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대문학의 위기』를 구상한 것은, 2002년 한일(韓日)월드컵 열기가 사그라들고 막 일병을 달았을 때였습니다. 당시 국방부 소속 일어 통역병이었던 나는 전방으로 재배치되어 전근을 가게 되었습니다. 갓 부임한 소위와 함께 이동하려던 중에 지원차량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어찌어찌 인파 속에 휩쓸려 갈아타야 할 역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소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한 마음에 다음 역에 내려 전화를 했습니다. 휴대폰 사용은 불법이지만 소위는 휴대폰을 갖고 있었습니다. 양손으로 수화기를 들고 받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소위도 놀랐는지, 전화 속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갈아탔니, 고진?”
나는 군대 문학의 위기가 이러한 예로부터 알 수 있듯이 전반적인 군기 상실로부터 왔다고 생각합니다. 군대 문학의 기원이 엄격한 군기(軍氣)에서 비롯되었듯이, 집단의 영향력 저하가 현저해진 지금, 개인의 나사 풀린 행태는 이제 군대 문학을 접어야 할 시기라고 단정하게끔 하는 바입니다.
군대 문학이라는 것은 대한민국 육군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텅 비어 있던 내무반의 서재는 전후 『6.25의 진심』, 『성웅, 맥아더』, 『나는 공산당이 미워요』와 같은 몇몇 반공서적으로 풍성하게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군대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풍성함 속의 획일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군대 문학이 위대한 세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 김진명 작가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발표되면서였습니다. 물론 그전에 이현세 작가의 『까치 병장』 이나 『울부짖는 산하』 같은 역작이 있기는 했지만 만화가 아닌, 장편 소설로, 또한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북한이 적이 아닐 수 있다는 발상은 여러 적들을 양산해 냈고, 이후 군대 문학은 실로 다양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군대 문학의 위기의 단초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지요. 군대 문학의 역작인 『데프콘』 시리즈 - 한중전쟁, 한일전쟁, 한미전쟁이 완간되고, 더 이상 군인이 맞설 수 있는 적이 없을 때 이미 종언의 징후들은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DMZ』나 『실미도』와 같은 군인의 정체성을 교란하는 문제작들은 존재했습니다만 내무반에서 장병들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그즈음 군대 문학의 서가(書架)는 다양해져서 『연탄길』 이라든지, 『괭이부리말 아이들』 같은, 전혀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양성이 또 다른 다양성을 이끌어 낸 셈이지요.
단정하자면, 순수해야 합니다, 문학은. 군대 문학도 마찬가지지요. 군대 문학은 군대 문학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이전까지 군대 문학은 철저하게 개인의 군복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군인이야기이며, 동시에 군대이야기입니다. 개인과 집단이 혼연일체 되어 전투를 치러 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문학이야말로 최강의 군대 문학인 셈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주적(主敵)의 개념이 혼란스러워졌을 때 더 이상 군대는 주적으로 인한 갈등, 소설에선 중요한 요소이지요, 이를 생산해낼 동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위기가 도래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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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정진세
연극인. 극단 문(Theater Moon) 소속 작가. 2008년 희곡 <디아제팜, 삼촌>, 음악극 <미인>, 인형극 <나의 열살> 등을 쓰고 공연했다. 현재 뮤지컬 <쌈마미아!>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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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으로는 영상문화의 침투입니다. 과거에 글과 만화로 대체되던 전투씬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 보여준 전투장면으로 보다 현실화되었습니다. <블랙 호크다운> 이라는 영화는 리얼리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문학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쓰리킹즈> 라는 영화는 패러디 문학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내고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에 비견될 만한 것이라면 <쓰리킹즈>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거대서사적인 씨퀀스는 군대 문학이 가지고 있는 장엄성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재현해내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는 장병은 이제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현세 『남벌』의 ‘국경’의 개념을 영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신세대 장병들은 전투의 현장성과 핍진성을 영상으로 체험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자 상상력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감안하여, ‘전쟁’ 만 나오면 군대 문학으로 분류했던 과거 방식도 조만간 사라질 것입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서 발간 당시에는 훌륭한 진중문고였습니다만 지금은 작가의 『남한산성』과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이 크게 다르게 분류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스토리를 읽으며 자신의 일상과 가상 전투를 일치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진중문고가 군인의 삶과 유리될 때 내무반의 서가는 사회의 서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군대 문학의 정체성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 셈이지요.
군대 문학의 종언은 군 복무기간이 1년 6개월로 줄어듦에 따라 거의 확실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계급에 시간이 최소한 6개월 이상 부여될 때만이 자신의 이야기는 개인사(史)가 됩니다. 그 이하는 단순히 '체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군인들이 자신의 역사를 말해왔습니다만, 이제 군인은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나열하는, 이른바 고백록의 형식을 띠게 될 것입니다. 경험을 말하는 정도의 고백록이라면, 군대 문학은 권위를 잃게 될 것이고 과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험은 다양해지는 한편, 단편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내가 군대 있을 때는…” 이라고 시작되는 고백은 보편성과 역사성을 지닌 이야기였습니다만, 지금의 군대 이야기는 모두가 공감하기에는 너무 고생(苦生)의 기반이 허약합니다. 진정성이 떨어진 문학은 결단코 문학이 아닙니다. 확대 재생산된 담론일 뿐.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면, 과거 군대 문학이 추구하는 군대 축구 이야기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따라서 보편성과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미는 없으면서 호응하는 독자가 있었습니다만, 지금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의 비가역적인 상투성이랄까. 그 위대한 전통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더 이상 ‘축구’ 소재의 군대 문학은 사회문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전통의 상실은 군대 문학의 종언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재미와 다양성이 군대 문학을 사지(死地)로 내몬 셈이지요.
그간 군대 문학에 주력해왔던 까닭은 이렇습니다. 비효율성으로 대표되는 ‘낭만’의 개념이 사라진 지금 시대에 이를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군대이기에 그런 것이겠죠. 군대 문학의 종언을 고하러 여기에 서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사실이 가슴 아픕니다. 군대 문학은 휴머니즘의 문학입니다. 그리고 휴머니즘은 신자유주의 이후 자본 사회에서 인간이 배겨낼 수 있는 하나의 이념입니다. 사회에서는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만, 오로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의지, 혹은 ‘협동’이라든지 ‘우애’라고 하는 가치가 여전히 발동되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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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문학의 이후에는 어떤 시대가 올까,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기는 아마도 민족 문학의 시대, 민족 문학의 부활이 도래할 것입니다. 일단,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 제기가 먼저 올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군대가 사회를 점령하는 것을 ‘쿠데타’라고 합니다. 쿠데타는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폭력 등의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기습적인 활동을 의미하지요.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는 있는 작가들, 이를테면 아까 읽은 이처럼 군대 문학을 깔보고 매도하는 이들, 젊은 작가들, 군대 문학의 정체성을 흩트리는 작자들. 이들을 모두 두 대의 관광버스에 태웁니다. 이들은 대관령이든 추풍령이든 한계령이든 안개에 휩싸인 고갯길을 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위장된 사고로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지요. 자연스럽게 우리 문단은 세대교체, 물갈이가 됩니다. 민족문학의 시작이지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군대 문학의 종언을 고해야 합니다. 나의 경우, 군대 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이 민족문학에 대한 계승, 발전의 사명감으로 이어졌습니다.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나는 이제 민족문학을 할 것입니다.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서라도 민족을 저버리고서, 대체가 키보드의 ‘ㄴ’을 쳐댈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민족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족의 아픔을 생각하며 쓰는 것입니다. 민족의 아픔이라는 게 뭡니까? 홍역, 식중독, 폐암, 말라리아, 감기, 교통사고,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민족 문학 작가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민족의 한 많은 세월을 응축하여, 간결하게 미적(美的) 문장으로 만들어 줄줄이 나열하는 방식으로 빵, 터뜨리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히 재미의 관점에서 보면 꽝, 입니다. 하다 보면 재미있는 민족 문학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발상은 집어 치우고, 민족문학은 재미없다는 진리를 가슴에 품고, 그냥 묵묵히 전진하는 것입니다.
등단하는 방법은 입대하는 방법만큼이나 쉬워질 것입니다. 때를 기다렸다가, 오라는 데로 오고 가라는 데로 가면, 등단입니다. 살아남은 젊은 작가들은 아마도 반발하겠지마는, 기성의 문단, 특히 민족문학 진영은 환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간 민족문학의 계승자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죠. 틈새시장 공략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얄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북한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 환경폐기물 방류에 신음하는 비무장지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게 사실입니다.
예고 3학년 문창과 교실에는 “소설 써, 이년아”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군 생활 말년의 좌우명이 “소설 써, 말년아”로 바뀔 시점이 오고 있는 것이지요. 그들은 모두 민족문학의 가능성을 지닌 작가입니다. 아직 그 분야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들은 언젠가 지리산맥, 소백산맥, 설악산맥, 가리왕산맥 등등 산맥시리즈를 줄줄이 집필할 것이고, 민족문학의 대가들과 술자리를 같이하게 될 것입니다. 산맥시리즈가 다하면, 섬시리즈, 강시리즈, 댐시리즈 까지도 줄줄이 써 내려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평양 축전에 가서 만세를 부르고, 금강산에서 손을 흔들고, 몽골에서 따그닥 따그닥 말을 타고, 노래방에서 <아침이슬> 을 불러 재끼면 됩니다. 나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문학청년, 문학장병에게 기원합니다.
자, 이 시대 작가를 꿈꾸는 일만 이천 문학청년들이여~ 내 마지막 말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겠습니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의 독자, 즉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글을 써야 한다, 고. 우리는 오로지 한민족(韓民族)의 구성원이자, 신성한 국방의 의무 혹은 행정자치의 임무를 다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제는 예비군의 일원으로써 글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
(『자음과모음』 2009년 여름호, 통권 4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