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오 다섯시 이십분, 그의 방에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촛불 같은 작은 전구 열두 개짜리의 빛나는 샹들리에. 푸른빛이 짙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그의 방은 순식간에 화려한 살롱처럼 변한다. 지금처럼 기온이 급강하한 날 누군가 밖에서 그 방을 엿본다면 가만히 숨어들고 싶을 만큼 환하고 따뜻해 보인다. 하지만 그 화려한 불빛은 정물처럼 붙박여 있는 방 주인 덕에 불이 켜지는 이 순간만 지나면 곧 화사한 빛을 잃은 채 적막 속에 빠져들 것이다. 어쩌면 그 방의 적막은 지나치게 환하고 밝은 저 조명 탓인지도 모른다. 적요한 방 안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샹들리에라니. 불빛 환한 그 방을 나는 오늘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방은 내 방과 다를 바 없는 열다섯 평짜리 복층형 원룸오피스텔이다. 창문 크기만 보아도 평수를 짐작할 수 있는 근처의 오피스텔들은 거의 엇비슷한 평수에 크게 다를 바 없는 인테리어를 하고 있었다. 들어 가본 적은 없지만 방 안을 대강 그릴 수도 있을 만큼 오피스텔의 구조란 뻔한 것이었다. 남다른 것이 있다면 대부분 창문 크기에 꼭 맞춘 세로 블라인드나 가로로 된 롤스크린으로 실내를 가린 데 비해 그의 방은 어디선가 쓰던 것인 듯 커튼 자락이 창턱에서 5,60센티 정도 올라가 있다는 점이다. 보통 길이의 커튼을 창문이 높은 복층의 오피스텔에 매달아놓으니 얻어 입은 치마처럼 달랑하다. 시린 발목처럼 그의 방 일부가 외부를 향해 노출돼 있다. 그 덕에 내 방에서는 책상에 앉아 있는 그의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꼭 그만큼의 높이까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오늘도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미동도 않고 앉아 있는 그의 옆모습은 마치 좌선에 든 스님 같다. 가을 벌판의 억새 같은 흰머리를 삼십 도쯤 기운 등에 얹은 채 내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남자의 옆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노라면 적막한 산사의 입구에 서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남자의 등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그해 초부터 위태롭기만 하던 나는 겨울방학이 되자 기어이 가출을 했다. 친구와 함께 그 애의 사촌언니가 일한다는 햄버거가게에 오후 내내 앉아 기다리다가 일이 끝난 사촌언니와 함께 그녀의 좁은 옥탑방으로 기어들었다. 첫날밤은 온몸을 감고 있던 사슬에서 풀려난 기분으로 생전 처음 소주도 한잔 마셨다. 신발을 꺾어 신거나 규정보다 더 머리를 기른 채 사복을 입고 대학교 앞 생맥주집을 가도 좀처럼 느슨해지지 않던 것들이 일시에 풀려버리기라도 한 듯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갑갑하기 짝이 없는 집과 학교에 폭탄이라도 하나씩 던지고 나온 기분이었다. 다음 날 학교의 점심시간 무렵에야 일어나 늦은 아침을 먹을 때 학교로 불려갔을 엄마의 얼굴이 잠깐 떠올랐지만 곧 포연 속으로 사라지고 그날 나는 친구와 함께 종일 명동거리를 쏘다녔다. 오후 서너시경이었다. 추위도 녹일 겸 백화점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1층의 잡화 코너를 하나씩 돌며 구경했다. 귀고리와 목걸이를 몇 개씩 걸쳐보기도 하고 큐빅이 촘촘히 박힌 머리핀을 꽂아보기도 했다. 선글라스 코너를 돌 때였다. 샤넬 로고가 선명히 찍힌 짙은 검정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어느 순간 친구와 눈이 반짝 마주쳤고 망설일 새도 없이 나는 태연히 그 선글라스를 들고 있던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화장을 곱게 한 점원은 중년의 여자에게 구찌 선글라스를 끼워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언가 견고한 장벽 하나를 부수어버렸다는 쾌감으로 손을 꼭 잡고 재빨리 백화점 현관문을 나서던 나와 친구는 그러나 멀리 가지 못했다. 현관문을 채 나서기 전에 소리 없이 달려온 남자직원의 조용한 악력에 꼼짝없이 잡혀 경비사무실로 끌려갔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남자의 한쪽 손에 든 무전기에서 새 나오는 잡음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지하 3층 경비사무실의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내 가방에서 나온 샤넬 선글라스가 무참히 빛나고 있었다.
연락도 안 되는 딸을 기다리느라 밤을 꼬박 새운 후 하루에 학교와 백화점 두 군데서 호출을 받은 엄마는 혼절 직전이었고 그런 엄마 대신 달려온 아버지의 얼굴은 대리석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이혼한 친구의 엄마는 식당일이 바빠서 백화점까지 오지도 못한 채 전화로 모든 걸 아버지에게 일임했다.
반듯이 맨 넥타이에 정장 코트까지 걸친, 영락없는 은행원 차림으로 허겁지겁 달려온 아버지가 철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며 빌고 또 빌고 나서도 30분 이상 경멸어린 훈계와 시선을 받고야 겨우 풀려나오던 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산 거 같구나.”
서너 발자국 앞서 걷던 아버지의 감색 코트 위로 저물어가는 겨울햇살 한 줄기가 시리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 인색한 햇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버지에게 끝내 한마디도 할 얘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내 완강한 침묵 때문이었을까, 코트가 땅에 끌릴 듯 내려앉은 아버지의 등허리가 눈에 들어왔다. 딱딱하게 굳은 아버지의 등은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은 적 없는 옛 무덤처럼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돌아온 내 등과 머리를 닥치는 대로 때리다가 끝내 큰 소리로 흐느끼던 엄마는 적어도 아버지처럼 적막해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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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이정
1994년 <문화일보>에 단편소설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소설집 『그 남자의 방』, 『도둑게』,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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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바로 옆방과 아랫방에도 불이 들어온다. 하늘에 푸른색이 덧칠을 거듭할 무렵의 방심한 시간대에는 꽤 많은 집들이 블라인드나 커튼 단속을 하지 않은 채 불을 켜기 때문에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밖이 아직은 완전히 캄캄하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누군가 들여다본다 해도 거리낄 게 별로 없는 시간대인 것이다. 그렇게 방심한 채 불이 켜진 몇 몇 집의 내부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환히 들여다보인다. 704호는 오늘도 내복만 입은 초등학생 여자아이 둘이 엄마인 듯한 여자와 함께 식탁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 셋이서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이라도 퍼먹는 자세다. 905호, 그의 옆집에선 이십대로 보이는 여자가 블로그에 글이라도 올리는지 모니터에 열중해 있다. 긴 생머리를 한 여자의 길고 가는 어깨선이 모니터 불빛 탓에 더 창백해 보인다.
신도시로 들어오는 인터체인지의 가로등에도 불이 들어와 있다. 크고 둥근 반원을 이룬 인터체인지와 직선으로 뻗은 외곽순환도로의 가로등 불빛들은 제법 그럴듯한 밤 풍경을 만들어낸다. 유영하듯 흐르는 자동차 불빛들과 호위하듯 도열한 가로등과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까지 합세한 불빛들의 아련한 반짝임이 절로 상념에 젖게 만든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오피스텔 사이로 보이는 이 느닷없는 야경보다 더 먼저 내 시선이 가닿는 곳은 불빛들을 부표처럼 띄워놓고 바다처럼 음험하게 누워 있는 들판의 검은 여백이다. 낮에는 남루하게 비닐하우스들이 들어선 그저 넓고 빈 들판에 불과한데 어두워지면서 벌판은 대천 앞바다처럼 막막해졌고 그 가장자리로 비닐하우스들이 파도라도 일렁이는 양 희끗희끗한 갈기를 세우고 몰려들 기세였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육지의 한 끄트머리에 앉아 먼 바다에서 반짝이는 고기잡이 배들이라도 보듯 아련해지곤 하는 것이다.
집을 떠난 아버지가 간 곳도 바다라고 했다. 1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모든 걸 버리고 떠난 후 가닿은 곳이 바다였다는 사실은 아직도 내게 불가사의다. 재를 세 개나 넘어야만 대처로 나올 수 있는 충청북도 산골짜기 출신의 아버지가 하필이면 떠난 곳이 바다였다니, 아니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시중 은행의 만년 과장에서 부장이 된 지 3년째였고 정년을 꼭 한 해 앞둔 시점이었다. 1년만 더 직장생활을 하고나면 아버지는 남은 생애 동안 생계 걱정 없을 만큼의 연금을 받으며 안온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날 아침에는 북상한 벚꽃이 여의도에 만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나는 무사히 입학한 대학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겸한 학과 MT를 강촌으로 다녀왔다. 뒤풀이까지 마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야 나는 아버지가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았다. 대를 물려온 청빈이 유일한 자랑거리인 선비 집안의 장남으로, 한 장 한 장 벽돌 쌓듯 일군 가정의 가장으로, 55년 동안 한 번도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게 살아냈던 아버지는 마치 벚꽃이 피기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여의도에 모인 그 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30년이나 근속한 은행에는 이미 사표가 수리된 상태였고 퇴직금도 정산이 끝나 있었다. 나와 엄마, 그리고 살던 집과 다달이 붙던 적금 통장과 보험 따위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입던 옷가지를 계절별로 두 벌씩만 챙겨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30년 근속한 대가인 퇴직금은 지하철 역 앞 작은 점포의 등기권리증으로 바뀌어 적금 통장과 함께 있었고 깨끗이 정리된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는 짧은 편지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어떤 말로도 당신에게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곤 믿지 않소. 하지만 최소한 한마디라도 남겨야 한다는 마지막 의무감으로 더듬거리고 있소. 당신도 알다시피 난 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소. 헛된 길을 걸은 적도 없고 삿된 길을 기웃거린 적도 없이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는 게 최고의 선이라고 믿었소. 하지만 지금 나는 그 모든 게 허무하고 허전하기만 해 견딜 수가 없소. 내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소.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만 하루하루 절박했소.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소. 하지만 가보고 싶소. 낯설고 먼 곳으로 가니 부디 나를 찾지 마시오. 당신과 소연에겐 미안하기 그지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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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렇게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저녁을 먹으려는지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뒤돌아서 냉장고로 간다. 방 안에서도 트레이닝이복이나 러닝셔츠 차림을 절대로 하지 않는 그는 푸른색 남방을 입고 있다. 무늬나 배색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푸른빛을 띠고 있는 남방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속에서 쏟아져 나온 불빛 때문에 유난히 등이 굽은 그의 실루엣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의 등 너머로 불이 환히 켜진 냉장고 선반들이 보이지만 그 안의 내용물들까지 알아볼 수는 없다. 안경을 끼지 않으면 눈앞의 사물들을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하는 불량한 시력 탓도 있지만 설령 시력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의 방 냉장고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닌 것이다.
8층의 내 방에서 맞은 편 비잔티움오피스텔을 볼 경우 같은 8층보다는 9층이 더 눈높이에 맞았다. 전면의 벽이 가슴까지 올라와 있는 높은 턱 때문에 같은 층보다는 한 층 높은 9층이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집에서 일본만화책을 번역하는 나는 창문 아래에 커다란 책상을 두고 있는데 책상에 앉아 있다가 습관적으로 눈을 들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맞은편 오피스텔로 갔고 그때마다 그는 늘 부동의 자세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밤 열두시까지,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그는 늘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북향을 한 그의 오른쪽 옆모습을 나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바라보지만 자세는 쉽게 흐트러질 줄 몰랐다. 도대체 그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흰머리를 눈 덮인 초가처럼 이고 있는 그가 종일 책상에 앉아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마다 나는 큰 잔에 물을 따라 한 컵씩 마시곤 했다. 가구와 하나가 돼버린 듯 책상 앞에 앉아 그는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흔히 젊은 남자의 실종은 의심과 배반감이 먼저인 반면 나이 든 남자의 실종은 무엇보다도 혼돈을 가져왔다. 어릴 적부터 허튼 욕 한번 내뱉는 법이 없었으며 꽁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사람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되뇌던 조부모의 전폭적 신뢰가 아니어도 아버지는 누가 보아도 그런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까지 한 번도 결석을 한 적이 없으며 나이 많은 조부를 대신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다.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어려운 집안 살림은 물론 동생들의 학비와 끝내 중풍과 치매로 마지막 생을 마감한 조부모를 모시는 몫까지 모두 혼자 도맡았다. 군복무 동안 틈틈이 공부한 덕에 제대 후 곧바로 취직을 한 은행에서 30년 동안이나 근속했으며 부모의 상중을 제외하곤 결근 한 번 없이 근무해왔다. 90년대 초반 은행이 여전히 인기 직장이던 시절 몇 군데 보험회사와 신생 금융회사에서 아버지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온 적이 있었다. 물론 훨씬 나은 직위와 연봉을 제시했지만 아버지는 뿌리라도 내린 바위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동료들 사이에서 아버지의 별명은 노계였다고 한다. 미련스럽게 한곳에 오래 붙어 있다고 누가 알아주겠는가. 결국은 노계가 되어 폐사 처리밖에 더 하겠느냐 빈정거림 당하던 노계.
집안에서라고 별로 다를 게 없었다. 혼사를 서두르는 부모의 성화에 먼 친척이 소개한 참한 처녀였던 엄마와의 결혼에 앞서 아버지는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밑으로 두 남동생과 여동생 한 명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결혼 때까지 보살펴야 하니 묵묵히 따라주기 바란다는 게 아버지의 요구였다. 일생을 한량으로 지낸 외할아버지 덕에 외할머니가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까닭에 무엇보다 남자의 책임감을 먼저 쳤던 엄마는 보험이라도 드는 기분으로 결혼을 했다. 그리고 엄마의 보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든든하고 미더웠다. 이틀을 끄는 난산 끝에 탈진한 엄마를 위해 더 이상은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일찌감치 단산 수술을 해준 마음 씀씀이까지 엄마는 아버지가 고맙고도 믿음직하기만 했다. 딸 하나는 너무 외롭다며 돌아가는 날까지 아쉬워한 걸 제외하곤 아버지는 부모의 마음을 섭섭하게 한 적도 없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모습조차 가족들에게 보인 적도 없었고 언제나 같은 시각에 일어나 같은 시각에 잠이 들었고 집은 물론이거니와 가구나 가전제품 따위를 아버지가 나서서 바꾸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취직을 한 아버지가 제일 먼저 했다는 조간신문 구독을 30년째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한번은 자전거 한 대를 디밀며 제발 한 번만 바꿔보라는 보급소 직원의 유혹에 넘어간 엄마가 신문을 바꾸었다가 다음날로 자전거를 돌려주고 머리 숙여 사과한 적도 있었다. 밑으로 두 남동생과 여동생 하나까지 대학을 보냈으며 결혼할 때에도 집을 얻을 때에도 적잖은 몫을 기꺼이 감당했다. 결혼 후에도 두 삼촌은 전세를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연락을 받으면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달려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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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5년 전, 자기가 다니던 은행의 주택부금과 정기적금으로 고지식하게 마련한 서른세 평짜리 아파트 역시 아버지는 더 이상 평수를 늘리려고 들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답답해 가슴을 친 적도 있지만 한편으론 안심을 했다. 하나하나 반듯하게 다듬어 아귀 꼭 맞게 쌓은 성곽 속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은 몹시도 안온하고 평화로웠다. 아버지의 남은 인생은 물론 엄마와 나의 앞날 역시 눈에 훤히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선글라스 사건 이후로 집 안에서도 학교에서도 더 이상 금을 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 한 번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본 듯 미련이 없어지고 시시해졌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착실히 공부해서 부모가 그리 섭섭지 않을 만큼의 대학에 무사히 진학도 했다. 그즈음 나는 생이란 앞에 놓여 있는 몇 개의 궤도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 다음은 올라간 레일을 타고 끝까지 가는 기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을 단숨에 뒤집어놓은 채 사라져버렸다.
그가 간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모양이다. 책상과 스탠드 너머로 희미하게 그의 상체가 보인다. 가끔씩 주방에서 한참 동안 요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단히 식사를 때우는 모양이었다. 혼자 사는 것이 가장 불편할 때는 식사 때였다. 혼자 먹는 밥은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맛이 나지 않았다. 한동안 나는 그의 식사시간에 맞춰 밥을 먹기도 했다. 아침 여덟시 삼십분에 아침을 먹고 한시에 점심을, 저녁은 일곱시에 먹는 매우 규칙적인 식사였다. 그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나 역시 그의 방이 똑바로 마주보이는 간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두 달 동안 함께하던 그 기묘한 동반 식사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는 게 내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로 나는 그의 밥상을 상상하며 내 밥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짐작을 해보기도 한다. 그의 건물 1층에는 솜씨 좋은 중년여자가 하는 반찬가게가 있다. 다른 어떤 점포보다 성업 중이었고 나도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일주일에 한 번쯤 그곳에 가 된장에 박은 콩잎이나 연근조림 따위의 밑반찬을 사오곤 하는데 화려하진 않지만 집 반찬과 다르지 않아 주변 오피스텔 입주자들의 단골집이었다. 물론 반찬가게에 갈 때마다 나는 맞은편 그의 방을 확인하곤 한다. 그가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지갑을 들고 그가 사는 건물 1층으로 간다. 가는 길에 그의 우편함을 한 번씩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지난여름 어느 날 네 시간 째 미동도 앉고 책상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도대체 그가 무얼 하고 있는 건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진 나는 벌떡 일어나 열쇠를 챙겨 들었다. 갑자기 그의 우편함이 떠오른 때문이었다. 우편물을 보면 무언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우편함을 찾으러 그의 오피스텔 건물에 들어간 나는 곧 난감해졌다. 매일 수차례 바라보는 방이지만 정작 호수를 몰랐다. 나는 망설일 새도 없이 1층에 멈춰서 있던 엘리베이터에 재빨리 올라탔다. 누군가 그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닫힘 버튼을 누른 후에야 나는 그런 자신에게 당황했다. 도대체 그의 우편함은 뒤져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나는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혹 그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9층에 멎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나는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복도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투명한 유리벽이 쳐져 있었다. 최근 몇 년 새 지어진 아파트에 흔히 있는 무인단속용 출입문이 복도 입구에 떡 버티고 있었다. 해당 호수의 벨을 눌러 호출을 하면 실내에서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 통제 시스템이었다. 순간 당혹감과 함께 어처구니없지만 배반감 같은 것이 몰려왔다. 마치 바리케이드 앞에라도 서 있는 기분이었다. 맨 오른쪽 문이 분명한 그의 방문은 너무 멀어 숫자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바로 옆집인 905호는 똑바로 보였다. 그리고 905호 왼쪽으로 901~904라는 아크릴 표지판이 보였다. 그의 방은 분명코 906호였다. 방 호수만 확인한 나는 도망치듯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경비가 졸지 않는다면 무인 카메라에 비친 수상한 내 거동을 보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예상과 달리 우편함은 1층 주차장으로 나간 외부에 있었다. 나를 위해 그곳에 만들어놓기라도 한 듯 반가웠다. 그러나 확신에 가까운 기대감과 달리 우편함은 텅 비어 있었다. 광고 전단 한 장 볼 수 없는 텅 빈 우편함. 마치 내가 올 줄 알고 누군가 우편함마저 비워버린 듯했다. 그날 나는 두 번의 난데없는 배반감에 당혹하여 도망치듯 내 방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는 그동안 화장실조차 다녀오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가끔씩 습관처럼 그의 우편함을 뒤져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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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나는 갑자기 급정거를 한 선로 위에서 당황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버지가 갈아탄 기차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통 감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혹 딴 여자가 생긴 게 아닐까, 엄마는 모두가 한 번쯤은 의심할 법한 말을 가장 먼저 입 밖으로 꺼냈다. 젊은 여자와 함께 도피행이라도 떠난 건지도 모른다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그럴만한 증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고 돈 한 푼 안 챙긴 채로 여자와 떠난다는 건 거의 가능성 없는 얘기였다. 게다가 여자라곤 엄마가 처음이었고 평소 그토록 과묵하고 변변한 주변머리도 없던 사람이 갑자기 여자와 함께 세상 끝으로 사라졌다는 얘기는 곧 설득력을 잃었다. 그밖에도 이모와 삼촌들은 절에라도 들어갔을지 모른다거나 깊은 산속의 빈집을 찾아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저마다의 상상력을 동원했으나 그 모두가 아버지의 성품과 한계 안에서의 추측일 뿐이었다.
아버지의 소식을 안 것은 실종된 지 두 달이 지나던, 보리가 누렇게 변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게 최종 의견들이어서 한동안 잠잠히 지내던 차에 작은 삼촌이 종로경찰서 정보과에 있다는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아버지의 행적을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삼촌이 가져온 정보에 의하면 뜻밖에도 아버지는 집을 나간 사흘 후 부산에서 외항선을 타고 나갔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밀항도 아니었고 언제 준비했는지 선원수첩까지 받아 갑판원 자격으로 유럽행 컨테이너선을 타고 갔다는 것이었다. 정식 해운회사 소속은 아니었고 주로 잡역부들을 송출하는 용역회사를 통해서였다. 외항선을 타고 나갔다는 소식은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나간 때만큼이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다. 충청도 산골짜기 출신의 골샌님인 아버지는 여름휴가라 해서 그 흔한 해수욕장을 가거나 자신이 먼저 나서 겨울 동해바다를 보러 간 적도 없었다. 그저 이모네가 어쩌다 콘도를 빌렸다며 함께 가자고 할 때나 그 일행에 붙어 속초 바닷가나 서해의 대천 바닷가를 가보았을 뿐이다. 아버지는 하다못해 직장 사람들끼리 떠나는 바다낚시조차 즐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집을 나가 찾아든 곳이 저 망망대해라니, 갑자기 대양 한가운데로 뛰어든 아버지의 마음의 행로를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진 나는 심한 뱃멀미라도 하듯 어지러웠다.
두 달 동안 멍하니 당혹스럽기만 하던 엄마에게 아버지가 망망대해로 떠났다는 소식은 비로소 깊은 배반감을 불러왔다. 절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하다못해 여자도 아닌 바다라니, 엄마는 아버지가 가출을 했다는 사건보다 아버지가 간 곳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바다라는 사실에 더 심하게 몸을 베인 사람 같았다. 엄마는 그때까지 옷장에 고스란히 걸려 있던 아버지의 옷들을 모두 꺼내 아파트 쓰레기통 옆의 헌옷 수거함에 넣어버렸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 엄마는 아버지의 양복 재킷 하나를 수거함에서 다시 가져와 밤새 가위로 잘게 자르며 통곡을 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 몸져누워 있다가 몰려온 이모들이 억지로 일으켜 앉힐 때까지 엄마는 깊이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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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담배를 피운다. 라이터 불빛 하나로 견고한 적막이 깨진다. 단지 담뱃불을 붙였을 뿐인데 방 안 풍경이 달라 보이고 그는 방금 전과 전혀 다른 존재가 돼버린 것 같다. 같은 자세로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지만 그의 손에 들린 담배 한 개비가 그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잠시 데려가기라도 한 듯 전혀 딴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담배를 피우는 간간이 커피라도 마시는지 그가 컵을 들어올린다. 그의 방 안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마주 앉아 있기라도 한 것만 같다. 오래 묵혀두었던 가슴속 비밀이라도 꺼내놓고 있는지 그의 자세가 사뭇 촉촉하고 은밀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보아도 그의 방 안엔 타인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는 서랍 속에 넣어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급히 불을 붙인다. 담배 연기가 창문가로 번져 시야가 안개 낀 듯 흐려진다. 먹빛으로 변하기 직전 마지막 짙푸른 하늘 가운데로 손톱으로 찍어낸 듯한 초사흘달이 실눈을 뜬 채 내려다보고 있다. 손가락 사이에서 짚불처럼 타들어가던 던힐 라이트의 흰 재가 무릎관절이라도 꺾듯 책상 위로 떨어진다.
담배를 다 피운 그가 갑자기 창문 앞으로 다가온다. 나는 급하게 방 안의 불을 끄고 책상 의자에 앉아 자세를 낮춘다. 그가 창가로 와 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가 보고 있는 곳이 어딘지 정확한 시선을 구별할 수 없다. 혹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언젠가 해가 남서쪽으로 넘어가는 오후에 그와 나는 대치하듯 마주 서서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본 적이 있다.
그날따라 나는 비닐하우스와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무심히 내다보고 있었다. 인터체인지의 휘어진 도로 위를 달리던 차창에서 햇살이 은어 비늘처럼 튀어 올랐다. 언제부터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무심히 던져진 눈길을 돌리다가 나는 그와 시선이 맞닥뜨렸다. 아니 그의 시선이 보일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니 시선이 부딪친 것은 아니었다. 실내등이 켜진 밤도 아니고 대낮의 햇살 아래서는 창문의 유리에 빛이 반사돼 실내가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사람이 분명 나를 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만큼 그의 자세가 나와 겹쳐지는 느낌만은 또렷했다. 얼굴 윤곽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표정이 보이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만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는 어떤 기척. 평소 같으면 얼른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거나 롤스크린을 내려버렸을 터인데 그날은 나 역시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보았다. 내가 그를 마주보고 있다는 걸 충분히 알만큼 나도 그를 쳐다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그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깨는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으로 적당히 긴장돼 있었고 눈빛은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형형했다. 나는 단지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켜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한 곡이 끝날 즈음이던가, 그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하던 일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서둘러 몸을 돌린 그는 곧바로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는 순식간에 벽면을 향해 좌선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토록 매정하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그가 참을 수 없었던지 그날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우편함에 가보았다. 통신사에서 온 지로 고지서와 2,550원짜리 가스요금 고지서, 흰 봉투에 넣은 근처의 나이트클럽 개업 안내장이 들어 있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정도로 밥을 해 먹고 있었고 A통신사의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8층까지 하나하나 계단을 밟아 돌아오는 길, 통신요금 고지서에 선명히 찍혀 있던 박규범이라는 이름 석 자가 몸속 어디선가 찰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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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생활 형편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엄마에게는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월급봉투 대신 아버지가 퇴직금으로 마련해놓은 구청 앞 10평짜리 점포에서 최소한의 생활비가 나왔다. 몇 해 전, 한 해의 시차를 두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도 아버지는 집을 떠나기 1년 전 서해안의 한 암자에 맡겨두었다. 할머니의 세 번째 기제사를 마친 아버지는 삼촌들과 고모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 돌아가신 지 3년도 지났으니 이제 제사는 절에 모시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대대로 제사 모시는 걸 장남의 제일 큰 임무라 생각해온 집안 분위기로 보아 그것은 말 그대로 폭탄선언이었다. 제사야 당연히 장남인 아버지가 지내리라 믿었던 엄마는 무엇보다 삼촌들의 눈초리가 무서워서라도 왜 그러냐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제사는 마음으로 지내고 이젠 그만 홀가분하게 살아도 되지 않겠소?”
중풍으로 3년을 누워 지낸 할아버지와 돌아가기 전 1년을 치매로 엄마를 고생시킨 할머니인지라 아버지의 말은 놀랍긴 했지만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삼촌들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숙모의 홀가분한 표정 덕분에 아버지의 선언은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집을 떠나기 위한 아버지의 첫 준비 작업이었다.
아버지가 없는 내 삶 역시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이미 스무 살이 되었고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붓기 시작한 교육보험이 대학 학비를 끝까지 책임질 것이었고 졸업 후에는 늘 꿈꾸던 독립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돼버렸다. 가장으로 살았던 30년 동안이 마치 떠나기 위한 준비 기간이기라도 했다는 듯 아버지는 모든 걸 완벽하게 정리해놓고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긴 엄마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폐경기 여인의 우울증을 표 나지 않게 앓고 있던 엄마는 아버지 없는 빈 시간들을 급기야 종합병원 정신과에서 받아오는 약들로 겨우 버텨내기 시작했다. 한 3년 정도 호르몬 변화가 안정기에 들 무렵 조금씩 약을 줄이기 시작한 엄마는 아버지가 떠난 지 5년 만에 겨우 약을 중단했고 이모들과 어울려 조금씩 바깥출입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년 전, 엄마는 내게 열다섯 평짜리 아파트 하나를 남기고 이모가 사는 천안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모네 찜질방엔 제 일처럼 관리를 거들어줄 사람이 필요했고 엄마는 수다하면서도 잔정 많은 이모가 필요한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실종이 혼란스러웠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흔히 책임감 강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버지는 워낙 말이 적고 속을 드러내는 게 익숙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아버지가 있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와 그리 살갑게 지낸 기억이 없었다. 내가 머리에 염색을 하거나 곧 실밥이 터질 듯한 교복 따위로 반항하던 중학교 때는 학생시절 교모조차 한 번도 비뚤게 써본 적 없는 아버지와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선글라스 사건 이후 내가 그런 일들에 흥미를 잃는 바람에 아버지와 더 이상 충돌이 일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소심한 모범생들에게 호기심은 일지 않지만 한번 마음을 트고 나면 여간해선 변치 않는 신뢰감이 생기듯이 아버지에게도 나는 비슷한 심정이었다. 혈액형이나 별자리처럼 사람을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분석하길 좋아하던 내게 아버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을 한 인간 유형의 모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내 신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걸 헝클어놓았다. 이후로 나는 대학생활 내내 다가오는 남자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사람 속에 감춰져 있을 또 다른 곳에 가 못 박힌 내 시선을 남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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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한눈파는 사이 외출이라도 하려는 건지 그가 갑자기 겉옷을 걸치고 있다. 멀리 가는 길은 아닌 듯 입은 옷 위에 파카만 걸치는 모양이다. 드물게 보는 장면이다. 24시간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컨대 그가 집을 나가는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다. 그의 방이 한참 동안 불이 꺼진 채 있어 그가 외출을 했으리라 짐작을 한 적은 있지만 이렇듯 그가 옷을 입고 나가는 장면을 본 적은 없었다. 그의 방에 불이 꺼지고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내 방의 불을 모두 끄고 길 아래쪽을 뚫어지게 내려다본다. 그가 혹 다른 출입구로 가버린 건 아닐까 포기할 즈음 검은 파카를 입은 키 작은 은발의 남자가 편의점 옆 정문에서 나와 내 오피스텔 쪽으로 걸어온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신호등을 기다리고 서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와는 달리 유난히 키가 작아 보이고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워 보인다. 길을 건넌 그가 내 건물 앞쪽으로 커브를 돌며 사라진다. 망설일 새도 없이 나는 급히 오리털 점퍼를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방을 나선다. 마침 10층에 서 있던 엘리베이터가 갓 돌 지난 아이 걸음마처럼 천천히 내려온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재촉하며 1층으로 내려간다. 미용실과 세탁소를 지나 옆문으로 급히 뛰어나가 그를 찾는다. 며칠 전에 개업한 옆 동의 맨 끝에 있는 퓨전 주점 오뎅 사케집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간신히 눈에 잡힌다. 나는 반짝이는 작은 전구들에 칭칭 감긴 채 단지 한가운데 고문당하듯 서 있는 벚나무 옆에 멈춰 서서 겨우 숨을 고르며 사라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가 들어간 퓨전 주점을 지나며 표 나지 않게 안을 들여다본다. 분홍 리본이 매인 행운목과 벤자민, 꽃이 핀 서양란 사이로 대여섯 명의 그림자가 비친다. 창가 맨 구석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분명 그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따뜻한 정종이라도 마시는지 잔을 든 그의 어깨는 가까이서 보니 더 좁고 낮게 내려앉아 있다. 주변의 누구도 그에게 눈길 주지 않고 그 역시 어떤 곳에도 시선 가지 않는 완연한 독작이다. 홀로 드는 술잔이 그림자 연극처럼 느리게 올라간다. 나는 태연히 그 곁을 지나 길 건너 스시집으로 들어가 늦은 저녁식사로 알밥을 주문한다. 돌아앉은 그의 완고한 등이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내비친다. 뚝배기 속의 날치알들이 입안에서 폭죽처럼 터진다. 인도양 한가운데를 가르마 타듯 지나가는 배 양쪽으로 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활짝 편 채 새처럼 날아간다는 날치 떼가 눈에 본 듯 선하다.
바다에서 돌아온 아버지의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종숙 어른이었다. 아버지와 동갑의 나이로 공교롭게도 아버지와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종숙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삼촌들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건설회사 퇴직 후 부동산 사무실을 차려 소일거리로 삼던 종숙은 어느 날 친구의 부동산 사무실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다고 했다. 아버지는 마침 외국에서 살고 있는 집주인이 시세보다 500만원이나 싸게 내놓은 방의 전세 계약서를 쓰던 중이었다. 작은집 장남인 아버지와 함께 늘 집안의 대소사를 분담해오던 종숙은 아버지가 사라진 후 그 모든 일들을 혼자 도맡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걸 아버지에게 미뤄온 두 삼촌들은 문중 대소사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빠지곤 했다. 종숙이 죽은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온 양 아버지를 반긴 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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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근처 찻집으로 아버지를 끌고 간 종숙은 아버지에게서 오 년간 떠돌았던 바다 이야기를 물어물어 겨우 들었다고 했다. 뱃사람 중 최하직급인 갑판원으로 승선을 한 아버지는 처음엔 소원하던 대양을 쳐다볼 새도 없이 낯선 일들을 익히는 데 몸이 바빴다. 갑판장의 지시에 따라 기름때 전 작업복을 입고 배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선적된 컨테이너를 조이는 레싱 작업을 했으며 입출항시마다 긴장감 팽팽한 갑판 위를 뛰어다녔다. 휴식은 인도양에 들어서야 겨우 찾아왔다. 찌그러진 곳 하나 없이 공처럼 둥근 대양 한복판에서 지나가는 배 한 척 눈에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이 탄 배 하나만이 홀로 바닷길을 가르고 있었다. 엔진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선수(船首)에서 문득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아버지는 비로소 자신을 동여매고 있던 것들이 비늘처럼 떨어져 나가는 걸 보았다. 그토록 무겁고 두렵기만 하던 세상 것들이 어느 순간 뱃전으로 튀는 물 한 방울보다도 더 가볍고 덧없어지고 있었다. 순간 그는 예감했다. 둥그런 수평선 너머로 내려가는 쇳물 같은 해를 보며 다시는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란 걸.
제일 낯선 세상을 보고 싶었다고 하더라.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곳 말이다. 세상의 가장 눈 선 데가 어딘가 생각해보니 바다였더란다. 그것도 망망대해에서 자기가 일생을 지렁이처럼 기듯이 산 땅덩어리를 보고 싶었다더구나. 우주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서 혼자 몰래 준비한 선원증을 얻어 갑판원으로 이 배 저 배를 타고 5년간 세상 구경을 하고 왔단다.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을 모두 돌았다더라. 일부러 낯설고 멀리 가는 배들만 골라 탔대.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배를 타는 건 그중 수월했나 보더라. 정해진 휴가도 될 수 있으면 단축해서 5년 내내 물 위를 떠다니다시피 했단다. 그렇게 한 5년 떠돌고 나니까 가슴속에 바위처럼 뭉쳤던 것들이 뭐였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더란다. 그 망망대해서 이 좁아빠진 땅덩어리를 보면 참 허망하기 짝이 없더란다. 사는 게 어이없기만 하고… 죽는 날까지 그렇게 보내도 하나도 억울할 게 없을 것 같더란다. 나이 때문에 더 이상 탈 수가 없어 배에서 내리고도 부두에서 막일을 하며 바닷가에 붙어 있다가 작년에야 서울 근처로 왔나 보더라. 이젠 떠돌이 신세니 어딜 가도 바다나 다름없겠지. 너나 네 어머니에겐 염치없는 짓이니 절대 연락 말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입고 있던 옷이라도 터진 건지 그가 내복 빛깔의 옷을 들고 바느질을 하는 모양이다. 실을 너무 길게 꿰었는지 손놀림이 크고 느리다. 한 땀 한 땀 떠가는 손길이 더없이 신중하고도 정성스럽다. 그의 시선과 바느질감이 한 몸이라도 이루듯 빈틈없이 몰두해 있다. 어떤 누구라도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바느질 하나에도 저토록 자신의 전부를 던져 하나가 될 수 있다니. 나는 그의 바느질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어느덧 그에게 바느질은 책상 앞에 앉아 종일 꼼짝하지 않고 책을 읽던 모습이나 홀로 술을 마시던 모습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는 늘 홀로 있지만 정부와 틈 하나 없이 포개져 있는 사내처럼 충만해 보인다. 고독하지만 외로워보이진 않는다.
나는 방 불을 남김없이 켜놓고 세 쪽으로 나뉜 롤스크린 모두를 끝까지 감아올린 후 와인 한 잔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계단에 앉는다. 자동차 통행이 줄어든 시각의 야경은 한결 차분해져 있다. 환한 불빛 속의 내 방과 계단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맞은편에서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그의 방이 나란한 눈높이에서 더 가까이 보인다. 바느질을 마친 그가 다시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다. 그가 쓰는 것이 일기인지 혹은 가계부인지 나는 알 수 없다. 1년 가까이 훔쳐보고 가늠해보고 우편함까지 뒤졌지만 나는 그가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책상에서 무엇을 하는지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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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저기다. 저기서 혼자 살아.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해서 이사하는 날도 안 가봤다. 종숙 어른이 가리킨 곳은 비잔티움이라는 알파벳 글자가 건물 벽면에 크게 붙어 있었고 그의 방은 9층 서쪽 맨 끝 방이었다. 그날 나는 종숙 어른과 헤어진 뒤 근처 부동산에 들러 그의 방 맞은편 오피스텔에 빈방이 나온 게 있는지 알아보았다. 마침 서너 달 전부터 새로 입주를 하고 있던 오피스텔은 빈방이 많았고 나는 한 달 뒤 그의 방이 마주 보이는 이곳 8층으로 이사를 했다.
어릴 적 조부에게서 배웠다는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읽고 있는 걸까. 중국사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회사 다니면서 공부하는 야간대학에는 사학과가 없었기에 아쉽게도 경영학과를 다녔다는 그가 혹 중국 고대사를 읽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는 자신이 지나다녔던 베링해나 아라비아만의 해류나 캄차카반도의 만년설이나 빙하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을 짐작조차 할 수 없듯이 나는 그가 지나온 인도양과 태평양의 물빛과 깊이를 알지 못한다. 그 깊은 바닷속으로 흐르던 어떤 해류가 어느 날 갑자기 불어온 바람 한 줄기에 방향을 틀어 물 위의 우리를 어떻게 흔들어댈지도.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린다. 잠이 오지 않으면 새벽 세시에도 전화를 걸어오는 엄마다. 뭐하니? 엄마는 마치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가 참을 수 없이 궁금해진 사람처럼 늘 절박하게 물어오곤 한다. 뭐하긴, 술 한잔 하고 있어요. 혼자? 혼자인줄 뻔히 알면서도 꼭 되묻곤 하는 것도 엄마의 버릇 중 하나다. 나도 포도주 한잔 마셨다. 잠이 통 안 오네. 포도주에 젖은 엄마의 목소리에 내 손에 들린 와인 잔이 슬며시 흔들린다. 엄마는 천안의 열여덟 평짜리 아파트 구석구석을 화분으로 채우고 있다. 그렇게 꽃으로라도 빈 공간을 채워 넣지 않으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지금도 엄마의 방에선 연분홍 철쭉이 철 이른 꽃을 화사하게 피워내고 있을 것이다. 나하고 한잔 더 마시면 잠이 올 거야. 우리 건배할까? 나는 자꾸만 잠기려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는다. 그럴까? 젖은 엄마의 목소리에 습기가 조금 가신다. 건배! 나는 캄캄한 어둠에 묻혀버린 그의 방을 향해 술잔을 든다. 투명한 술잔 속에 꼬리를 매단 가로등 불빛들이 한데 들어와 꼬물거린다. 오늘이 네 아버지 생일인 거 너도 알지? 엄마는 끝내 참았던 한마디를 내뱉고야 만다. 꼭 10년인데…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마침내 엄마의 목소리가 포도주잔 깊숙이 젖어든다. 나는 불 꺼진 그의 방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남자의 방』에서 전재 (김이정, 자음과모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