시멘트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할머니는 정사각형의 무지개색 젤리를 납작하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탄력이 좋은 젤리는 쉽게 제 모양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젤리를 바닥에 두고 그 위에 성경책을 얹었다. 엉덩이로 깔고 앉아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할머니의 감색 고쟁이는 언제 빨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종아리에 달라붙은 파리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할머니가 납작하게 짓눌린 젤리를 장판바닥에 숨기고 이불로 위장하는 모습을 입을 틀어막으며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저 젤리를 찾아 떠돌이 개에게 먹일 것이었다. 할머니가 미운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호불호의 감정을 느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장난일 따름이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할머니의 반응은 극렬해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숨겨놓은 과자를 꺼내어 다른 곳으로 옮겨두었다. 어디에 숨겨두건 상관없었다. 한 번도 찾지 못한 적은 없었다. 할머니의 수는 너무 얕았고, 나는 할머니보다 작고 빨랐다. 나는 종종 숨겨둔 과자를 꺼내 문갑 위에 아무렇지 않게 올려두거나, 할머니의 손이 닿지 않는 처마 밑에 박아두곤 했다. 훔친 과자들을 모아 동네 아이들에게 환심을 샀다. 방학은 길고 지루했다.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할머니는 곧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할머니에게 사탕이나 젤리 같은 것이 어떤 의미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나를 나무라지도 못했다. 처마가 부서져라 장대로 쑤셔대며 씩씩대는 할머니의 모습은 추하고 역겨웠다. 그것은 언제 보아도 유쾌한 광경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싶었다. 담아두고, 언제든 꺼내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침묵했다. 우리는, 그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으며 같은 지붕 밑에서, 같은 상을 받는 무언의 적이 되었다. 방학이 끝날 때까지, 할머니의 악몽은 계속되었다.
집을 향해 뛰었다. 모든 것이 이상했다. 또다시 잠이 들다니. 모든 것이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나 자신조차 제어할 수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방문을 열었다. 기다리는 것은 할머니의 냄새,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그 냄새가 전부였다. 그것은 곧 앞날에 대한 불안과 징조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불현듯 벌떡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어릴 적 할머니의 과자를 훔칠 때처럼, 방의 모서리, 장판의 벌어진 틈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해충 같은 불안은 구석에 숨어 있다 어둠에 섞여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드러난 불안은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나는 K처럼 발광했다. 불안에 완벽히 사로잡혀 있었다. 사라진 할머니가 당장이라도 나타나 내 목을 조를 것 같았다. 할머니를 되찾는 것과 나의 안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애초에 할머니의 얼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찾아오는 등뒤의 섬뜩한 기운들 모두 불길한 징조 같았다. K는 내가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을 한사코 말렸었다. 다 거짓말 같다, 너는 그 여자를 본 적도 없지 않느냐, 고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나는 또다시 K의 병이 도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K의 어두운 얼굴이 예언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육중하게 자리 잡은 문갑을 보았다. 문갑은 어릴 적 만화영화에서 보았던 비밀한 통로, 혹은 시취로 가득 찬 고문기계처럼 보였다. 문갑 위 개어놓은 이불들을 치우고 걸쇠를 열려 할 때, 여자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마에 맺힌 땀이 귀밑머리를 적셨다. 밥상을 내려놓는 여자의 드러난 목덜미에 붉은 멍이 보였다. 여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보고는, 그 자리에 서서 벌벌 떨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방으로 뛰어들어와 여자의 다리를 붙잡으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이의 눈에서 경계와 경멸을 읽었다. 나는 이 모든 숨겨진 것들로부터 드러난 징후들과 앞으로 닥쳐올 일들의 전조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오지 않는 버스와 몰려오는 잠으로부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할머니로부터, 그 그전에 내 앞에서 떨고 있는 여자와 딸아이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밥상 위 갓 구운 조기에서 섬뜩한 윤기가 흘렀다. 졸음의 원인은 여자가 차려온 음식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자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밥상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굉음과 함께 여자와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그 모든 소리들을 피해 집을 뛰쳐나왔다.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붙잡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달려본 적은 없었다. 이곳의 기후마저도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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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끝나갈 무렵, 할머니는 버젓이 눈앞을 활보하는 적을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할머니는 다음해, 혹은 그 다음해의 여름에 닥쳐올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할머니의 문갑을 뒤졌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겨울용 고쟁이와 누빈 조끼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끝과 손바닥에 찐득하고 불쾌한 천의 감촉이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땀띠가 돋을 것 같았지만, 이곳에 숨겨둔 것이 확실했다. 새벽에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곧 무언가 물컹한 것이 손에 잡혔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잡은 것을 들어올렸다.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것은 토끼의 앞발이었다. 앞발이 설탕이 잔뜩 발라진 수박모양의 젤리를 감싼 채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할머니의 복수였다. 그후, 할머니는 언제나 과자와 함께 죽은 개구리나 오리의 머리, 닭 볏 같은 것들을 함께 넣어두었다. 할머니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죽은 참새의 날갯죽지를 펼쳐 자두맛 사탕을 꺼내어 먹었다. 장난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할머니의 머리통이 문갑에서 튀어나와 내 목덜미를 물었다. 너무 아파, 깨어나서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응징당했다.
집 뒤 야산을 향해 달렸다. 산을 가로지르면, 읍에 좀더 빨리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전히 도로는 텅 비어 있을 것이었다. 나는 뛰어서 읍까지 갈 참이었다. 언제 잠이 들지 알 수 없었으므로, 있는 힘껏 달려야 했다. 떨어질 준비를 하는 해가 마지막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이 숲을 알고 있었다. 숲의 지리와 풍토, 자라는 풀과 나무의 이름들을 알고 있었다. 가장 양지바른 곳과 산짐승들만이 발자국을 남기는 은밀한 길들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나의 휴양지이자, 그 사건 이후 할머니로부터의 도피처였다. 산의 입구로 들어섰다. 키 작은 작살나무와 산벚나무, 길을 따라 무리지어 자라는 망종화, 쑥부쟁이들을 지나자 눈앞에 산밤나무숲이 펼쳐졌다. 키 큰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맥없이 추락했다. 어린 시절 몸으로 익힌 길은 시간이 지나자 차츰 기억 속으로 되돌아왔다. 켜켜이 쌓인 낙엽과 젖은 흙이 솜이불만큼 푹신했다. 따듯한 계절이었다면, 암꿩이나 오소리와도 쉽게 마주칠 수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닦여진 길이 아닌 나무와 나무 사이의 좁은 틈, 드러난 나무뿌리와 바위들을 뛰어넘으며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숲속의 해는 급작스럽게 지는 법이었다. 해가 져감에 따라 기온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태어나는 입김들이 쉴새없이 얼굴에 달라붙어 체온을 떨어뜨렸다. 새들의 지저귐은 사그라졌으나 바람결에 몸을 비벼대는 나뭇잎소리는 톱질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뒤를 따라다녔다.
허리가 굽은 노송을 지나자, 봉분 하나가 나왔다. 동백꽃나무 몇 그루가 그곳을 지켰다. 그 시절 나는 이곳을 버려진 시들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이 묘지를 발견했을 때, 그 앞에 반은 불에 타고 반은 찢어진 종이뭉치들이 있었던 탓이었다. 그것은 일기, 혹은 쓰다 만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는데,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적힌 글 주변엔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글 위에 크게 가위표가 처져 있기도 했다. 묘는 양지바른 곳에 있었으니, 누군가가 볕을 쬐다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남발된 관념어와 상투적인 상징들로 가득 찬 언어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몇 가지 단어들로부터 유추한 결과로 나는 그 글들을 사랑의 밀어라고 단정지었다. 그것은 곧 시가 되었다. 나는 불에 탄 미완의 시들을 모아 땅에 묻었다. 그곳엔 두 개의 묘가 생겼다.
묏자리의 원 주인은 이름에 공(供) 자가 들어가는 십삼 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경상남도 관할의 작은 섬 출신이었다. 1889년에 태어나 1901년에 이곳에 묻혔다. 동년배였던 나는 그에게서 낭만을 보았다. 섬에서 태어난 그가 어째서 내륙까지 올라와 요절했는가에 대하여 온갖 가정들을 세워가며 그해 여름을 보냈다. 그는 자주 모습을 바꿔 머릿속에 침범했다. 상상 가능한 모든 음란한 짓들을 그와 함께 했다. 나는 그가 실재한다고 믿었다. 무덤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듯 마른 잡초가 무성했다. 만개한 동백꽃이 붉었다. 잎은 조화처럼 윤기가 흘렀다.
쉬지 않고 달렸다. 걸음을 늦추면, 곧 추위가 몰려왔다. 땀에 젖은 옷에 한기가 달라붙었다. 시간상으로는 이미 도로가 나왔어야 했지만 길은 좀처럼 드러나주질 않았다. 나는 참을성 있게 걷다 뛰기를 반복했다. 앙상한 나무 그림자가 환영을 만들었다. 작은 부스럭거림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를 쫓는 달이 있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 산은 결코 크거나 깊지 않았다. 이 길을 수십 번도 더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도 모든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개에 홀렸는지도 몰랐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잠들면 안 된다고 되뇌었다. 동사할 수도 있었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짐승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질지도 몰랐다. 나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여자와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나. 나는 그들에게 할머니와 다름없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K의 근심 어린 얼굴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지금, 하늘에서 포자처럼 날리는 것은 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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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엔 유난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보름 가까이 폭염이 이어져, 도시 사람들은 모두 바다와 산으로 흩어졌다. 마을은 때 아닌 피서객들로 몸살을 앓았다. 숲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휴양지를 잃고 마을의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를 누비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돌담 밖으로 우거진 감나무 가지를 꺾어 사방으로 휘두르며 걸었다. 햇볕 때문에 정수리가 따가웠다. 턱으로 뚝뚝 떨어지는 땀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길가의 돌멩이나 깡통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와중에, 저만치 앞서서 걷는 여자가 보였다. 갈색 단발의 고수머리칼이 엄마 같았다. 엄마는 방학이 끝나기 전에 내려와 함께 있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매년 여름방학 내내 어서 엄마가 내려와 나를 구원해주기를 빌었다. 이곳은 유형지나 다름없었다. 고독하고 지루한 시간들이었다. 나는 큰 소리로 엄마를 외치며 뛰어갔다. 손에 거치적거리는 나무막대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엄마는 전에 없이 걸음이 빨랐다. 뒤를 돌아보는 것 같았는데, 할머니의 집이 아닌 다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엄마가 들어간 집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숨이 차도록 뛰어갔다. 문을 열려 했으나, 잠겨 있었다. 나는 엄마를 크게 외치며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육중한 나무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엄마가 아니었다. 그녀는 엄마 또래의 젊은 여자였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녀를 엄마로 착각한 것 같았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여자는 나를 집 안으로 잡아끌었다. 여자는 상냥하고 너그러웠다. 그 집의 대청은 유달리 차고 시원해, 무뢰배처럼 신발을 신은 채로 마루 위를 굴러다녔지만, 여자는 웃으며 얼음을 띄운 미숫가루를 내어줄 뿐이었다. 윗도리를 가슴께까지 추켜올리고 바닥에 배를 댔다. 그녀는 귀신처럼 예뻤다. 나는 그 집의 잘 가꾸어진 정원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개구리밥 같은 대추꽃이 만발했다.
잠에서 깨어나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옆에서 부채를 부쳐주던 여자가 내 입가에 달라붙은 유과가루들을 털어주었다. 어둠에 젖어가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고기처럼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진 순간, 나는 불현듯 벌떡 일어나 할머니의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단지 여자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인데, 그것은 여느 그림자와 다르지 않았는데, 그 서늘한 어둠이 참을 수 없이 무섭고 섬뜩했다. 눈앞에 장막처럼 펼쳐진 수십 겹의 또다른 어둠을 뚫고 달렸다. 울면서 달렸다. 엄마를 부르고 싶었지만, 부를 수 없었다. 그 이름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K를 외쳤다. 울면서, 목이 쉴 때까지, 오지 않는, 올 수 없는 K를 불렀다. 외침은 입김이 되어 사라졌다. 나는 진심으로 K가 그리웠다. 웃고 있는 K,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K, 나에게 공포의 언어를 속삭이는 간악한 얼굴의 K가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달빛에 하얗게 부서지는 눈들, 그 적막한 어둠들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눈은 살아 있는 공포였다. 모든 사사로운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그것이 K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K는 이십이 세에 큰 건어물 도매상을 경영하는 남자의 아들과 결혼했다. 남자는 이십사 세였다. K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났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일주일 뒤 남자의 조모가 죽었다. 조모의 시신은 사흘간 안방에 안치되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집 음식을 나누었다. 호상이었기에, 소리내어 웃어주었다. 상주는 울음이 섞인 웃음으로 예우를 차렸다. 사흘 후, 시신은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산 한가운데에 묻혔다. 그날 새벽, K는 상여꾼들을 따르지 않고 집을 지켰다. 조모의 시신은 천천히, 영원히 집을 떠났다. 골목 어귀까지 배웅을 나갔던 K는 돌아와 대문을 열었다. 마당에 발을 들이는 순간, 엄습한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발을 뗄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버선발을 붙잡으며, K는 문턱에서 눈물을 흘렸다. K는 푸르고 단단한 낯빛을 한 텅 빈 마당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한때 집 안을 가득 메웠으나, 이제는 사라진 죽음의 흔적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 냄새가 K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것은 고요, 였다. 오랜 시간이 흘러 그 집을 떠나기 전까지, K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할 수 없었다. 발화되지 못한 공포는 뼛속 깊숙이 새겨졌다.
나는 이곳이 평생 동안 K가 품고 살았던 공포의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K의 나라였다. 비로소 K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K의 따듯한 내장 속을 걷고 있었다. K를 사랑한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믿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미명이었다. 눈에 젖은 손발이 푸르렀다. 인중에 달라붙어 얼어버린 콧물을 손등으로 비볐다.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밤새도록 걸어서 도착한 곳은 할머니의 집 앞이었다. 나는 도리어 안도했다. 이제 어느 곳이라도 상관없었다. 이미 모든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았던가. 나는 모든 것에 순응하기로 마음먹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순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하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 옛날 멀리서도 눈에 띄던 푸르른 지붕은 색이 바랠 대로 바래 있었다. 지붕의 색은 안개와 같았다. 그 낡은 지붕을 눈이 끌어안고 있었다. 굳게 닫힌 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문은 쉽게 열렸다.
눈으로 뒤덮인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 한가운데,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죽은 듯 엎드려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눈이 쌓인 마당은 바다처럼 드넓었다. 언젠가 K가 보여주었던 검푸른 바다가 떠올랐다. 손을 맞잡은 채 바라본 K의 주름진 얼굴은 아름답지도, 생기가 넘치지도 않았다. 손은 차디찼다. 그러나 K가 그리웠다. K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저기, 마당 한가운데 누워 있는 여자아이의 시선이 향하는 곳, 대청 밑에 할머니의 시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칠 일 전부터,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대청 밑의 어둠을 지켰을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일으킬 수 없는 것처럼, 할머니의 시신을 꺼낼 수 없었다. 단지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그 고요한 어둠을 바라볼 뿐이었다.
『늑대의 문장』에서 전재. (김유진, 문학동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