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런 식이 가능할까. 불가능하게 시작할 수는 없을까. 시작은 없고 중간과 끝만 있는 이야기는 어떨까. 끝도 필요 없다. 시작과 끝을 연상하고, 연상이 무한히 확장되고, 끊어져 중간의 얼굴을 치장할 수 있다면. 흠집 낼 수 있다면. 시작을 지연시키는 혹은 끝에 다다르기 위한, 불가능의 이름으로 가능한, 이야기의 중간. 중간 이야기.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야기에 표백제를 뿌린 경고 문구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다. 나는 환자복을 입고 있다니. 처음부터 뭔가 잘못됐다. 이럴 순 없다. 문장이 나의 의지보다 앞서다니.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나. 나는, 이라고 더 이상 문장을 시작하고 싶지 않다, 고 나의 목숨을 걸고 약속 하지 않았는가. 목숨을 걸만 한 일이 고작 그것에 불과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첫 문장에 목숨을 걸만큼 내가 어떤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알고 누구도 나와 약속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누군가들은, 나중에 누군가들은 그들이 될 것이다, 나의 첫 문장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제 그 힘이 소진 된 것에, 힘을 필요로 할 곳과 것이 없기에,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나는 나와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장점임을 잘 알고도 있다. 그는 환자복을 입고 있다. 나를 그라고 불러본다. 실제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설마. 내가 나를 어떻게 그라고 부른단 말인가. 나를 분리하지고 구부리지도 마주하지도 못하는 내가. 다만 이렇다. 허구에 솔직해지자. 능통해지자. 나를 그라고 써본다. 나를 그라고 쓴들 나가 그가 되는 법은 없지만. 나는 나의 무지를 조롱하는 심정으로 그라고 나를 생각한다. 생각에 있어서 나는 기어코 무지한 편에 속하고 싶다. 부르고 쓰고 생각한다. 이 순서대로 나가 그가 되어가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밝힐 수 있다면, 뒤이어 논리의 허점을 찾아 반박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부르고 쓰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쳐다보고 있으니 순서가 왠지 뒤바뀐 것 같다. 아무래도 좋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좋다. 나인지 그인지 이 문장에 중독되어 있다. 뭔가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아무래도 좋다. 이 문장을 또 쓰게 될 것인가. 또 쓰겠지. 아무래도 좋다, 라는 문장은 아무 때나 써도 좋지만 그렇기에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아무래도 좋다, 라는 문장을 쓰기 위해 혹은 아무래도 좋다, 는 문장의 의미를 지시하는, 의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불필요한 문장을 쓰고 지우고 억지로 연결시켜야만 하는가. 벌써부터 지친다. 나는 나를 그라고 부르게 된 것을 후회한다. 후회의 저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메아리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반복되는 메아리. 다가오면 숨 막히고 멀어지면 아득한. 그녀라는. 그녀라고 불렀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다. 그녀는 한 번도 환자복을 입은 적이 없다. 그녀에게 환자복을 입힐 수야 없지. 그를 뒤집으면 그녀가 된다. 그와 그녀의 엉덩이는 유사하다. 눈을 부릅뜰 필요가 있을까. 이 문장에 뭔가 풀리지 않는 비밀 혹은 엄청난 오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 따위가 알게 뭐냐. 그녀를 떠올리는 것조차 버겁다. 그녀라는 이름에서는 참기 힘든 냄새가 난다. 그녀의 엉덩이에서 풍기는 것처럼. 이름이 메아리를 부른다. 그녀라는 메아리에서는 잠든 후각을 꼬집는 비릿한 냄새가 난다. 어려울 게 뭐 있겠는가. 나는 나를 그(그녀)라고도 부르지 않겠다. 나는 나(너)에 대해 혹은 그(그녀)에 대해 어쩌면 아무개에 대해 영원히 부르지 않는 편이 좋겠다. 가능하다면 나와 그와 아무개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주인으로부터 애써 뺏어온 것을 돌려준다는 것은 얼마나 민망한 짓인가. 엉덩이를 깐 문장이 다른 문장의 사이사이로 요리조리 몸을 숨기는 민망한 짓거리를 어디 한두 번 목격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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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태용
2005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2년 후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를 펴냈다. 죽은 아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치매에 걸린 노인의 이야기 「풀밭 위의 돼지」, 친구의 아내와 욕망관계에 있는 사내가 등장하는 「검은 태양 아래」, 죽은 아빠가 들어 있는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상한 가족들의 이야기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 절대로 침낭에서밖에는 잠들 수 없는 남자가 등장하는 「잠」 등 10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소설은 크로테스크한 풍경 속에 흔적없이 해체되는 전통 가족 서사를 그려낸다. 김태용의 소설은 하나같이 ‘기괴함’으로 이루어진 문제작들인데, 내용의 파격성 외에도 뚜렷한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 점, 이야기 맥락의 전과 후를 일부러 해치는 동어 반복과 뛰어넘기 등이 이색적이다. 2008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텍스트 실험집단 <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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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머릿속이 텅 비어 머리 밖 세상을 짓누르는 허공과의 경계가 희미해진 것도 아니다. 실례를 드는 것은 좋은 대화법이 아니다. 대화할 사람은 언제나 넘쳐났다. 대화를 유도하고 거절하는 방식은 매번 비슷했다. 환의를 입은 자들이 병상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침대 정면에 붙어 있는 환자기록부를 힐끔 쳐다보거나 침상에 걸터앉지도 다리를 뻗어 눕지도 못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 뭔가 말하려다가 돌아섰다. 환자기록부에 적힌 이름과 나이와 주소와 병명은 누구의 것인가. 따져 묻는 것은 금기다. 규율이다. 법칙이다. 개나 소나. 같은 말이다. 아무튼 뭔가 지켜야하지만 어기고 싶은 것을 되도록 지키고 어기지 않으면서 지키지 않고 어기는 방법을 궁리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크나큰 이로움을 제공한다. 편의에 따라서는 적극성을 보이며, 뭔가 과시할 것을 찾지 못해 안날이 난 것처럼, 침대의 상부와 하부를 따로 따로 움직일 수 있다고, 가만히 누워서 몸을 구부릴 수 있다고, 그게 정확히 어떤 뜻인지는 나중에야 알았지만, 말하는 환자들도 여럿 있기를 기대했다. 주기적으로 어떤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듯 환자들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자들까지 그때만큼은 몸을 일으켰는데, 그들의 재빠른 동작은 무모한 혁명처럼 순식간에 이루어졌는데, 침대 아래에 붙어 있는 꺽쇠, 뭔가 다른 용어, 의학용어에 가까운 현학적인 명칭이 있겠지만, 꺽쇠라고 명명한 이상 다른 것으로 부를 수 없는, 이것이 인간의 유일한 약점임을 재확인하며, 그것을 잡고 돌렸다. 침대의 허리가 반으로 접히며 고통스러운 쇳소리가 퍼졌다. 그 소리는 신경을 무척 거슬리게 만들었는데, 환의를 입은 자로서는 그 소리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잠든 밤에, 실제 잠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어나 꺽쇠를 미친 듯 돌리고픈 충동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꺽쇠를 돌리는 자에게만 쇳소리가 나면 좋을 텐데, 어떤 불가능한 것에만 기대는 습관은 쉽게 버릴 수가 없다. 한 밤 중 자신의 메아리가 듣고 싶어 무작정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한 번도 꺽쇠를 돌린 적이 없다. 아니 몇 번은 돌렸는지 모르겠다. 실제로 돌린 적이 없다 해도 이렇게 기억하는 것이 마음에 편하다. 간호사가 다가와 돌려드릴까요, 라고는 전혀 묻지 않고, 올려드릴까요, 내려드릴까요, 라고 물어봤을 지도 모른다. 환자가 있든지 없든지 그것이 그들이 해야 될, 말해야 할 의무 같은 것이니까. 자고 일어나면 침대의 상부가 완전히 올라가 있었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누워서 잠이 들고 깰 때는 앉아 있는 고통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육체가 자력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수면 중에 누워 있던 몸이 아주 느린 속도로 움직여 상체를 꼿꼿하게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오전 시간을 심심하지 않게 보낼 수 있었다. 허리에 석고를 발라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 섣불리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플라스틱 허리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고무 허리처럼 되었다. 사지가 멀쩡해 보이는 데 왜 움직이지 않지요. 정면에 마주보이는 환자가 물었다. 허리가 아프다고 둘러대자, 그렇게 말하자 그때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허리에 문제가 있어 입원을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니 옆의 옆에 있는 환자는, 다리가 부러져 입원하면 기관지가 아프기 마련이고 두통이 심해 입원하면 항문에 염증이 생긴 다는 듯, 너무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좋은 약초가 있었는데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은 까먹었지만 곧 생각이 날 거고 생각나는 대로 알려주겠다고, 마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허리 통증이 사라질 것처럼 확신에 차 말했다. 결국 약초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고 퇴원을 하고 말았다. 퇴원 준비를 하고 인사를 할 때도 꼭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의 눈빛을 보냈다. 퇴원을 해도 약초의 이름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든 찾아와 알려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금도 환자가 약초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헛된 믿음이 아니라 무모한 편견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환의를 입은 자들은 서로 다른 고집의, 아집에 가까운 고집인데,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깊이와 집중도는 경중을 가리기가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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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가 죽었다는 소식은 자주 들리지 않았다. 살기 위해 입원한 환자들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환의를 입은 채로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환의는 죽음의 옷이었다. 환의의 묘사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 허락된다면 환의에서는 주검의 냄새와 망자들의 메아리가 들린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검의 냄새를 맡아본 적도, 망자들의 메아리를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 편이 더 직접적으로 환의의 의미를 드러내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삶은 얼마나 단순하게 끝나고 말 것인가. 어떤 인간들은 복잡하게 태어나 단순하게 죽고 싶어 한다. 사랑의 잉태가 아니면 모든 탄생은 복잡한 것이고 자살이 아니면 모든 죽음은 단순한 것이다. 아무리 시간을 생략하고 공간을 바꿔도 달라질 것이 없다. 사과는 언제나 칼을 필요로 한다. 사과를 다 깎을 동안 껍질이 한 번도 끊어지지 않는 것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단 한 번도 사랑이 실현된 적은 없다. 도대체 사랑의 실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칼이 있었다면. 단순하게 끝내고 싶다. 옆의 환자는, 어쩌면 환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만, 어떤 목적을 갖고 환자로 위장한 자가 틀림없다고 믿게 만드는, 틈만 나면 자리를 비워 간호사와 의사, 병원 관계자를 곤란케 만들었다. 그들이 정말 곤란했는지, 그들의 삶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한 번 만 더 회진을 돌 때 자리에 없다면 강제 퇴원을 시킬 것이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그럴 때마다 환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고갯짓을 했다. 그 말을 할 때도 환자는 자리에 없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간호사와 마주쳐 피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환자는 어느 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분명 그 시간에 눈을 뜨고 있는 자가 없다고 확신 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환의로, 언제 새 환의를 구해 숨겨두었을까, 갈아입었다. 환의를 갈아입고 헌 환의를 들고 세탁물 보관실로 가 그것을 던졌다. 커다란 부대자루 속에 헌 환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뭔가 들끓고 있거나 흘러넘치고 있었다. 헌 환의는 새 환의로 세탁될 것이다. 표백제로 물들 것이다. 누구나 환의를 입고 있다. 입게 될 것이다. 팔 다리가 뒤섞여 있다. 환자는 잠시 부대자루 속에 담긴 환의들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자신의 어떤 생각을 차단하듯 문을 꽝 닫았다. 뭔가를, 그것이 냄새를 풍기는 동그랗고 붉은 것이라면 좋겠다, 우적우적 씹는 것처럼 턱관절을 움직이며 병원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맨발로 나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병원에서는 환자가 실종되었다고 선포했다. 선포라는 말은 너무나 정확하다. 선포 다음에는 경고가 환자들에게 떨어졌다. 무단 외출 시에는 퇴원 조치를 하겠다는 것이다. 경고는 환자지침서 제 1조 1항에 적혀 있는 것과 같았다. 환자들은 모두 퇴원을 꿈꾸지만 무단 외출을 감행하지 못한다. 그것이 그들의 한계다. 어떤 환자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환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환의라는 두려움의 옷 말고는. 너무나 오랫동안 두려움의 옷을 걸치고 있어 두려움 자체가 몸이 되었지만. 옆의 환자가 사용했던, 거의 사용을 안 했을지도 모를, 선반에는 빨간 사과가 놓여 있었다. 간호사 2인 1조가 환자의 침대를 정리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보이지 않는 규칙과 반복되는 리듬에, 병실에서는 모든 것이 리드미컬하게 소리를 낸다, 따라 움직였다. 침대보를 걷어내고 매트리스에 분사용 알코올을 뿌리고 마른 걸레로 닦았다. 매트리스의 색깔은 검은색이었고 군데군데 흠집이 나 있었다. 창백한 침대보에 감춰진 검고 낡은 매트리스가 환자들이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두려움의 정체 같아 보였다. 환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그걸 듣고 있다니. 언제 짐을 비웠는지 아무 것도 없었다. 환자는 아무 것도 들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환의를 입고 병원을 유유히 빠져나갔듯 환의를 입고 언젠가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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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환자를 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기다려야 할 것은 기다리지 않고 기다리지 않을 것만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 침대보가 매트리스를 감쌌다. 어떤 얼룩과 흠집도 없는 새 것이었다. 뭐 더 정리할 게 없을까 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선반 위의 사과를 쳐다보며 간호사 둘이 웃었다. 죽지 않았을까. 꼭 죽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어. 그렇지 않더라도 얼마 살지 못할 환자였어. 이 사과는. 사과 맞나. 드실래요. 간호사 한 명이, 치아교정기를 달고 있는, 일부러 그걸 보여주려는 듯 기괴하게 웃어 보이며, 사과를 내밀었다. 일단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절하지 않고 받아두는 버릇이 있기에 받기로 했다. 윤기가 흐르는 사과는 물렁물렁해야 했다. 손아귀에 힘을 주면 과육이 뭉개지고 진물이 흐를 것이다. 2인 1조의 간호사와 침대에서 육체가 뭉개지고 몸의 구멍 밖으로 분비물이 흐를 때까지 뒹굴고 싶은 충동은 비단 환의를 입은 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상상만으로 기분이 불쾌해지고 기력이 쇠약해질 때가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렇다. 옆의 환자를 따라 사과를 선반에 놓아두었다. 사과가 썩어가는 소리와 냄새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칼이 있다면 껍질을 벗겨두고 싶지만, 칼이 있다고 하더라도 껍질을 끊지 않고 깎을 수 없으니 칼이 없는 게 마음이 더 편하겠지만, 그저 바라볼 만한 대상으로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빨간 사과라면, 그것이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눈앞에 놓여 있게 되었으니 애정을 갖고 기다려줘야 할 것이다. 대체 사과는 어떤 향과 맛을 지녔을까. 언제 사과를 깨물어봤는지 기억도 없다. 사과의 주인을, 사과의 주인이 누구일까, 찾아 병원 밖을 나가는 상상을 해본다. 병원 앞 사거리에서 환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리 한쪽을 구부린 채, 이 자세만큼 환자에게 어울리는 것도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며 서 있을 때, 실제로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그들이 들이닥친다. 상상의 문이 닫힌다. 지독한 인간들. 여기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들은 항상 이런 식이다. 기다리지 않는 자들만 왜 눈앞에 자꾸만 나타나는가. 그들 속에는 그가 없다. 그들을 둘러보며 그를 찾으려 했다. 언제나 그 옆에 있어야 마땅한 그녀도 없다. 당연하겠지. 그가 없으니 그녀도 없다. 그가 있으면서도 왜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했는가. 그에게 더 바짝 다가가기 위해, 멀어지는 방식을 택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증명해 보이려 했는가. 그는 누워 있고 그는 아프다. 사랑은 그녀의 엉덩이 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지 오래다. 그들은 뭔가 손에 보따리를 들고 왔다. 그것을 풀어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침상에 걸터앉고 보호자, 누가 누구의 보호자란 말인가, 의자를 빼 무거운 엉덩이를 올려놓았다. 마땅히 자리를 차지 못한 자들은 침대에 건방지게 몸을 기대고 서 있거나, 선반에 하체의 일부를 걸쳐놓았다. 사과가 흔들렸다. 사과에 손을 대지 마라. 아무도 사과에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사과에 손을 댈지도 몰라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달라졌어요.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메아리가 없는 목소리는 공허하다. 이런 말을 했다면 그들은 노트를 꺼내 받아 적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말을 기다리는 자들. 어떤 의미를 품은 말인지 따져 묻기 전에 아무 말이면 족하는 자들. 지낼 만한가요. 잠을 잘 자나요. 밥은 잘 나오나요. 입맛에 맞나요. 양치는 하루에 세 번. 여기서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나요. 저렇게 잘 보이는데. 오줌은 잘 나오나요. 의사는 뭐래요. 간호사는 예쁜가요. 마지막 말은 귀에 대고 말했다. 혁명을 촉발 시킬 수 있는 행동을 위한 지령을 내려주세요. 지령이 필요한지 행동이 필요한지 혁명이 필요 한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결코 이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환의를 입은 자가 환의를 입고 임종을, 죽음이라는 혁명의 패배자로 남기를, 무지와 무저항의 나체로, 허리를 구부린 채, 제대로 기다리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것에 불과하다. 한때 무릎을 꿇고 애걸하며, 마치 타인의 문장을 갉아 먹으며 성장하고 싶다는 듯 굴었던 그들은 이제 텅 빈 머리의 소유자가 되어있다. 농담 속에 뼈가 녹아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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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었다. 그들은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라던 바라고 말하면 그들에게 무기력을 증명하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그들은 궁리했다. 걸어서 역으로 가 기차를 탈 것인가. 택시를 타고 기차를 탈 것인가.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탈 것인가. 어떻게 기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을까. 병원을 떠나려면 우선 기차 시간을 알아봐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안개가 가득 차 있는 듯 흐리멍덩했던 머릿속이 검표원이 들고 있는 천공기처럼 명쾌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사과 한 알이 놓여 있다. 머리가 먼저 터질 것인가 사과가 먼저 썩을 것인가. 의식의 껍질을 깎아 머릿속 사과를 꺼낼 수만 있다면. 기차를 타고 사과를 씹으며 기차 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마침 사과나무 고장을 지나게 된다면. 기차가 전복될지도 모른다. 다시 올 수 없는 곳이니 하루 정도 관광을 해도 좋겠다고, 콧구멍에 다른 바람을 집어넣자고, 냄새나는 엉덩이로 침상을 비벼대며 말한 녀석도 있었다. 그들은 끝내 보따리를 풀지 않았다. 보따리 속에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모든 패배에 익숙해졌다 해도 그들에게 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껴안으려 하고 손을 잡으려 했다. 피하지 않고 몸을 그대로, 허리를 감춘 채 플라스틱 덩어리처럼 굴려고 했건만 온몸이 메아리처럼 떨렸다. 아직도 그들에게 뭔가를, 저체온을 유지하는 쉼표 없는 문장의 연속 같은 떨림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들킬까봐 몸을 꿈틀거렸다. 이제 어떤 문장의 세포도 그들의 혈관을 통과하지 못한다. 옆의 환자에게, 그가 언제 다시 침상으로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잘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옆의 환자는 꿈 풀이 사전에서 눈을 떼지 앉은 채 긍정도 부정도 아닌 고갯짓을 했다. 환자들도 악몽을 꾸나요. 그들이 묻고 동시에 웃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환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병원이 당신들의 것이냐고 소리를 질렀다. 우리들의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것이 될 수도 있지요. 그들은 왜 쉽게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는가. 어떤 미련도 없으면서. 텅 빈, 미쳐가는 머릿속을 보이며 환자들에게 썩은 내장의 건강함을 과시하기 위해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병실에 들어올 때의 순서대로 나갔다. 그들이 가고 슬리퍼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에게만 충실한 개 같은 누군가가 슬리퍼를, 한 짝이라도, 원래 슬리퍼가 아니더라도, 발이 들어갈 수만 있는 것이라면 무슨 상관이랴, 입에 물고 가져다주기만을 기다리는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설렘에 입에서 침이 질질 새어나왔다. 맨발로 뭔가를 밟기 시작하면 계속 밟아야만 하는 고통을 알고 있기에 섣불리 침상에서 다리를 빼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정신의 한계를 물리적 한계로 환원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들이 다녀가고 나서 인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말해서 인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잠결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사타구니를 핥고 지나간 듯 하체가 서늘했다. 무언가 음낭을 탁탁 건드렸다. 수면 중에 발기가 되나보나 했다. 그런 적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도 없다. 그녀가 그에게 다시 돌아간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발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눈을 간신히 뜨고 더 이상 힘을 주어서는 안 되는 허리에 힘을 주어 상체를 살짝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지 마시오.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은 목소리로 떠돈다던데 신의 목소리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위엄에 차 있었다. 신의 손이 음경의 윗부분을, 너무 오그라들어 있어 위와 아래의 구분이 모호할 테지만, 귀여워 죽겠다는 듯 코를 살짝 꼬집는 것처럼 잡았다. 긴장한 나머지 오줌이 나오려했다. 마침 오줌이 몹시 마려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되도록 오줌을 싸지 않기 위해 물과 수분이 있는 음식을 멀리했지만 오줌의 양과 횟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한밤중에 오줌이 마려울 때만큼 육체가 거추장스러워지는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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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간호사에게 건너편 왼쪽 환자가 그러는 걸 보고 소변 줄을 음경에 삽입해달라고 했다. 아마 음경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추측되는데, 간호사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마비환자가, 어느 신경의 어느 부위의 마비인지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적잖이 실망해 이불에 오줌을 싸고 엉덩이로 문대는 짓을 언제가 하고 말리라 생각했다. 마비환자의 오줌통에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이 채워지는 것을 보고 환의 속으로 손을 넣어 축 늘어진 음낭을 어루만지며 얼마나 부러움과 질투심에 빠져 들었는가. 맙소사. 오줌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가끔 애용하고 있는, 퇴원이 가능하다면 퇴원을 해서도 가져가고 싶은, 호리병 모양의 플라스틱 오줌통 속으로 오줌이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오줌을 참아왔는가. 오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입을 막고 있는 듯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오줌에 녹아들어갔다. 신이라면 마땅히 환자의 오줌 정도는 받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을 때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하지 마시오. 그들이 당신을 나에게 부탁하지 않았소. 이런 부탁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오. 사실 나는 부탁 들어주는 것을 즐겨하지 않소. 부탁을 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경멸하며 살았소.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소. 아마 그 부탁 때문일 것이오. 부탁 이란 말을 곱씹으며 잠이 들었던 것 같소. 그것이 눈을 감을 때까지 나의 신경을 자극했단 말이오. 좀 전에 꿈을 꾸었소. 당신이 오줌이 마렵다고 나를 깨웠고 나는 참으라고 말했소. 당신은 계속 오줌이 마려워 미칠 것 같다고 소리를 질렀소. 곧 아침이 밝아올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자연스러워 질 것이라고 당신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았소. 할 수 없이. 정말 할 수 없었소. 그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당신도 잘 알 것이오. 일어나 오줌통을 들고. 그게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소. 이불을 젖히고 당신의 하의를 벗겨 자지를 꺼내. 난 음경보다 자지라는 말이 좋소. 당신이 언젠가 간호사에게 음경이란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있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남들은 안중에도 없으니. 딱하오. 당신의 자지를 잡고 오줌통 속에 넣었소. 그런데. 그런데. 당신이 오줌을 싸지 않는 거였소.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소. 입장이 바뀌어 내가 오줌을 싸라고. 오줌을 싸야한다고 당신에게 애걸했소. 당신은 잠들었는지 죽었는지 아무 반응도 없었소. 초조와 불안이 공포로 변해갔소. 당신의 오줌소리를 너무나 듣고 싶었소. 머릿속을 명쾌하게 때리는 그 미적지근한 소리를. 나중에는 오줌을 싸라고 미친 듯 소리치며 울부짖었소. 한 손으론 당신의 자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오줌통을 붙잡고 말이오. 상상이나 할 수 있겠소. 모두가 잠들어야 마땅한 밤에 말이오. 지독한 꿈이었소. 내 비명을 듣지 못했소. 어떻게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수 있소. 이것은 나의 악몽인지 당신의 악몽인지 모르겠소. 우리 모두의 악몽일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악몽을 실현시키기 위해 일어나 오줌통을 들었소. 이렇게. 말이오. 당신이 자지를 갖고 있어서. 혹시나 자지 말고 다른 게 달려 있으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소. 솔직히. 이렇게. 오줌을 싸주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오. 자, 마음 놓고 싸시오. 목소리를 듣자 오줌이 뚝 끊어졌다. 음경의 표피를 칼로 벗겨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신은 왜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는가. 신도 오줌을 쌀 수 있단 말인가. 싸더라도 오줌의 맛과 냄새는 알 수 없겠지. 더구나 소리에 대해서라면. 반도 못 채운 오줌통을 든 환자가 병실 밖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환자는 오줌을 어떻게 할 것인가. 화장실 형광등 아래 비춰 보이며 농도와 색깔을 살펴볼 것인가. 자신의 오줌과 견주어 볼 것인가. 미지근한 오줌통을 들고, 마치 악몽의 갈증을 해소하듯, 마실 것인가. 마셔야하리라. 오줌통을 들고 사라진 환자가 돌아오지 않기를 기다렸다. 환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줌통을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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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눈을 뜨자 창밖으로, 창이라고 해봤자 창살이 쳐진 사람 얼굴만 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날이 밝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쩌면 창에는 검푸른 색 벽지가 발라져 있는지 모른다. 언제나처럼 먼저 눈을 떠서, 누군가 눈을 뜨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환의와 침대 시트가 오줌에 절어 있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켜 직각으로 세웠다. 바닥에 발을 디뎠다. 얼마나 오랜만에 걸어보는 것인가. 발바닥을 타고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가기를 기다렸다. 오줌에 전 환의가 사타구니에 달라붙었다. 만져보지 않아도 음모와 함께 음경이 음낭 속으로 말려들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끄집어내기에는 쉽지 않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어기적거리며 침대 앞으로 가 허리를 구부렸다. 허리가 조금 늘어난 듯했다. 꺽쇠를 잡고 돌렸다. 직각으로 세워져 있던 침대의 상부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지 않았다. 아무리 돌려도 꺽쇠는 헛돌았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한숨과 울음과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옆의 환자가 누워 있던 침상을 내려다보았다. 새 주인을 기다리는 듯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누가 보지도 않을 테지만 누가 볼지도 몰라 재빠르게 선반에 놓인 사과를, 무엇이 더 있겠는가, 들고 환의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에 넣자 뭔가 불쑥 솟아오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왜 진작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보려고 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누군가 마주치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미친 정신과 구멍 난 육체의 통증으로 물든 밤을 보내다 뒤늦게 새벽잠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지만, 한 번쯤은 그래도 좋겠다는 생각에 간호사 데스크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당직 간호사 둘이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간호사의 입가에는 무언가 빨간 국물이 묻어 있었다. 새벽의 허기를 참지 못하고 뭔가를 허겁지겁 먹고 있었나보다. 데스크에 가려 하체가 보이지 않았다. 오줌에 젖은 환의와 맨발을 간호사가 봐주었다면 좋을 텐데 어떤 한계가 느껴졌다. 또 어디 가는 거예요. 아무 대답이 없자 다시 말했다. 자꾸 그러면 저희가 곤란해요. 좀 맵지 않니. 잠시 후 등 뒤로 소리가 들렸다. 근데 몇 호실이죠. 당장은 이 축축한 환의를 갈아입어야만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차가운 바닥을 맨발로 누비며 헤매었을까. 세탁물 보관실 앞에 다다라서야 길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덜 마른 빨래에서 풍기는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스위치를 올리자 전등이 켜졌다. 벽에 붙어 있던 바퀴벌레 몇 마리가 재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커다란 부대자루에, 사람 열 명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벗어 던진 환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떤 것으로 갈아입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좀더 나은 것이 좀더 못한 것보다 낫다고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환의를 꺼내 젖은 환의 위에 껴입었다. 환의 속에 환의, 라고도 중얼거렸던 것 같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입었다. 아홉 개의 환의를 입자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환의 덩어리가 되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환의 속에서 뭔가 기어 다니는 듯 여기저기가 가려웠다. 도대체 몇 번째 환의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더 늦기 전에 중심을 놓고 있던 정신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과를 꺼냈다.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사과를 코에 대보았다. 아무런 향도 없었다. 이제 아무 것도 거부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껍질을 깎을 수 없는, 윤기만 흐르는, 가짜의, 모형의, 장식의, 이미지의, 허구의, 환희의, 광기의, 플라스틱 사과를 깨물었다. 어떤 통증도 허리를 감싸지 않았다. 무통의 감각이 척추 뼈를 타고 온몸으로 퍼지기 전 사과를, 플라스틱 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었다. 허리만큼 부실한 이빨 사이사이에 과육의 쪼가리가 끼었다. 과즙이 턱을 타고 질질질 흘러내렸다. 충분히 냄새나고 더러운 환의를 더럽혔다. 바닥인지 벽인지 모를 곳에 등을 기댔다. 서늘해도 좋고 미적지근해도 좋을 거대한 손 같은 것이, 신의 손이라고 해두자, 허리를 어루만졌다. 허리를 뚫고 뭔가 쏟아져 나오려 했다. 누군가 문을 열고 뭉쳐진 환의를 부대자루 속으로 집어 던졌다. 잠시 후 어떤 생각을 차단하듯 문을 꽝 닫는 소리가 들렸다. 부대자루가 쓰러졌다. 환의들이 쏟아졌다. 팔 다리가 서로 얽혀 있어 애초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와 그와 아무개는 주인에게 돌아갔을까. 누구도 쉽게 환의를 갈아입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좋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그들이 아직도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것이 이야기의 허리 어디쯤에 자리한 첫 문장이라면. 어쩌면 우리에겐 또 다른 혁명이, 혹은 환의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현대문학> 2009년 11월호, 통권659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