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한다. 서울 집에서는 가스보일러가 윙-소리를 내며 돌아갈 때마다 주머니의 돈이 타들어가는 소리로 들렸다. 또 주방에서 더운물을 쓰는군, 하면서 아내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 온 뒤로는 보일러 소리가 사뭇 다르게 들린다. 곧 정지될 보일러여서일까. 연구실에서의 고된 밤샘 작업과 숱한 좌절의 시간들이 각각 음표를 달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듯하다.
이 소리는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라 내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엉기고 맺혀 부르짖는 음악이다. 불이 물을 끌어안고 내는 옹골찬 소리는 내 귀에서 한참 팽팽한 긴장감으로 흐르다가 파도가 몇 번씩이나 뒤집히는 듯한 격정으로, 다시 가슴을 에는 그리움으로 바뀌어간다. 팽팽한 소리에서는 이를 악물고 첼라로 밸브를 끝까지 돌리던 내 몸의 완강한 힘이 느껴지고, 격정적인 대목에서는 부실 시공으로 겪었던 폭발 사고 때의 아픔이 지금도 살아나 내 몸을 으스러뜨릴 듯하다. 보일러를 껴안고 뒹굴던 청년 시절 내 몸의 진한 땀 냄새가 지금도 훅 코를 스친다.
한없이 부드러운 소리는 갸름하면서도 야무진 손 하나를 눈앞에 그려낸다. 체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열병을 앓고 있을 때 나를 온돌방에 누이고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바꿔 올리며 미음을 떠먹이던 손. 내 머리에 나보이식 터번을 매어주려고 뒷목과 귓불을 어루만지던 손. 알맞게 따스한 그녀의 손이 지금 내 얼굴에 와 닿는 것만 같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때로 그녀, 알료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목이 쉬도록 부르는 내 가슴속 외침이 된다.
오늘 새벽, 바닥에 불 아이 들어와요, 하는 말에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럴 때면 수십 년 보일러에 의지해 밥 먹고 산 티가 저절로 났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나는 안다. ‘아이’에 강세가 들어가 있었다. 타슈켄트의 허름한 호텔방으로 걸려온 전화 속 고려인 여자 목소리는 서툴고도 몹시 다급했다. 알료나 이래로 대여섯번째 바뀌었다는 온돌 체험방의 안내인이다. 잠이 확 달아난 나는 비상 걸린 내무반의 병사처럼 단숨에 벌떡 몸을 일으키면서 전화통에다 대고 소리쳤다. 에러코드가 뭐라고 떴어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여자는 네, 네? 하더니 계속 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이것이 한 시간 넘어 돌았슴다. 온기 기별 없어. 온수 잘 나와.”
알료나라면 이런 경우 필터 청소만 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을 텐데.
“알았어요. 금세 갈 테니까 리모컨 전원을 끄고 기다려요.”
나는 어둠 속에서 소파 위에 걸쳐두었던 티셔츠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감색 유니폼 점퍼를 꿰기 시작했다. 외풍이 얼마나 센지 유리창을 덮은 커튼이 바르르 떨렸다. 라디에이터에는 초저녁에 잠시 매지근하게 난방이 들어왔을 뿐 새벽이 되자 기별도 없었다. 점퍼 양쪽 팔뚝 부분에 달린 주머니에 첼라와 드라이버를 꽂았다. 첼리스트는 첼로를 껴안고 살지만 보일러 엔지니어는 첼라를 끼고 산다. 첼로와 첼라. 발음은 조금 다르지만 둘 다 음악 소리와 관련이 있다. 불과 물이 서로를 끌어안고 돌아가면서 내는 묘한 소리는 엔지니어만이 해독해낸다. 이곳에 온 뒤로 바닥에 온기를 가져다주는 보일러 소리가 자꾸만 음악 소리로 들려왔다. 내 몸의 한 자락과 닿아 있는 것 같은 녀석. 녀석이 윙 하고 정상적인 소리를 내지 않을 때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전정가위 비슷하게 생긴 이 공구를 끼고 달려간다. 첼라가 없으면 배관을 분해하거나 밸브를 조일 수가 없다.
보일러 뚜껑을 열고 부품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았다. 모두들 잘 있었지? 나는 속으로 내 살붙이 같은 부품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육안으로 쓱 훑어보아도 나는 보일러의 몸 상태를 알 수 있다. 점화플러그, 삼방밸브, 자동급수밸브를 손으로 쓰다듬어보았다. 첼라로 밸브를 조여보았다. 더 이상 조여지지 않았다. 느슨해지거나 틀어진 것 하나 없이 처음의 촉감 그대로 탱글탱글했다. 버너가 가동되면 물을 껴안아 데워주는 두 대의 스테인리스 열교환기도 누수된 흔적 없이 탄탄하고 늠름해 보였다. 보일러가 멈춘 김에 차이하나 카레야의 문을 닫아버릴까, 잠시라도 생각했던 것이 머쓱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닫을까 말까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이번에 오자마자 나는 보일러의 건강진단을 정밀하게 했다. 문을 닫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까지 보일러는 힘차게 돌아야 한다. 이 한국식 찻집 안에 마련된 온돌 체험방은 보일러가 없으면 냉골이 된다. 널찍한 온돌방은 언제나 따스한 온기를 품고 손님을 맞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도착하던 날, 연소가스 측정기로 배기가스 유해성분도 측정하고, 디지털 마노미터로 가스압도 재어보았다. 수치는 모두 정상이었다. 사실 이 보일러는 텔레비전이나 자동차, 또는 다른 지역에 설치된 동료들보다도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스압은 시시때때로 달라지고, 온갖 화학물질로 오염된 물에는 석회질이 많아 배관이 잘 막히며, 전압도 불안정한 타슈켄트의 구시가지에 놓여 있다. 리모컨에 에러코드 ‘01E’가 떠 있었다. 비등. 물이 끓어오른다는 뜻이다. 난방필터가 막힌 게 틀림없어 보였다.
“가동은 되는데 바닥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건 물이 순환되지 않고 보일러 안에서만 끓기 때문이에요. 난방필터에 이물질이 끼어서.”
나는 안내인에게 에러코드를 설명해주고 나서 보일러 뚜껑을 열고 배수밸브의 흰색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렸다. 보일러 내부의 뜨거운 물이 쏟아져나왔다.
“배수밸브 바로 밑에 난방필터 보이죠? 거기 손잡이 고정핀을 왼쪽으로 빼고 아래로 당겨보세요.”
내가 시키는 대로 안내인은 따라 했다. 그물처럼 생긴 필터가 빠져나왔다.
“필터를 수돗물에 깨끗이 씻어서 다시 제자리에 넣으세요.”
안내인은 물에 잘 씻은 필터를 제자리에 꽂고 첼라로 손잡이 고정핀도 끼웠다.
“자, 이제 가동하기 전에 또 뭘 해야 되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안내인은 아직 보일러의 기본 원리도 모르는 듯했다.
“우리가 필터 청소 하느라 뭘 다 뺐죠?”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그녀는 재빨리 급수밸브를 열어 보일러에 물을 다시 채웠다. 안내인을 앞세우고 온돌 체험방으로 들어갔다. 리모컨의 전원을 켜고 온도를 26도로 맞추었다. 윙 하고 녀석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기가 들어온 것도 아니지만 보일러 도는 소리에 벌써 훈기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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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박찬순
MBC PD, MBC, SBS 외화 번역 작가로 활동한 바 있는 작가는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가리봉 양꼬치」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결혼 후 연년생 남매의 엄마가 되어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다가 번역에 얹혀 겨우 세상으로 나가는 하나의 통로를 찾았다. 『나의 생애 골다 메이어』등 몇 권의 역서를 낸 뒤 방송국에서 <맥가이버>, <미세스 다웃파이어> 외 천여 편의 외화를 번역했다. 30년 가까이 빵을 해결해 준 것 이외에도 번역은 두둑한 보너스까지 안겨 주었다. 가슴을 울리거나, 혹은 서늘하게 하는 명대사들을 바구니 가득 주워 담았고, 밤새 입을 맞추었던 영화 속 수많은 인물들과 삶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니 적어도 손해 본 장사는 아닌 듯하다. 후배들에게 경험을 전한다는 보람에 대학에 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가르치는 즐거움보다 대사의 뉘앙스를 가슴으로 느끼고 배우의 표정에 몰입되어서 그의 체취가 묻어나는 맛깔스런 표현을 찾아낼 때의 즐거움이 가장 크다. 번역한 영화로는 <아마데우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 외 천여 편이 있고, 저서로는 『방송번역작가의 세계』, 『그 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나의 생애 골다 메이어』, 『아이는 사랑의 손으로 키워라』, 『멍멍 의사선생님』, 『다락방의 등불』,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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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펌프 소리도, 송풍기의 사이클도 정상이었다. 보일러는 몸이 아프면 이상한 소리를 낸다. 실험실에서 하도 많이 들어보아서 나는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아픈지 훤히 알 수 있다. 송풍기에서 띠끌 띠끌하는 이격음이 들리면 몸이 성치 않다는 신호다. 또 송풍기의 사이클이 너무 가쁘거나 느려도 문제가 있다. 지금 같아서는 아직 10년은 너끈히 차이하나 카레야를 끌고 갈 힘이 느껴졌다. 저렇게 싱싱한 보일러를 멈춰 서게 할 수는 없다.
현판이며 겉모습을 훑어보려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문을 닫든 누구에게 넘기든 차이하나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다. 오후에 누가 보러 오겠다고 했다. 차이하나의 상태를 전체적으로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리털 점퍼에 두툼한 털모자를 쓰고 나선다. 키릴 문자로 된 차이하나 카레야 현판 앞에 서본다. 정말 타슈켄트에 온 실감이 난다. 조금 떨어진 곳에 모스크의 푸른색 돔 지붕이 솟아 있고 그 밑으로 나지막한 집들이 마치 공원의 산책자들처럼 나무들 사이에 얌전하게 들어서 있다. 역사가 묻어나는 마드레사 뒤로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있는 곳.
나는 이 도시로 다시 돌아왔다. 내 손으로 보일러를 놓고 현판을 걸었던 차이하나 카레야를 직접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차이하나를 둘러싼 자작나무 가지마다 얼음꽃이 열렸다. 주위의 거대한 사막과 평원이 만들어내는 드문 풍경이다.
“김본, 온돌 체험방에 왜 그리 목을 매는 거요? 지금 본사가 쓰러질 판인데.”
사장의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그 말을 듣자 곧 내 눈앞에 알료나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료나는 이제 이곳에 없다. 차이하나 카레야를 정리하는 것 이상으로 그녀의 행방을 찾는 것이 나의 소임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사장은 마음속으로 차이하나의 문을 닫는 시점을 째깍째깍 카운트다운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사사로운 감상에 치우쳐 마케팅 본부장으로서 객관적인 판단을 못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문을 닫을 거라면 내 손으로 마무리 짓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타슈켄트에 돌아오자 나는 문을 닫기 보다는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 전 동네 마을회관 마할라에서 설명회를 했더니 다행히도 누군가가 관심을 보인 것이다. 하필이면 이런 날 보일러에 문제가 생기다니. 나는 면도도 하지 못하고 달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메라 뷰 파인더에 눈을 대자, 10여 년 전 현판을 걸던 날 직원들과 함께 손이 부르트도록 박수를 치던 알료나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깃과 치마 가장자리에 흰색의 화살촉 무늬가 수놓인 푸른색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납작한 황금색 추비체이카를 쓴 알료나.
언젠가 고장 났던 보일러가 수리 뒤에 다시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자 그녀는 보일러 위에다 두 손으로 마트료시카를 올려놓았다. 두 손으로 고이 받쳐서 인형을 들어 보일러 위에 올리고는 치렁치렁하게 넓은 소매를 활짝 펼쳐서 옆으로 내렸다가 다시 앞으로 모아 합장을 하는 몸짓은 보일러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자세였다. 그 몸짓은 마치 날갯짓을 하는 한 마리 푸른 새처럼 보였다. 그 깃털에서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어수룩함과 풋풋함이 느껴졌다. 어쩌다 돌과 돌을 부딪치는 장난 끝에 기적처럼 불을 발견하고, 그 불씨를 잃을까 안절부절못하는 원시의 소녀처럼. 그러나 그녀는 이제 여기에 없다. 나는 그녀의 아픔을 모르는 체하고 매정하게 떠났다. 그러고는 오래도록 잊어버렸다. 그 뒤로 우리 보일러는 수많은 사람들의 등을 따뜻하게 덥혀주었고, 나의 삶도 한동안은 따뜻했었다. 빠른 승진에, 사내에서 만난 여자와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비가 되는 행운도 얻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누운 자리가 얼마나 따뜻한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영특한 사람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복잡한 게임으로 우리 시대를 뒤흔들어 다시 빙하기를 초래하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어떤 시기보다도 더 추운 지금에 와서야 나는 그녀를 생각한다.
잠시 밖에 서 있었을 뿐인데 이가 덜덜 떨린다. 텔레비전에서는 몇 년 만에 닥친 혹한이라고 했다. 현판은 글자가 비바람에 조금 퇴색한 것 말고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 앞에 서서 안내인에게 셔터를 눌러달라고 부탁한다. 유리로 된 현관문을 열고 다시 홀로 들어온다. 뎅그렁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마트료시카 세 개가 서로 부딪치며 눈앞에서 춤을 춘다. 붉은 입술에 노란 스카프를 쓰고 뺨에 연지를 찍은 건강한 새색시 모양의 러시아 목각 인형. 알료나가 풍경처럼 달아놓은, 크기가 서로 다른 인형들이다. 그녀는 내게 인형을 쥐어주면서 말했다.
“우치찔 김, 이제 자꾸 행운이 올 거구마. 열면 나오고 또 나오는 이 인형처럼.”
그녀가 있다면 다산과 풍요의 마트료시카를 하나 더 선물 받고 싶다. 그때 평직원이었던 나를 그녀는 선생님이라는 뜻의 러시아어로 불렀다. 회사가 문을 닫고 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지금이야말로 내게는 마트료시카가 절실히 필요하다. 양파처럼 한 개의 인형을 열면 그 속에 점점 작아지는 인형 다섯 개가 차례로 든 것 말고, 열어도 열어도 끝없이 나오는 것으로.
시장 가까이에 있는 차이하나 카레야에는 아침부터 손님들로 북적인다. 안내인이 손님들에게 차와 음식을 갖다주느라 분주하게 홀을 오간다. 알료나처럼 우즈베크 전통 옷을 입지 않고 검은색 면바지에 흰 블라우스를 입었다.
“겨우 러시아어 배우고 나니까 이제 독립했다고 우즈베크어를 쓰라한다꾸마.”
알료나는 입을 앙다물고는 옆으로 쭉 늘였다. 뭔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일을 할 수 없는 이들은 다시 연해주로 돌아갔다고 했다.
신발을 벗어 신장에 넣고 마룻바닥에 올라가 낮은 테이블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방식은 내가 처음 만들어놓은 그대로다. 먼지가 푸석거리는 두꺼운 양탄자와 삐걱거리는 플라스틱 탁자며 의자들을 들어내고 온수 파이프를 깔고 온돌용 마루를 놓은 것이 벌써 10여 년 전이라니. 천장 한구석에 거미줄이 있기는 하지만 직원들이 직접 페인트칠을 한 벽도 아직은 비교적 깨끗하다. 기둥에는 알료나가 구해온 붉은 벨벳 천에 노란 꽃무늬를 수놓은 우즈베크 식 족자가 걸려 있고 몇 군데 벽감의 선반에는 머리를 여러 갈래로 길게 땋은 우즈베크 인형과 포도 무늬 청자 매병이 나란히 놓여 있다. 청자는 모조품이지만 도자기를 아는 친구를 데리고 인사동을 헤집으면서 구한 작품이다. 다시 윙 하고 보일러 소리가 들린다. 조금 떨어져서 듣자니까 가늘고도 여린 멜로디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져, 아련한 환상처럼 여겨지는 지난날로 나를 이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길고도 강한 인연의 줄을 따라서.
어느 날 저녁 차이하나의 보일러가 가동이 안 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내가 퇴근을 하고 숙소로 돌아온 뒤였다. 알료나의 목소리는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보, 보일러에서 쿠, 쿵쿵 타, 타탕거리는 소리가 나서 빨리 죽였스꾸마. 무, 무서워요.”
가족의 치명적인 사고나 중병의 선고 같은 소식을 전할 때의 목소리 같았다. 허구한 날 기름진 양고기와 샤슬릭으로 속이 더부룩하던 나는 그날만은 밥과 김치 생각이 간절해서 쌀을 막 씻으려고 하던 중이었다. AS 담당 엔지니어는 마침 사마르칸트 아파트 건설 현장에 나가고 없었다. 저녁 10시까지는 문을 열어둬야 하기 때문에 나라도 당장 달려가야만 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점점 식어오는 방바닥에 손을 대보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소리가 날 때 쉽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동안 보일러에 전혀 말썽이 없었던 탓도 있었다.
“보일러를 켰을 때 이상하게 쿵쿵거리는 소리가 나면 공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연소가 안 되는 거지.”
나는 보일러 뚜껑을 열고 밑에 있는 에어밸브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황동으로 된 배관의 레버를 올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계를 만지는 게 두려운지 머뭇거렸다. 고객에게는 말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직접 자기 손으로 해보도록 권하는 것만이 사용법을 확실하게 가르치는 최선의 방법이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 레버에 갖다댔다. 알료나의 손가락이 레버를 올리자 물과 함께 뽀글뽀글 기포가 빠져나왔다. 두 손이 겹쳐지자 손이 따스해오는 것을 느꼈지만 맹세코 알료나의 손을 잡고 어떻게 해볼 생각은 없었다.
공기를 다 뺀 뒤에 리모컨의 숫자를 26도로 맞추라고 했다. 윙 하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연소램프에 빨간 불만 깜빡거렸다. 긴장한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나도 조금은 당황했다. 나는 턱을 괴고 서서 연소램프에 불이 깜빡거릴 때는 무슨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더라, 하고 차근차근 생각해보았다. 엔지니어로 일하다 마케팅 부서로 옮기고 나서부터 어느새 보일러의 상태에 대해 조금씩 무디어졌던 것이다. 다행히도 잠시 뒤에 나는 아, 알았다, 하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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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무것도 아냐. 보충수가 부족해서 그래. 이 밸브를 열면 보조탱크에 물이 저절로 차게 돼.”
나는 알료나에게 수도관과 연결된 배관의 밸브를 돌리라고 했다. 첼라를 든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조심조심 밸브를 열었다. 물 나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간밤에 기온이 너무 떨어져서 수도관이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헤어드라이어를 가지러 갔다. 꽁꽁 얼어붙은 수도관 연결부위에 더운 바람을 쏘이는 그녀의 손길이 애타게 까딱거렸다. 잠시 후 탱크에 졸졸 물이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방 안으로 돌아가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윙 하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겁에 질렸던 알료나의 얼굴이 조금 풀어진 듯했다.
나는 방으로 가서 보료 옆에 꿇어앉아서는 두 손을 보료 밑에 넣고 한참을 기다렸다. 그녀도 옆에 와서 앉아 두 손을 보료 밑에 넣었다. 머리에는 노랑과 파랑, 자주색의 술이 달린 황금색의 납작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푸른색 바탕에 흰색 꽃무늬가 수놓인 벨벳 원피스는 소매가 넓어 앉아 있을 땐 바닥에까지 닿았다. 알료나는 온돌 체험방에서 한복을 입고 싶어 했지만 나는 우즈베크 전통 옷을 고집했다. 그것은 수출회사가 채택하는 현지화 전략의 하나였다. 그녀가 준비해온 우즈베크 전통 옷은 오랜 세월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이슬람 문화권의 옷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의 그녀는 딱히 어느 곳이라고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신비한 나라에서 온 소녀 같았다. 긴장된 숨소리만 쌕쌕 들리더니 알료나가 입을 열었다.
“아바이 구들 놓으실 때 아부지가 따라다녔스꾸마. 아바이가 아궁이에 불을 때시면 아부지가 방에 들어가 바닥을 어루만지면서 불기가 오기를 기다렸스꾸마. 그때 아바이랑 아부지가 뭐라고 서로 물어봤을까?”
나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스런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갔슴두?” “왔스꾸마.”
보료 밑에 손을 넣고 있자 할아버지 생각이 난 모양이었다. 아바이가 함경도 어느 지방에서는 할아버지를 뜻한다는 것을 알료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불기가 ‘갔슴두,’ ‘왔스꾸마’ 라는 말로 신호를 주고받는 함경도 부자 구들장이의 모습이 떠올라 나는 키득키득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녀가 워낙 숙연한 표정을 지어서였다. 이런 정도야 고장 축에도 끼는 게 아니어서 긴장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알료나와 같이 바닥에 손을 대고 있자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둘이서 그렇게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보일러가 잘 돌아가라고 비는 우리만의 의식처럼 보였다. 가스보일러를 처음 내 손으로 개발해 안양의 5층짜리 복지 아파트에 시공을 해준 다음 사장과 집 주인 여자와 함께 방바닥에 손을 대고 있던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때는 정말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다. 보일러의 성능도 약한데다 가스압도 낮고 흐름이 고르지 못할 때였다. 한겨울에 시멘트 골조로 된 아파트에 처음 불을 넣는 것이어서, 한 시간쯤 지나서야 바닥에 온기가 돌았다. 사장과 나는 서로 말없이 부둥켜안았고 여주인은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그녀와 함께 보료 밑에 손을 넣고 온기가 느껴지기를 기다린 지 겨우 5분쯤 지났을까. 바닥이 따스해져왔다. 손바닥에 전해오는 온기를 느끼면서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욕실에 가서 샤워기를 틀자 온수도 정상대로 쏟아졌다. 연장통을 챙기려고 다시 보일러실로 돌아와보니 그녀가 치렁치렁한 푸른색 원피스 소매를 치켜 올려 보일러 위에 뭔가를 올리고 있었다. 마트료시카였다. 인형을 올린 다음 그녀는 넓은 소매를 활짝 옆으로 펴서 내리더니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얼핏 커다란 푸른색 새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동작처럼 보였다. 그러더니 이마를 보일러에 대고는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기척이 없어 옆으로 가서 살펴보았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그녀를 보일러에서 떼어냈다. 그녀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왜 그래, 알료나? 물어도 대답 없이 그녀는 서럽게 울어댔다. 그렇게 내 품에 안겨 울던 그녀는 한참만에야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영 가는 줄 알았스꾸마.”
“누가, 내가? 파견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녀는 말없이 턱으로 보일러를 가리키며 더욱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말을 이었다.
“엄만 신통방통한 얘 덕에 식구들 굶지 않게 되었다고 그랬스꾸마. 동생들도 학교 보내게 됐스꾸마. 이게 멈춰서면 제가 회사 못 다닐까봐 얼마나 속을 태우는데.”
“다시 목화밭에 나가면 되잖아. 이제 보니 소녀 가장이었군.”
알료나는 내 말에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입은 웃어도 눈엔 여전히 눈물이 글썽거렸다. 내가 아니라 보일러가 영영 가버릴까봐 마음을 졸이는 그녀를 보며 나는 둔기에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보일러가 세상에서 환영받기 시작하면서 도리어 나는 그것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일러에 대한 처음의 그 열정은 차츰 시들해져갔다. 배기가스 속의 잠열을 이용해 열 효율을 30퍼센트 이상 높이는 콘덴싱 제품을 개발했을 때의 기쁨도 오랜 과거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동코일로 되어 있던 열 교환기를 스테인리스로 바꾸어 열 효율과 내구성을 높였을 때의 벅찬 감격도 무덤덤해진 지 오래였다. 반면에 타슈켄트에서 시작된 가스보일러 열풍은 이웃나라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를 넘어 러시아 모스크바에까지 번져갔다.
그날 차이하나에 마지막 손님이 가고 난 뒤 나는 온돌 체험방에서 처음으로 그녀를 안았다. 20여 년 전 안양의 복지 아파트에서 처음 가스보일러를 가동하던 날만큼이나 나는 뜨거운 마음이었다. 그것은 알료나가 내게 되찾아준 선물이었다. 나는 그것을 알료나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젊은 날 밤을 지새우며 껴안고 뒹굴었던 녀석을 그렇게 아끼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그러자 보일러를 사이에 두고 알료나와 나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만큼 밀착되어 있다고 느꼈다. 다만 지금까지도 자신이 서지 않는 한 가지는 그 순간 내가 정말 그녀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마음으로 끌어안은 것일까 하는 점이다. 혹시라도 그녀를 계속 넘보다가 가장 적절한 기회를 붙잡은 것은 아니었을까.
온돌 체험방 보료 위에 앉아 앉은뱅이책상 위에 다이어리를 펼친다. 내 꿈의 잔해들이 빼곡히 들어 있는 그것은 이번 금융 위기로 폭삭 삭아버려 먼지가 푸르르 날 것처럼 보인다.
“조금만 기다려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오른손에 다이어리를 쥐고 흔들면서 알료나 앞에서 호기를 부리던 내 모습이 보인다. 노란 테이프로 표시된 페이지를 연다. 하동 칠불사 아자방(亞字房)의 내부 사진 밑에 쓰여 있는 글씨들.
원적외선 방사 광물 채취 → 세라믹 바닥재 개발
아자방 사진을 찍고 나서 생각나는 대로 끄적인 뒤 칠불사 경내에서 사장과 나눈 대화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담공선사는 무슨 바닥재를 썼길래, 한 번 땐 구들의 불기가 49일을 갔다는 거지?”
“운모가 섞인 돌판이었죠. 거기다 구들을 아(亞) 자 형으로 놓아 불기를 오래 잡아둘 수 있었어요. 그 웅장한 정방형 굴뚝 보셨죠? 아궁이도 장정이 땔감을 지게에 지고 들어가도 될 만큼 컸다는데요.”
“운모가 섞인 돌에서 인체에 이로운 원적외선이 나온다…”
“네, 주로 화성암 속에 들어 있는 운모나 석영, 장석과 같은 광물질에서 방사된다고 알려져 있죠.”
아 자의 내부는 낮고 주변은 45센티쯤 높이 설계된 아자방에서 높은 부분에 앉아 참선하던 스님들의 모습. 그러나 신라의 담공선사가 놓은 아자방의 구들은 여수순천사건 때 공비토벌작전 중에 소실되어버리고 지금 것은 1980년에 새로 놓은 구들이라 했다.
“글쎄, 요즘은 한 번 군불을 때면 한 일주일쯤 갈래나,”
말끝을 흐리던 공양보살. 한 번 군불을 때면 온기가 49일을 갔다는 구들장과 고래의 모양에 몰두해 있던 사장의 모습이 찍힌 사진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아자방에 앉아 있는 김수로 왕의 일곱 왕자의 모습을 그려보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그들이 모두 득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 특별한 아자형 구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화개장터를 굽어보는 지리산 자락 하동의 절 이름까지 칠불사로 불리게 되었고 말이다. 칠불사를 다녀온 이후로 다이어리에는 연해주 광산 얘기가 자주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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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남부 아촘, 파르티잔스키 지방 광산 개발에 지분 참여 타진.”
타슈켄트에 근무하던 몇 년 동안 여름만 되면 알료나와 함께 우수리스크를 찾은 것도 휴가도 즐길 겸 원적외선이 나오는 광물질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알료나 아버지의 고향이라는 연해주를 자주 찾을수록 더욱 영글어가는 듯하던 나의 꿈. 한 번은 알료나와 함께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의 날 공연을 보던 기억이 난다. 오랜만에 한복을 입고 서툰 발음으로 한국 동요를 부르고 태권도 시범을 보여주던 고려인 청소년들. 당의를 입고 족두리를 쓴 채 어설픈 부채춤과 장구춤을 추던 처녀들. 문화관에 둘러앉아 어른들에게서 큰절하는 법을 배우던 어린이들. 그러나 막상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에서는 러시아 노래를 목청 높여 합창하던 고려인들. 그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다가 나를 힐끗 돌아보더니 내 손을 꼭 잡던 알료나.
그녀와 함께 연해주의 숲 속에서 길고 달콤한 키스를 나눌 때면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가슴이 팽팽해지곤 했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없으랴, 하는. 거기에는 원적외선을 듬뿍 내뿜는 광석이 무진장으로 매장돼 있다는 연해주 광산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알료나와 연해주에서 휴가를 보낼 때 숲 속의 방갈로에서 잠을 잔 것도 산 밑에 파묻혔으리라 생각되는 원적외선 방사 광물을 몸으로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녀의 몸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원적외선이 방사되는 광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한 번 불을 때면 한 달 하고도 열아흐레나 온기를 잡아두는 구들. 그런 구들이 될 광석을 찾는 것은 회사와 나의 꿈이자 알료나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도 사라지고 또다시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우리의 꿈도 사라졌다. 알료나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보일러를 아무리 가동해도 그녀는 없다. 다만 나는 온돌 체험방 문을 처음 열던 날 내 눈에 새겨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뿐이다. 한국인의 얼굴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이국풍이 서린 묘한 분위기를.
“앗살람 말레이꿈(당신에게 평화를). 신발을 벗어 신장에 넣고 들어오세요.”
푸른색의 실크 드레스에 납작한 황금색 모자를 쓴 알료나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우즈베크어로 공손히 인사하며 손님들을 맞았다. 과수원집 처녀처럼 뺨이 발그스레해진 그녀가 허리 굽혀 인사할 때는 어깨선이 곱게 흘렀다. 어깨에서 팔로 알맞게 비스듬히 내려오는 그 선을 보면서 나는 한복이 잘 어울릴 체형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론 여리고 공손하기만 한 여자가 일손이 맵고 몸까지 민첩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같은 또래 서울의 젊은이들과 자꾸만 비교가 되었다. 이국땅에 내팽개쳐진 이가 살아남기 위해 몸에 익혀야 했던 절제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남의 땅에서 항상 주눅 들어 살다 보니 나이에 비해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만은 알료나도 즐겁고 유쾌한 마음뿐인 듯했다. 장화를 벗고 널찍한 홀로 들어선 손님들은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려인 아가씨의 따스한 미소에 젖어 홀로 들어서면 낡고 거추장스런 식탁과 의자가 치워지고 마루가 깔린 훤한 바닥에 나무로 만든 나지막한 상이 놓여 있었다. 놀란 눈으로 둘러보는 손님들에게 알료나는 우즈베크어로 차분하게 설명했다.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몇 년 먼저 파견되었던 직원이 함경도 말로 통역해서 우리를 웃겼다.
“훨씬 환해졌습지? 라디에이터 없애고 바닥에 온수 배관 했지비. 그 모든 게 왕왕 돌아가는 가스보일러 덕분이꾸마.”
온돌식 난방을 소개하는 알료나는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었다. 벽에 붙여 설치하는 라디에이터만 알고 있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는 낯설고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면 발바닥에 전해오는 온기에 다들 입꼬리가 올라갔다.
때는 1월이어서 밖은 매섭고 건조한 겨울바람이 불고 이따금씩 눈보라도 쳤지만 차이하나에 들어서면 금세 몸이 풀어졌다. 손님들은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나지막한 상 앞에 앉았다. 온돌 체험방이 차려진 차이하나는 타슈켄트 서부 구시가지에 있는 초르수 바자르 뒤쪽 시냇가에 있었다. 그날도 눈보라 끝에 혹한이 닥쳐 차이하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작나무 숲에 얼음꽃이 열린 날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시냇물이 보였다. 나는 창가에 앉아 빙화가 핀 시냇가의 자작나무를 내다보기도 하고 가끔 알료나가 손님을 상대하는 모습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알료나는 손님 곁에 다소곳이 다가가 메뉴판을 펼치고 조곤조곤 설명했다. 어떤 음식이든 알료나가 권하면 몇 배는 더 맛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메뉴에는 볶음밥과 비슷한 쁠롭, 피자 빵만큼이나 크고 둥근 리뽀쉬까, 꼬치 요리인 샤슬릭, 만두 비슷한 삘메니 등 몇 가지 음식만 올라 있었다. 목화 농장 주인은 메뉴판을 보다가 알료나를 쳐다보다 되풀이하더니 기름을 듬뿍 넣어 볶은 쁠롭을 시켰다. 알렉산더가 전쟁 중에 허약해진 병사들의 건강을 위해 특별히 고안했다는 기름 볶음밥이었다. 그는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포크를 든 채 알료나를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먼 길을 다녀온 무역상들은 푸짐하게 나오는 양 갈비찜인 카잔카보프를 자주 찾았다.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노린내가 전혀 나지 않아 나처럼 토종 입맛을 가진 사람도 아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다. 주방 안쪽 우즈베크 남자 요리사들은 주문 받은 요리를 만드느라 홀 쪽을 흘깃거릴 겨를도 없어 보였다. 다른 차이하나에서는 홀에서 손님을 맞는 이가 터번을 쓴 중년의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차를 따르면서 넉살좋게 손님들 사이에 끼어들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우스갯소리로 분위기를 돋우곤 했다. 손님들도 외국 여행객을 빼놓고는 여자라고는 찾기 힘들었다. 철저히 남성들의 사교 클럽이었다. 하지만 차이하나 카레야만은 예외였다. 알료나가 그 역할을 맡게 된 거였다. 나는 어떻게 해서 알료나가 그런 허락을 받아냈는지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알료나가 마할라에 힘을 써줄 마을 유지인 우즈베크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저 잘 되기만을 바랐다.
10여 년 전 처음 현지인 직원을 채용하려고 면접을 볼 때였다. 어떤 응시생에게 보일러의 효용성을 피부로 느끼게 해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차이하나라고 전통 찻집이 있는데, 거기다 온돌방을 만들면…”
가무잡잡하고 화장기 없는 시골 처녀 얼굴이지만 눈이 크고 어딘가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응시생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고려인 아가씨는 밭에서 목화를 따본 이력 외에 요즘 말하는 두드러진 스펙이라고는 없었다. 우즈베크어와 문화에도 정통하면서 한국어를 잘 하는 통역 겸 직원을 뽑는다는 신문광고에 고려인 외에도 우즈베크 인들까지 몰려와 지원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다. 대부분이 한국어 자격시험에 합격한 4년제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그녀의 대답은 어제까지도 목화를 땄다는 타슈켄트 고려인 처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면접관들도 의아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자 알료나가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저희 아바이, 아니 할아버지가 연해주에서 구들장을 하다가 오셨슴다. 그때 교포들 집은 거의 아바이, 아니 할아버지께서 구들을 놓으셨지요.”
반은 러시아, 반은 우즈베크 여자가 다 된 카레이스키의 등에 구들 유전자가 박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구들 난방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그때 얼핏 내 머릿속을 스치는 영상들이 있었다. 함경북도 회령에 살던 알료나의 조부모가 일제 강점기에 가난을 견디다 못해 연해주로 봇짐을 싸서 떠나던 모습이며 새로 찾은 고향 우수리스크에서 땅 일구며 정붙이고 살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강제로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맨몸으로 우즈베키스탄에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시베리아를 통과하는 오랜 여정 끝에 실의에 빠져 실성하거나 병마에 시달리다 숨져버린 이들의 모습도 겹쳐 보였다. 구덩이를 파고 갈대로 덮어 잠자리를 만들고, 이웃 도시에 나가 동냥으로 그해 겨울을 난 이들.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 사이도 없이 얼굴이 까맣게 타도록 황무지를 일구어 밀이며 보리를 심어나가던 억척스러운 동포들의 주름진 얼굴들도. 그중에는 타슈켄트 근교 교포 마을에서 집집마다 다니며 구들을 놓아주던 알료나 할아버지의 두툼하고 바지런한 손도 끼어 있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함경도 사투리가 조금 거슬리긴 했다. 한글을 새로 익히고 자격시험에도 통과했지만 긴장을 놓으면 어른들에게서 배운 함경도 말이 툭툭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말끝마다 ‘스꾸마’를 붙이는 그녀의 말투가 처음엔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자 ‘스꾸마’를 말할 때는 짧고 빠르게 저음으로 처리해서 도리어 애교스럽게 들렸다. 나는 표준말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그녀를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그 사투리는 어쩌면 내가 들어가야 하는 또 다른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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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 체험방을 나와 홀로 들어선다. 남자들이 몇 군데 무리지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한결같이 검은색의 추비체이카를 썼다. 납작한 사각형의 모자는 정수리 부분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깃털 무늬가 아라베스크풍으로 새겨져 있고, 가장자리에는 아치 모양이 연달아 수 놓여 있다. 쓰기가 번거로운 터번은 이제 나이든 어른들 사이에서나 가끔 볼 수 있을 뿐이다. 모자도, 터번도 한여름에 때로 섭씨 45도씩이나 올라가는 뜨거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쓰는 거라고 하지만 이곳 남자들은 머리에 뭐든 쓰지 않고는 외출을 하지 않는 듯하다.
겉에 걸쳤던 헐렁한 두루마기 같은 차반은 대부분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따뜻한 온돌 바닥에 앉으니 저절로 외투를 벗고 싶어질 것이다. 신발장에는 손님들이 벗어놓은 장화가 나란히 놓여 있다. 흑차를 마셔가며 허겁지겁 양 갈비찜을 먹는 남자도 보인다. 대목을 보느라 점심시간을 놓친 모양이다. 무슨 소리인지 내가 통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들로 홀 안이 왁자지껄 소란하다. 올 가을 면화 값에 대한 전망을 하는 걸까, 강물을 목화밭으로 보내느라 호수로 들어가는 수로를 막아버려 점점 말라가는 아랄 해를 걱정하는 걸까. 우즈베크어를 모르니 내 마음대로 추측만 할 뿐이다. 한국풍의 차이하나는 그러니까 알료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어린 여자가 서슴없이 내뱉는 말에 솔깃해 벌써 10여 년 전에 일을 저질렀고 지금까지는 별 탈 없이 지속되어왔다. 어느 날 갑자기 두번째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는.
“애들 학원 끊어야 될까. 회사에 별일 없는 거지?”
떠나던 날 아침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파트 현관문을 나왔다. 환율이 무섭게 치솟고 있어 회사는 은행과 계약한 괴이한 파생 상품 때문에 도산의 길로 가는 중이었다. 달러 가격이 약정 범위 내에서 움직이면 은행이 높은 가격으로 달러를 사줘서 기업은 차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상한선을 돌파하면 계약 금액의 두세 배에 달하는 달러를 사서 낮은 가격에 은행에 팔아야 했다. 900원 정도 하던 환율이 갑자기 금융위기로 1,500원을 넘어버렸다. 흑자도산. 세상에선 이렇게 불렀다.
안내인이 사모바르를 가져와 차를 따른다. 윙 하고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날씨가 춥긴 추운 모양이다. 윙 소리가 날 때마다 사각사각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알료나가 내 앞에 나타날 것만 같다. 하지만 보일러가 아무리 돌아도 알료나는 없다. 거무스레한 빛을 띠는 흑차를 내려다본다.
“알맞게 우려졌스게꾸마. 빨리 마십쇼. 흑차 드시면 열이 내린다꾸마.”
바로 옆에서 알료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다른 직원들 앞에서는 또박또박 책에서 배운 서울말을 쓰다가도 내 앞에만 오면 함경도 말을 마음놓고 쓰던 그녀. 내가 재미있어하자 점점 더 원본에 가깝게 나오던 함경도 사투리. 아니 사투리가 아니라 함경도 말.
그녀의 팔이 내 윗몸을 일으켜 받치고는 찻잔을 내 입에 갖다 댄다. 나는 열에 들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겨우 입술만 적신다. 40도로 치솟는 고열에다 이가 덜덜덜 맞부딪치듯 떨리고 근육이 갈래갈래 욱신거린다. 나는 사경을 헤매고 있다.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다 구토가 일고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새록새록 아프다. 의사도 말라리아인지 황열병인지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밥은 물론 물도 삼킬 수 없다. 알료나는 벽에다 베개를 세우고 나를 기대게 한 뒤 입에다 뭔가를 떠 넣는다. 윽 하고 구토가 일어 삼킨 것을 토해낸다.
“토해내도 곡기가 들어가야 하꾸마.”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내 입을 벌리고 뭔가를 억지로 떠 넣는다. 요 밑의 장판 바닥도 뜨겁고 내 몸도 불덩이다. 알료나는 내 이마에 연신 차가운 물수건을 갈아대기 바쁘다.
사실은 열병으로 몸이 펄펄 끓어오르기 전날 밤의 일부터 기억하는 게 순서이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와 밤늦게 여자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막 돌아서는 길에 느닷없이 골목에서 불쑥 나타난 검은 주먹들. 턱과 복부를 수없이 가격당하고는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 귓가에 들리던 여자 친구와 사내들의 악다구니. 이튿날 새벽, 다급한 러시아말이 들리는 가운데 응급실에서 정신이 들던 일. 상처를 겨우 수습하고 잠을 자려는데 밤부터 치솟기 시작하던 열. 수십 번 검사를 하느라 팔에 촘촘히 찍히던 바늘 자국. 그까짓 것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를 공략하기 시작하던 열병. 대사관 파티에서 만난 금발의 러시아 여자 친구는 단 한 번 문병을 왔을 뿐 소식이 끊겼고, 차도가 전혀 없자 지사장과 직원들의 입에서 본국 귀환 얘기가 나오던 때.
“뜨거운 온돌방에서 몸 구리하면 나을지도 모르꾸마. 아차, 몸 지지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당에 당돌하게 끼어들던 신입사원 알료나.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병원에서도 차도가 없을 바엔 온돌방으로 옮기는 것도 방법이지. 환자가 워낙 한기에 떠니까.”
지사장의 한마디에 나는 그날 오후 곧바로 온돌 체험방으로 옮겨지고 알료나의 말대로 절절 끓는 방바닥에 몸을 지진다. 자연스럽게 내 간호사가 된 알료나. 반 의식 상태에서 희미하게 감지되던 알료나의 어머니와 누군가의 방문. 그렇게 한 달을 앓고 난 뒤 어느 날 새벽엔가 내 이마를 짚는 여자의 손에서 전기처럼 오던 짜릿함. 나를 일으키는 여자의 품에 안길 때 난생 처음 어떤 황홀감이 느껴지고 서서히 내리던 열. 별다른 치료법이라고는 기억에 없다. 단지 무슨 차와 미음과 뜨거운 온돌방과 차가운 물수건밖에는. 어떤 치료를 했느냐고 물어도 그저 이렇게만 대답하던 그녀.
“나도 모르꾸마. 어머니가 달여주는 차를 먹였스꾸마. 이 나라엔 효과가 좋은 꽃이나 풀이 영 많아서…”
그때까지 그저 순박한 시골 아가씨로 보였던 알료나는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내 눈에 각인되었다. 그녀는 몸을 뜨거운 구들방에 지지기만 해도 병이 개운하게 낫는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마치 어머니 배 속 같은 안온한 온돌방에서 열병을 이겨낸 셈이었다.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몇 년 전 그녀는 갑자기 사라졌다. 온돌 체험방으로 인연을 맺은 우즈베크 남자와는 헤어졌다는 소식을 현지 직원 편에 들은 적이 있었다. 몇몇 아는 고려인들에게 수소문해보았지만 타슈켄트 어디에서도 그녀의 자취는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 오는 길에 협회에서 주선한 연해주 콕사로프카 발해 유적 답사에 따라간 것도 그 가까이에 있는 그녀 할아버지의 고향 우수리스크를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타슈켄트를 떠났다면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돌아갔을 것이 거의 확실해보였다. 회사에는 바닥재 개발을 위한 광산 정보도 얻고 구들 유적지에서 보일러 마케팅 아이디어도 생각해보겠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알료나 없는 연해주에서 나의 흥미를 자아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드넓은 성터에서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커다랗게 타원형으로 나 있는 콕사로프카 평지성터. 그것은 크기조차 헤아릴 길 없는 내 안의 크나큰 공허를 상기시켰다. 제2의 금융위기라는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고, 그것이 휩쓸고 지나가면 우리 삶의 터전도 곧 폐허가 될 것이었다. 둘레가 거의 2킬로나 되었다는 평지성이 오로지 몇 군데의 구들 터로 쪼그라들었듯이. 넓은 벌판에 남은 것은 단지 구들 자리에 무더기로 박혀 있는 크고 작은 돌멩이뿐이었다.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이렇게 由자 또는 曲자 꼴로 된 구들은 곧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가 세운…”
진 교수의 구들 얘기는 내 귀에 그저 게으른 학자의 후렴구로만 들렸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입으로만 떠드는 학자들보다는 이미 온돌용 보일러를 전 세계에 수출하는 우리 같은 제조업체가 실은 구들 문화의 전도사였다. 정부나 학자들은 항상 민초들보다 뒷북이었다. 나는 못마땅한 듯 구들 터에서 시선을 돌려 벌판을 바라보았다.
그때 홀연 환영처럼 푸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마리 푸른 새가 보였다. 자세히 뜯어보자 새는 어느새 옷깃과 치마 가장자리에 흰색의 화살깃 무늬가 수놓인 푸른색의 우즈베크 전통 옷을 입고 납작한 황금색 모자를 쓴 여자로 바뀌었다. 그녀는 타슈켄트 온돌 체험방의 초대 안내인 알료나였다. 며칠 전 내가 우수리스크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그녀를 갑자기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눈을 의심한 나는 손으로 두 눈을 비벼보았다. 연해주의 러시아 처녀도, 우즈베키스탄이나 북한 아가씨도 아니었다. 카레이스키, 오알료나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 전체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우즈베키스탄과 할아버지의 고향 연해주, 그리고 조상의 땅인 북한 회령, 그 모두의 분위기가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내가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다면 바로 그 이국적인 이미지 때문일 것이었다. 타슈켄트의 차이하나에서 사모바르를 들고 조용히 차를 따르던 때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알료나는 내가 잡으려 손을 내밀면 푸른 날개를 펼치면서 날아가버리고, 손을 거두면 다시 날아오기를 되풀이하면서 나의 애를 태웠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며칠 전 연해주에서 교포가 가장 많이 살고 있다는 우수리스크를 헤매고 다니던 때를 다시금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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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알료나의 흔적은 없었다. 넓은 초원지대에 전봇대가 띄엄띄엄 서 있는 옆으로 나지막한 집들이 수십여 채 나란히 줄지어 선 마을이 있었다. 붉은 지붕 색깔 탓에 동네는 금세 눈에 확 들어왔다. 마을 앞에는 좌우로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서 있었고 집집마다 청국장 띄우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국으로 수출할 통로를 찾았는지 손바닥만 하게 메주를 빚어 건조대에 올리는 할머니의 손길에는 신바람이 들어 있었다. 이름을 붙여놓지 않아도 고려인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타슈켄트에서 최근에 돌아온 사람들 중에 알료나네 가족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알료나의 행방은 모른다고 했다. 마을회관에서 요 근래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았지만 거기에도 알료나 가족의 이름은 없었다. 고려인 마을을 나와 우수리스크에서 규모도 가장 크고 없는 게 없다는 중국시장으로 갔다.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서 있고 그 아래 매대에 울긋불긋한 과일이 수북이 쌓여 있는 청과 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토마토를 진열하고 있는 중년 여자를 보자 가슴이 뛰었다. 얼굴 생김새가 완연한 카레이스키였다. 오알료나를 아느냐고 묻자 그런 이름은 생전 처음 듣는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게오르기, 어머니는 김이밀리아인데, 우즈베키스탄에서 살다가 돌아왔어요.”
부모 이름까지 대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수리스크 중국시장에서 과일 가게 몇 군데만 들러보면 자신의 집안과 금세 연결이 될 거라고 하던 알료나의 말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때 이미 중앙아시아로 함께 쫓겨났던 그녀의 친척들은 대부분 우수리스크로 되돌아왔다고 했다. 몇 년 전부터 중국의 조선족이 들어와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이렇게 판도가 바뀌어버린 것일까. 오랫동안 시장을 지켜왔을 법한 주류 도매점, 훈제 정육과 생선, 소시지를 파는 가게를 찾아가 러시아어로 된 쪽지를 보여주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물건을 진열하던 러시아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맞은편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가리켰다. 가전제품 같은 공산품과 옷 등 수입 상품들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금발의 젊은 러시아 여인들이 컨테이너 박스 주변을 기웃거렸다. 컨테이너 상가를 돌면서 오알료나와 그의 부모 이름을 대봤지만 역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허전한 마음을 안고 발길을 돌려 일행이 먼저 가 있는 콕사로프카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었다.
“구들 터에서 나온 이 적갈색 토기를 보시죠.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인 띠 고리 손잡이가 달린 병 모양의 토기인데요. 여기 치마 입은 처녀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돌아가며 춤추는 문양은 발해의 문화가…”
진 교수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 나는 뒷걸음으로 일행에게서 슬며시 벗어나 담배를 피우러 나오는 척하면서 성터에서 빠져나왔다. 진 교수에게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알료나는 마치 붉은 토기 속의 여인처럼 강강술래를 하는 자세로 푸른 날개를 펼친 채 자꾸만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키 작은 나무들이 몇 그루 있는 작은 동산으로 올라가서는 나무 밑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료나도 따라와 내 곁에 앉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역사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일에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연해주라고 하자 저절로 구미가 당긴 것은 내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그녀에 대한 마음의 짐 때문인지도 몰랐다. 온돌 유적을 활용해 보일러 마케팅을 해보라는 당국의 처방은 약발이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이런 유적이 발견된 것이 처음도 아니었다. 단지 이번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북쪽 해안으로 몇백 킬로나 떨어진 콕사로프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긴 했다. 이것은 발해의 국경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위쪽인 연해주 중북부까지 뻗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데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이미 수백, 수천 년 전에 망한 나라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짓인지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런 짓을 또다시 하는 종족이 있다면 팔레스타인과 같은 화약고를 지구에 또 하나 만드는 격이었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 서양에도 없는 발해의 구들문화를 계승한 덕분인지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도,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에서도, 심지어 최근에는 모스크바와 런던, 도쿄에서도 라디에이터를 치우고 바닥에 온수 배관을 하고 가스보일러를 설치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열교환기의 진화 덕분에 만들 수 있었던 순간온수기도 미국과 유럽에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온돌 난방은 금발의 서양인들에게도 터번 쓴 아랍인들에게도 집 안에서 구두를 벗도록 명령했고, 그 청결함과 쾌적함이 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다이어리를 가지러 다시 온돌 체험방으로 돌아간다. 서울에서도 보기 힘든 매끈하고 노르스름한 장판 바닥이 오늘 따라 유난히 빛이 나 보이고 나비 무늬가 새겨진 문갑과 사방 탁자도 맵시가 달라 보인다. 침대가 없는 널찍한 온돌방은 누군가 반가운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하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백자 달 항아리도 문갑 위에 가만히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오른쪽 구석에 서 있는 사방 탁자로 눈길이 간다. 맨 아래에 양쪽으로 열도록 된 문이 있고 거기에 옛날식 걸쇠가 걸려 있다. 무심코 다가가 걸쇠를 빼고 문을 열어본다. 왼쪽에는 비단 주머니에 든 윷과 둘둘 말아둔 말판이 들어 있고 오른쪽에는 말라붙은 붓과 벼루, 그리고 먹을 머금은 화선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화선지 옆에는 흰색과 주황색, 붉은색으로 된 면과 실크 스카프가 개켜서 나란히 놓여 있다. 나는 돌연 푸른 새가 날아와 내 머리에 터번을 감아주는 모습을 본다.
한국의 설날 직원들과 함께 이 방에다 담요를 깔고 윷놀이를 하고 난 뒤에 그녀는 꼭 내 머리에 터번을 감곤 했다. 얼마나 꼼꼼하게 다져가며 스카프를 감는지 나는 그녀가 터번을 감는 게 아니라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울 새 둥지를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광릉 숲에서 짚과 침으로 다져져 단단하고 영글게 지어진 작은 새 둥지와 그 안에 담겨져 있던 알들을 본 기억이 났다.
“어릴 때 영 순했는 매다. 뒷머리가 너무 납작해서 모양이 잘 안 나온다. 이런 머리는 터번 짓는 기술이 더 필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