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란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이는 현교수와 나 모두 익히 알고 있는 바이다.
우리는 비록 어제 저녁 <동아시아 포럼>에서 처음 만났지만 오래전부터 서로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지인으로부터, 높은 학식과 뛰어난 논쟁술로 각계의 전문가들을 물리쳐온 그가 나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바 있다. 나 역시 최근 상대했던 몇몇 학자들의 어눌한 말투와 자료가 손에 쥐어져 있지 않으면 말꼬리를 흐리는 재앙에 가까운 기억력, 한 줌의 명예를 지킨답시고 과감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버리는 뻔뻔함에 일종의 절망을 느꼈기에 현교수와의 멋진 논쟁을 마음 깊이 희망해왔다.
모임이 끝나갈 무렵 형편없는 몰골의 현교수는 내게 다가와 구겨진 자기 명함을 건넸고 나는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그에게서는 더러운 냄새가 났다. 입고 있는 양복은 내 넥타이핀보다도 싸구려였으며, 게다가 만찬에 나온 중국요리의 흔적이 왼쪽 가슴에 묻어 있었다. 나는 손톱만 한 그 얼룩이 라조육과 홍소새우의 소스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두 손으로 악수를 청하고, 몇 분 동안 온갖 아부의 언사를 퍼붓는 데 주력했다. 내 직감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논쟁을 벌이게 될 터이고, 따라서 입에 발린 덕담을 통해 상대에게 잔뜩 바람을 불어넣어두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작자만큼 논파하기 쉬운 상대는 없다.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상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나는 실수를 범했다. 내 기억으로 현교수는 지방의 모 대학에 있었는데, 받은 명함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오로지 기억을 과신하는 바람에 ‘교수님의 연구실을 구경해보는 것이 소원’이라 말해버린 것이다. 현교수는 자기 연구실이 이 대학─<동아시아 포럼>이 개최된─에 있으니 원한다면 당장이라도 초대하겠다고 말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기에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이렇게 해서 현교수의 연구실이 우리의 대결 장소가 되고 말았다. 나로선 적의 소굴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두 건물을 잇는 좁은 구름다리를 건너 삼층에 있는 현교수의 연구실로 들어가 보니 상황은 더 안 좋았다. 나는 그토록 거대한 인문학자의 방을 본 적이 없었다. 내 연구실의 두 배는 넘는 넓이에, 위층까지 깨끗하게 터서 중세 유럽의 도서관을 연상케 했다. 책꽂이는 바닥에서 이층의 천장까지 16단이었고, 잘 말린 마호가니로 만든 세 개의 사다리가 각기 세 방향에 놓여 있었다.
멋지네요, 하고 말했다. 그건 입에 발린 덕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문과 마주보도록 배치된 책상 뒤쪽에는 창을 가려버린 낡은 책꽂이가 있었다. 갑골문자, 상형문자 사전을 비롯해 몽골, 티베트, 베트남, 심지어는 실크로드 너머 아랍의 사전까지 꽂혀 있었다. 특히 내 호기심을 자극한 건 그 낡은 책꽂이 오른편의 좁은 공간─출입구를 제외하고는 사면의 벽 중에서 유일하게 책꽂이로 가려지지 않은─에 걸려 있는 동아시아 전통 장검이었다. 길이가 백오십 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그 칼은 평균적인 체구의 고대 아시아인이 사용하기엔 너무 컸고, 내게 위압감까지 주었다.
“저건,”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 “장군의 칼이군요.”
“전국시대 연나라 대장군의 칼입니다.” 어딘지 차가움이 느껴지는 그 대답으로 인해, 우리 사이에 이미 논쟁이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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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박형서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소설집으로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자정의 픽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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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한 주제의 선정
논쟁이란 이견이 있는 사실에 대해 상대와 겨루는 과정이 아니다. 역으로, 상대와 겨루기 위해 이견이 있는 부분을 모색하고 그걸 극대화시키는 과정이다. 그것이 바로 이성과 논리로 진행되는 대화의 여러 스타일 중에서 논쟁만이 가진 독특함이다. 예를 들어 토론을 할 때라면, 우리는 동료로 하여금 그가 가진 재능과 기억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그의 성과가 토론에 참여한 모두의 성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쟁의 성과는 단 한 사람의 것이며, 다른 이는 오직 패배자로서만 기억된다. 그러므로 논쟁에서는 상대를 일부러 무시하고, 약 올리고, 극도로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실수를 이끌어내야 한다. 두 달 전에 나는 은밀한 성적 메타포가 내포된 언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슈퍼컴퓨터의 언어연산능력을 가진 한 여교수를 울린 적이 있다. 나는 그녀가 성도착자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교수가 내게 한 짓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연구실 한가운데 있는 소파로 안내한 그는 내 의사는 묻지 않고 태국산 우롱차를 내왔다. 나는 그가 자랑스럽게 열어젖힌 잎차 전용 냉장고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백 년 이상 묵힌 보이차, 일엽차 새순, 최고급 용정차 등이 가득했다. 태국산 우롱차라고? 나는 그 정도로는 우롱당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과시하려고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우리가 논쟁 전에 차를 마시는 이유는 음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혀를 잘 놀리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혀를 좀 데고 나니 태국산 우롱차도 꽤 맛있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각기 자기에게 유리한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머리가 너무 바빴던 탓이다. 나는 곁눈질로, 손길이 자주 닿지 않았을 책꽂이의 바닥과 특히 맨 꼭대기 칸에 있는 도서 목록을 훑으며 현교수의 독서 성향과 지식의 정도를 가늠했다. 우선 그는 고등기하학과 생태지리학, 언어철학, 응용통계학, 의상심리학, 비교종교학, 양자물리학에 조예가 깊어 보였다. 연금술을 포함한 광물발생학, 비교문학, 퍼스널암호학, 중세철학, 컴퓨터언어학, 도상학도 상당한 경지에 다다른 듯했는데, 반면에 특히 유기화학과 해상군사학에는 취약한 것 같았다. 전형적인 인문학자의 취향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논쟁은 평범하게, 공통의 전문 분야인 역사 쪽에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는 고대 극동아시아를 전공한 학자로서, 현교수처럼 고대 중국사를 전공한 학자가 놓치기 쉬운 일명 변방 오랑캐들의 역사를 끄집어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얼핏 보아도 이만 권은 넘어 보이는 책들 중에 없는 주제를, 내가 지난 일 년 동안 강연한 적이 있는 주제를, 쉽게 말해 현교수는 잘 모르고 나는 잘 알고 있는 주제를 찾아내기 위해 애썼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논쟁거리가 떠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일단 세 가지로 간추리고 나서, 그러니까 차를 더 달라며 빈 잔을 내밀고 난 후에는 각각의 주제들이 어떤 의미와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보다 면밀히 분석해보았다. 좋은 논쟁의 주제는 오늘날 이견이 분분한 것이어야 하며, 그럼에도 하나의 유력한 가설이 다양한 증거와 검증, 유추 자료를 통해 대표 학설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며, 일회성 에피소드의 수준을 넘어 근접한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어야 하며, 비전공자로서도 흥미를 가질 만한 것이어야 한다.
먼저 공자 일파와 흉노족 간의 정치적 상호의존 관계는 현란한 사료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공인된 학설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비전공자들은 흥미를 가질지 모르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다지 영향력 있는 주제가 아니다. 두번째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모헨조다로를 비롯한 인더스 문명, 그리고 황하 문명의 삼각관계는 지나치게 잡다한 사료가 많고 공인된 학설이 강력해 논쟁거리가 되기 어렵다. 언젠가 현교수가 세 문명 기원의 트라이앵글을 역으로 설정한 강연을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를 논박하는 것은 대체로 쉬운 일이나, 내가 고리타분한 학설을 되뇌고 있을 때 현교수 쪽에서 희귀한 자료를 들고 나올 경우 나는 뜻밖의 곤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논쟁의 주제를 13세기 태국의 건국 과정으로 결정했다. 크메르제국이 쇠퇴할 무렵 태국의 지방장관들인 쿤 방끌랑타오와 쿤 빠므망이 1238년 크메르 북부를 점령하면서 세운 최초의 독립왕국 수코타이 왕조는 나에게 이상적인 주제였다. 지난 학기에 나는 이 주제로 두 번의 강연을 했다. 한 번은 한반도와 수코타이 왕조와의 교류에 있어 중국은 지름길이었는가 장애물이었는가에 관한 강연이었고, 다른 한 번은 13세기 몽고 침략 시기에 수코타이 왕조의 초국가적 협력이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에 어떻게 기여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마시는 차는 태국산이다. 나는 지난 강연의 기록을 머릿속으로 훑으며, 바로 이 우롱차에서 논쟁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했다.
그 순간 현교수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귀에 거슬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책상 뒤로 걸어갔다. “이 칼, 방금 전에 연나라 대장군의 칼이라고 말씀드렸죠.” 벽에 걸린 칼을 끌러 내리며 한 말이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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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겁주기
내가 늦었다. 너무 오래 생각을 한 것이다. 이제 나의 수코타이 왕조는 ‘싸왓디 캅’ 하며 날아갔고 현교수의 전공인 연나라가 수천 년의 침묵을 깨며 우리 곁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모든 건 그의 서가에 거의 이만 권이나 되는 장서가 있는 까닭이고, 또 내가 겁 없이 그의 소굴로 들어온 탓이다. 이곳에서 그는 중국과 연관된 모든 사료를 척척 들이댈 수 있다.
현교수는 큰 칼을 힘겹게 껴안고는 내 쪽으로 뒤뚱뒤뚱 다가왔다. 그리고 선 채로 말했다. “이건 겉보기와 달리 제법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말을 끝낸 후 손잡이를 잡고는 힘을 주었다. 쉬악, 하고 무언가를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잘 보존된 정도가 아니었다. 가무잡잡한 칼집에서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 장검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할 만큼 시퍼런 빛을 뿜어냈다. 현교수는 고대 중국의 장수들이 적장 앞에서 하는 방식, 즉 날을 내 쪽으로 향한 상태로 그 칼을 뽑아들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모든 전투용 칼에는 사람의 목뼈를 자르고 내장을 뚫고 살을 찢으려는 강한 열망이 스며 있다. 날이 사람을 향할 땐 그런 욕구와 또 실제로 그래왔던 기억이 한꺼번에 깨어나 묘한 아우성을 지른다. 그 앞에서는 누구나 얼어붙기 마련이다. 고요한 밤, 인적 드문 대학 건물의 외딴 연구실에서 나는 논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반쯤 진 상태였다.
무시하기
아버지는 나를 논쟁가로 키웠다. 유치원에 입학할 즈음부터 우리의 저녁식사는 논쟁이 끝난 후에 이루어졌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어도, 아버지는 식탁에 앉자마자 논쟁을 시작하고는 한쪽이 승리할 때까지 젓가락을 들지 못하게 했다. 물론 승리하는 건 늘 아버지였다. 나는 어렸고, 약했고, 이기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매일매일 졌다. 심지어 아버지는 그날의 주제를 설명한 후 내게, 맘에 드는 쪽을 선점하도록 권하는 오만까지 부렸다. 나는 늘 유리한 쪽을 택했지만 그런다고 나아지는 건 없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의 모멸감만 짙어질 뿐이었다. 더 큰 수모를 피할 요량으로 서둘러 패배를 인정하는 건 결코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철저하게 망가지는 길 외에는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오늘은 내가 얼마나 많이 다칠까? 시작도 하기 전에 잔뜩 주눅이 든 채로 자문해보곤 했다.
“아마, 잘 모르실 겁니다.” 현교수가 장검을 칼집에 도로 꽂아 넣으며 한 말이었다.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말을 이었다. “전국시대와 삼국시대는 시기상으로 멀지 않지만, 검의 모양과 제련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당연히 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다는 걸 현교수도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나는 알고 있다. 현교수는 의도적으로 나를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논쟁의 기술을 통해 내가 흥분하길 바라는 것이다. 아무렴, 나는 알고 있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국인 진나라와 서한·동한의 약 사백 년을 사이에 두고 기원전 221년 전까지가 춘추전국시대, 기원 후 220년부터가 삼국시대다. 그러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시기상으로 멀지 않다’는 말에 집중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 시기의 사백 년은 중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하며, 몹시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객관적으로도 사백 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굳이 고개를 끄덕일 필요가 없었기에 나는 조금 더 기다렸다. 현교수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중국의 고위관리에게서 선물로 받았습니다. 부패한 작자지만 알아두었더니 꽤 도움이 됩디다. 그가 말하길, 최고의 학자들에게 문의한 결과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대장군의 칼로 확인되었다는군요. 칼날의 모양과 제련 방식, 그리고 손잡이의 도안이 또렷하게 보존되어 있어 이론의 여지가 없답니다. 어떤 학자는 더 자세히, 즉 연나라 말기의 대장군이었던 주패의 칼이라고 주장했답니다.”
“오, 그거 훌륭하군요. 주패라면 백전불패의 전설적인 장군 아닙니까.”
“주패를 아시는군요. 상당히 의외입니다.” 현교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개자식.
얄밉게 웃기
그래서 나도 따라 웃었다. 더 얄밉게 웃었다. 얄밉게 웃는 것만큼 적은 노력으로 큰 효과를 보는 논쟁의 기술도 드물다. 물론 아무렇게나 웃으면 안 된다. 너무나도 해맑게 웃어버리면 그건 이쪽에서 백기를 드는 것과 같다. 논쟁 중에는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보여야 한다. 상대가 너무나 하찮기에 어이없어 웃는다는 인상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상대가 발끈해서 대들 때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까불다가는 다친다, 얘야’ 하는 경고의 웃음을, 상대가 역사적 사료 혹은 세세한 연도를 줄줄 읊을 때면 허공을 보며 ‘하하, 귀엽군’ 하는 경탄의 웃음을 지어야 한다. 현교수 앞에서 내가 보인 웃음은 둘 다였다.
현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주패가 죽고 나서 이 칼은 진나라 황실로 들어갔습니다. 진나라가 망한 후 어떤 목적에서인지 한나라의 유명한 자객인 수윤보에게 전해졌고, 요하의 변절 이후 장거정에게 수윤보가 살해당하자 다시 갑부인 조범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조범은 이 칼을 가보로 삼아 소중히 여겼다지요.”
“조범” 하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삼국시대 사람인 상산 조운, 즉 조자룡과 관련이 있는 인물 아닙니까?”
“맞습니다.” 역시 의외라는 듯,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현교수가 말했다. “이쪽에 대해 해박하시군요.”
“약간 압니다.” 슬그머니 부아가 솟은 나는 일단 그의 말에서 튀어나온 허점을 짚기로 했다. “그런데, 무언가 좀 이상하군요. 조범이 이 칼을 가보로 간직했다고요? 조범은 용담이라는 창을 선물해서 유비 휘하에 있던 조운을 회유하려다 오히려 그 창에 죽음을 당한 자가 아닌가요? 그래서 조운이 저 유명한 장판파 싸움에서, 하후은을 죽이고 빼앗은 조조의 청홍검 대신 용담을 사용했잖습니까.” 말을 하고 나자 혹시 함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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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돌리기와 문답법
현교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말씀대로입니다. 『삼국지』에 그렇게 씌어 있지요. 하지만 조범은 용담이라는 창만 갖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은원이라는 찌르기 전용 창, 귀영쌍검으로 불리는 한 쌍의 양날 칼, 그리고 빨대처럼 빈 공간이 숨어 있어 그 안에 복어의 독이 든 암살용 단검인 하시단도 갖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병장기 애호가였던 셈이지요. 그런데…” 잠시 말을 멈춘 현교수의 얼굴에 이죽거리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런데 장판파 싸움이라니요, 설마 교수님께서는 조운의 그 전설적인 활약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고 계시는 건 아니겠지요?”
전형적인 말 돌리기 수법이다. 은원이니 귀영쌍검이니 하시단이니, 검증되지 않은 책에서 간혹 보이는 이름을 아무렇게나 갖다 댄 후 상대가 반격하기 전에 다른 화제로 후딱 넘어가는, 그 따위 수법. 사실상 말 돌리기의 달인에게는 사전에 엄격히 합의된 주제도 별 소용없다. 틈만 보였다 하면 슬그머니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로 끌어가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조자룡과 장판파라면, 그건 현교수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바로 지난달에 나는 모 방송국에서 ‘실리와 의리’라는 주제로 장판파 전투를 강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현교수님은 그럼 장판파 싸움이 없었다는 말씀이신지요?” 그가 말을 돌리고, 나는 그가 돌린 쪽에 기꺼이 집중해준 셈이다. 또 돌리더라도 역시 집중해줄 자신이 있었다.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주제로 돌려보렴, 이 82학번 애송이 녀석아. 나는 머릿속을 헤집어 장판파 파일을 꺼내고, 거칠게 훑어 내리며 내 기억의 완벽함을 재차 확인했다. “어떤 근거로 말씀하시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현교수가 웃음을 흘리며 반문했다. “먼저, 장판파 싸움에서 조운의 역할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래야 우리 사이의 이견이 어떤 건지 알고, 그것을 조율해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흠칫 놀랐다. 현교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는 방금 저 고전적인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을 사용한 것이다. 지적 논쟁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은 혐오의 대상이다. 문답법을 사용할 때는 알려주길 간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예의이므로, 그 예의 뒤에 숨어 자신의 무지를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속해서 질문만 퍼부어대는 문답법은 무식한 선생이 존경받으며 살아남을 수 있는 절호의 처세술이기도 하다.
문답법이 혐오의 대상인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문답법은 상대의 지식 정도를 사전에 테스트하는 무례한 기술이다. 상대가 대답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하자. 그러면 질문자는 제논과 헤겔, 마르크스 등 변증법과 관련된 모든 인물을 들먹이며 상세한 설명을 요구할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이러한 과정에서 질문하는 자와 대답하는 자의 신분은 검사와 피의자의 관계처럼 일률적인 상하구조로 나뉘게 된다.
또한 문답법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몰아간다. 상대가 자신이 아는 바를 얘기한다면, 즉 자신이 들고 있는 카드를 내보인다면 질문자는 그에 맞춰 자신의 전략을 수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가 1 더하기 1은 2라 말했다고 하자. 이는 산술적으로 옳은 계산이다. 하지만 일단 상대가 그런 말을 해버리고 나면, 질문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이진법상의 답인 10을 말하고, 그 순간 상대는 십진법만을 진리라고 믿는 편협한 멍청이가 되어버린다. 그런 봉변을 피하기 위해 미리 십진법에서는, 이라는 단서를 붙였다고 하자. 그럼 질문자는 수학적 검증은 수학 자체를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불가능한 검증이 언제든 존재할 수 있다는 괴델의 정리를 읊거나, 더 못된 놈이라면 아핀 변환이 무작위로 반복된 2.44차원 프랙탈 모형의 비대칭적 확산유한집성이론을 들먹이며 자연수 체계 자체를 혼란시킬 것이다.
상대가 모르는 예를 들기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이미 현교수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 말고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 주희(朱憙)의 『통감강목』, 증선지(曾先之)와 유염(劉剡)의 『십팔사략』,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 아, 또 뭐가 있을까요? 아무튼 그런 것들, 물론 중국인의 기질로 미루어 보아 모두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걸 능가할 사료가 현재로서는 없으니까요.”
반문이 섞인 이 광범위하고 가치중립적이며 표준적인 답변을 통해 그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사실 이런 대응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문답법을 사용하는 논쟁가가 드물기 때문에 굳이 참신한 방어책을 궁리할 필요도 없다. 첫 번째 공격에 실패한 현교수는, 그럼에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서가 쪽으로 걸어가 책을 한 권 뽑아왔다.
“자 여기, 기원 후 410년경에 편찬된 중국의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책이 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 부분에 관심이 있으실 것 같군요.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가 책을 읽기 시작하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동아시아를 전공하는 학자로서 나는 북경 표준어를 비롯한 7대 중국 방언과 타이어, 몽골어, 베트남어, 일본어, 버마어, 라오어, 말레이어, 자바어, 힌디어, 심지어는 러시아어까지 고급 수준으로 배웠다. 하지만 고대 중국어라면 극히 난해하여 언어학자들조차 기피하기로 소문난 언어 아닌가. 내 귀에는 중풍으로 혀가 돌아간 경극 배우의 대사처럼 띠왕띠왕 }라}라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꼴을 보아하니 이 빌어먹을 자식은 구전되던 그대로의 분위기를 살린답시고 감정까지 섞어 읽는 중이었다. 뒤통수가 찌릿하면서 난데없이 이상한 말발굽 소리마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정한 일류 논쟁가는 이런 상황에서도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법, 나는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 조심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 분가량 온갖 과장된 제스처를 취해가며 읽고 난 현교수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이마의 땀을 닦고는 책을 내려놓았다.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박수를 서너 번 쳐주는 것으로 모욕을 해버렸지만, 그가 내려놓은 책을 보자 표정 관리가 여의치 않을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하남성 쪽의 문서인 듯 『명유통사(冥洧通史)』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배자(配子)가 엉망이었고 휘갈긴 서풍(書風)도 끔찍했다.
“전한 시대에 끈으로 엮어진 목편의 문서를 말아서 진흙으로 봉하고 도장을 찍은, 일명 봉니(封泥)를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옮긴이의 신원은 알 수 없으나 초지법(抄紙法)으로 보아 후한 말기의 서적으로 추측됩니다.” 잘난 현교수의 말이었다.
그 정도쯤이야 나도 첫눈에 알아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지금 저걸 읽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이 역시 현교수의 연구실로 따라 들어온 실수 때문에 치러야 할 대가라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런데 후한 말기라고? 나는 즉시 의문을 제기했다. “현교수님, 그렇다면 이건 장판파 싸움과 무관한 것 아닙니까? 장판파 싸움은 후한 다음인 삼국시대의 일이니 말입니다.” 아아, 말을 하고 나니 섣불렀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설마 현교수가 그걸 몰랐을까.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무식한 학생들처럼 현교수의 의견 개진을 도와준 꼴이다. 궁금증을 제때제때 풀어주는 친절한 선생님처럼 현교수가 대답했다.
“물론 그렇지요. 이 『명유통사』는 장판파 싸움으로 알려진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씌어진 책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읽어드린 부분─아니 설마─혹시, 교수님께서는 고대 중국어를 못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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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들이대기
아버지가 내 기를 죽이기 위해, 나 자신이 지독한 멍청이며 천하에 쓸모 없는 녀석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당신과 어울려 따뜻한 밥을 먹을 자격이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 펼쳐 보인 논쟁의 기술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괴롭혔던 건, 나름대로 진지하게 제기한 반박에 대해 별 우스운 놈도 다 본다는 투로 폭소를 터뜨리는 기술이었다. 순식간에 상대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그 웃음에 실려 내 유년의 저녁은 원망 혹은 자책의 어둔 기슭을 향해 흘러갔다.
하하, 하고 현교수가 크게 웃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스타일로 웃었다. 내게 매운 상처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소리가 우리를 둘러싼 수백 년 된 책들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저 혼자 열심히 읽었군요. 하하, 이거 웃어서 미안합니다, 하하.”
절대로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찻잔으로 가렸다. 그는 온몸을 배배 꼬며 웃어대느라 거의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지경이었다. 내 아버지가 저녁식탁에서 끝없이 반복해서 그랬듯이 말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고대 희랍어나 라틴어, 또 고대 이집트의 민중문자인 디모틱 정도는 알지만 나 원 고대 중국어라니, 그걸 배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오늘 처음 알았군요. 아무튼 방금 전에 읽으신 부분은 어떤 내용입니까?”
현교수가 천천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며 자리에 앉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찻주전자를 들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남은 차를 내 잔에 모두 따라버렸다. “방금 전에 제가 읽은 건…” 현교수가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바로 장판파라는 곳에서 벌어진 어느 싸움의 기록입니다. 오익이라는 마을과 유허촌이라는 마을의 장정들이 장판파에서 마주쳤습니다. 숫자는 유허촌 쪽이 훨씬 많았지요. 결국 오익의 장정들은 도망쳤는데, 그 우두머리인 길량이라는 자의 아내와 아이가 뒤에 처졌습니다. 이에 부하인 공려가 적진으로 달려들어 길량의 아이를 구해옵니다. 한편 길량의 또 다른 부하인 염증도는 장판교에 단신으로 버티고 서서 유허촌 장정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이때 마율성이라는 유허촌의 거한이 놀라 장판교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지요.”
“흡사하군요.”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똑같지요.” 현교수가 오른손 검지로 허공을 찔러대며 쏘아붙였다. “오익은 신야의 백성을 비롯한 유비의 장수들이고, 길량은 유비입니다. 부하인 공려는 조운 자룡이며 그가 구해온 아이는 유비의 아들 유선입니다. 염증도는 장비이고, 다리 밑으로 굴러 떨어진 거구의 유허촌 장정은 장비의 고함 소리에 놀라 낙마한 하후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교수님 말씀은…” 나는 살짝 당황스러운 듯이 말했다. “『삼국지』의 장판파 싸움이 날조되었거나, 최소한 표절이라는 건가요?” 현교수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나는 방금 전 현교수가 했던 것보다 훨씬 과격하게, 길게 웃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현교수가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뒤돌아서 몇 권의 책을 더 꺼내왔기 때문이다. 그중 한 권은 높은 곳에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는데, 위태롭게 휘청거리면서도 떨어지지 않도록 한쪽 팔로 사다리를 단단히 붙잡아 나를 몹시 안타깝게 했다. 그 모습을 볼 때 내 뒤통수에서는 자꾸만 ‘다가닥 다가닥’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것은 지금의 중국 호북성 당양현 동북 방향, 장판파라는 곳에서 벌어진 싸움을 기록해놓은 남북조시대 사관 오윤조(吳允朝)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장판교라는 다리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이것은 아까 교수님께서도 안다고 말씀하신, 『십팔사략』의 저자 증선지(曾先之)가 남긴 일종의 일기입니다. 증선지는 이 글을 통해 장판파에서의 조운의 활약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책은 역시 교수님께서 앞서 언급하신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의 서신집입니다. 사마광은 장판파 싸움의 일부는 인정하지만, 특히 조운의 가공할 만한 활약이나 장판교에서 장비의 사자후는 단정적으로 부인했습니다. 또 이 책은 이렇고 저렇고…”
말허리 자르기
“율리우스 시저를 누가 죽였는지 아십니까?” 난데없는, 게다가 한창 설명하는 중에 튀어나온 내 질문에 현교수의 얼굴에는 당황하고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합니다, 하고 나는 속으로 이죽거렸다. 당신 말허리를 잘라먹기엔 지금이 딱 적당한 순간이라 그랬어요.
“시저의 양자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라고 보통 얘기하곤 하지만, 시저의 양자는 옥타비아누스 한 명뿐으로 그는 시저의 양자가 아닐뿐더러, 혼자 죽인 것도 아니지요. 카시우스 롱기누스, 트레보니우스 등 열네 명과 함께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단도로 찔러 죽입니다. 기원전 44년이라니, 아주 오래된 일이지요. 그러므로 역사책 외에는 탐문수사 기록이나 혈액 DNA 감식 증명서, 스물네 각도에서 찍은 기초 현장사진 등 그 어떠한 증거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은 시저가 『갈리아 원정기』에서 ‘젊은 브루투스’라고 애정이 담긴 어투로 지목할 만큼 깊이 신뢰하던 부하인, 게다가 유언장에 제2의 재산상속인으로 지명하고 제1의 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의 후견인 겸 유언 집행인으로 삼을 정도로 사랑했던 데키우스 브루투스가 바로 ‘브루투스 너마저’의 주인공이자 시저 암살의 주역이라고 봅니다. 한술 더 떠서, 비무장지대인 원로원에는 시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무기를 소지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시저는 원로원에서 독살되었으며, 저 유명한 암살 장면은 실력자들을 한꺼번에 물리치려 했던 원로원의 사후 대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암살 과정과 의도, 암살자의 신원, 현장에 대한 견해가 분분합니다. 그렇다면 원로원에서의 시저의 죽음, 더 나아가 율리우스 시저의 존재 자체도 부정되어야 할까요? 케네디 암살의 자료들이 미 상원조사위원회에 의해 조작되었다 하여 케네디가 아직 살아 있다고 얘기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현교수님의 주장은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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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하기
“다르지. 아무렴, 완전히 다르고말고!” 현교수가 얼굴을 붉히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런데 요 새끼 좀 봐라, 나한테 반말을 하네?
몰아세우기
어느 날, 중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아버지와 저녁식탁에 앉아 비교종교학에 관해 논쟁을 벌였다. 아버지의 습관적인 오만으로 인해 나는 불트만을 옹호하는 입장을 선점할 수 있었고, 아버지는 근거가 희박한 엘리아스 카네티의 후기 저작을 주요 무기로 삼았다. 그때 나는 불트만의 엄청난 대작인 『비교종교학』에 나오는 거의 모든 논증을 두 시간에 걸쳐 쏟아내었다. 식탁의 음식은 이전과 달리 아버지의 것이 아닌, 아버지를 몰아붙이는 내 침으로 뒤덮였다. 아버지가 14세기 이슬람 울라마들의 견해를 이용해 몇 마디 응수했지만, 이 또한 10세기 알 가잘리의 『이슬람 종교학의 부활』 서문을 통째로 암송함으로써 멋지게 격퇴하였다. 생명을 줄 힘을 가진 정령이 특정한 나무 그늘에서 재현된다는 믿음과 그 정령을 숭상하는 바라족의 신앙이 불트만에게는 선별적이며 예외적으로 인정되었다고 아버지가 지적하자, 나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배화교 경전 중 가장 오래된 『가타』의 「아베스타」를 통해 저 마다가스카르어를 사용하는 바라족 신앙의 원류를 보편성 차원에서 논증했다. 아버지가 『구약성경』 중 「레위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 나는 즉각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조셉 캠벨과 E. H. 카와 호이징가, 그리고 토머스 불핀치를 끌어들였다. 그러한 끊임없는 몰아세우기가 마침내 내 인생에 있어서 첫 승리를 불러왔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는, 묵묵히 젓가락을 들어 차갑게 식은 음식을 입에 쑤셔 넣음으로써 승복한 것이다.
“어떻게 다르지요? 지금 당장 그 차이를 말씀해주시지요.” 현교수가 평정을 잃은 걸 눈치 챈 나는 멈추지 않고 몰아세웠다. “간단명료하게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케네디가 아직 살아 있는 건지, 시저가 태어나지 않았던 건지. 그거 참 대단히 궁금하군요. 유감스럽게도 저는 이제껏 완전히 잘못된 역사책들을 읽어왔나 봅니다. 헤로도토스의, 투키디데스의, 플루타르크의, 사마천의,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역사책이 잘못되었던 거군요? 이제 역사의 진실을 가여운 제게도 알려주시지요.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교수님의 견해를 똑똑히 들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들은 바를 동아시아역사학회의 동료 교수들에게도 널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분명히 그들도 현교수님의 견해를 듣고는 깊이 반성할 것입니다. 자, 이제 시저와 케네디, 그리고 조자룡의 진실을 알려주시지요. 혹시 시간이 남으신다면 알렉산더 대왕, 진시황, 강감찬 장군, 아리스토텔레스, 이솝,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의 진실도 밝혀주세요. 그들은 실존했나요, 아니면 죄다 사기꾼 같은 역사가들이 지어낸 소설 속 인물인가요?”
괴상한 어법
나는 아버지를 이기던 날의 풍경을 똑똑히 기억한다. 길고 정열적인 시간이 지난 뒤라 무척 배가 고팠지만 허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 음식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는 아버지와 함께 식탁 위에 올라가 춤을 추고 싶었다. 아버지가 나를 무척 자랑스러워하리라고 생각했다. 덥석 껴안고는, 당신 아들이 난생처음 쟁취해낸 승리를 축하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리고 냅킨을 뒤집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꾹꾹 눌러 훔쳤다. 알알이 젖어가는 냅킨 너머에는 울음을 참기 위해 지은 어색한 미소가 있었고, 그 애처로운 퍼포먼스 너머에는 무참한 굴욕의 경련이 있었다. 상대가 아들이더라도 논쟁에서의 패배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던 것이다. 잠시 후 아버지는 냅킨을 내려놓는 대신 넓게 펴 얼굴을 모두 덮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감싼 채 머리를 고요히 식탁에 처박았다.
정적이 흐르던 그 저녁, 급격하게 늙어버린 아버지의 가냘픈 어깨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가 아버지였으므로 나는 아팠다. 하지만 항복한 자의 경멸스러운 모습에서 내가 받은 기묘한 희열은 육친을 향한 애정보다 강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눈을 돌리지도 않고 이 모든 상황이 만들어내는 중독을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짧은 평화가 찾아왔다. 아버지와 나는 논쟁이 사라진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을 먹었다. 서로 반찬을 집어주는 저 평균적이고 다정한 식사의 자리에서 나는 행복했다. 그땐 정말 행복했다고, 두 손으로 달을 가리켜 맹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끊임없이 다른 종류의 행복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식탁에 앉자마자 굶주린 듯 논쟁거리를 끄집어냈다.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약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기는 방법까지 알고 있었다.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패퇴시켰다. 더 큰 수모를 피하려고 개처럼 배를 드러내며 누운 아버지를 거칠게 모욕했다. 그리고 다시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지 못하도록 깊고 깊게 밟았다. 뜻대로 되자,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른 상대를 찾아 나섰다─더 이상 나와 함께 식사할 자격이 없는 아버지를 버리고서.
나는 흥분했다. 오랜 방랑 끝에 드디어 맞수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내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고꾸라뜨렸던 몰아세우기 기법마저─내 짐작이 맞다면─현교수는 방어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이 모두 끝나기도 전에 이미 평정을 되찾았고, 찻잔을 들었다 놓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벌었다. 온몸이 감동으로 뜨겁게 달궈졌다. 나는 지금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또 당신은 지금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모두는 같은 종류의 슬픈 인간, 논쟁에 중독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나는 극도로 흥분했다. 아버지를 능가하는 사람,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거대한 사람.
이윽고 현교수가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논의를 확대하지 마시지요.”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반격할지를 기다리며 나는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됨을 느꼈다.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 내 아버지처럼 꼬리를 말며 승복할 것인가, 아니면 촌스럽게 억지를 쓸 것인가. 내가 쏘아 보낸 화살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교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는 내 주장을 일일이 또는 전체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본다면, 논쟁의 고수로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이대로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기 코끼리 덤보처럼 귀를 팔랑거리며 현교수의 입에 집중했다. 이윽고 현교수가 눈을 뜨고는 고요히 말을 이었다.
“지금 우리는 조자룡의 활약이 진수의 『삼국지』에 나온 그대로인지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만약에, 장판파적으로 논의의 초점을 돌려보았을 때 유비의 신뢰와 더불어 유선의 구출이 진짜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문제라서 자가복제적 모순을 드러내겠습니까?”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현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조자룡이 멋진 인물이며 장판파 싸움은 이미 역사가인 진수에게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고 그것이 몇 사람의 의도에서 나왔건 중복의미요소함수를 고려할 때 이현령비현령이라고 하듯 중국 역사의 상대적 총합에서는 마천루의 난쟁이와 같은 것입니다.”
“난쟁이요?”
“난쟁이입니다.”
“확실히 난쟁이입니까?” 그의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해 몹시 난처해진 나는 재차 확인해보았다. “펭귄처럼 귀엽고 뒤뚱뒤뚱 걷는?”
현교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 나는 그가 나를 혼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괴상한 어법을 사용했음을 깨달았다. 아니면 내게 빌어먹을 최면이라도 걸고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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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청 부리기
물론 처음 당하는 일은 아니다. 전에도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상대를 만난 적이 있다. 나를 비롯한 두 명의 논쟁가로부터 동시에 궁지에 몰렸던 어느 괴상한 작자는 이 기술을 비장의 카드처럼 꺼내들었고, 덕분에 나와 내 동료는 서로의 못생긴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당시 내 동료가 뒤늦게나마 시도했던 저 효과적인 대처방식, 즉 딴청 부리기를 이용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치 처음 보듯, 탁자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중국 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 칼은 정말 멋지군요. 도대체 몇 명이나 베었을까요? 이런 칼이 등 뒤에 걸려 있으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허허, 저라면 누군가가 저 칼을 막 휘두를까 봐 겁이 날 텐데요. 혹시 늦은 밤 골목에서 괴한에게 칼에 찔린 경험은 없으신지요.”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현교수가 이마를 찡그리며 치사하게 굴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맞다. 사실 딴청 부리기는 논쟁을 코미디로 만들어버리는, 승자와 패자의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고약한 술수다. 하지만 논쟁에서 치사하지 않은 수법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말이다. 방금 전에 현교수 자신도 괴상한 어법을 동원하는 치사한 짓을 하지 않았던가. 일단 논쟁이 시작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한다. 그게 논쟁의 법칙이다. ‘내가 졌소’ 혹은 ‘당신이 무조건 옳소’ 하는 식의 비아냥 따위는 실수로라도 해선 안 된다. 역설이든 뭐든, 어떤 메타포가 있건 간에 승복은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비정한 게임에서 깨끗한 패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논쟁의 끝에는 언제나 한껏 웃어젖히는 승자와, 극심한 치욕감에 휩싸여 눈물과 함께 실어증세를 보이는 패자만이 존재한다.
“장판파 싸움을 믿으신다면,” 한 수씩 접고 그만 본론으로 돌아가자는 듯이 현교수가 말했다. “그 싸움에 동원된 조조의 군사가 백만 대군이었다는 것도 믿으시겠군요. 또 장비의 사자후에 하후걸이 낙마했다는 것도, 조자룡이 온몸을 난자당하며 구해온 유비의 아들 유선이 그 격렬한 싸움의 와중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는 것도. 어디 한번, 그건 거짓말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실이라고 말씀해보시죠. 관우의 양자인 관평, 초나라 마지막 명장인 요화가 실존 인물인가요? 그렇게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저팔계도 믿으시겠군요.” 하하, 과장되게 웃으며 현교수가 말했다. “저팔계를 정말 믿으신다면 이거 죄송한 일인데, 어찌하여 나는 순박한 교수님께 그런 실례를, 하하.”
그 정도에 약이 오를 내가 아니다. 나는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계속해서 딴청을 부렸다. “근데 이상한 소리가 안 들리시나요? 저는 아까부터 자꾸 말발굽 소리가 다가닥, 다가닥 들려오네요. 이거 76학번이라서 귀가 이상해질 나이가 된 건가? 그런데 현교수님은 82학번이시지요? 저희 때는 선후배 사이가 아주 엄했는데. 기합도 주고, 오월의 떠돌이 개처럼 막 두들겨 패기도 하고, 허허.”
막나가기
갑자기 현교수가 찻주전자를 옆으로 쳐서 떨어뜨렸다. 우아한 백자 찻주전자가 수박 깨지는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파편은 이리저리로 튀었으며, 그중 하나는 내 구두에도 맞았다. 그 순간 기괴한 정적이 연구실을 감돌았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온몸의 털이, 심지어는 내장에 난 융털까지도 모두 빳빳하게 곤두서버렸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지요, 안 그렇습니까?” 파편을 주울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는 듯이 소파에 편히 기댄 채, 손가락 끝으로 나를 가리키며 실실 웃었다. 아찔했다. 뒤통수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까보다 훨씬 생생하게 들려왔다. 분명 이 건물 어딘가에서 한 마리 말이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 비열한 현교수에게,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험한 꼴을 당하고 말았다.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막나가기─나는 속으로 뇌까렸다. 그건 우리처럼 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거리인 것이다. 우리의 언어 중 ‘어이, 그 사람이 논쟁에서 막나갔대’라는 문장은 늘상 ‘거 참 상종하지 말아야 할 쓰레기 같은 놈이네’라는 말을 뒤에 달고 다닌다. 이제껏 수많은 논쟁가들이 극심한 패배의 위협 앞에서도 막나가기만큼은 피해왔다. 논쟁에서 이긴다면 명예를 얻지만, 막나감으로써 얻은 승리는 오히려 그의 명예를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교수는 방금 전에 막나갔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애초부터 그의 목표는 논쟁에서 이겨 명예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무슨 짓을 저지르던 간에 나를 꺾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하였다. 이렇게 엉망으로 논쟁하는 자에게는 참혹한 패배를 맛보게 해준 후 이 바닥에서 영원히 추방해버려야 한다. 막나가기라니, 나는 정말 형편없는 개자식과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부적절한 태도 따위를 문제 삼을 여유가 없다. 이 모든 발악을 극복하고 무조건 논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 방법으로 나는, 일단은, 조금 부끄럽지만 그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기로 마음먹었다. 이 소리 들리지 않나요, 하고 낮게 속삭였다. 제대로 듣지 못해 이쪽으로 귀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예상대로 그가 예? 하고 반문하며 상체를 기울여 내 쪽으로 다가왔다.
“다가닥, 다가닥 이 소리…,” 나는 현교수의 귀가 거의 내 입 바로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숨을 가득 들이켰다. 그 상태로 이를 악물고 단전에 힘을 끌어 모았다. 양 주먹을 꽉 쥐고 발가락들도 신발 밑창을 향해 바짝 세웠다. 그리고 내 육체와 지성과 영혼에 내재된 모든 힘을 폭발시키며 고함질렀다. “안 들리냐고요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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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결론 내리기
기겁해서 뒤로 물러나 앉은 현교수는 고막이 반쯤 찢어진 표정이었다. 고막이 반쯤 찢어진 상대와의 논쟁이라면 거의 이긴 거나 다름없다.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항상 신체의 모든 기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어디 한 군데라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곳은 곧 약점으로 작용한다. 남들보다 뛰어난 점은 상대를 모욕하는 일에 있어 선봉이 된다. 나는 남들보다 고함을 잘 지르는 장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장점이 현교수의 고막을 반쯤 찢어놓은 것이다. 한동안 현교수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얼굴이 검게 익어버렸는데, 그람 음성균인 단간균(短桿菌)에 감염된 것처럼 보였다. 흑사병 말이다. 정말로 흑사병에 걸렸을 리야 없지만, 논쟁 중에 이런 얼굴색이라면 뭐 별반 다를 것도 없다.
그가 조금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막나가기는 내가 시작한 게 아니다. 찻주전자를 깨뜨림으로써 그가 먼저 시작했다. 나는 현교수의 입술을 주목함으로써 이 논쟁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 예측해보았다.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반쯤 찢어진 고막이야 곧 붙겠지만, 화들짝 놀라면서 상실한 전의는 쉽게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겼다─고 생각했다. 내가 완전히 이겨버린 것이다. 현교수의 멍하니 닫힌 입술은 확실히 그런 의미였다. 논쟁에서 침묵은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오로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자만이 사용할 수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 말이다. 현교수는 우아하게 침묵할 자격을 상실했으며, 그의 침묵은 패배의 증거일 뿐이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먼 과거를 추억하는 역사학자들의 시간이다. 어쩐지 마음이 느긋해져 현교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셸리의 낭만적인 시라도 읊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복병은 의외의 곳에 숨어 있었다. 적의를 푼 눈으로, 아니 한술 더 떠 예의 그 저열한 미소까지 입가에 단 채 현교수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깊어가는 밤을 들먹였다. 너무 늦었다는 얘기였다. 목을 움직이고, 팔다리를 휘저었다. 이건 자기가 좀 고단하다는 제스처였다. 나는 이러한 행위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그다음으로 현교수는 테이블에 놓인, 장판파 전투에서 조자룡의 활약이 사실무근이라는 근거로 가지고 온 책들을 아무렇게나 뒤적였다. 그러고는 모두 덮은 후 차곡차곡 쌓았다. 제시한 자료들을 테이블에서 철수시키겠다는 신호였다. 그때까지도, 나는 현교수의 교활한 마지막 술책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논쟁을 포기하려는 것 같다고 순박하게 오해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힌트가 주어졌음에도, 저 격렬한 치명타가 준비되던 시각에, 나는 천하의 멍청이처럼 입을 다문 채 앙증맞은 두 손을 내밀어 선물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현교수는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양팔을 넓게 펼쳐 테이블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눈을 자신의 오른쪽 허공을 향해 치켜뜬 채 자, 하고 말을 시작했다. “이제껏 잘 들었습니다. 제가 제기한 가설에 대한 교수님의 반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겠군요. 먼저…”
세번째 문장이 시작되기도 전, 나는 내가 어떤 끔찍한 위험에 노출되었는지를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 속에서 깨달았다. 이 비열한 자가, 이 교활한 후레자식이, 이 천하의 개 쌍놈이 우리의 논쟁을 제멋대로 요약하고 결론 내리려 한다! 여태 격렬하게 논쟁해놓고는 자기가 불리해지자 갑자기 제삼자로서 냉정한 중재 역할을 자처하는 수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껏 내가 제기한 의문과 화려한 논쟁술 따위는 모두 곁가지로 전락하고, 논쟁의 중심에는 현교수가 내세웠던 논리만이 일목요연하게 존재하게 된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고는 뒤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머릿속에서는 ‘다가닥 다가닥’ 엄청나게 큰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황급히 말허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좀 다른데…”
“그러니까,” 현교수가 단칼에 반박했다. 나는 그의 눈에서, 제물의 목에 이빨을 단단히 박고 난 맹수 특유의 차가운 희열을 읽었다. “간단히 말해 교수님의 의견은 승자든 패자든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일화들은 회의할 필요 없는 사실이며…”
“아니 그게 아니고, 현존하는 사료들의 가치를 일정 부분 믿지 않는다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나는 거의 울먹였다.
“그러니까,” 현교수가 다시 내 부질없는 저항을 일축했다. “기록을 조금의 여과도 없이 믿고 전파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취향은 매우 흥미롭지만 학자인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그러니까’를 거듭 들으며, 패배라는 녀석이 눈앞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가는 걸 보았다. 결국 최종적인 결정은 현교수가 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나눈 모든 논의와 반론, 재반론과 반격이 내 적수의 시선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그 결론에 의하면 나는 일개 소설에 불과한 사료에 의지해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인 얼치기 시정잡배이며, 현교수는 다양한 가설과 이견을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진실을 향해 전진하는 참다운 학자인 것이다. ‘다가닥, 다가닥’ 힘찬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힘이 쭉 빠졌고, 머리는 부서질 듯 아팠다. 나는 이토록 참혹한 패배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세 시간 넘게 진행된 이 논쟁에서 나는 단 몇 초간의 방심으로 인해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버지, 아아 아버지. 저는 어찌하여 이 개자식을 물리치지 못하고, 어찌하여 당신의 아들로서 이런 수모를 당하고… 외부에서 다친 감각들은 안으로 숨어들어 내 모든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의 마찰, 가스를 만들어내는 위장의 흐느낌, 발가락 사이로 고이는 땀의 축축함, 혀뿌리에서 스며 나오는 타액의 끈적임, 필사적인 저항을 무시하고 흐르는 눈물을 짚어내었다. 뒤통수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누군가 거기에 총이라도 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내가 이 논쟁에서 완전히 지기 전에, 마침내 끔찍한 굴욕을 당하기 전에. 소문은 계절처럼 학계 전체로 번질 것이고, 모든 동료 학자들은 현교수에게 한수 가르쳐 주겠다고 거만 떨던 내 지난날을 비웃을 것이다. 아, 나는 어찌하여 여기까지 따라왔던가. 어찌하여 아버지의 식탁을 떠나 이 황량한 무덤가로 왔던가. 뒤통수뿐 아니라 온몸이 아팠다. 아까부터 끊임없이 들려오던, 시멘트 바닥을 내딛는 말발굽 소리는 더욱 커졌다. 마치 연구실 문 바로 너머에 거대한 한 마리 말이 콧바람을 쉭쉭 내뿜으며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극도의 절망에 휩싸인 나머지 현교수의 눈을 외면하기 위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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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수단
그 순간 엄청난 굉음을 내며 연구실 문이 박살났다. 나무로 된 문은 산산조각이 되어, 그 파편이 뽀얀 먼지와 함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소파의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고, 현교수는 벌떡 일어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진한 밤색의 엄청나게 커다란 말이 서 있었다. 코에서는 허연 김이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말발굽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무시무시한 건 말 위에 앉아 있는 험상궂은 얼굴의 사내였다. 구 척은 돼 보이는 그 거구의 사내는 피범벅이 된 고대 중국 스타일의 갑주를 온몸에 두른 채, 푸른빛이 감도는 길쭉한 날이 달린 창을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아래턱까지 덮은 미늘갑옷이며 높이 솟은 누런 구리 도금 투구, 정강이 가리개에 달린 두툼한 가죽장식들은 내가 예전에 무참히 능욕해버린, 삼국시대의 전투복식을 연구한 어느 동양학자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했다. 말이 육중한 발굽 소리를 내며 연구실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나는 손발이 떨려 일어나지도 못했다. 현교수 역시 선 채로 얼어붙어 있었지만, 그래도 이 방의 주인이랍시고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딴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