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그곳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은밀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가 방 안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상가 건물이었다. 아파트가 밀집한 주택가 한복판에 미용실과 세탁소,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다는 간판을 크게 내건 반찬 전문점, 소아과와 내과 병원, 그리고 약국 등속이 들어 있는, 뭐 그냥 흔하디흔한 상가 말이다. S는 그때까지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상가 1층 로비를 두리번거리다가 드디어 지하로 내려가는 첫 계단에 발을 내려놓았다. 거기까지 따라온 봄 햇살을 등에 가득 짊어진 S는 햇살마저 힘에 겨운 듯한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천천히 밟아 내려갔다.
지하 1층으로 내려서자 심율처(心?處)라고 적힌 손바닥만 한 간판이 먼저 눈에 띄었다. 심율처라… 마음이 물 흐르듯 막힌 데 없이 순리와 이치에 맞도록 해 준다는 뜻? 아니면 맑게 흐르는 물로 마음을 씻어 낸 듯 편안해진다는 뜻인가? 아무려나. 그 간판이란 것도 자줏빛 비단 위에 금사로 수놓은 것을 액자에 표구해 걸어 놓은 것이어서 언뜻 보면 무슨 자수 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방음장치까지 덧댄 육중한 문을 밀치자 조도가 낮은 조명과, 푸른빛이 도는 옥이 주렁주렁 매달린 주렴이 시야를 막아섰다. S의 가슴께까지 길게 늘어진 주렴에서는 맑고 청아한 구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마치 바깥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비밀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S가 주렴을 걷고 앞으로 발을 내밀고 나서도 어둠에 눈을 익히려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자, 안쪽에서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저는 빈입니다…”
말 그대로 여자, 아니 빈의 목소리는 바닥에 낮게 깔려 흐르는 듯, 발뒤꿈치부터 서서히 휘감아 올라와 S의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바닥에는 어두워서 색깔이 잘 구별되지 않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실내 전체에 뭔지 모를 향긋한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향기는 콧구멍으로 맡아진다기보다는 온몸의 피부 세포를 통해 바로 흡수되는 것 같았다.
뚱뚱하고 못생겼으리라는 우려와 달리 빈은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웠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칼은 부드러운 컬이 물결치는 데다 갸름한 얼굴선은 섬세하고 우아했다.
“이쪽으로… 여기 의자에 편안하게 앉으세요.”
빈의 목소리에 이끌려 S는 빈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부렸다. 고풍스러운 흑단나무 재질의 의자 팔걸이에는 수없이 많은 나비 문양이 조각돼 있었다. S는 비단으로 덮인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편안했다. 앉은 자세로 빈을 올려다보니, 빈이 걸치고 있는 긴 가운은 속살이 비칠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빈의 몸놀림을 따라 비단 재질의 가운에서 연신 사락, 사라락 소리가 흘러나와 S의 귓등을 간지럽혔다. 작은 탁자 위에는 여러 개의 초가 타오르며 조용히 불꽃이 흔들리고 있으며, 사방 벽에는 두꺼운 커튼이 둘러쳐져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알아 두셔야 할 것들을 얘기해 드릴게요. 가장 중요한 건 보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시각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는 감각을 이용하는 거죠. 촉각, 소리, 냄새, 그리고 가끔 특별한 경우에는 맛을 보는 것도 허용돼요. 하지만 봐서는 안 돼요. 보지 않고 믿는 게 중요하니까요. 눈으로 보게 되면 다른 감각들은 다 없어져 버리고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게 되거든요. 뭔가 얘기하는 건 상관없어요.”
그러더니 빈은 검은 띠를 가져와 S의 눈에 둘렀다.
“자, 이제 눈을 가릴게요.”
빈의 말처럼 시각이 사라졌다. 아니, 검디검은 시야가 단번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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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이은
학부에서 한문학을 공부했고, 2002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낸 책으로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 『붉은 이마 여자』(공저), 『피크』(공저) 등이 있으며 어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호 아저씨 호치민』, 『부처님과 내기한 선비』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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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감은 눈꺼풀 안쪽에 촛불의 잔상이 남아 계속 흔들렸다. 제 기능을 잃은 시각 대신 예민해진 후각이 맹렬하게 작동하기 시작해 실내에 가득 들어찬 향기로운 냄새를 콧구멍으로 한껏 빨아들였다. 무슨 냄새인지 궁금해졌다.
“탁자 위에 놓인 아로마 향초에서 나는 냄새예요. 라벤더와 일랑일랑을 적당히 블렌딩한 거죠. 심신을 진정시키고 고통과 두려움을 잊게 해 줘요.”
라벤더는 ‘씻다’를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됐다. S는 상처 입은 마음을 씻고 고통을 잊기 위해 냄새에 집중했다. 열린 귓속으로 빈의 낮은 음성과 함께 가운이 벗겨지는 소리가 뒤섞여 들어와 청각을 자극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후각과 청각뿐 아니라 시각을 제외한 몸의 모든 감각기관들이 활짝 열렸다. 아니, ‘화들짝’이라는 말이 더 맞겠다. 빈이 S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에 갖다댄 순간 말이다.
“이건 단지 핏덩이를 젖 먹여 키우는 생물학적 생명 유지 기관으로서의 유방(乳房)에 그치는 것도 아니고, 너무나 서투르고 무지한 남자들이 맘대로 주무르면서 마치 여자를 정복이라도 한 양 한껏 물고 빨고 하면서 도취감에 빠져 갖고 노는 완방(玩房)도 아니에요.”
S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온몸이 오그라들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손끝의 떨림이 점점 강해져 S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빈의 가슴에서 손을 떼어 내서는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치료를 받는 중이고, 어떤 고통도 없을 거예요.”
빈은 부드럽게 말하면서 비단 손수건으로 S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었다. S는 조심스럽게 손에 힘을 약간 주었다. 매끄러운 피부의 느낌이 고스란히 손바닥에 휘감겼다. 그러다 손가락에 힘을 좀 더 실어 두 개의 가슴을 살짝 잡아 쥐었다. 손안으로 빨려 들어온 가슴이 순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 끝의 세포가 다 살아났다. 여윈 듯 보이는 몸피와 달리 가슴은 풍만했다. 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허공에 뜨는 것 같고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다. 닫힌 시각으로 자신의 안쪽 깊은 곳을 들여다보니, 가슴속에서 굳게 둘러쳤던 가시 철망을 뚫고 벚꽃 잎들이 조심스레 불거지기 시작했다. 벚꽃뿐이 아니었다. 영산홍과 목련을 비롯해 향기로운 라일락까지 한꺼번에 만개해 가슴속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지금까지 이토록 풍요로운 적은 없는 것만 같았다. 봄꽃 향기 가득한 빈의 목소리가 가슴에 가 닿은 S의 손길을 타고 온몸을 어루만졌다.
“이건 당신이 알고 있고 경험한 것들보다 훨씬 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죠. 당신이 과거에 겪었던 모든 상처들, 그리고 아직까지 잊지 못하고 온몸에 각인돼 있는 고통들을 치유해 줄 거예요.”
S는 다시 손에 모든 감각을 그러모았다. 빈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빈이 작게 아,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희열의 소리인지 고통스러운 비명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소리에 저절로 손아귀 힘이 더 세졌다. 거칠게 잡아 쥔 손바닥 안에서 빈의 가슴이 터질 듯 팽팽해지고 젖꼭지가 바짝 곤두서서 튕겨 나올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뭔가 말을 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S는 입속으로 말이 되지 않는 언어를 우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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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당신은 별로 말이 없는 환자로군요. 원한다면 가슴속에 쌓인 것들을 모두 토해 내세요.”
손가락으로 빈의 젖꼭지를 비틀고 있는데 빈은 아픔을 모두 다 받아들이는 듯한 목소리로 S를 다독인다. 그 말에 지난 30년간 겪었던 모든 고통들이 가슴속에서 서로 고개를 디밀며 아우성친다. 눈가리개를 잡아 뜯어내고 빈을 향해 마음껏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속에서 뻗어 나간 고통의 줄기는 손으로 이어져 S는 빈의 가슴을 거칠게 쥐어뜯는다.
실은, 오랫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둘러쳤던 가시 철망을 쥐어뜯고 있다. 그 안에 켜켜이 쌓여 있던 것들이 철망 사이를 비집고 한꺼번에 뒤섞인다.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온 날, S는 열 살이 많은 옆집 누나의 엉덩이에 고추를 비비면서 누나가 손에 들고 있는 회초리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봐야 했고,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부대 배치 받던 날 밤에는 선임병의 엉덩이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어야 했다. 그 이후부턴가… S의 성기는 일어설 줄 몰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사귄 애인에게 발기불능을 이유로 차였고, 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듯한 인상이 자신감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번번이 입사 시험의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젠 햇빛조차 두려워 대낮엔 바깥출입도 하지 못한다. 야간 대리운전 수입으로만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필품만 구입하고, 어떤 즐거움도 누리지 못한다. 심율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찾아와 3개월 동안 대리운전으로 번 돈을 치료비로 지불했다.
“손의 감각에 집중하세요. 그리고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알게 되는지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빈은 S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준다. 이어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옴폭하게 들어간 손바닥 중앙 부분이 젖꼭지를 감싸 안도록 도와준다.
“대개 환자들은 너무 서툴고 무지해서 내가 직접 도움을 줘야 할 때가 많아요. 자, 이렇게 해 보세요. 자신의 깊은 곳에 억눌려 있던 기쁨과 환희가 터져 나오도록 섬세하게 느끼는 거예요.”
섬세하게… 느껴진다. 빈의 턱에서 목덜미로 이어지는 선은 한없이 매끄럽고, 다시 쇄골에서 가슴, 젖꼭지로 내리닫는 굴곡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S의 손이 막힘없이 타고 흐른다. 빈의 호흡을 따라 조용히 오르내리는 명치에 이르러 S의 손바닥은 습기를 머금은 듯 축축해진다. 라벤더와 일랑일랑이 잘 섞인 향기는 빈의 가슴에서도 풍겨 나와 S의 후각을 유쾌하게 마비시킨다. 게다가 빈이 간혹 내뱉는 신비롭고 낮은 신음은 또 어떤가. S를 향한 빈의 마음이 느껴져 S는 마치 깊디깊은 원시 수풀림 속에 들어간 듯 몸의 모든 감각이 청쾌하고 무한대로 넓어진다. 빈의 간절한 치유는 계속된다. 부드럽고, 넘치고, 향기로운 빈의 가슴은 S의 손바닥 안에서 물결친다. 거기에 S, 자신이 있… 다.
하지만 여전히 고통과 상처가 S의 마음속에서 맹렬하게 끓어넘친다. S는 환희와 고통의 세계를 넘나들며 이내 혼란스러워진다. 빈의 소리와 냄새가 꿈인 듯 미래인 듯 아득해지고, 차가운 과거와 혹독한 현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든다. 마음이… 흐르다 막힌다. 심율…
그러다 갑자기 S의 손이 아래로 뻗어 가 빈의 음부를 거칠게 움켜쥔다. 묘한 흥분과 열기가 등줄기를 타고 정수리까지 빠르게 올라온다. 여긴 지금 S와 빈, 둘만 존재한다. 거세게 빈을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긴다.
“쉽지 않군요. 하긴, 천지 사방에 온통 상처 입은 사람들투성이죠. 이젠 치유하고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할 때예요. 당신에겐 좀 더 심층적인 치료가 필요하겠군요.”
빈은 낮게 한숨을 내뱉더니 S의 팔을 가져다 자신의 허리에 두른다. 어느새 빈의 향기가 코끝 바로 앞까지 다가든다… 싶더니 허리를 들어올린 자세로 빈이 자신의 젖꼭지를 S에게 물려 준다. 입안 가득 강렬한 향기와 촉감이 채워진다. 아! 아! S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던 무수한 언어들을 순식간에 일갈한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S의 안에 멈춰 있던 모든 것들이 뚫리고, 그 모든 것들은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S는 먼 길을 돌아 점점 더 작아져 유아기를 지나 태아기를 거치고 피에 말갛게 씻긴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렁찬 울음소리가 S의 첫 세상을 열어젖힌다. S는 그제야 빈을 완전히 신뢰한다. 빈의 가는 몸피와 풍만한 가슴 속에 고여 있던 무한한 치유를 완전히 경험한다. 이제… 됐다. 서서히… 서고 있다. S는 아랫도리의 감각을 섬세하게 느낀다.
“이제 된 것 같군요. 오늘은 이만하죠. 일주일 후에 다시 오세요. 치료는 6주 동안 진행될 겁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빈은 S에게서 몸을 떼어 내고는 가운을 걸치고 사락, 사라락, 소리를 내며 방 안쪽에 나 있는 또 다른 문을 향해 걸음을 떼 놓는다. S는 눈가리개를 풀고 의자에서 일어나 빈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고는 걸음을 돌려 출입문으로 향한다. 문밖 세상에는 여전히 봄 햇살이 가득하겠지. 치료가 끝나면 햇살을 정면으로, 가슴 한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을까. 아직까지 매끄러운 살갗의 감촉이 남아 있는 손으로 출입문을 밀치려는데 등 뒤에서 빈의 목소리가 따라온다.
“아, 잊은 게 있네요. 심층 치료는 비용을 더 지불하셔야 합니다. 잘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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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P
경계
봄 햇살은 ‘봄 햇살’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따갑게 빈의 정수리를 달궈 놓았다. 지구 온난화 문제로 계절의 경계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란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서 빈은 보행 신호가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서둘러 건넜다. 횡단보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는 무슨 공사를 하는지 경계막이 쳐진 공사장 안에서 소음과 먼지가 넘쳐 흘러나오고 있었다. 횡단보도 저쪽은 서울시 은평구 수색동, 건너고 나니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이었다. 그러니까 횡단보도를 건너며 빈은 시의 경계를 지난 셈이다. 고작 몇 발짝으로 서울을 벗어난 빈은 이미 바싹 말라 버리고 개망초만 무성하게 자라 있는 개천 변을 따라 걸으며 눈으로 건천빌라를 찾았다. 손차양도 별 소용없어 내리꽂히는 볕을 피해 얼른 건물 현관으로 들어섰다. 건천빌라는 말이 빌라일 뿐 건물 외벽의 페인트가 다 떨어져 나간 다세대주택으로, 입구가 열린 쓰레기 봉투들이 주변에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빈은 쓰레기 봉투 더미를 간신히 피해 기다란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추스르며 계단을 내려가 101호 초인종을 눌렀다.
“심율처에서 왔습니다. P 씨 되시나요?”
P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빈은 문을 벌리고 들어가 손바닥만 한 거실에 가방을 부려 놓았다. 이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서서 뭐라 웅얼거리고 있는 P의 손을 잡아끌어 문을 닫고는 걸쇠까지 단단히 여며 잠갔다. 방문 치료는 오랜 망설임 끝에 어렵게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그중 반수 이상의 환자는 문 앞에서 빈을 돌려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때문에 일단 환자와 대면하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집 안 공기가 너무 건조하군요.”
빈은 얼마나 감지 않은 건지 모르게 기름기가 끼고 푸석거리는 파마머리를 긁적이고 있는 P의 눈을 쳐다보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싱크대엔 닦지 않은 그릇들이 가득 차 있고, 집 안 구석구석엔 먼지가 뭉쳐 굴러다녔다.
“누구신데… 이 집엔 누군가 찾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아요.”
P가 내뱉는 말은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아 소리들이 파삭거리며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P의 목소리는 빈의 귓바퀴에 제대로 와 닿지 못하고 공중에서 떨려 그 끝이 흐려졌다. 찾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니.
“P 씨를 방문한 거예요. 제게 와 달라고 하셨잖아요.”
P는 마치 어른들이 없는 집을 혼자 지키고 있던 어린아이가 낯선 사람을 맞닥뜨렸을 때처럼 뒷걸음질 치는 듯한 눈빛이다. 방문 치료를 요청한 사실을 잊었거나, 혹은 무엇도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빈은 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P의 양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비단 손수건으로 버석거리는 P의 얼굴을 쓸어 주었다.
“제가요? 그런 적 없는데… 이 집에 누가 온 건 처음이에요. 여긴 아무도 없는데…”
아무도 없다는 P의 말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P 자신조차 이미 오래전에 그 ‘아무도’에 포함돼 버렸을 테지. 빈은 P의 떨림이 진정되고 손안에 따뜻한 온기가 번질 때까지 아무 말 없는 채로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점차 P의 홍채가 또렷해졌다. 빈은 부드럽게 P의 손을 놓고 가방에서 라벤더와 일랑일랑 향초를 꺼내 집 안 곳곳에 피워 놓았다. 빈은 이어 가방에서 두려움을 치유하는데 쓰이는 보르딘의 「프린스 이골」이 담긴 시디를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집 안 어디에서도 시디 플레이어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가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불꽃들은 바싹 마른 공기를 태우며 끊임없이 흔들렸다. 아로마 향기가 퍼지면서 집 안의 악취가 서서히 사라져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빈은 쉼 없이 아무도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P를 일으켜 세워 침대로 이끌었다. 사락거리는 치맛자락이 P의 발에 밟혀 하마터면 둘 다 고꾸라질 뻔했다. 그 결에 빈과 P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었다. 침대에 P를 눕힌 뒤, 빈은 그 옆에 편안하게 걸터앉았다.
“오랫동안 집 안에만 있었던 모양이군요.”
서른다섯? 혹은 마흔쯤? 빈은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햇빛을 보지 못해 병색이 짙은 P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서워서요. 밖에 나가면 세상엔 온통 괴물들뿐이에요. 누군가 나를 덮칠 것만 같고, 사람들은 험상궂은 표정들이에요. 집 앞에 횡단보도가 있는데 거길 건너면 사람들이 더 많아져요. 한번은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대형 할인 마트에 갔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달려들잖겠어요? 괴물들이에요. 눈엔 핏발이 서 있고 이빨을 드러내고는 으르렁거려요. 난… 싫어요.”
P는 빈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공포든 뭐든, P에게는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 뭔가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아주 나쁜 건 아니다. P는 사람들 무리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빈이 들은 바로는 P가 집 밖 출입을 하지 않은 건 이미 여러 달째다. P는 뭐랄까, 경계 바깥에서 혼자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다.
빈은 천천히 앞섶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가슴은 아침보다 조금 더 커져 있다. 가슴에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일어 몸은 좀 무거웠지만 치료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까 S라는 남자가 다녀간 뒤 충분히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여긴 아무도 없잖아요. 그리고 원한다면 내 얼굴은 보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자, 손을 이쪽으로 뻗어 보세요.”
빈의 가슴에 와 닿는 P의 손길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까와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빈의 치료에 대한 반응이다. 다행이다. P는 빈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이 정도로 치료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빈은 잘 알고 있다. S 같은 이성 환자의 경우는 좀 쉬운 편이다. 다른 성(性)의 경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데다, 막연한 기대감과 호기심, 욕망을 한꺼번에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동성 환자는 그리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동성의 몸에 대한 신비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므로 좀 더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시각을 지우는 것도 그리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상상에 의해 감각을 깨우기보다는 감각을 직접 자극해 줘야 한다. 빈은 P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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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빈과 P는 마주 보고 누운 채로 서로의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빈은 가슴의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크기도 좀 더 커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빈의 가슴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빈이 막 서른을 넘긴 무렵이었다. 환자들을 치료하고 나면 통증과 함께 가슴에 딱딱한 멍울이 만져졌다. 사춘기 무렵, 처음으로 가슴에 멍울이 단단하게 잡혀 콕콕 쑤시며 아팠던 것과 비슷했다. 반면 몸피는 점점 더 가늘어져 갔다. 그러니까 빈의 몸은 기형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피골이 상접할 듯 말라 가는 몸에 가슴은 용량이 점점 더 커져 지금은 가슴을 지탱하느라 허리와 척추에도 무리가 온다. 그동안 빈이 치료한 환자들이 얼마나 될까? 줄잡아 500명 가까이는 될 듯싶다. 그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그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는 동안 그 상처와 고통의 흔적들이 멍울 져서 빈에게 켜켜이 쌓여 온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내 손은 지금 당신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허리선을 따라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고 있어요. 느껴지나요?”
P는 첫 경험을 하는 소녀처럼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작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방문 치료는 심율처로 찾아온 환자들의 경우보다 빈을 더 긴장하게 만든다. 감각은 쉽게 열리지 않고 반응은 더디다.
“나를 만지거나 내게서 나는 냄새를 맡아도 좋고, 혹은 맛을 보는 것도 괜찮아요. 뭔가 말을 하거나 소리를 내 보세요. 당신의 어느 부분을 만지는 게 좋은지 집중해서 느껴 보세요.”
P에게서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난다. 빈이 손을 미끄러트려 P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든다. P의 음부는 바싹 말라 있다. P가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집 안의 공기는 건조하다 못해 빈의 물기마저 금세 빼앗아갈 것만 같다. 뭔가 마실 것을 원하느냐고 P에게 물었다.
“목이 말라요. 하지만 집 안엔 마실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횡단보도 건너편, 그러니까 시의 경계 안쪽에 새로 아주 큰 스파가 들어온대요. 그래서 배수 공사를 하던데, 그게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겠어요. 일주일째 물이 안 나와요. 그나마 받아 놨던 물도 이젠 바닥났어요.”
P의 갈증이 고스란히 빈에게 전해진다. P는 일주일이 아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메말라 있었던 것 같다. 듣기로 P는 오랫동안 남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외과 수술 전문의인 남편은 환자를 수술하고 돌아온 날이면 P의 속옷을 거칠게 잡아 뜯고는 거실에서, 주방 바닥에서, 화장실 문 앞에서 P를 돌려세워 엎드리게 했다. 그러고는 바싹 마른 P의 음부 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갔다. 동시에 P의 귓속으로 “느껴 봐. 고통을 즐겨 보라고. 고통과 희열은 이음동의어거든. 흐흐흐.”라는 말들을 흘려 넣었다. 그때마다 P는 남편의 성기가 자신의 몸속을 관통해 온몸의 세포를 오그라뜨리고, 뼈를 부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점점 더 남편이 무서워졌고, 남편이 돌아오는 시각이 두려워졌고, 남편이 헤집고 다니는 집 안이 무서워졌다.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이 두려워졌고, 오로지 두려움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P는, 점점 메말라 갔다.
“그렇군요. 이곳의 물을 다 끌어가 버린 거로군요. 이 향을 맡아보세요. 갈증이 가실 거예요.”
빈은 라벤더와 로즈마리를 섞은 향을 P에게 맡게 했다. 달콤한 꽃 향은 P의 두려움을 다스려 줄 것이다.
네 달쯤 전,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은 P를 현관에서 잡아끌어 냄새나는 신발 위에 엎드리게 했다. 타일 바닥에 쓸린 무릎에서 핏방울이 배 나왔다. 자세히 보니 핏방울은 무릎에서만 나는 게 아니었다. 핏줄기는 P의 허벅지를 타고 가늘고 길게 흐르고 있었다. 남편이 일을 치른 뒤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져 잠든 그날 밤, P는 도망쳤다. 지하에 골프 연습장과 수영장이 딸린 강남 한복판의 주상 복합 아파트를 뛰쳐나와 시의 경계를 넘어 이곳 반지하 셋방으로 숨어들었다. 숨어들었으니, P는 이곳에 없는 게 당연했다. 여기서 P는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지워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당신을 아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어요. 내 손가락이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지 느껴 보세요. 두려워하지 말고 당신 자신을 느끼는 거예요. 할 수 있죠?”
빈은 가방 안에 들어 있을 새의 깃털과 부드러운 비단 천, 최음 효과가 있는 향료 등을 떠올렸지만, 곧 다른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빈이 직접 도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빈은 천천히 P의 허리를 어루만지다가 엉덩이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부드러운 놀림으로 손을 앞으로 가져와 손가락을 무성한 털 사이로 집어넣었다. 마치 메마르고 뜨거운 사막의 모래밭 속에 손을 묻는 느낌이었다. 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P의 몸은 열리지 않은 채 완강하게 빈의 손길을 거부했다.
“뭘 느낀다는 게 무서워요. 고통스럽다구요.”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P의 몸과 마음에 물기가 돌아 다시 생명을 호흡하게 할 수 있을까. P는 메마르고 오래 묵은 이 집에 스며들어 버린 것처럼 존재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목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렸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빈은 곧 자세를 낮춰 시선을 P의 아랫배에 맞췄다. 그러고는 질 입구에 살짝 입을 맞췄다. P의 허리께가 순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반응이다. 좋다. 이어 빈은 입술을 약간 벌리고 따뜻한 숨결을 내뿜는다. 숨결이 가 닿은 곳의 털이 하르르, 떨린다. 빈의 촉촉한 입술이 곧 메마른 P의 입구를 두드린다. 부드럽게, 아주, 천천히… 빈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계속해서 빈은 P의 메마른 문을 두드린다. 그러자, 조금씩 습기가 배 나오기 시작한다. P가 촉촉하게 젖어 들수록 빈은 반대로 자신이 메말라 간다고 느낀다. P의 고통과 두려움이 P에게서 빈에게로 넘어오는 것이다.
드디어, 활짝 열린다. 그리고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수원(水源)이 터진 듯, 맑고 달큼한 액체가 흐르기 시작한다. P의 입술이 벌어지고 촉촉한 신음이 터져 나온다. 우연인지, P의 신음과 거의 동시에 집 안의 모든 수도꼭지에서 우르릉, 소리가 나더니 물이 쏟아져 흐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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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3: J
벼랑
심율처.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인가… 퇴근길에 우연히 눈에 띈 간판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심율처의 육중한 문을 열 때까지, J는 심율처가 그저 그런 휴게방의 일종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어 차르륵 소리가 나는 주렴을 걷고 들어가 뭔지 모를 편안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소릴 들을 때까지만 해도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시는 그런 곳인가 싶었다. 다시 돌아 나갈까 생각하다가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향내에 J는 저도 모르게 안쪽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제야, 실내 안쪽에 벽을 등지고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띄었다. 순간, J는 뭐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훑고 지나면서 가슴이 콱 막히는 건지 반대로 아련하게 쓸려 내려가는 건지 모를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분명 빈이었다.
빈은 소매가 길고 빛깔이 고운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조도 낮은 조명을 받고 서 있어서인지 빈은 오래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오랜만이군.”
간신히 한마디를 건네고 나서도 J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어야 하는 건지,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아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왜 빈이 여기에 있는 건지,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자신을 빈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한꺼번에 많은 생각들이 밀려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쪽으로 들어와 앉으세요.”
놀랍다. 빈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J를 안쪽 의자로 안내해 앉게 했다. 빈의 표정은 뭐랄까 연민을 품은 의사가 예의를 갖춰 환자를 맞는 것처럼 따뜻하면서도 낯설다. 그리고 어딘지 피로해 보인다.
“니가… 아니, 당신이 이곳에 있는 줄 몰랐어. 난 그냥 지나다가…”
“잘 오셨어요. 편안히 앉으시고 우선 차 한잔 드세요.”
빈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J에게 찻잔을 건넸다. 투명한 크리스털 찻잔에 붉거나 노란, 자잘한 꽃잎들이 가득 피어났다. 향이 편안하고 익숙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지리산에서 초봄에 반쯤 핀 매화를 채취한 거예요. 매서운 추위를 이겨 낸 봄의 기운이 담겨 있죠. 마시면 머리가 맑아지는데 무엇보다 향과 꽃잎의 아름다움 때문에 후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효과가 있지요.”
알고 있다. 아니, 잊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알던 사실이다. 빈이 건네는 매화차를 마실 때마다 살포시 풍기는 그윽하고 달큼한 향내가 꼭 빈의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것 같다고 느꼈었다. 생각해보니 심율처 문을 열었을 때 맡았던 향내가 바로 이 냄새다. 빈의 몸에서 풍기는 것 같던 달콤하면서도 후각을 강하게 자극하는 향기. 잔뜩 굳어 있던 온몸이 풀어지는 것 같다.
“많이 지친 표정이군요. 예전보다 훨씬 더…”
지쳤다. 살아 내느라, 살아남느라. 아니다. 지쳤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메마르고 바닥이 드러났다. 오늘도 해고 명단을 뽑아 사무실 책상 위에 던져 놓고 나온 길이다. 나라고 왜 그들이 여기서 나가면 갈 데가 없단 걸 모를까. 하지만 회사의 인력 조정 본부장 자리를 꿰차고 앉아 수익을 내지 못하는 직원들 자르는 게 내 일이다. 1년이 넘도록 돈 한 푼 못 벌면서 꼬박꼬박 월급 받아 가는 놈들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말이다. 저들을 안 자르면 결국 내 모가지가 날아간다. 난 이 도시에서 남자답게 싸우고, 경쟁하고, 이기거나 혹은 진다. 그러느라… 지쳤다.
“요즘 꿈을 자주 꿔… 요. 같은 꿈을. 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어요. 사람들이 내 발목을 끌어당기려 들면 나는 그들을 하나씩 떨어트려. 혹은 그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요. 나는 그저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지. 그러다 어느 순간 내 몸을 내려다보면 발가락에서부터 무릎, 손, 온몸에 생채기가 나고 피가 흘러.”
빈이 다가와 어깨를 쓰다듬는다. 빈의 손길에서 번져 나온 온기가 어깨를 타고 내려와 손끝에 이른다. 후각에 이어 잊고 있던 촉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움찔한다.
“그렇게 피 흘리다 깨고 나면, 웃겨. 그냥… 웃음이 나요. 온몸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지. 땀이 흥건한 시트 위에 쭈그리고 앉아 마냥 웃지. 어둠 속에서 웃는 거야. 덜덜 떨면서.”
빈이 테이블에 내려놓았던 찻잔을 들어 건넨다. 쌉싸름하고 달착지근한 맛이 혀를 지나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내려간다. 후각으로 자극된 감각이 미각으로 이어져 열린다. 빈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는 과거를 회상하는 옛 애인의 표정이라기엔 너무도 현실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묘하게 J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는… 심율처란 뭐하는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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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당신처럼 지친 사람들, 그리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서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에요. 기쁨과 환희와 열락을 잃은 사람들에게 그걸 되찾아 주는 거죠.”
빈은 비단 옷자락을 팔랑거리면서 실내 쪽으로 난 문을 열고 J를 이끈다.
“자,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방 안엔 흑단나무 재질의 침상이 중앙에 놓여 있다. 좀 전에 앉아 있었던 의자처럼 침상 사방의 기둥에는 수많은 나비 문양이 조각돼 있다. 비칠 듯 말 듯한 비단 휘장이 침상을 둘러싸고 드리워 있다. 흑단나무에서 비쳐 나오는 광택이 여기저기 흔들리고 있는 촛불에 비쳐 더욱 은밀하게 느껴진다. 인공조명이 일절 없는 방 안, 침상 옆에 두 손을 다소곳하게 맞잡고 서 있는 빈은 정숙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어딘지 도발적으로 느껴진다.
“말했듯, 여기는 치유하는 곳이에요. 당신은 그걸 원해서 이곳으로 이끌려 온 거겠죠.”
이끌렸다. 심율처라는 말에, 익숙한 향기에, 그리고 빈에게… 듣고 보니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떻게?
빈이 천천히 다가와 J의 넥타이를 목에서 풀어 낸다.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그대로 내버려 둬야 하는 건지, 빈의 손을 붙잡아 그만두게 해야 하는 건지, 헷갈린다.
“모든 감각을 열고 섬세하게 느껴 보세요. 치료 방법엔 여러 단계가 있지만, 당신에겐 가장 심층적인 방법을 사용할 거예요.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나는 이미 많은 부분이 익숙할 테니까.”
맞는 말이다. 잊었던 듯싶었던 몸의 기억이 단번에 살아났다. 빈의 손길에 J의 몸은 오랜 시간을 단번에 뛰어넘어 정확하게 반응했다. 온몸의 세포가 예민해지고 목덜미가 간지러우면서 싸르르한 느낌이 등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좀 다르다. 뭐랄까. 빈의 몸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가냘프고, 와 닿는 가슴의 감촉은 지나치게 풍만하다. 빈이 살짝 웃는다.
“자, 당신의 고통을 내게 말해 보세요. 가슴속 깊이 쌓여 있는 것들, 살아오면서 받았던 상처들을 다 토해 내는 거예요.”
빈은 J의 목에서 풀려 나온 넥타이를 자신의 목에다 건다. 표정과 몸짓이 왠지 피로해 보인다. 가슴에 쌓인 것들, 상처들… 그걸 어찌 말로 다 할까. 회사 간부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빈과 헤어지고, 결혼 직후 고속 승진한 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가지를 내 손으로 쳐 냈다. 2년 전 공금횡령으로 회사 간부가 퇴출당하고 나서 이혼하고, 내가 잘리지 않으려고 더 모질게 사람들을 내보냈다. 그러지 않았으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테지만, 그러는 사이 빈도, 삶의 여유도, 행복도, 다 떠났다.
“당신도 좀 피곤해 보이는군.”
J는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빈을 옆에 앉게 했다. 침상에 깔린 비단 요에서 사라락, 기분 좋은 소리가 난다.
“오늘은 당신이 세 번째거든요. 게다 방문 치료까지 다녀온 탓에… 처음으로 나를 걱정해 주는 환자로군요.”
빈이 희미하게 웃는다. 그리고 목에 J의 넥타이를 맨 채로 손을 뻗어 J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내가 언제 한 번이라도 빈을 걱정해 본 적이 있었던가. J는 애써 기억해 보려 하지만 그런 기억 따위는 없다는 걸 곧 깨닫는다. 늘 빈에게서 필요한 걸 가져왔다. 위로와 희열, 따뜻함과 탈출감… J의 셔츠 단추를 다 풀어 낸 다음, 빈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옷깃을 벌려 가슴을 드러낸다. 빈의 가슴은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다. 더욱 가늘어진 몸에 큰 가슴이 왠지 기형적이고 슬프게 느껴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빈은 J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눈물이 주륵, 흐른다.
“이 방법은 좋지 않은 것 같군요. 기억이 때론 덫이 되기도 하죠.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냥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게 좋아요. 애써 되돌리려 한다거나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트려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모두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에요. 모두가 다시 아파진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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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율
“당신에겐 다른 방법을 써야겠군요.”
빈은 입고 있던 옷가지들을 모두 풀어 내리고 완전히 알몸이 되어 J 앞에 선다. 아니다. J의 넥타이는 여전히 빈의 목에 걸려 있다.
“이건 당신을 종일 묶어 놓는 고통이에요. 그 고통을 내게 넘겨주고, 당신은 거기서 풀려난 거예요. 자, 당신이 꾼다는 그 꿈을 다시 떠올려 보도록 하죠.”
빈은 J에게 자신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잡아 쥐도록 했다. 그리고 끝에서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 양쪽 끝을 잡고 빈의 목에 단단히 감아 매도록 했다. J는 머뭇거리면서 빈의 목을 서서히 조여들어 갔다. 흔들리는 촛불에 비친 빈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숨이 차오르고 미간이 좁아 든다. 빈의 얼굴에 J가 겹쳐진다. 이제 J는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조금씩 위로 올라갈 때마다 호흡은 불규칙해지고 가슴은 답답해진다. 어느새 이마엔 식은땀이 고이고 힘을 꽉 준 손바닥엔 생채기가 난다. 입으로 힘겨운 날숨이 급하게 뿜어 나오고 눈동자는 허공에서 맴도는 듯 초점이 맞지 않는다. 옆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벼랑에서 떨어져 간다. 벼랑에서 떨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피를 흘리고 있다. 이젠 그들의 손을 붙잡아 주고 싶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고 싶다. 그들이 흘리는 피를 닦아 줘야지. 그리고 나는 돌아갈 것이다.
“열어 줘. 내가 들어가 쉴 수 있도록. 내게… 활짝 열어 줘.”
J는 그제야 빈의 목을 놓아 준다. 빈은 침상에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고른다. 핏발이 섰던 빈의 눈동자가 서서히 안정을 되찾는다. 이런. 내려다보니 빈의 손바닥과 무릎에 생채기가 나 있고 피가 맺혀 있다.
“그래요. 이젠 치유할 때예요. 이 도시에서, 험한 사회에서 살아가느라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었어요.”
침상에 비스듬히 기댄 채, 빈은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다리를 벌린다. 빈의 표정은 어느새 차분해져 있다. 낮게 흐르는 음악과 달큰한 향내, 그리고 빈의 몸짓으로 열린 몸의 모든 감각들이 예민하게 꿈틀거린다. 빈이 편안한 자세로 반쯤 누워서는 무릎을 구부려 다리를 세운다. J의 시각이 빈의 양쪽 다리를 타고 올라가 벌어진 그곳에 가 멈춘다.
그곳은 어느새 활짝 열려 있다. 검고 무성한 털이 뒤덮여 있어 마치 원시 수풀림의 입구처럼 J를 설레게 만든다. 상쾌한 향기가 뿜어 나올 것만 같다. 둘레에는 마치 하얀 꽃잎들처럼 무언가 솟아나 있다. J는 크게 벌린 입속 같다고 생각한다. 가지런하게 나 있는 하얀 이 같기도 한 그것은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그 안쪽으로는 검은 동굴이 나 있다. 예쁘다. J는 한없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도시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그래서 아직 상처 입지 않은 세계다. 빈은 상처 입어 피 흘리는 J를 부드럽게 받아 안아 줄 것이다.
심율… 마음이 따라 흐른다. J는 검은 동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J는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워진다.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고통스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동굴의 입구를, 원시의 수풀림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이제 저곳으로 들어가는 거다. 들어가서, 가슴을 씻어 내고 편안하게 누워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나는… 들어간다.
* Photo by 이연.
『코끼리가 떴다』에서 전재 (김이은, 민음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