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새로 얻은 원피스를 입고 유령회사에 출근했다.
J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원피스만을 고집했다. 원피스는 줄기차게 박해받았다. 감색이나 회색 원피스를 입고 다니던 대학 새내기 시절, 이런 식으로 농을 거는 선배들이 있었다. 축 늘어져 대퇴부쯤에서 어슬렁거리던 숄더백까지 싸잡아서.
“독립군 마누라야?”
동기들은 J를 ‘모단걸’이라고 불렀다. 30년대 스타일의 촌스러운 옷은 그만 좀 벗어버리라는 소리였다. 그것이 조롱임을 J는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스타일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다. 어머니가 계속해서 원피스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J의 어머니는 집에서 옷을 팔았다. 30년대의 감각을 살려서 동대문에서 원피스나 투피스를 떼어오는 어머니는, 도무지 영업에 감각이 없었다. 감색이나 회색, 심지어 옥색으로. 꾸준하게 A라인 프린세스 실루엣으로. 갈수록 원피스 드레스의 재고량은 많아졌다. J는 불행하게도 90년대 말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즈음에는 더 많은 아가씨들이 MTV를 시청했다. 그런 원피스 따위는 아무도 입지 않았다. 어머니는 J에게 더 많이, 더 자주 남은 원피스를 주었다.
J는 유령회사로 출근했다. 첫 출근이었다. J의 출근을 허락한 R은 희부옇게 살이 오른 중년 남자였다. 그는 J의 촌스러운 원피스 따위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두 가지를 요구했다. 제시간에 출근할 것, 작업을 걸 공직자를 100명 뽑아 올 것.
첫 번째는 놀라울 정도로 범박한 요구였다. 하지만 두 번째가 이 일의, 이른바 정체성 같은 것이었다. J는, 관용어구 ‘작업 건다’가 이토록 범죄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줄 미처 몰랐다. 사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무실’ 자체가 범죄스러운 곳이기는 했다. 그곳은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사무실, 엄밀히 말하면 가정집에 대충 꾸며놓은 협잡실이었다.
J는 이곳이 유령회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담하게 출근한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J가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야말로 곧 유령회사요, 협잡실이었다. 80년대 말에 어머니는 J와 단둘이 살던 13평형 시영아파트에 ‘보세옷팝니다’를 개업했다. 급하게 개업하느라 멋들어진 이름을 지을 새가 없었다. 어머니는 청테이프를 끊어 비뚤비뚤 보, 세, 옷, 팝, 니, 다, 란 글자를 창문에 붙였는데, 아홉 살의 J는 기절하는 줄 알았다. 어머니는 창문 안에서 보이는 순서대로 붙이고 있었다. 사탕을 빨면서 집으로 들어가던 J는 소리쳤다.
“엄마, 다니팝옷세보잖아!”
그마저도 온전하지 않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다니팝옷세보’는 척 봐도 유령 영업장의 냄새를 풍겼다. 장사나 영업이라는 것도 어차피 다 협잡행위 아닌가. 하지만 어머니는 당당하게 사업자등록을 한 자영업자였다. 장사가 잘 안 되기는 했지만.
아! 생각할수록 이건 좀 심한 것 아닌가! J는 순간, 자신의 진짜 타락을 절감했다.
J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유령회사가 풍기는 범죄적이거나 범죄스럽거나 한 뉘앙스도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J의 머릿속에 무수한 문장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1. 이것은 범법행위이다. 그러나 당신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범법과 탈법은 한끝차이라고. 실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무수한 탈법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고. 물론 사기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그토록 강조했던 ‘부의 재분배’이다. 도무지 재분배할 생각이 없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권유를 하는 것뿐이다.
2. 내가 사람을 죽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범죄라는 단어가 촉발하는 공포에 기죽지 말자. 나는 살인을 하는 것도, 강간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범죄세계의 마지노선인 살인, 그것은 당신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주말 등산이 유일한 취미인 서민층 중년들에게 물어보아라. 산을 밟다 목격하는 시체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바위틈에서 살아남은 민들레보다 쉽게 발견되는 것이 썩은 손가락일 것이다.
“아가씨, 지금 무슨 생각해?”
R이 쏘아붙였다. J는 자신이 무심코 지칭한 당신에 놀라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대학까지 나왔다면서 어리어리하기는.”
R은, ‘우리는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찢어질 관계’니까 이름이나 출신성분은 나눠 갖지 말자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J는, 차마 이력서라고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그 비슷한 것을 R에게 제출했다. 잡지사, 출판사, 방송국을 전전한 5년 동안의 이력 따위는 기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주소 정도는 필수기재항목이었다. 요컨대 이력서가 아니라 신상명세서였다. J는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이력서에서 경력사항과 자격사항을 쭉쭉 지워 나가다 그만 출신학교는 내버려둔 채 R에게 그것을 제출했다. R은 피식 웃었다.
“아니 좋은 대학 나와서 왜 이러고 살아요?”
R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책상 하나를 가리켰다.
“아가씨 자리는 저기.”
J는 다소곳하게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전화기 두 대가 놓여 있었다. 이른바 ‘대포폰’이 분명한 구형 휴대전화였다. R은 황당하다는 듯 J에게 말했다.
“아가씨, 왜 앉아? 오늘은 사전미팅이란 말이야. 주말 지나고 월요일에 보자구. 혼자 하는 거, 쉽지는 않을 거야. 그만큼 벌이는 좋겠지만.”
주말 지나고 월요일부터,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R과 J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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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박민정
2009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단편 「생시몽 백작의 사생활」이 당선되었다. 문예부가 없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틈틈이 소설을 썼고, 대학에서는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여러 차례, 정규직을 비정규직의 자세로 전전했으며 여전히 사춘기 습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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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과연 K를 공직자로 분류해도 좋은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중이었다.
R이 말한 공직자는, 반드시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대다수는 ‘공’자는 붙이지도 못할 만큼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벌었다. J는 집에 돌아와 열심히 ‘공직자’를 검색했다. 대형 포털사이트에 인물 DB라는 포맷이 있었다. 인터넷은 허술했고, 이른바 공직자라는 인간들은 더욱 허술했다. 입신보다 양명에 주의 깊은 그들 대부분은 개인정보를 남발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할 일없는 인간들이 그들의 정보 따위를 궁금해 할까 싶었다. 그들의 생년월일이나 출신학교, 가족관계를 궁금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J와 R과 같이 사업상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들의 사적인 정보를 알기 위해 건당 천 원을 지불해야 했다. R이 알려준 아이디로 접속하자 십만 원이 결제되어 있었다. R은 말했다. ‘아가씨는 이제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야.’ J는 그 말을 명심했다. 6대 4라면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프린터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95명의 공직자가 J의 원피스만큼이나 촌스러운 스타일의 양복을 입고 기계에서 밀려나왔다. 모두들 오래전 젊은 시절의 사진을 등록해 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개체는 달라도 계열은 같은 인간들이었다. R이 말한 ‘이른바 공직하는 인간들’의 범위 안에는 당연히 이런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 남자
2. 중년 남자 (1970년 이전 출생)
3. 가정이 있는 중년 남자
4.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중년 남자
4번 같은 경우, 인물 DB에서 제공하는 정보로만 미루어 짐작하기에는 다소 모호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들은, 양명에 목숨 건 남자들이었다. 그토록 당당하게 인터넷 거미줄에 자신의 역사를 매달아놓은 남자들이라면 당연히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가정을 예금처럼 생각했다. 안전보장, 안정보장. 가정 안에서는 평화로운 가부장을 지향하는 소시민들이었다. 그리고 그 지점이, R이 익명의 J에게 당당하게 제안한 노다지 사업 아이템이기도 했다. J는 바로 이 시점에서 K가 떠올랐다. 그래서 J는 다시금, ‘100명의 공직자’ 안에 K를 포함해도 좋은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J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96번의 공직자로 K를 선택했다. 그가 작업을 걸 대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 인물 DB를 검색할 필요는 없었다. R은 제시한 조건을 모두 만족했다. J는 그의 생년월일도, 출신학교도, 가족관계도, 학위논문의 주제도 모두 알고 있었다.
J는 그 정도만 알았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J는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1970년 이전에 출생한 중년 남자이자 ‘공직자’인 K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에 바뀐 K의 전화번호는 몰랐다. 사실 R이나 J에게는 그것만이 중요했다. J는 인물 DB의 검색창에 K의 이름을 넣었다. ○○대학교 문과대학 불문학과 교수……. J는 결제버튼을 눌렀다. K는 예의 그 준엄함에 걸맞지 않게 천 원으로 만족했다. 모니터 너머 그토록 J에게서 도망치려 애쓴 K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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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대학시절 J의 지도교수였다. J와 K의 관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지도교수와 학생이었다. 소심한 축에 끼는 학생이었던 J는 그러나 시시한 남자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J는 신입생 시절부터, 눈웃음을 치는 중년의 K와 모텔이라는 곳에 한번 들러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게 오년 전 일이었다. J는 가끔 주워섬겼다.
“어떻게 우리가 사랑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J의 지인 가운데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L은, 한심하다는 듯 J의 등짝을 후려쳤다. L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집어치워. 넌 그저 K교수에게 낚인거야.”
J는 자신에게 사치스러운 감정을 허락하고 싶었다. 교수와 연애 비슷한 것을 한, 그 시시껄렁한 사건에 그 정도 낭만성이라도 부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했을까?’ 그것은 허황된 문장이었다. 그저 K를 유혹한 것은 J의 촌스러운 원피스였다. 관계란 일종의 전투였다. 패배와 승리가 명백한 전투였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료하게 가려내기 위해서 누가 선방을 날렸는지도 중요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J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누가 선방을 날렸는가. 도의적인 경우에 따라서 K의 아내에게 일러바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K의 사적인 공직을 그만두게 할 수 있었다. K는 언제나 ‘모양새 좋게’ 하자고 했다. J도 촌스럽게 굴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해 가을, 졸업을 두어달 남겨둔 J의 원피스가 뒤늦게 K의 눈길을 끌었다. ‘보세옷팝니다’에서 남아도는 30년대 스타일의 원피스. J는 집요한 놀림 속에서도 꿋꿋했다. J는 결코 예쁘장한 축에 들지 못했다. 예쁘지도 않은 주제에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맸고, 구닥다리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K는 젊고 생기가 도는 모든 여학생에게 관심이 있었다. 특히 앞가슴이 훌렁 드러난 옷을 입고 꿀떡꿀떡 술을 받아 마시는 여학생을 보면 참을 수 없는 욕정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런 욕정을 실천한다면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종류의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J는 내내 K의 관심 밖이었다. 어느 날 교수회의가 끝나고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K는 딱 한번 J를 언급했다.
“그 촌스러운 여학생, 오늘 발제한 것을 보니 글은 제법 쓰더구만!”
징후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며칠 후 J가 졸업 논문 심사를 받기 위해 K를 찾았다. 은행잎이 흩날렸다. J는 짙은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글은 제법 쓰는 촌스러운 여학생의 원피스가 대학시절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K의 딴에는 원피스가 무심하게 드러난 본질이었다. 요컨대, 그녀가 의도하지 않은 유혹이었기에 진짜 유혹이었다. K는 그녀를 보는 순간, 어떤 무력감을 느꼈다. 무력감이 드는 동시에 서글펐다. 앞가슴을 내밀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느꼈던 욕정과 종류가 달랐다. 앞섶에 수줍게 매달린 두어 개의 단추. 그것은 브로치와 같은 장식이었다. 함부로 여닫을 수 없는 것이었다. J, 그녀 자신조차도. 그런 것이 원피스였다. 몸으로 가는 문이라고는 등에 달린 지퍼밖에 없는 옷. J는 아침마다 팔을 뒤로 꺾어 힘겹게 지퍼를 닫을 것이고, 밤에는 마찬가지로 열 것이었다. K는 그 문을 열고 싶었다. 그녀 자신이 볼 수 없는 곳에 달린 문, 등에 달린 지퍼를.
K는 논문을 제출하고 돌아서려는 J에게 무슨 말이든 건네고 싶었다. 그런 충동은 걷잡을 수 없었다. 그 순간 무슨 말이든 하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J의 원피스를 거칠게 뜯어낼 것만 같았다.
“그런 옷을 좋아하나?”
“네?”
“혼자서 입기 어려운 옷 말이야. 자네도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나?”
K는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것은 H의 화법이었다.
J는 얼굴이 새빨개져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런 J는 정말 촌스러워 보였다. K는 책상에 놓여있는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K는 충동을 수습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건넸고, 그 말을 수습하기 위해 아무 책이나 건넸다. 책을 받고 돌아서는 J의 등에 달린 지퍼를 K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K가 건넨 책은『생시몽 백작과 그 주의자들』이었다. K의 학부시절 선배이자 동료교수인 H가 쓴 책이었다. K는 지도교수로서 학생에게 처음 건넨 책이 바로 그 책이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또한 그 건방지고 같잖은 저술이, 자신이 J에게 처음 준 선물이었다는 것을. 결국 H에게 속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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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등에 지퍼가 달린 원피스를 입고 유령회사로 출근했다. R은 J가 출력해온 ‘공직자 리스트’를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J는 그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다고 생각했다. 공직자이든 사직자이든 상관없을 리스트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R이 조금 우스웠다. 돌연 R이 종이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질문을 했다.
“아가씨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J는 그런 R이 불편했다. R은 너무 진지하게 굴고 있었다. 지난 금요일처럼 경박한 말투를 사용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J는 대답했다.
“어리석은 열정, 대상을 모르는 욕망, 무의미한 호기심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R은 껄껄 웃었다.
“실수가 차곡차곡 쌓일 뿐이지. 더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어느 시점에서인가 우연히 이지러져버린 채로 계속 살아가는 거야. 수습도 못하고! 일 시작하지.”
J는 그 말을 듣는 순간, R은 역시 이른바 공직자라는 인간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적이 명확한 사람은 적의 본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K처럼. J는 의자에 앉았다.
“불문학과 교수는 아가씨가 아는 사람이야?”
이번에 J는 대답하지 않았다. J는 그가 쓸데없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진지한 사람은 대부분 진실하지 못했다. J는 그런 사람을 경계해왔다. 누군가의 경박한 말투와 칠칠하지 못한 행동거지 속에서 깊은 고독을 발견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J는 이런 일을 하면서까지 생각이 많아지는 것이 싫었다. R은 멋쩍게 웃으며 종이를 한 장 건넸다.
“더할 것은 없어. 여기 쓰여진 대로만 멘트하면 돼. 100명. 대부분 제 발이 저려서 계좌번호 부르라고 할 거야. 제법 덜덜 떨면서 말이지.”
J는 활짝 웃었다. R의 화법은 K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공직자 화법이었다. J는 1번에게 전화를 걸었다. 1번은 1970년생, 100명 가운데 가장 젊었다. 마흔도 채 안된 그는 수도권 4년제 대학의 전임교수였다. 예술대학 회화과의 교수인 그는 서양화를 전공했다. 시작, 월요일 오전 10시였다. 1번은 전화를 걸자마자 받았다. J는 정중하게 작업을 걸기 시작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예, 그런데 누구십니까?”
“회화과 4학년 학생인데요.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이름을 밝혀야지.”
“교수님, 요즘 만나는 여자분, 사모님도 알고 계세요? 교수님 차에서 함께 계시는 걸 봤는데.”
1번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왔다. 그는 J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을 테니 함구해달라고 연신 사정했다. J는 1번의 여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렇게 눙쳐 봤다가, 만약 만나는 여자가 없다면 미친 사람 취급 받고 끊으면 되는 것이었다.
1. 차에 있는 걸 봤다.
2. 모텔에 드는 걸 봤다.
3. 손잡고 가는 걸 봤다.
4.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걸 봤다.
5. 엉덩이를 만지는 걸 봤다.
R의 멘트는 다채로웠다. 1번부터 90번까지 작업을 거는 동안, 총 60명의 공직자에게 법률혼 이외의 여자관계가 있었다. 과연 대다수의 공직자가 불법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하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노골적인 스킨쉽을 해오고 있었다. J는 내내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R의 말대로 먼저 ‘원하는 게 무엇이냐’ 라고 질문해왔고, 망설이지 않고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했다. J는 그들에게 R의 유령계좌를 낭랑하게 불러주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존재가 아닌, R이 만든 조건에 합당한 사람으로 말하고 움직였다. 개중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네도 이 철학공부가 받는 오해를 잘 알고 있지? 못 배운 우리 부모님은 그깟 점보는 공부 하러 구라파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내내 버린 사람 취급하시고, 겨우 전임 되고 자리 잡았는데…”
분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 전임 되느라 무지 힘들었는데, 내 원 참 인생 뭣 같아서, 이거 다 아는 처지끼리 왜 이래?”
어르는 경우도 있었다.
“내 연구조교를 하지 그래. 아무런 일도 안 시킬게. 장학금 나가고 학점 좋게 나가는데 어떤가.”
J는 이런 수사학적 변명을 제일 싫어했다.
“자네도 나이가 들면 알 수 있을 거야. 인생을 전부 그르칠지도 모르는 강렬한 매혹이 있다는 것을.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J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짧은 매혹 때문에 인생을 그르칠만한 위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리정돈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어떤 회한인지 심심풀이인지 모를, 짧은 변명을 늘어놓고는 백만원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 후에는 여자들도 정리할 위인들이었다.
“아니면 그만이고, 맞으면 대박 나잖아. 그래서 죄 짓고 살면 못 쓰는 거야.”
R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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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어빡자빡 앉아서 졸고 있는 4학년 학생들이 짜증났다. 어째 가면 갈수록 멍청한 녀석들만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웹사이트에서 긁어온 빤한 글들을 묶어서 발제문이라고 내지를 않나, 도대체 발제문이 아닌 발췌문이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주제에, 졸업이 가깝도록 발전한 녀석이 없었다. H의 농담처럼, 요즘 녀석들의 발제문이나 감상문은 저자가 한 둘이 아닌 그야말로 호메로스의 서사시였다. K와 H는 마주 앉아서 ‘옛날 녀석들’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옛날 녀석들이 글도 잘 썼고, 잘 쓰지는 못하더라도 진지했고, 촌스럽지만 열정이 있었는데. 그렇지?”
“그랬지. 뭔가, 자기 세대를 방어하려고 용쓰던 녀석들이었지. 당시에는 헛똑똑이처럼 굴지 말고, 취업 준비나 하라고 구박하긴 했지만.”
“그래서 최근에는 정말, J만한 학생이 없다는 걸 느껴.”
“그 이야기를 왜 또 꺼내는 거야?”
K는 H의 주둥이를 담뱃불로 지져버리고 싶었다. H는 잘 나가다가도 J이야기를 불쑥 꺼내서 K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하기야 H에게는 그 사건이 두고두고 좋은 놀림감이자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K도 내심 자랑하고 싶었다. 예쁘지는 않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인 젊은 여학생과의 연애였다. 옛날 꼰날부터 여자문제를 가지고 자랑하기를 일삼던 H가 꼴보기 싫었다. 그까짓 것이 무슨 경력쯤이나 되는 줄 아는 위인이었다. 그래서 보란듯 J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을, K는 후회했다.
H는 심심하면 J를 들먹였다. H는 여러 번 여학생과 연애를 했다. 그의 말마따나 제일 똑똑한 여학생들만 골라서 상처를 주었다. H는 자신과 연애를 할 만한 학생의 얼굴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런 아이들은 평소에도 질문이 많았고, 사소한 허점을 지적당하면 변명하기 바빴다. 요컨대 방어적인 녀석들이었다. H는 그런 아이들을 두고 ‘끼가 있는 애들’ 이라고 불렀다. 그런 분류법에 따르면, J도 거기 속했다.
교수와의 연애경험을 무슨 기념품처럼 생각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서로 나쁠 것이 없는 관계였다. H의 생각에, 사람들의 편견은 틀렸다. 그 녀석들은 성인이었고, 단 한 번도 강요한 적 없었다. H의 가정 속에 자신을 편입시켜 달라고 엉엉 울며 조르는 녀석들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결론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 똘똘한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K는.
“형은 운이 좋았던 거야. 그것마저 모르는 척 하진 않겠지?”
J이야기만 꺼내면 발끈해서 공격해오는 K였다. H는 그런 그가 안쓰럽기도 했고, 조금 얄밉기도 했다.
“너는 J를 사랑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그건 또 무슨 잘난 척이냐?”
“결코 사랑한 적 없다고 해야 잘난 척이 되는 거겠지.”
H는 호연하게 껄껄 웃었다. K는 속으로 말했다.
‘웃기지도 않은 걸로 웃지 마, 이 새끼야.’
그 시절, J는 졸업을 앞두고 전전긍긍 불안해했다. K는 J에게 자주 용돈을 주었다. 질색팔색을 하며 거절을 하던 J도 나중에는 잘만 받아갔다. 주로 모텔이나 한강 둔치에 주차한 차 안에서 데이트를 했기 때문에, 다소 찜찜한 뉘앙스로 돈이 전해지기는 했으나. J는 젊은 여학생답게 질문이 많았다. K는 J의 그런 면이 사랑스러웠다.
“선생님, 그러니까 결국 생시몽주의자들은 생시몽백작의 뜻을 거슬렀다, 가 이 책, 그러니까 H선생님의 요지인 것인가요?”
“너에게만 말이지만, H는 생시몽의 사생활에만 관심이 있었어. 그 형은 늘 그런 식이었지. 어떤 철학자든, 어떤 작가든 간에 그들의 사유가 아닌 사담에만 주의를 기울였어. 그러니 쓰레기 같은 저술만 내놓는 거지. 예술가들의 사랑이야기라니, 그딴 저술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랭보와 베를렌느가 사랑을 했건 말건 무슨 상관이야. 그 책 이야기는 하지도 마. 생시몽이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하인의 집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해?”
“그런 사적인 사건들이 하나의 상징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가령 모두 똑같은 양의 노동을 하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으면, 그런 형식만 갖추면 천국이 툭 떨어지리라고 믿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말로 같은 것 말이에요. 선생님도 형식주의에 대해서 비판하셨잖아요. 제 원피스의 지퍼를 그렇게 놀리신 것 아닌가요? 생시몽주의자들은 뒷부분에 단추가 달린 옷만 입고 다녔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만 입을 수 있는 옷을 입고, 연대하는 공동체,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그들이라면서요.”
“형식주의는 여기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K는 대학시절부터 숱한 여자와 연애를 하고, 교수가 되고 나서는 학생들까지 심심찮게 건드리는 H가 싫었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다.
“그들도 나를 원했으니까.”
H는 늘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대학시절 집회에 나가서도 지랄탄 속에 쓰러진 여학생을 일으키는 일은 자기가 도맡아 해야만 했다. 도대체 여자문제에 있어서는 순정한 선의를 보여준 적이 없는 H였다.
K는 종국에 그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싫었다. 결국 J와의 관계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H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으로. J가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는 부당했다. 자신이 유부남이라서가 아니라, 교수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법적이나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결론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K는 J를 계속 만날 생각이 없었다. 죄와 죄의식이 다른 것처럼, J가 사랑스러운 여자라는 것과 J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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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은 별탈없이 90명까지 온 기념으로, 맥주를 한 잔 사겠다고 말했다. J가 자신은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 것이 싫으니, 그냥 사무실에서 술자리를 하자고 말했다. R은 자기도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좋다고 말했다. 맥주캔이 열 개 정도 쌓였다. R은 J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J도 R에게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물었다.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R이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불문학과 교수, J양이 아는 사람이지?”
“그런 종류의 질문을 받는 것이 싫어서 이 일을 하는 거예요.”
그것은 J의 진심이었다. 갑자기 아가씨에서 J양으로 호칭을 바꿔버린 R역시, K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J의 20대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그 그리움을 잊기 위한 지난한 노력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J의 그리움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라, 굴욕과 치졸과 환멸이었다. K는 전화번호를 바꾸어버렸고, 연구실로 찾아온 J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며 쫓아냈다. J는 졸업식에도 갈 수 없었고, 동문회에도 갈 수 없었다. 졸업 후에 단 한번 캠퍼스에서 K와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경멸한 H와 함께 있었다. 둘은 목례를 하는 J를 모른 척 하며 피해갔다. J는 H가 던지는 은근한 눈길을 참을 수 없었다. H를 경멸하며 K와 단결했던 짧은 시절이 뇌리에 스쳤지만, J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K교수는 부인을 사랑하지 않았어요. 죽어도 가정을 깰 마음이 없는 인간이라서 그랬지요.”
“K교수가 J양 이후로 누구와도 연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마 그랬을 거예요.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은 아니니까. 난 K의 사생활이 궁금하지 않아요. 그저 조건에 부합했을 뿐이고, 오래 전에 그냥 넘어간 위자료를 받는 셈 치는 거죠.”
“J양은 스스로의 호기심을 책임질 수 있나?”
R은 K에 관한 질문으로 J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녀가 K를 그저 그런 공직자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내면에 덕지덕지 붙은 과거의 불순물을 없애버리고 투명하게 이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R은 젊은 J가 살아남기를 바랐다. K가 다른 99명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지위와 사생활이 일치하지 않는, 그저 그런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했으면 했다.
R은 이런 종류의 사기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거짓은 존재하지 않지만 거짓말은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거짓으로는 증명할 수 없지만 거짓말로는 증명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면 충분했다. 한 번도 목격하지 못한 불륜 현장을 말로 꾸며내는 것. 정관사를 쓰지 말고 부정관사를 쓸 것! 그 여자, 가 아닌 어떤 여자, 라는 시험. 자기 삶의 거짓된 부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인간들은 그런 시험에 약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도.
J는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R은 담요를 덮어 주었다. J의 얼굴은 앳되어 보였다. 저 30년대 어디쯤에서 날아와 불시착한 것 같은 젊은 여자.
R은 그 불문학과 교수 K라는 놈을 아주 순식간에 이해해 버렸다. 빛나는 젊음을 더 이상 빼앗기지 말고 살아남기를. 살아남기를. 살아남아주기를. 그녀 자신의 지옥에서. 이 검붉은 욕망에서. R은 염불하듯 중얼거리며 J의 원피스 지퍼를 내렸다. R은 언제나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홉 살 J는 마룻바닥에 앉아 맛도 없는 바닐라맛 사탕을 쪽쪽 빨고 있었다. 사람이 많았다. 모두들 어머니의 안목을 칭찬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옷들만 가져 왔느냐고 했다. 우리 딸 면접 보는데 잘됐다고 여기에서 하나 사야겠다고 했다. 그런데 돈을 안 가져 왔다고 했다. 구경만 실컷 하다가 사람들은 모두 집에 가버렸다. J는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옷을 많이 팔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로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서 바닐라맛 사탕 같은 것은 얼마든지 사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J는 사탕을 빨았다. 엄마는 왜 이런 원피스를 나에게 준 거야. J는 더욱 힘차게 맛도 없는 그것을 빨았다. R의 신음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지루하다, 고 J는 생각했다. 아무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수가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다. 더는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J는 R의 얼굴을 소중하게 부여잡고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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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아침부터 온갖 일에 트집을 잡아 성질을 내고 있었다. H는 그런 K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해할만한 일이었다. 그가 번역한 프랑스 현대소설이 세계 제일의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가 그만 수상을 하지 못했다. H는 교수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K를 위로했다.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였잖아. 로또 못 맞은 것 가지고 성질내지 마.”
“형, 지레짐작 좀 하지 마. 내가 그렇게 못난 놈으로 보여?”
H는 어깨를 으쓱했다. K는 숟가락을 탁 내려놓고 식당을 나갔다. 밥맛이 없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고, 그걸 잡아내는 H란 놈도 싫었다. 말마따나 그깟 일로 기분나빠하지 않을 만한 깜이 안 되는 자신이 싫었다. 그렇다고 밥맛 떨어지게 그 일을 노골적으로 들먹이는 H도 싫었다. 꼴 보기 싫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보기 싫다고 안 봐도 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K는 줄담배를 피웠다.
H는 묵묵하게 밥을 다 먹었다. 학생들이 식판을 들고 지나가며 목례를 했다. K는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K가 숟가락을 탁 내려놓을 때 그의 눈빛에 스치던 적의를 H는 목격했다. 건방진 자식. H는 늘 별 생각이 없었다. K가 뭘 하든지 말든지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K라는 놈은, 마치 마음먹고 저를 골탕먹이려고 했다는 듯이 구는 거였다.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면 그놈은 전두환까지 들먹였다.
“형, 아무 생각 없음에서 쿠데타도 일어나는 것 아니야?”
말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놈이었다. H는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내 딴에는 위로해주려고 그런 건데.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게 없어. 다 된 쿠데타를 혁명으로 만들어 버릴 놈 같으니라고.”
H는 중얼중얼 욕을 하며 물을 마셨다. K가 앉았던 자리에서 휴대전화 진동음이 울렸다. K란 놈은 성질내는 일에 정신이 빠져서 물건도 놓고 다닐 지경이었다. H는 혀를 쯧쯧 차며 전화를 받았다.
“예, 전화 받았습니다.”
J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K의 목소리였다. J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작업을 걸 것인가. 진정 K의 사생활을 알아낼 것인가. R의 말이 떠올랐다.
J양은 스스로의 호기심을 책임질 수 있나.
R은 콩나물해장국을 먹으러 간다고 나가서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다고 했다.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말씀 없으시면 전화 끊겠습니다.”
“교수님!”
J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불문학과 4학년 학생입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세요?”
H는 어떤 녀석인지 통성명도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꼴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K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불문학과 교수였으므로, 학생의 용건을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H는 정중하게 대답해주었다.
“그래요. 용건을 말해요.”
“교수님.”
“무슨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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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요즘 만나는 여자분, 사모님도 알고 계세요? 제가 참으로 난감하게도 두 분이 학교 앞 스카이모텔에 드는 걸 봤는데요.”
H는 당황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H는 침착하게 굴자고 다짐했다. H는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이봐 학생,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건가, 지금?”
J는 입술을 달달 떨다가 다리를 떨었고, 급기야 온몸을 발작하듯 떨어대기 시작했다.
J는 K가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교수들이라면 몰라도 K는,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걸 즐기기 때문에 자신을 만난 것은 아니라고. 그의 말마따나 세상에 유일한 감각을 지닌 여자였으므로. 21세기에 생시몽주의자 스타일의 원피스, 반드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입고 벗을 수 있는 옷을 즐기는 여자였기 때문에. 다 거짓이란 말인가. J는 절망했다.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싶었다. 위자료 같은 건 애초에 필요 없었다. R의 말이 맞았다. J가 의뢰한 것은 K의 비밀일 뿐이었다.
“더 이상의 용건이 없으면 끊겠네. 정정당당하게 찾아와서 말을 하라고.”
J는 한참동안이나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다. K의 부재를 알리는 공명음이 왕왕 귓속을 메웠다. 결국 K에게 한 번 더 배신당한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K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믿지도 않았는데 배신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J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K의 사생활을 원했던가?
J는 K의 이름에 밑줄을 그었다. 96번, 실패.
H는 잔디밭에서 철없이 뛰어노는 녀석들을 보고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라는 녀석들이 참 팔자도 좋다 싶었다. 졸업을 하는데 필요한 전공학점이 줄어서 그런지, 누구 말대로 인문학의 위기라서 그런지, 과거 54학점짜리 전공들과 요즘 36학점짜리 전공들은 차원이 다른 것 같았다. 그 녀석들은 진지했는데, 순정했는데. 그래서 바보로 남았지만. H가 알기로는 우수한 성적으로, 우수한 사유로 졸업한 학생들 대부분이 백수였다.
H는 입맛을 쩍, 하고 다셨다. 요즈음엔 바보 같은 녀석들이 없다. 바보들은 있어도 바보같은 녀석들은 더 이상 없구나. 촌스럽고 방어적인 여학생들도 더는 없었다. 이거야 원, 누가 연구실에 찾아오기라도 해야 작업을 걸든지 말든지 하지.
H는 생각했다. 발제문 하나 제대로 못 쓰는 주제에 짱구 굴릴 줄만 아는 영악한 녀석들, 왜 그런 녀석들에게 바람피우는 현장을 들키고 말았는지. K가 너무 한심했다. H는 피식피식 웃었다.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잘난 척을 해? 허술하게 학교 앞에 있는 모텔이나 들락거리고. 그걸 제자에게 들킨 주제에.”
“어떤 쓸개 빠진 놈이 그래?”
K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가와 담배 한 대를 건넸다. H는 미소를 지으며 지포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H는 K에게 전화기를 건네며 말했다.
K, 내가 마누라 몰래 연애할 때 운이 좋았다고 했지?”
“그랬지. 적어도 들킨다거나 하는 종류의 일은 없었지만, 그건 형의 능력으로 된 일은 아니었으니까. 인정하잖아.”
“K, 너는 운이 안 좋았다.”
K는 웃음을 터뜨렸다.
“심심한데 그럴 일이라도 있었으면 하네.”
H는 어느 맹랑한 녀석이, 하려다 그만두었다. 끝까지 고상한 척을 하고 있는 K가 얄미웠다.
은행잎이 흩날렸다. K는 다시금 잊고 싶은 계절이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이런 계절에는 J가 예의 짙은 남색 원피스를 입고 돌연 나타날 것만 같았다.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여학생들은 아무도 그런 원피스 따위를 입지 않았다. K는 고개를 흔들어가며 J의 잔상을 지웠다.
H는 마치 현실에서 도망가려는 듯 고개를 흔드는 K를 지켜보고 있었다. H는 조금 전, 감히 협박을 하려든 맹랑한 학생에 대해 생각했다. K교수를 어떻게 굴려볼까 했겠지. 제 예상과는 다르게 나오는 ‘K’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 녀석의 계획은 실패했으나, H에게는 K를 골탕 먹일 기회가 온 셈이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했지.’
H는 우연히 알게 된 K의 사생활과 어떤 방식으로 타협할지, 궁리하는 중이었다. (*)
<작가세계> 2009년 겨울호, 통권 83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