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할까요? YES. 신시아는 행인들과 웃으면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사교성 게이지가 5퍼센트 상승했다. 의류점이 나타났다. 어깨선을 따라 금실 자수가 놓인 벨벳 드레스가 눈에 띄었다. 조만간 왕궁에서 열릴 무도회에서 신시아를 돋보이게 해줄 만한 의상이었다. 구입할까요? YES. 옷값으로 500솔을 지불했다. 매력 게이지가 10퍼센트 올랐다. 옷가게 옆에는 구두가게가 있었다. 나는 발등에 크리스털 장식이 부착된 유리 구두를 골랐다. 매장 내 최고가의 상품이었다.
“오우, 누나! 레벨이 벌써 일레븐이야?”
담배꽁초가 빽빽한 재떨이를 카운터에 올려놓으면서 커서가 눈을 찡긋했다. 눈을 커서처럼 쉴 새 없이 깜박이는 버릇이 있는 그는 내가 근무 시간에 마음껏 게임을 하도록 늘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매상 ‘삥땅’을 모르는 척해주는 데 대한 답례였다.
“어서 오세요!”
녀석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백사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커서는 백사장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그가 요금을 낼 때마다 이용 시간과 무관하게 지갑에서 꺼내주는 세종대왕을 좋아했다. 그는 오늘도 여자애와 함께였다. 커서가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재떨이를 가져다주는 것을 보며 나는 무기 판매점으로 들어갔다. 매대 위에 철퇴와 곤봉, 각종 칼이며 창, 갑옷과 투구들이 진열돼 있었다. 신시아는 무도회에 가는 길에 요괴들과 맞닥뜨릴 것이다. 어떤 무기를 고를까요? 철제 갑옷과 투구, 쌍수검, 당파창을 사는 데 800솔이 들었다. 그녀의 전투력 게이지가 15퍼센트 올라갔다. 아 참, 너클은 안 파나? 좁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카운터에서는 20평 남짓한 피시방 전체가 한눈에 내다보였다. 주말 저녁이라 40여 대의 컴퓨터가 대부분 가동되고 있었다. 폭탄 터지는 소리, 총 쏘는 소리, 레이싱카 충돌하는 소리, 굿 샷! 하고 외치는 소리들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밥그릇에 숟가락이 부딪히거나 휴대폰 벨이 울리거나 변기의 물이 내려가는 소리처럼 언젠가부터 내 일상이 되어버린 소음들이었다.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후로는 담배 냄새에도 면역이 되었다. 골수에 사무치도록 맡았더니 이제는 되레 금연 구역에 있으면 옷 입은 채 목욕탕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어색했다. 이런 증상이 정상적인 것이 아님은 알지만, 평생 이렇게 살 것이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나는 알고 있었다. 아바타가 전사(戰死)하기라도 했는지 누군가 장탄식을 했다. 모니터에 빨려 들어갈 듯 눈을 고정시키고 있는 사람들의 구부정한 등을 넘고 넘어 내 시선은 맨 구석 자리로 향했다.
그들은 여느 때처럼 한 대의 컴퓨터를 앞에 놓고 칸막이가 무색하도록 붙어 앉아 있었다. 인근 상가에서 ‘백 사장’으로 통하는 사내는 이 피시방의 단골이었다. 그의 성이 백인지 아닌지, 진짜 사장이기는 한 건지, 진실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달빛을 받은 백사장(白沙場) 마냥 허옇게 번쩍이는 대머리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그 호칭은 그와 썩 잘 어울렸다.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여자애였다. 그가 처음 여자애를 이곳에 데려온 것은 한 달 전쯤의 일이었다.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옆에서 총소리라든가 비명 소리 같은 효과음이 조금만 크게 들려도 소스라쳤다. 고개를 숙인 채 무릎 위에서 마주 잡은 양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에 왠지 내 가슴이 뜨끔했었다. 유흥가 뒷골목을 걷다가 난데없이 교회를 발견한 기분이었달까. 여자애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백사장이 자판을 마구 두드렸다. 여자애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을까. 그들은 매번 블록 쌓기, 틀린 그림 찾기, 가로세로 낱말 맞추기처럼 너무 건전해서 보는 이들을 김빠지게 하는 게임만 했다. 차라리 오락실에 가서 이인용 오락을 하지. 아니면 보드카페엘 가든가. 하기야 십대 소녀와 중년의 대머리 사내가 쌍으로 그런 곳에 가면 의혹에 찬 눈초리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피시방만큼 남의 눈으로부터 자유로운 곳도 드물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모니터 밖의 세상에는, 칸막이 너머의 인간에게는 관심을 가질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네트워크 세상에서 그들은 저마다 왕이고 전사(戰士)며 공주이자 요정이었다. 악의 무리를 응징하고 제국을 건설하고 이웃나라 왕자들의 구혼도 받아주어야 했다. 할 일이 너무 많았으므로 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 피시방 특유의 생리는 나와 잘 맞았다. 게다가 신시아를 만나고 있노라면 시간도 빨리 갔다. 백사장이 여자애의 뺨을 꼬집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쇼핑을 계속할까요?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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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미월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정원에 길을 묻다」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 장편소설 『여덟 번째 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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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은 출간된 지 오래된 데다 사람의 손을 많이 타서 책장이 나달나달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서 곰팡내가 올라왔다. 방바닥에 엎드린 채 책장에 코를 박았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먼지다듬이들이 세 쌍의 다리를 버둥거리며 콧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두 다리를 꼬고 발끝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가 천천히 움직였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항 밖으로 내던져진 금붕어처럼 이윽고 하반신 전체가 세차게 요동쳤다. 몸부림은 짧고 격렬하게 끝났다. 주먹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만화책을 책상 위로 던졌다. 숨이 가라앉자 주방에서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병인이 죽을 끓이는 모양이었다. 탁상시계를 흘깃거렸다. 이제 겨우 밤 열 시였다. 신시아를 만나려면 자그마치 열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눈앞에 놓인 책상과 침대, 옷장이 가상현실 속의 물건들로 보였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는 있어도 그것들은 아무 힘이 없었다. 신시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도 못했고 세상을 바꾸지도 못했다. 저 책상을 고아원에 기증하면 신시아의 봉사정신 게이지가 10퍼센트 올라갈 텐데. 침대를 시장에 팔면 그녀의 원피스를 한 벌 살 수 있을 텐데. 옷장 옆에 쌓아둔 상자들을 열었다. 스팽글이 잔뜩 달린 스커트, 과감한 색상의 숄, 굽 높이가 10센티미터나 되는 하이힐이며 리본 장식이 치렁한 머리띠들은 모두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팬티가 축축했다. 옷장에서 속옷과 수건을 꺼냈다.
거실에서 나는 운 나쁘게도, 간병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할머니의 팬티를 벗기다 말고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의 기저귀를 혼자서 가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문제는 내가 그걸 알면서도 간병인의 도움 요청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는 못하다는 거였다. 내가 할머니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동안 간병인은 오줌에 젖은 기저귀를 빼내고 따뜻한 물수건으로 음부를 닦았다. 뼈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의 다리가 ㄱ자 모양으로 꺾인 채 간병인의 손놀림에 따라 좌우로 흐느적거렸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마를 수 있다니.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이 여자가. 한숨을 쉬었다. 반송장이 되어 눈만 끔벅이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이 노파가 정녕, 어린 나를 몸뚱이와 몽둥이가 물아일체가 되도록 때렸던 그 여자인가. 뒈질 년! 지 에미 잡아먹은 년! 빌어처먹을 녀언! 애창곡 가사 읊듯이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순서대로 욕을 퍼붓던 그 여자인가. 간병인이 할머니의 문드러진 샅에 유아용 파우더를 발랐다. 퍼프를 두들길 때마다 흰 입자가 날렸다. 할머니가 재채기를 했다. 세 번, 네 번. 재채기는 감기 기침으로 이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간병인이 물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방 안에 떠다닐 감기 바이러스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할머니가 몸을 웅크렸다. 추워. 그녀의 오그라든 어깨가 말했다. 침방울 속의 바이러스는 금방 사라지는 게 아니다. 10월의 찬바람이 늙고 병든 작은 몸뚱이를 할퀴는 것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더는 누구도 때릴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육체가 보기 흉했다. 더는 맞고만 있지 않을 만큼 강해진 나는 눈을 돌렸다. 그곳에 물컵을 든 간병인의 손이 있었다.
“아주머니, 손톱 좀 깎으셔야겠어요.”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매니큐어도 위생상 별로 안 좋아 보이네요.”
나 원 참, 학생이나 잘해. 평소엔 할머니한테 코빼기도 안 비치면서 위하는 척은, 하고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나는 욕실로 갔다. 이로써 그녀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백 가지를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간병인과 친해져봤자 피곤해지는 건 나니까.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피붙이라고 하나 있는 게 반신불수 외할머니를 남한테 맡기고 싸돌아다니기만 한다고, 집에 있을 때도 제 방에만 처박혀 있다고, 나를 마뜩찮게 쳐다보는 눈이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누워 있는 할머니의 얼굴만 봐도 숨이 막혔다. 구세군 냄비가 집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욕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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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은 건물의 꼭대기인 5층에 있었다. 4층에는 전화방이, 3층에는 DVD방이, 2층에는 노래방, 1층에는 찜질방이 입점해 있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끝낸 후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은 날에는 5층에서 만화를 보았다. 3층에서 DVD를 보거나 2층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집에 아예 들어가기 싫은 날에는 1층에서 잤다. 이 건물은 시간 때우기에 여러 모로 유용한 장소였다. 엘리베이터는 도중에 서지 않고 5층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낯익은 아르바이트생이 만화책을 건네받았다. 어, 벌써 다 보셨어요? 왜 항상 옛날 만화만 빌려가세요?와 같은 질문을 그가 또 던지기 전에 가게를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섰다. 전화방에서 뭘 했는지 머리털이 죄 곤두선 사내가 탔다. 지독한 술 냄새가 뒤따라 탔다. 문이 닫혔다. 사내가 돌연 내 앞으로 한 발 다가왔다. 나는 움찔했다. 본능적으로 청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매끄럽고 차가운 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사내는 나를 지나쳐, 건물 바깥쪽으로 면해 있는 승강기의 유리벽 앞에 섰다. 그가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았다. 그는 1층에서 내렸다.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어서 오세요! 커서 녀석이 눈을 깜박이면서 소리쳤다.
신시아는 자리보전하는 노인에게 밥을 먹여주었다. 기저귀도 갈아주었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했다. 양로원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는 것은 자립심과 봉사정신 두 항목의 게이지를 동시에 획득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였다. 그녀는 성실하고 꼼꼼했다.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매를 맞아본 적 없는 소녀다운 천진함과 스스럼없음이 온몸에서 배어났다. 내 집의 간병인으로 고용하고 싶을 만큼 일솜씨도 빼어났다. 현재 내 집의 간병인도 충분히 잘하고 있긴 하지만.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왕궁에서 무도회 초대장이 왔습니다. 오호, 올 것이 왔군. 최종 단계인 12레벨 진급이 눈앞에 있었다. 출입문이 열렸다. 담배 냄새가 섞이지 않은 바깥의 찬 공기와 함께, 야구모자를 눌러쓴 청년이 카운터로 왔다.
“제 MP3 플레이어 어딨어요?”
야구모자가 시비조로 물었다. 빈말로도 인상이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저절로 긴장이 되었다. 켕기는 구석은 물론, 있었다.
“하얀색 셔플이거든요. 조금 전에 여기 두고 갔어요.”
“못 봤는데요.”
커서가 나섰다. 녀석은 당당했다. 그럴 만했다. 배짱이 없으면 남의 유실물을 가로채는 짓은 할 수 없을 테니까. 그가 이 피시방에서 손대지 않는 것은 내 앞으로 온 택배 상자들뿐이었다. 카운터 아래 금고 뒤에 숨겨진 셔플을 야구모자는 제가 앉았던 자리에서 찾고 있었다. 커서는 태연하게 눈을 깜빡이며 게임 잡지를 뒤적였다.
“옆자리에서 그러는데, 당신이 아까 재떨이랑 같이 가져갔다는데요.”
카운터로 돌아온 야구모자가 커서를 노려보았다. 나는 바닥에 덜컥 떨어진 내 심장을 찾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커서는 침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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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보셨겠죠. 전 안 가져갔습니…”
다,와 박자를 맞춰 야구모자가 커서의 어깨를 밀쳤다. 허락도 없이 카운터 안으로 들어온 그는 결국 금고 뒤에서 셔플을 찾아냈다. 이상하다고, 그게 왜 거기 있냐고 발뺌을 하는 커서에게 주먹은 날아가지 않았다. 야구모자는 인상과 달리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담배 냄새가 섞이지 않은 바깥 공기가 한차례 더 카운터를 휩쓴 후, 커서와 나는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야구모자가 앉았던 자리. 그 왼쪽 옆자리에서는 초등학생 세 명이 헤드셋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른쪽 옆자리의 사내는, 백사장이었다. 그가 혼자 온 것은 근래 들어 처음이었다. 커서가 헛웃음을 쳤다. 나는 빈자리의 의자들을 테이블 아래로 집어넣으면서 백사장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였다. 모니터에는 기괴한 음담패설과 육두문자로 도배된 메신저가 떠 있었다. 곧이어 그는 혼자 올 때마다 즐겨 보던 변태성행위 및 잔혹엽기동영상들을 차례로 섭렵할 것이다.
카운터로 향했다. 아무도 믿지 마라. 엄마의 목소리가 발밑에서 뒤로 물러나는 바닥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는 내 오른쪽 손등의 튀어나온 뼈들을 만져보았다. 조그맣고 무른 뼈였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엄마는 몸을 떨었다.
소녀는 교복 차림이었다. 황학동 벼룩시장에서부터 중앙시장을 거쳐 청계천을 따라 평화시장까지 걸었다. 아무나 붙잡고 물었다. 너클 사려면 어디로 가야 돼요? 상인들은 되물었다. 너클이라니, 그게 뭐냐? 왜 격투만화 같은 거 보면요, 남자들이 주먹에 끼는 거 있잖아요. 상대방을 더 세게 때리려고.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고, 여기 손등 있는 데가 뾰족하고요. 아아, 그거? 아니, 여학생이 그건 뭐 하려고? 상인들은 소녀를 무시하거나 희롱했다. 왜, 남자친구가 속 썩이디? 복수하게? 돌아다니다 지쳐 포기하려고 했을 즈음이었다. 웬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너클 찾았지? 사내의 왼쪽 눈에는 칼자국처럼 세로로 깊게 팬 흉터가 있었다. 따라와. 소녀는 무서워서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구리합금으로 만들어진 너클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하고 아름다웠다. 손등 뼈를 덮는 윗면에 속이 투명하고 붉은 인조보석도 박혀 있었다. 장식이 아니라 파괴력 증강을 위한 장치라는 점에서 그것은 더욱 매혹적이었다. 칼자국이 십만 원을 불렀다. 소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하지만 이걸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거저 주마. 사내는 성대에도 칼자국이 있는지 목소리마저 갈라져 있었다. 내 딸 생각이 나서 그런다. 교복 입은 모습이 참 예뻤는데. 지금 니 나이쯤 됐겠구나. 그 험상궂은 낯으로 칼자국은 사람 좋게 웃었다. 그는 너클이 불법 유통되는 무기라고 했다. 줄 수는 있지만 위험하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참, 모양새가 좀 다른 것도 있는데. 내 가져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군복이며 군화, 야전용 전투 장비들, 사제 권총 따위가 벌여진 좌판 귀퉁이에 너클이 놓여 있었다. 잠깐은 길었다. 거리는 붐볐고 주위는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제 볼일 보기에 바빴다. 소녀를 눈여겨보는 이는 없었다.
아무도 믿지 마라. 그 말을 할 때면 엄마는 목소리까지 떨었다. 나보다도 칼자국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였다. 명심해. 자기 몸은 스스로 지켜야 돼. 세상에 믿을 건 자기 주먹밖에 없어. 비장한 어감과 달리 엄마의 부르쥔 주먹은 작고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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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얼떨결에 내팽개친 만화책에서 낱장이 한 장 떨어져나갔다. 간병인이 내 방문을 두드리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할머님이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드시고 계세요.”
짜증 게이지가 단번에 10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그럴 때는 계란프라이를 해주면 된다고 몇 번이나 일렀거늘.
주방에는 계란프라이가 담긴 접시가 네 개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완전히 익힌 것, 흰자는 완전히 익히고 노른자는 안 익히다시피 한 것, 흰자는 완전히 익히고 노른자는 살짝 익힌 것, 흰자 노른자 둘 다 살짝 익힌 것. 간병인의 프라이 솜씨는 경이에 가까웠다. 나는 세번째 접시를 턱으로 가리켰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건 3번이에요. 맛소금 안 친 거 맞죠?”
간병인은 네 가지를 번갈아 대령해보았으나 모두 거절당했다고 했다. 나는 3번 접시를 침대로 가져갔다. 할머니의 입은 망가진 서랍처럼 굳게 닫혀 있기만 했다. 프라이가 식어서 그럴 거라고 우리는 추측했다. 간병인은 능란한 솜씨로 금세 3번 프라이를 뚝딱 만들어냈다. 할머니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새로 만들어 올린 2번과 4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다양한 시도가 몇 번 더 이어진 끝에 결국 할머니가 받아들인 것은, 간병인을 집에 들이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가 만든, 솜씨가 서툴러서 3번이 되다 만, 노른자가 터져서 보기에도 궁상맞은 프라이였다. 그녀는 세 개의 못생긴 프라이를 주는 족족 받아먹었다. 입가심으로 흰죽까지 한 그릇 비웠다. 그녀가 입맛을 다시는 소리에 나는 허기를 느꼈다.
간병인이 만든 일곱 개의 프라이는 대중의 이해를 얻는 데 실패한 예술가의 조각품처럼 고독하게 접시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반찬 삼아 간병인과 나는 밤참을 먹었다. 할머니의 침대 곁에 앉아서 먹고 있노라니 세 식구가 다정한 저녁 한때를 보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간병인은 할머니에게 따뜻한 차를 끓여주었고, 나는 김치보시기를 간병인 쪽으로 밀어주었으며, 할머니는 침 넘어가는 소리로 나의 식욕을 돋워주었다. 평화로운 식탁이었다. 일상은 관계보다 견고한 것인지도 몰랐다.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만든 프라이만 먹는 거네요, 그쵸?”
그녀의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말은 잃었어도 청력에는 이상이 없다고 의사가 그랬는데. 못 들은 척하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럴 거면서, 옛날엔 왜 그렇게 나를 때렸어요?”
간병인은 내가 계란 먹고 취한 사람처럼 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멀쩡했다. 그래서 정작 묻고 싶은 것은 물을 수가 없었다. 내가 태어난 게 그렇게 싫었느냐고, 그때 엄마한테 한 얘기들은 다 나 들으라는 거였느냐고, 나는 묻지 못했다.
눈 쌓인 마당에서 엄마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엄마의 머리 위로 눈이 쌓이고 또 쌓였다. 그리고 다시 그 위로 빗자루 세례가 쏟아지는 것을 나는 담벼락 뒤에서 훔쳐보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서. 할머니가 엄마를 욕하는 것은 익히 보아왔으나 때리는 것을 목격하기는 처음이었다. 할머니는 엄마가 없을 때 나를 때렸듯이 내가 없을 때 엄마를 때려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망할 년! 집안 망신 다 시키는 년! 나가 죽을 년! 하는 식으로, 할머니가 평소 엄마에게 즐겨하는 욕은 레퍼토리가 일정했다. 그날은 달랐다. 그런 애를 왜 낳았어! 니가 어떻게 키우려고! 그 와중에도 나는 저게 설마 내 얘기는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날의 매질은 마무리도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마당에 쓰러져 통곡을 한 것은 두들겨 맞은 엄마가 아니었다. 살기등등하게 때리던 할머니였다. 그녀는 눈밭을 뒹굴며 몇 번이고 부르짖었다. 불쌍해서 어떡해! 이렇게.
할머니는 포만감 때문인지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감겼다. 이내 고른 숨소리가 새나왔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녀에게서 무슨 대답인가를 들은 것 같았다. 정말 취기가 오르기라도 한 듯이 머릿속이 몽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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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아홉 시의 피시방은 한산했다. 새벽에 와서 여태 뭉개고 있는 아저씨 손님이 네댓 명 있을 뿐이었다. 커서가 출근하는 정오까지는 바쁠 일이 없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물건이 때맞춰 배달되었다. 가슴 부분에 레이스가 풍성한 블라우스는 화면으로 보던 것보다 더 근사했다. 집에 갖다놓은 스팽글 스커트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무도회가 드디어 내일로 다가와 있었다.
“아가씨, 뭐 괜찮은 게임 좀 없어요?”
나를 부른 이는 조금 전까지 포르노 동영상을 보고 있던 남자였다. 재떨이에도 빈 컵라면 용기 안에도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눈에는 핏발이 촘촘했다.
“싸우는 거 말고, 좀 신선하고 재밌는 거 뭐 없을까.”
나는 바탕화면에 깔려 있는 ‘신시아’의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룰은 간단해요. 갓난아기를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거예요. 근데 애를 키우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잖아요. 수입이랑 지출을 관리해야 돼요. 그것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아요. 공부도 가르쳐야 하고 일도 시켜야 해요. 귀찮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애가 불량청소년으로 자라거든요. 그러면 항목별 점수를 제대로 얻을 수가 없고, 무도회에도 초대받을 수 없어요. 그럼 게임오버예요. 무도회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게임의 최종 목표거든요. 나중에 실력이 늘면, 무도회에 가기까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은 게이지를 쌓느냐에 따라 기록도 세울 수 있어요.”
신시아는 내일 왕궁으로 간다. 그녀는 무도회에서 멋진 청년들과 춤을 출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천생배필을 찾을 것이다. 신시아의 세계는 자본의 논리에 철저히 지배된다는 점에서도 현실 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자본의 위력은 현실에서보다 더 막강했다. 돈으로 성별도 바꿀 수 있고 수명도 늘릴 수 있었다. 그런데 돈으로 얻을 수 없는 유일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이 게임을 만든 이는 대단한 로맨티스트였음이 분명했다.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신시아는 완벽했다. 왕궁으로 가는 길에 출몰할 요괴들을 물리칠 만큼 강했다. 무도회에 온 그 어떤 아가씨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지혜로웠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아끼고 좋아했다. 교양, 매력, 성실성, 지식, 전투력, 사교성, 건강 등 모든 분야의 게이지가 최상위권이었다. 나는 어쩌면 무도회 당일, 수천수만의 동시 접속자들 중에서 득점 부문 신기록을 세울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기대보다는 불안이 더 컸다. 게임이 종료된 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가 없는 시간들을, 나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어쨌든 지금은 그녀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예금의 잔고를 모조리 인출했다. 꿈을 파는 가게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사기 위해서였다. 오늘 밤 신시아의 잠 속에 나타날 이 꿈은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 될 터였다. 현실에도 꿈을 사고파는 가게가 있다면. 나는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화면 하단에 말풍선이 떴다. 오래전의 그 악몽을 팔아버릴 수만 있다면. 어떤 꿈을 고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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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커서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다 싶었다. 백사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오랜만에 여자애와 함께였다. 둘은 구석 자리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예전처럼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자판의 상하 이동키를 부지런히 눌러댔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여자애가 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늑대에게 쫓기고 있었다. 늑대는 직립보행, 아니 직립구보로 나를 추격해왔다. 나는 간신히 대문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문을 잠갔다. 늑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담 밖에서 연거푸 뛰어올랐다. 담장 위로 무시무시한 늑대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끝없이. 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치다가 깨달았다. 그렇다. 방 안에는 엄마가 있다. 무서울 게 뭐란 말인가? 방으로 뛰어들면서 나는 꿈에서 깼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가 갑자기 일어나는 서슬에 인 바람을 맞아 서늘했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TV에서 새어나온 빛으로 환했다. 그 빛 속에 엄마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세븐, 식스, 파이브, 포… 화면에서는 정말이지 꿈처럼 인공위성이 발사되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팔에 매달렸다. 엄마, 나 무서운 꿈 꿨어!
보통의 엄마라면 ‘걱정 마, 엄마가 여기 있잖니’라든가 ‘꿈은 반대란다, 얘야’ 같은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겨우 열여섯 살 손위였던 그녀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주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인공위성이 창공으로 솟구쳤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조금도 기쁘지 않다는 얼굴로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우주에는, 별들이 많이 있겠지?
어린 마음에도 나는 그녀의 옆모습이 퍽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로 잠들었다. 또 꿈을 꾸었다. 늑대가 아니라 엄마가 나오는 꿈이었다. 엄마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품에서 향긋한 분유 냄새가 났다. 그녀는 무도회에 참석하는 공주처럼 눈부시게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에 오색영롱한 보석들이 박힌 왕관도 쓰고 있었다. 엄마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러도 될 만큼 꿈에서도 젊고 아름다웠다. 엄마가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미안해. 그 속삭임이 너무 부드럽고 간지러워서 나는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사뿐히 들어올려졌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팔락이며 그녀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높이 날아오르면서 자꾸만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때 손을 흔들었던가.
나는 지금도 헷갈린다.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꿈에서 겪은 일인지. 각국 인공위성의 발사 기록을 찾아보면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헷갈리는 채로 놔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였다. 중요한 건 그때 보았던 엄마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헷갈리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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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어제 여기서 팔찌 하나 못 보셨나요?”
여자애는 하루 새에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눈이 퀭했다.
“팔찌요? 그런 거 없었는데요.”
이번에도 커서가 나섰다.
“금색 줄에 빨간 알이 달린 건데, 제가 어제 두고 갔어요. 지금 보니까 제가 앉았던 자리엔 없던데. 스피커 옆에 풀어놨다가 깜박 잊고 안 가져갔어요.”
어제 두 사람은 밖에서 다투고 온 것 같았다. 카운터에서도 그들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백사장이 달랬지만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출입문으로 뛰쳐나갔다. 팔찌를 챙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커서는 당당할 뿐 아니라 친절하기까지 했다.
“어쩌죠? 현재로선 습득된 물건이 없는데. 제가 한번 더 찾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꼭 찾아야 돼요. 사실은 그 빨간 게 진짜 루ㅂ… 아니, 저한테 굉장히 의미 있는 거거든요. 선물 받은 거예요. 제발 찾아주세요.”
반은 우는 소리였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그녀는 제가 직접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나가기 전에 커서에게 세 번이나 머리를 숙였다.
“그 대머리 새끼가 사줬겠지. 흥, 어제 잃어버린 걸 오늘 어떻게 찾아? 저기 앉았다 간 사람이 몇인데. 쌔벼 가고도 남지.”
커서는 콧방귀를 뀌다 말고 정색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나 안 가져갔어. 진짜야.”
그는 결백해 보였다.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는 눈에도 알아차린 기미가 없었다. 여자애가 얼버무린 단어가 아마도 ‘진짜 루비’였으리라는 것을.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자리를 꽤 오랫동안 비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화면보호기가 작동되고 있었다. 컴컴한 우주공간 속으로 별들이 흩어졌다. 무도회는 오늘 열린다. 나는 아직 신시아를 깨우지 않았다. 그녀도 행복한 꿈에서 금방 깨어나기는 싫을 것이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들의 간격이 다소 멀었다. 어딘가 적막하고 스산해 보이는 우주였다. 바탕화면에 디스플레이 등록정보 창을 띄웠다. 화면보호기의 설정 버튼을 클릭했다. 별의 개수는 26개밖에 되지 않았다. 내 나이였다. 십육 년 전, 인공위성이 발사되던 해 내 엄마의 나이이기도 했다. 별의 개수를 최대치인 200개로 늘렸다. 별이 많은 우주는 훨씬 더 밝고 활기차 보였다.
엄마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근데 저 치마, 어제 블라우스도 그렇고. 누나 타입은 아니던데. 왜 샀어?”
커서는 언제 상자를 열어본 것일까. 신시아 주려고. 이렇게 말하면 미쳤다고 하겠지. 그녀가 로그아웃 메시지 뒤로 사라지고 나면, 그 이후의 시간들을 처치할 방도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할머니처럼 현실 세계에서의 시간은 움직일 줄을 몰랐다. 만화를 보고 수음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DVD를 관람해도 지루하기만 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이,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이 끔찍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신시아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주문하고, 배송을 기다리고, 도착한 물건을 보며 그녀를 상상할 때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렀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 잊혀질 것이다. 어긋난 관계도, 떠나간 사람도, 악몽도.
“신시아 주려고.”
커서의 눈빛이 멍해졌다. 엔간히 놀랐는지 눈 깜빡이는 버릇도 잠시 잊은 듯했다.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몸을 젖혔다. 365일 24시간 담뱃진과 전자 소음에 찌들고 있는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만 보고 있을 할머니가 떠올랐다, 한때 자신의 딸과 그 딸의 딸을 마구 팼던, 지금은 괴이하리만치 깡마른 그 팔뚝이. 아주 옛날에는 그 팔로 자신의 딸을, 소녀 시절의 내 엄마를 안아주기도 했겠지. 소리 내어 웃어보았다. 커서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할머니는 어떨까. 나처럼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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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 물체가 손에 잡혔다. 한 번도 사용해보지 않은 너클을 오른손에 끼웠다. 손등 위에서 붉은 인조보석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번쩍였다. 너클은 네 개의 반지를 가로로 이어붙인 독특한 디자인의 장신구처럼 보였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믿을 건 자신의 주먹뿐이라고, 엄마는 흐느꼈었다. 나는 주먹을 쥐었다. 허공을 향해 잽을 날려보았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소매에서 담배 냄새가 났다. 보석상의 쇼윈도는 전지 규격의 종이에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종이에 갈겨 씌어진 ‘폐업 처분’ 네 글자가 어쩐지 모니터에 뜬 ‘GAME OVER’처럼 애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성업 중이었다면 오히려 들어갈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저, 보석 감정도 하시나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스포츠신문을 읽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가느다란 금줄에 앙증맞은 루비 네 개가 달려 있는 팔찌는 전문가의 손에서 더욱 광채를 발했다. 처음 스피커 뒤에 떨어져 있던 팔찌를 주웠을 때는 임자가 누군지 짐작하지 못했다. 울먹이는 여자애를 보았을 때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허어, 이건 가짭니다. 줄도 가짜, 보석도 가짜.”
남자는 팔찌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단언했다.
“네? 그럴 리가 없는데… 좀 자세히 봐주세요.”
“척 보면 알지. 아, 금 장사 삼십 년에 그것도 못 가려낼까봐?”
그가 팔찌를 돌려주면서 덧붙였다.
“차라리 학생이 손에 끼고 있는 게 더 값나갈 거요. 도금이 돼 있으니.”
그의 눈이 너클에 꽂혀 있었다. 나는 손바닥 위의 팔찌를 들여다보았다. 선홍색의 보석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빛깔도 찬란했다. 진짜로 진짜 같았다.
“원래 보석은 모조가 더 진품 같아요. 더 반짝거리고 더 화려하거든.”
남자가 진열장을 열더니 세팅되지 않은 보석 알갱이 두 개를 핀셋으로 집어 올렸다. 1캐럿짜리 캄보디아산 천연 루비는 다홍색을 띤 자줏빛에 가까웠다. 태국산은 검은빛이 감도는 자주색이었다. 팔찌의 루비와 별 차이가 없었으나, 남자의 말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나는 진열장 아래로 늘어뜨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걸, 진짜라고 선물한 놈은 사기꾼이겠군요.”
갑작스레 낮아진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쥐었었나. 오른손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등에도 손바닥에도 너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주물렀다. 여자애는 믿고 있었다, 그것이 진짜 루비라고. 그녀는 속았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진짜 믿을 건 너의 주먹밖에 없단다. 아직도 모르겠니? 바람이 찼다. 몸이 떨렸다. 그녀의 주먹은 내 주먹보다 더 작고 연약하겠지.
커서는 카운터에 엎드려 있었다. 팔꿈치 밑에 펼쳐진 게임 잡지의 한 귀퉁이가 보였다.
“어, 누나! 뭐 놓고 갔어?”
졸다 깬 주제에 녀석은 큰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두고 갈 게 뭐 있냐는 듯, 그의 눈이 스캐너처럼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나 없을 때 그 여자애가 오면 전해줘.”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너클을 낚아챘다.
“이거 어디서 났어? 정권에 끼는 거잖아!”
“걔가 찾던 거야. 금색 줄에 빨간 알, 맞잖아.”
녀석은 눈만 깜박였다.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이 말 그대로 커서가 깜박이는 빈 문서 파일 같았다. 첫 줄에 ‘이제 봤더니 누나두 삥땅을?’이라는 문장이 입력돼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애는 오지 않았다.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백사장은 왔다. 보름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그의 옆에는 역시 십대임이 분명해 보이는 다른 여자애가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 한 대를 놓고 백사장과 붙어 앉지 않았다. 단순한 아날로그 게임을 하며 시시덕거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옆에 백사장이 아니라 해수욕장이 통째로 펼쳐져 있대도 전혀 개의치 않을 듯한 자세로 온라인 대전게임에 몰두했다. 마우스를 굴릴 때마다 그녀의 손목에서 금빛 줄에 푸른 보석이 달린 팔찌가 반짝였다.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재떨이를 가져다주며 아는 체를 했다.
“팔찌가 참 예쁘네요.”
“어머, 언니 보는 눈 있다아. 이거 진짜 사파이어예요.”
옆자리에서 백사장이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그의 눈을 한번 쏘아본 후 여자애를 향해 대꾸했다.
“그러게요. 누가 봐도 진짜 사파이언 줄 알겠어요.”
백사장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나는 보지 않았다.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여자애는 오지 않았다. 너클은 커서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불만은 없었다. 어쨌든 시간이 잘 흘러가고 있었으므로. 신시아가 여전히 내 곁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삼십삼 일째 자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을 꾸면서 말이다. 나는 그녀를 깨우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디데이 전야를 보내는 중이었다. 다음날 잠에서 깨면 그토록 고대해온 무도회가 열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앞날에 기다릴 무엇인가가 있는 삶을 그녀는 지금 누리고 있다. 더욱이 엄마가 꼭 껴안아주는 꿈을 꾸면서라면 영원히 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양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레벨 12에 도달해 있으면서 무도회 참석을 미루는 게이머는 나밖에 없으리라. 나는 어쩌면 누구도 도전한 적 없는 새로운 분야에서 신기록을 세우고 있는지도 몰랐다. 화면 상단에 말풍선이 떴다. 하룻밤 더 잘까요? (*)
『서울 동굴 가이드』에서 전재 (김미월, 문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