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난 뒤, 그는 내게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결혼식을 열흘 앞둔 날이었다. 우리는 오후 두시의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페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푸른빛이 그의 손을 물들였다. 정맥이 뛰는 그의 팔뚝이 파란색 물고기처럼 보였다.
나는 그 물고기가 보라색으로, 붉은색으로 점차 변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문득 대답했다.
의자.
의자?
그가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를… 어떤 의자 말이야?
나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려 보였다.
천을 덧대거나 못을 박지 않은 나무의자. 장식이나 조각은 하나도 없어야 해. 등받이는 머리를 받칠 만큼 높고, 손으로 만지면 나뭇결이 느껴지는 의자.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데.
그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하자. 그건 이정 전문분야잖아. 이정이 그 의자를 찾으면, 내가 가져다줄게. 값이나 무게, 크기에 상관없이.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미소지었다.
좋아.
그는 내게 붙잡힌 손을 빼내며 마주 웃어 보였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길거리의 다른 사람들이 대개 구부정한 어깨로 서 있는 반면 그는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병원에 돌아가면 그는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손을 씻어댈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손을 잡았다. 점차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에 눈이 시렸다.
안과 진료를 받으러 갔던 날 그를 처음 만났다. 자꾸 눈이 충혈되고 눈물이 맺힌다고 말하자 그는 램프를 잡으며 눈을 떠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시선을 피했다. 그는 램프를 잡고 다른 각도로 빛을 비추었다. 나는 다시 그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물속에 잠긴 듯 아득한 눈이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꾸 나를 보는 겁니까.
그는 나보다 열 살이 많은 남자였다. 이르게 반백이 된 머리칼에, 몸에서는 희미하게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나는 누군가의 눈을 취미 삼아 들여다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의 눈을 보기 위해서 일주일간 빠짐없이 병원에 나왔다. 그는 예의를 다하듯 저녁을 먹자고 했다.
대화를 나누고, 웃고, 질문에 대답을 하는데 그와 나는 계속 어긋나기만 했다. 그는 마비상태에 빠진 사람처럼 반응이 한 박자씩 느렸다.
먼저 그를 이끌고 집으로 간 것은 나였다. 그는 땀을 많이 흘렸고 쉽게 지쳤다. 옷을 입기 전에는 한 시간이나 샤워를 했다. 그런데도, 그에게 매일 전화를 걸었다. 그의 찡그린 미소를 생각하면 눈이 시렸다. 나는 그에게 이상한 부채감을 느꼈다. 그는 열린 문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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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정한아
소설가. 2005년 대산대학문학상을, 2007년 장편소설 『달의 바다』로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나를 위해 웃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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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로 돌아와 주석화병을 암실에서 꺼냈다. 지난주에 들어온 18세기 중국 제품이었다. 암실에서 편안히 숨죽이고 있던 화병은 불빛 아래 나오자마자 끈적끈적한 기운을 뿜어냈다.
앤티크숍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는 햇수로 이 년이 되었다. 어학연수중에 친구들을 따라 크리스티 경매장에 갔던 것이 이 길의 첫걸음이었다. 그곳의 반짝거리는 경매장에 가득 찬 사람들은 벌레 먹은 삼단 서랍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도 소란스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서랍장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전공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 엄마 역시 말을 잘못 들은 사람처럼 내게 몸을 기울였다.
면장갑을 끼고 화병의 표면을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도포해두었던 크림이 먼지와 함께 닦여나왔다. 화병의 색깔이 점차 밝아졌다.
의자, 라고 말했을 때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 단어는 생각보다 앞서서 튀어나갔다. 말을 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오래 전 어린아이였던 내가 그 옆에 서 있었다. 방학 때마다 할아버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엄마에게 울며 대드는 소리, 넓은 정원 한가운데서 나를 맞이하던 할머니의 두 팔,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의 어두움, 이층 한옥의 냄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 의자는 그 일련의 감각들과 함께 기억 깊숙한 곳에서 떠올랐다.
할아버지 집에는 보기 드물게 커다란 가죽소파가 있었다. 의자는 소파의 거대한 그림자 속에 눈에 띄지 않는 자세로 서 있었다. 아무 특징도 없는 다리와 팔걸이를 가진 의자였는데, 앉아보면 놀랄 정도로 편안했다. 등을 기대면 나무줄기로 엮은 등받이가 허리에 부드럽게 밀착되었다.
할아버지는 보조장치를 달고 누운 환자였다. 그는 내게 한 번도 특별한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병으로 쓰러졌다는 할아버지는 그 탓인지 원래부터 그런 건지 표정이 없었다. 그는 꽤나 넉넉한 형편이었는데도 간병인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가 늘 고단했다.
방학이 오면 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할아버지 집에 내려가 지냈다. 동네에 어린아이가 하나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인상을 쓰며 책을 읽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신경을 써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하루는 온전히 할아버지에게 속해 있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시트를 갈고, 십수 가지 약을 챙기고, 빨래와 요리를 해야 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 집에서 나는 곧 시간을 잊어버렸다. 대신 공기의 질이 달라지는 것과 어둠의 농도가 짙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나를 거실로 불러 우유와 과자를 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의자에 앉았다. 거기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뜨개질을 하기도 하고, 담요를 두르고 앉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스르륵 잠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 머무는 것을 좋아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중학생이 된 나는 좀처럼 시골에 내려가지 않으려고 했다. 할머니는 어학연수중에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래도 가끔 그녀를 떠올리곤 했다. 할머니는 그 커다란 집 한쪽에서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그 의자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집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엄마는 인터폰 카메라에 비치는 내 얼굴을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하지 않고 서 있자, 곧 문이 열렸다.
왜 왔어? 당분간 보지 말자니까.
부엌에서 야채를 다듬고 있던 엄마는 꽉 다문 입술을 실룩거렸다.
엄마는 결혼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에게 아이가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전처 자식은 불씨 같은 거야. 감싸안을 수도 없고, 어디로 튀어 불이라도 나면 전부 네 책임이지.’ 엄마는 주문을 외듯 말했다. 아이는 시댁에서 데려다 키울 거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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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좀 가지러 왔어요.
나는 방에서 앨범을 꺼내 나왔다. 바닥에 앉아 앨범을 팔락이는 나를 보고 엄마가 다가왔다. 엄마는 엉거주춤 고개를 빼고, 바보스럽게 웃는 사진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건 왜, 하고 물었다.
이 의자 기억나요?
할아버지 집의 거실에서 찍은 사진을 짚어 보이며 내가 물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소파에 앉은 내 뒤로 한쪽 발이 잘려나온 의자가 보였다.
이게 뭐야.
엄마는 앨범을 끌어당겨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사진을 바라보던 엄마는 내 설명을 듣고 한참이 지나서야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그 의자가 할머니의 혼수품이었다고 했다.
만든 사람에게서 직접 선물로 받은 거라고 하셨어. 시집오면서 가져온 것 중에 그게 제일 크고 튼튼했다고.
엄마는 흥미없다는 듯 사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할머니 돌아가신 뒤에 시골 살림은 전부 처분했잖니.
중개인에게 넘긴 중고 물품 중에 그 의자도 같이 딸려갔을 거라는 얘기였다. 나는 유일한 단서가 된 사진을 앨범에서 빼냈다.
밥 안 먹고 가?
안 먹어요.
서둘러 집을 나서는 내 뒤에 대고 엄마가 물었다.
그런데 몇살이랬지, 그애가?
대답 없이 닫는 문 틈으로 그게 불씨라니까, 외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를 처음 본 것은 그의 집에서였다. 어둑어둑한 거실에서 아이를 봤을 때 나는 꽤나 당황했다. 그는 내게 한 번도 아이 얘기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짧은 머리의 남자아이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회색빛이 도는 눈동자에 팔다리가 인형처럼 가는 아이였다.
아이는 여섯 살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지 못했다.
장애 같은 건가?
내가 물었을 때 그는 칼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어.
그는 복도 끝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내가 죽은 뒤 아이는 가정부가 맡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아이는 그의 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했다. 대화를 할 수도, 질문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그냥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냇물 속의 하얀 조약돌 같은 아이였다.
주말에 나는 그와 함께 백화점에 갔다. 될 수 있는 한 집 안 살림을 전부 바꿀 참이었다. 그의 집을 채운 물건들은 모두 모래바람을 맞은 듯 퇴색된 빛깔이었다. 내가 의견을 물을 때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지 않은 채 백화점을 돌아다녔다.
쇼핑백을 가득 짊어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손을 씻는 동안 나는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 문이 열리면서 바닥의 물건들이 죽 밀렸다. 옷더미와 책, 장난감이 수집품처럼 바닥에 널려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아이가 나를 보고 투명하게 웃었다. 나는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아이는 백화점에서 사온 빵을 두 손에 들고 베어먹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아이에게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아이는 소리없이 우리 사이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밀어내듯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울렸다. 그는 아이가 빵을 다 먹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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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이라면 아이를 꼭 보내지 않아도 돼.
언젠가 내가 말했을 때 그는 피곤한 듯 얼굴을 쓸면서 대답했다.
그만 떨어져 지내는 게 좋아. 저애도 나도.
솔직히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이왕이면 외국으로 보내는 게 더 좋은데,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우습지 않은 우스갯소리에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해가 떨어지자 유난히 천장이 높은 그 집 곳곳에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새로 들어올 가구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 줄자를 들고 집 안을 돌아다녔다. 가정부를 두고 있다고 해도 구석구석에 모자라고 빈 부분이 눈에 띄었다. 어느 서랍에는 속옷과 장갑이 함께 뒹굴고 있었고, 깨진 액자와 유리도 발에 채었다. 먼지 더께와 같이 쌓여 있는 책들을 정리하는데 임신, 육아에 관한 몇 권의 책이 눈에 띄었다. 반듯하게 그어진 밑줄과 동글동글한 글씨들이 보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아내를 어떻게 잃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언제,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여자의 생김을 그려볼 수 있었다. 하얗고, 자그마한 여자였을 것이다. 이 집에서 그가 그녀와 함께 웃고 밥을 먹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끔 그 상냥한 여자가 나를 손님으로 대접하는 악몽을 꿨다. 그럴 땐 영영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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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일이 끝나면 나는 사방으로 의자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좀처럼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디자인이 닮았어도, 일단 앉아보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맞춤제작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사진을 들고 몇 군데 공방에 직접 찾아갔다. 사진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대개 장황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의자가 어떤 감촉이었는지, 어떤 형태였는지를 얘기하고 있으면 목수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참을성이 없는 축들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른 데서 알아보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이런 건 쉽게 주문을 받을 수 없어요.
한 여자 목수는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주문하신 그대로 만들려면 원목부터 새로 찾아야 해요. 그걸 제재해서 건조시키는 데 적어도 이삼 년이 걸리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건 이음으로 만든 의자예요. 전통목공 기술자가 만든 의자라는 뜻이에요. 못을 쓰지 않고 나무를 맞추는 거죠. 그런 기술은 요즘 흔한 게 아니에요.
여자 목수는 손으로 사진을 짚어 보였다.
이건 팔기 위해서 만든 의자가 아니에요. 패턴을 보면 알 수 있죠. 작가가 도면부터 직접 그렸을 거예요. 선이 조금만 어긋나도 느낌이 달라질 텐데 누가 그런 일을 맡으려고 하겠어요?
그녀는 나를 위로하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처음에 만든 곳을 찾는 게 빠를 거예요, 라고 덧붙였다.
서울 곳곳의 공방을 드나든 일주일 동안 나는 의자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갖게 되었다. 의자가 느티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연귀짜임이라는 전통목공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 또 일일이 나무를 깎아내는 방식으로 곡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목수들은 하나같이 손을 내저어 보였다. 만약 누군가 일을 맡는다 해도 웬만한 값으로는 안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매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피로와 의문이 점차 더해지는 기분이었다.
보통 시간과 노력이 아니었을 거예요.
여자 목수는 말했다.
이 의자는 그 자체가 조각인 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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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 수 없다는 말을 반복해서 들을수록 의자를 만든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할머니에게 그 의자를 선물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토록 정성을 다해 만든 의자를 선물한 사람이.
불도 켜지 않고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데, 문득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엄마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살림 말이에요, 전부 어디에 팔았다고 했죠?
엄마는 시골 살림을 처분한 중개인의 전화번호를 찾아내 더듬더듬 불러주었다. 이미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방 안의 가구들이 몸을 웅크린 듯 보였다.
중개인은 할머니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층 주택 안의 물건을 전부 다 자신이 처분했기 때문에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장부의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네요. 그 의자가… 거참 멀리도 갔네.
나는 펜 끝을 깨물어댔다. 중개인은 헛기침을 했다.
함양으로 팔려갔어요. 전화번호는 없고 주소만 있네. 그런데 아가씨, 함양이 어딘지나 알아요?
함양은 할머니의 고향이었다. 나는 종이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순간, 사진 속에서도 뿌옇기만 했던 의자의 형상이 보다 또렷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점심시간에 나는 병원으로 그를 찾아갔다. 의자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구내식당은 사람들로 몹시 혼잡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흰 가운을 입은 한 무리의 의사들 틈에서 그를 찾아냈다. 그는 탁자 끝자리에 앉아 있었다. 혼자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왠지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그는 아무 데도 보지 않고, 꼿꼿이 앉아서 음식을 씹어넘기고 있었다. 그는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나는 식사를 마친 후 냅킨으로 꼼꼼히 손가락을 닦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 옆을 가까이 스쳐갈 때도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부모님이 나를 찾아온 것은 그주의 마지막 날이었다.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온통 녹슬고 망가진 한 무더기의 유물 가운데 있었다. 경매사에서 거래한 상품이 들어온 날이었다.
가게 앞 레스토랑에서, 제법 격식 있게 옷을 차려입은 그들 부부가 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잘 지냈니.
종업원이 물을 가져오자 어머니는 성마르게 한 컵을 다 마셨다.
날을 잘못 잡았는지 도로가 꽉꽉 막혔어. 거의 움직이질 않더구나. 괜히 나섰나 싶었지만 그래도 볼일이 있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네.
나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 쪽은 줄곧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놀랄 것 없다. 뭐 다른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라 그냥 한두 마디 얘기를 하러 온 거니까. 엊그제부터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한번 불안한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게 돼. 이건 아주 힘든 문제란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사실… 이 결혼은 좀 뜻밖이야. 나는 그애가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너도 알겠지만 그애는 좀, 괴팍한 데가 있지 않니. 나는 너를 신기하게, 또 고맙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너는 곧 지금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될 거야. 결혼생활이란 간단치가 않은 법이다.
그녀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애는 병들어 있어. 네가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애는 정상이 아니야. 전처를 잃고 나서 그애는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 애엄마가 죽을 때 함께 죽은 셈이야.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그러니까 그애를 묻을 때 뭔가를 함께 묻어버린…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의 팔꿈치를 잡았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물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네가 그애를 좀 이해해줘. 네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점차 나아질 거야. 어린애는… 어린애에 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 내가 데려갈 테니까. 없는 것처럼 생각해도 돼. 알겠니? 그래, 얘길 하고 나니 좀 안심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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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야기를 마치고 샐러드를 시켜서 먹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딘지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은 가게에 들러 구경을 한 뒤에 덤덤하게 주석화병을 사갔다.
*
터미널 안은 무척 혼잡했다.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 내리는 기세가 얼마나 거센지 길에 서 있기만 해도 바짓단이 젖어들 정도였다. 승차장 앞에서 티켓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출발 직전이 되어서야 손을 흔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함양행 팻말을 달고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버스 안은 한산했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했다. 왜 거짓말을 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뭔가를 함께 묻어버린 셈이야.’ 되뇌는 말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였다. 그때 우리는 새벽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 인적이 없는 길 위에 그의 구두 소리가 울렸다.
어둠 속에서 벌떼에 쫓기는 꿈을 꿨던 적이 있어, 라고 그가 말했다. 술에 조금 취해 있던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낯선 사람처럼 보였다.
윙윙대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리고, 꼭 수만 개의 송곳에 찔리는 것 같았어. 나는 팔을 휘두르며 도망가지만 어쩔 수가 없어. 앞이 보이지 않아서 그것들이 어디로 덤벼올지 알 수가 없거든.
그는 허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지막에는 그것들과 내가 점차 어둠 속에서 알아볼 수 없게 엉기고 마는 거야.
차가운 공기중에 그의 입김이 하얗게 번졌다. 나는 그때 그의 몸속에 갇힌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눈동자를 통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를 비웃듯이, 내게 애원하듯이.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버스는 땅에서 조금 떠오른 듯 빗길을 달렸다. 함양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왠지 그곳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창밖으로 푸른 논밭이 스쳐 지나갔다.
함양 군내에 도착한 뒤에도 비는 멎지 않았다. 빗줄기를 구경하고 있는 철물점 주인에게 주소를 보였더니 길 끝까지 걸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나는 주택가를 따라 상림으로 통하는 숲의 아래까지 내려갔다. 간격을 두고 서 있는 서너 채의 건물이 보였다. 산줄기에 둘러싸인 사방이 빗소리뿐 온통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주소지를 들고 그 주변 길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 어디선가 기계음이 들렸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건물 앞에 다가선 나는 주소를 확인해보았다. 대문 앞에는 자그맣게 공방의 명패가 달려 있었다. 문은 가볍게 밀렸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 인적이 없는 널찍한 공터 쪽으로 향하자 소리가 시작된 곳이 보였다. 조도가 낮고 서늘한 그 공간은 나무 향기로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서 목재를 재단하고 있던 작은 키의 남자가 나를 바라봤다. 그는 전기톱의 스위치를 껐다.
누구시죠?
그의 얼굴이 불빛 아래에 드러났다. 남자는 내 또래쯤으로 보였다.
가구를 보러 왔어요.
나무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쓴 그는 내 표정을 보더니 선생님을 찾으러 오신 거군요, 라고 말했다.
기다리세요. 선생님은 지금 윗숲에 가셨어요.
젊은 목수는 앉은뱅이의자를 끌어오더니 내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자신은 수건을 들고 공터 쪽으로 나가 먼지를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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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벽에 붙은 오래된 영화포스터와 신문기사 들을 바라보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탁자와 문갑, 반닫이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액자에는 굵은 둥치 옆에 선 늙은 노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무슨 가구를 보러 오셨어요?
남자가 바깥에서 목소리를 높여 물어왔다.
의자요.
나 역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의자를 만들지 않는데요.
나는 가방에서 사진을 꺼냈다. 그가 내게 다가와서 사진을 건네받았다.
할머니의 의자였어요.
그는 그것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창문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이 의자를 알아요.
고개를 들지 않고서, 그가 말했다.
이건 큰아버지가 만든 거예요.
나는 남자가 일러준 대로 숲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들어갔다. 길이 험한데다 비까지 내려 주위에 인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빗방울에 부딪힌 잎사귀들이 사방에서 우수수 흔들렸다. 웅덩이에 발이 빠져 양말이 흥건해진 뒤에는 오히려 걷기가 편해졌다.
진흙물이 고인 연못에 커다란 연잎이 떠다니는 게 보였다.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서 있는데도 빗소리 때문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뭇잎이 하늘을 가려 눈앞의 길밖에 보이지 않았다.
젊은 목수는 사진을 본 뒤 내게 차를 끓여와 내어주었다. 조용한 목소리에 움직임이 단정한 남자였다. 그는 그의 큰아버지를 ‘선생님’으로 부르고 있었다. 도제수업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의자를 안다고 얘기한 순간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그 의자가 실재하기는 했던 것이다.
나는 그와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사람들의 소곤거림같이 들렸다. 나는 그에게 할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 결혼에 대해서도. 의자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실을 풀며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공터에 쌓아둔 원목 위로 계속 빗줄기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저렇게 계속 비를 맞아도 돼요?
일부러 두는 거예요. 바람과 비를 충분히 겪어야 나중에 뒤틀림이 없어요.
그가 빈 잔에 뜨거운 물을 따라주었다.
저분 밑에서 배우고 있는 건가요?
나는 노인의 사진을 가리켰다.
네, 대학에 있다가 그만두고 큰아버지께 내려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나무를 만지는 게 가족 내력이니, 도망칠 수가 없는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작업대가 있는 안쪽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집을 짓는 대목(大木)이셨어요. 큰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 모두 어려서부터 나무를 다루셨죠. 큰아버지는 저희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은데다 솜씨가 워낙 좋아서 할아버지로부터 더 각별하게 애정이랄까, 기대를 받았다고 해요. 할아버지 자신이 유명한 대목이었으니 그 큰아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랐던 거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대목이 된 건 아버지예요. 큰아버지는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소목(小木)으로 자리를 잡고 장이나 문갑 같은 가구를 만들고 계셨죠.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가 다 되어서야 큰아버지와 화해하셨어요. 할아버지 일을 물려받은 건 우리 아버지예요.
그는 찻잔을 감싸쥐었다. 그러면서 흘긋 내가 가져온 사진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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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큰아버지가 소목이 된 이유가 뭔지 늘 궁금했어요. 하지만 아버지조차 그 까닭을 알지 못했죠. 큰아버지는 원체 속을 보이지 않는 분인데다, 그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으니까요. 다만 아버지께 이 얘기를 들었어요. 언젠가 큰아버지가 젊었을 때 크게 열병을 앓았던 적이 있다고요. 하마터면 청력을 잃을 뻔했대요. 그때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난 큰아버지가 만든 게 바로 이 의자예요. 몸을 회복한 큰아버지는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하셨대요. 집을 지을 수 없다고요. 나는 이 의자를 사진으로만 봤어요. 아버지가 찍어두셨던 거죠.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만든 건 뭐든지 사진으로 찍어두셨거든요.
그는 기억을 돌이키듯 미간을 좁혔다.
그게 어떤 건지 잘 모르실 거예요. 큰 나무를 다루던 사람들은 작은 나무를 다루지 못해요. 그건 정신의 결을 반대방향으로 바꾸는 것과 같죠.
그의 얼굴은 처음보다 상기되어 보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 의자를 만들어주실 수 없나요.
저는 아직 수습 단계의 일꾼이에요. 목재 하나도 허락 없이 자를 수 없어요.
그는 처음으로 웃었다. 웃는 것을 보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나이가 어려 보였다.
저 숲에 가면 느티나무를 볼 수 있어요?
내가 물었다.
물론이죠. 선생님도 거기 계실 거예요. 일이 없을 땐 늘 그곳에 계시니까요.
그는 공터의 젖은 흙 위에 길을 그리며 방향을 일러주었다.
숲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나뭇가지들이 휘어져 눈앞을 가렸다. 나는 우산으로 가지를 밀어내며 걸어갔다. 혼자 빗속의 숲을 걸어가다니,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리 두려운 기분이 들지 않았다.
흙탕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멈춰 서서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물결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나는 우산을 다른 손으로 바꾸어 들었다. 멀리서 한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세찬 빗속이라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빗속에서 붉은빛을 띤 금색의 잎맥들이 반짝거렸다. 그와 나는 그렇게 잠시 한자리에 서 있었다. 상처 입은 나무처럼,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나는 웅성대는 숲을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느티나무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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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센터 인부들은 순식간에 아이의 방을 정리했다. 나는 결혼식이 끝난 직후 아이와 함께 보낼 물건을 이것저것 사들였다. 그런데도 박스가 채 네 개도 되지 않았다. 아이는 짐을 꾸리는 동안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새로 사준 피케셔츠를 입은 아이는 간혹 제 방 쪽을 돌아보았다.
정오 무렵, 짐을 실은 트럭이 먼저 떠난 뒤에 나는 아이와 함께 집 밖으로 나왔다.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아이가 무릎으로 의자에 올랐다.
창문 열어줄까?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이 제 아빠의 표정과 꼭 닮아 보였다. 아이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아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번갈아가며 유리창에 갖다댔다. 손가락 도장을 찍듯이.
잘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엄마의 전화와 어머니의 전화가 연달아 울렸다. 그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차 안은 내내 고요했다. 나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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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에 닿았을 때 아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그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만졌다. 아이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감촉이 부드러워서 손을 뗀 뒤에도 간지러운 느낌이 남았다. 휴게소 하늘에는 만국기가 달려 있었다. 형편없이 낡은 국기들이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젖히고 그것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식당 안은 조금 후덥지근했다. 나는 아이를 앉혀놓고 돈가스와 우동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는 연신 손으로 눈을 비볐다. 나는 뒤 테이블의 남자와 여자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들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더니 갑자기 여자가 남자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났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올렸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테이블 위에 있던 컵과 그릇을 남자가 서 있는 뒤쪽―우리를 향해 집어던졌다.
컵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아이를 끌어당겼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비명소리와 그릇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였다.
남자들이 그들을 끌고 나간 뒤, 직원들이 난장판이 된 바닥을 정리했다. 주위에서 이제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나는 아이를 위에서 덮어버린 것처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지배인이 직접 나와서 몇 번씩 사과를 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숨을 골랐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지배인은 음식값을 받지 않겠다며 우동과 돈가스를 내려놓았다. 뭘 먹을 마음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는데, 어느새 아이가 우동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아이는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젓가락을 몇 번이고 다시 고쳐쥐면서 우동을 먹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이를 바라보았다.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나오면서 나는 아이의 손을 잡았다. 하늘이 푸르렀다. 나무 아래를 지나갈 때 바람이 불었다. 땀이 식으면서 등줄기에 짜릿한 기운이 흘렀다. 나는 아이와 나란히 차에 올랐다.
트럭 기사들은 추가금액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한 뒤, 차를 돌렸다. 나는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오후가 다 되어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아이는 낯선 장소를 보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인부들은 툴툴거리면서 아이의 짐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상자에서 나오는 아이의 물건은 어딘지 아침과 조금씩 달라 보였다. 아이는 구석에 서서, 허물어졌던 자신의 방이 다시 메워지는 과정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아이는 누구보다 지쳐 보였다.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아이는 잠결에 조금 울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무거운 숨을 내쉬며 내게 안겼다. 그에게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는 아이의 짐이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잠에서 깬 아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손을 씻었다. 그는 맥주를 가져와서 아이 맞은편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공장 건물이 주저앉아 인부가 매몰되었다는 소식, 이스탄불의 유대인 회당에서 일어난 자살폭탄테러 소식이 전해졌다. 연기와 불길이 뒤섞인 영상이 번쩍거렸다. 그는 화면을 바라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그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이가 말했다.
아이가 그를 보고 말했다. 엄마.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말을 세상에서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눈을 깜박였다. 눈을 감았다 뜬 뒤에도 그 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랫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는 처음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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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주름진 목덜미와 회색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그는 한밤중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방을 나간 후, 멀리서 아이의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천장이 높은 그 집의 곳곳에 울림이 전해졌다. 나는 아이의 방에 들어간 그를 떠올려보았다.
스탠드를 켜자 엷은 빛이 흘러나왔다. 나는 가방 속에서 작은 종이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을 손바닥 위에서 거꾸로 흔들자 미세한 톱밥들이 떨어졌다. 함양에서 젊은 수습 목수와 헤어져 나올 때, 작업대 위에서 몰래 쓸어담은 것이었다. 톱밥의 감촉은 생각보다 딱딱하고 건조했다. 나는 그것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가슬가슬한 나무톱밥을 손에 쥐고 있으니 할머니의 의자가 생각났다.
나는 의자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대신 희미하기만 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암실에서 서서히 인화되는 필름을 바라보는 것 같은 과정이었다.
처음에 할머니는 그저 지친 몸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는 보다 또렷해진 모습으로 매번 다르게 떠오른다. 할머니는 심심할 때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화가 나면 의자에 곧게 앉아 분노를 삭인다. 온몸이 축 처질 땐 의자에 파묻힌 듯 기대어 눈을 감는다. 비가 오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그리고 지금 할머니는 대답을 하는 듯한 표정이다.
할머니는 오래된 질문에 대답하듯 의자에 앉아 있다. 나는 의자에 앉을 때 몸에 스며드는 느낌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 편안함과 부드러움, 기쁨, 그리고 조금의 슬픔.
누구든지 그 의자에 앉아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는, 눈에 띄지 않는 나무의자였다. (*)
『나를 위해 웃다』에서전재. (정한아, 문학동네,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