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렌지…, 오렌지.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첫 번째 목표물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오렌지』가 진열된 매대 주위에는 사람들이 울타리처럼 빼곡이 둘러서 있다. 휴일이라 그런가, 오늘은 유독 사람이 많다. 야구모자를 눌러 쓰며 좁은 울타리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본다. 무리하게 파고들었는지 옆에 서 있던 곱슬머리 여자 손에서 『오렌지』가 떨어져 내 발등을 때린다. 급하게 그것을 주워들어 미안한 듯 허리를 구부렸지만 여자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다.
넉넉하게 자리를 잡은 나는 그들처럼 울타리가 되어 진열대를 한눈에 훑는다. 『오렌지』는 쉽게 눈에 들어온다. 오렌지답게 진한 주황색인데다 다른 상품들과 달리 두 줄로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름때 묻은 투박한 손을 뻗어 중간에서 『오렌지』 하나를 꺼낸다. 맨 위엣 것은 사람들의 눈과 손이 쉼 없이 머무르기 때문에 우선 피해야 한다. 여러 사람의 손에 에돌린 제품을 제 돈주고 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새것은 흠 없이 깨끗해야 한다.
나는 손바닥의 검은 글씨를 들여다보며 다음 목표물로 향한다. 아방…, 아방. 걸음을 멈춘 곳은 비교적 한산한 예술 코너다. 공교롭게도 아까 곱슬머리 여자가 거기에 또 서 있다. 나는 모른 척 애써 외면하며, 이것저것 살피다 노력 끝에 발견한 양 『아방가르드의 이해』로 손을 뻗는다. 여자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기다 말고 때 낀 내 손톱을 힐끗거린다. 불결한 듯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리다 내 얼굴도 슬쩍 쳐다본다. 나는 이번에도 중간쯤에서 책을 꺼내어 몇 번 뒤적이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여자는 그때까지도 계속 나를 훔쳐본다. 혹 내 행동이 수상해 보이는 걸까. 그런 거라면 좀더 노련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노련하게 나머지 책 『성공을 위한 12가지 조건』과 『잃어버린 역사』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까지 손에 넣는다.
진짜 노련함이 필요한 건 지금부터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식으로 어설프거나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면 레이더망에 포착되기 십상이다. 나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어슬렁어슬렁 다른 데도 둘러보는 척하다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향한다. 대형서점의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다.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매장 한쪽에 화장실을 비치해 두었다는 것. 화장실이라는 은밀하고도 훌륭한 장소가 없었다면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자리를 찾아다녀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벌써 점원이나 고객에게 덜미가 잡혀 더는 이 짓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대형서점을 고집하는 이유는 다 이 매력적인 화장실에 있다.
화장실로 무사히 진입한 나는 문을 걸어 잠근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어지럽게 엉겨붙어 있다. 화장지로 젖은 이마와 손을 닦아내고 곧바로 작업에 돌입한다. 호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펼친다. 오렌지 251~258, 아방가르드의 이해 97, 155, 218, 성공을 위한 12가지 조건 160~174…
책이 더러워지거나 구겨지는 일이 없도록 『오렌지』의 책장을 살포시 연 뒤 페이지 251을 조심스럽게 손에 쥔다. 차갑고 보드라운 종이의 질감을 손끝으로 잠시 애무해본다. 긴장한 듯 페이지 가장자리가 예민하게 날이 서 있다. 단번에 쓸어 내리기라도 하면 손가락이 베일 것 같다. 나는 숨죽인 채 움켜쥔 손을 치마 벗기듯 천천히 아래로 끌어내린다. 갈피에 페이지 일부가 남지 않도록 손목의 힘은 일정하게 유지한다. 찌, 찌지직. 책을 찢을 때마다 나를 겁나게 하는 건 찢는다는 행위에 대한 죄의식보다 이 소리다. 페이지가 갈피에서 끌려 나올 때 질러대는 비명이 꼭 나를 원망하는 소리 같다. 찢겨진 페이지를 본다. 치맛자락처럼 구겨지고 주름진 페이지 끝자락이, 에로틱하다.
다음 페이지로 향한 내 손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한번에 꼭 한 장씩만 찢는다. 한꺼번에 많은 페이지를 찢으면 마무리가 깔끔하지 않을 뿐더러 책이 상할 수 있다. 상처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은 이 일에서 최우선으로 지켜져야 할 덕목이다. 나는 『오렌지』를 시작으로 각 책의 해당 페이지를 차근차근 찢는다.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췄다 다시 시작한다. 부욱북, 찌익찍. 페이지 찢겨 나가는 소리가 귓속에 서늘한 바람을 불어넣고, 심장을 가늘게 긁어내린다. 순간 손가락과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숨은 가빠진다. 온몸으로 저릿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린다. 거울을 들여다본다면 내 얼굴은 오르가즘에 도달한 표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은 오늘도 무사히 끝난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포스트잇을 꺼내 페이지가 없어진 자리마다 붙인다. 파란색 포스트잇에는 똑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페이지를 찾고 싶으시면 연락바람. pagepages@hanmail.net
찢어낸 페이지들을 가방에 넣고 화장실을 나와 손바닥의 검은 글씨를 지운다. 들어올 때와 반대로 이번에는 모자를 벗고 매장으로 나간다. 서점은 아까보다 한산하다. 나는 책 다섯 권을 원래 있던 자리, 중간에 잘 끼워 둔다. 이제야 긴장이 좀 풀린다. 지금부터는 한껏 여유롭고 안정된 자세로 돈주고 살 책을 골라야 한다. 책을 고를 때 나는 언론에서 선정한 우수도서나 매장 벽에 붙여 놓은 베스트셀러 목록을 참고하는 편이다. 물론 철저하게 내 기호나 취향에 맞는 걸 선택하기도 한다. 종류는 가벼운 소설부터 전문서적까지 다양하다.
다섯 권을 골라들고 계산대로 간다. 다음에 서점을 들를 때는 이 책 속의 페이지가 목표 대상이 될 것이다. 흐름상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페이지나 사람들을 안달 나게 할 페이지들.
-------------------------
작가 소개
장은진
2004년 단편소설 「키친 실험실」로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소설집 『키친 실험실』과 장편소설 『앨리스의 생활방식』,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가 있다. 2009년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했다.
**************************************************
2
금요일, 일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다. 몸에서 시큼한 기름 냄새가 물큰 올라온다. 손톱 밑에는 새까만 기름때가 끼어 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자동차 하청공장을 십 년째 다니고 있다. 직장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딱히 옮길 필요성도 못 느끼면서, 고졸 학력에 이만한 직장이면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삼 교대로 풀 가동되는 공장에서 내가 하는 일은 범퍼 찍어내는 일이다. 그야말로 같은 동작이 쉴새없이 반복되는 단순하고 지루한 노동이다. 똑같이 생긴 범퍼를 하루에 수백 개씩 찍어내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을 기계 부속품으로 믿게 되어 버린다. 다른 게 있다면 단지 숨을 쉰다는 것뿐이다. 기계 앞에서는 어떤 사고(思考)도 필요치 않다. 그래서 가끔은 편하다. 그래서 가끔은 또 허무하다. 감정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반복이 파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책이 읽고 싶어졌다. 기계에 기름칠하듯, 오글오글 주름잡힌 뇌 틈새에도 기름칠이 필요했다. 어쩌면 내가 진정 갖고 싶은 건 책표지처럼 윤기 나는 손일지도 모른다. 책처럼 단단하면서도 나뭇잎처럼 야들야들한 손.
공장 맞은 편이 버스 종점이라 나는 좌석을 고르는 특권을 누린다. 뒷좌석에 피로를 구겨 넣고 돌덩이 같은 머리는 벽에 부려놓고 잠을 청한다. 그러나 버스가 번화가로 진입하면 잠은 오래가지 못한다. 승객들이 소음을 일으키며 우르르 내렸다, 와르르 올라탄다. 버스 안은 금세 콩나물 시루가 된다.
“형씨!” 막 잠에서 깬 내 어깨를 누군가가 툭, 건드린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든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건 칵테일 파티다. “오메, 이런 데서 만나부요?” 칵테일은 내 손을 잡아 쥐고 반가운 만큼 세차게 흔들어 댄다. 셰이커처럼 머릿속에서 『칵테일 파티』와 사내의 첫인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파티는…?” 칵테일은 덕분에, 라고 대답하며 손을 놓는다.
칵테일 파티는 페이지를 통해 알게 된 사내다. 사라진 페이지를 찾기 위해 내게 연락을 취한 사람 중 하나란 얘기다. 사내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격렬한 문장으로 메일을 보내왔다. 맞춤법이 엉망인 행간마다 사내의 날선 분노가 녹아 있었고 글의 절반은 욕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발한 욕도 많았다. 시간과 장소를 정해 나간 날, 조폭 분위기의 사내는 험악한 인상을 하고 앉아 있었다. 사내는 나를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 고함부터 질렀다. 너 오늘 내 손에 한번 뒤져볼래? 벽돌 같은 주먹이 대가리를 찍어 내릴 것만 같았다. 사내는 애인과 만난 지 200일째 되는 날 손수 만든 칵테일로 파티를 열어줄 계획이었다. 칵테일을 만들기 위해, 각종 정보가 총망라된 『칵테일 파티』를 사서 읽다가 페이지가 찢겨나간 걸 발견한 것이었다. 사라진 페이지에는 애인이 좋아하는 그래스호퍼도 들어 있었다. 사내는 페이지가 없어진 걸 안 순간 애인과의 사이가 깨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며 페이지가 온전한, 내 『칵테일 파티』를 건넸다. 그러자 사내는 테이블을 반으로 쪼갤 듯 손바닥으로 치며 당장 페이지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겁먹은 나는 페이지를 가방에서 얼른 꺼내 건넸고, 사내는 급하게 그래스호퍼가 게재된 페이지를 찾아 훑었다. 사내는 셰이커 흔들듯 머리를 흔들며 칵테일 만들기를 반복했다. 페이지를 외울 정도가 되어서야 사내는 두툼한 허벅지로 테이블을 건드리며 일어났다. 나는 흔들리는 테이블을 붙잡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살았다고 한숨을 놓은 순간 사내가 나를 향해 다시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몸은 얼음조각처럼 그대로 굳어버렸고, 정말 뒤질 각오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사내는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테이블에 페이지를 툭 던지며 말했다. 그렇게 갖고 잡소? 사내는 그래스호퍼가 실린 페이지만 달랑 든 채 카페를 나갔다.
“잘 끝났어라. 여친도 뻑 가부렀소.” 밝은 표정의 사내에게서 예전 그 고약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도 그러고 댕기요?” 나는 멋쩍은 듯 웃기만 한다. “형씨 덕분에 서점이란 곳도 가끔 가서 책도 뒤적거린당께요. 이번엔 어떤 책인지 갈켜주믄 안 되제라?” 사내는 자신의 농담이 재밌다는 듯 소리내어 웃다가 가방에서 부스럭부스럭 뭔가를 꺼내 내민다. 너덜너덜해진 페이지에는 ‘그래스호퍼 만드는 법’이라고 적혀 있다. “이건?” “인자 필요 없응께 가지쇼. 요 대글박에 입력해놔서 문제없어라.” 내릴 때가 됐는지 사내가 벨을 누른다. “은제 연락 한번 주쇼. 칵테일 멋지게 한 잔 뽑아불랑게.” 칵테일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내 손에 들린 너덜한 페이지가 사내처럼 명랑하게 들썩인다.
**************************************************
3
집에 도착한 나는 칵테일이 준 페이지를 파일에 넣어두고 컴퓨터를 켜 메일을 확인한다. 다섯 통의 편지가 도착해 있다. 긴장된 손으로 마우스를 클릭 한다. 손바닥이 축축하다.
―고도를 기다리며. 이런 경험은 첨이라 황당하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생각해보니 참 재밌네요. 그러니까 제가 님에게 선택된 건가요? 당첨 선물은 없나요? ㅋㅋㅋ 내일 시내 마고에서 오후 4시에 뵙죠. 제가 좀 바쁘니 고도를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o^
―서양 철학사. 대출한 책으로 공부 중인 사람인데, 기말고사 망치면 니가 책임 질 거냐 씹새꺄! 공공 서적에 이래도 돼? 도서관에 고발하기 전에 빨리 내놔! 좆나 재수 없네! ㅗ
―동성애의 심리학. 저번에 부탁한 대출 건도 그렇고 겸사겸사 만났으면 하는데. 내가 버섯요리 잘하는데도 알아놨거든. 시간 되는 대로 연락주삼. ^^
―공자에서 퇴계까지 주인이다. 남의 책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옛날에 책도둑은 도둑도 아니라고 했지만, 통째 집어 가는 게 백배 낫지 책을 찢는 무식한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당신 같은 인간 만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우편으로 보내라. 여기 주소는…
―우주의 신비. 드디어 저희 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어요. 다섯 마리나. 초산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모두 건강하답니다. 원하시면 한 마리 분양해 드릴게요~~
누군가 나를 생각하고 궁금해한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그게 증오든 미움이든. 나는 나를 찾는 사람에게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내 페이지를 궁금해하듯 나 또한 그들이 궁금하다. 난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답장을 보낸다. 편지 쓰기를 끝내고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은 주소록에 등재한다. 페이지 수만큼 주소록의 페이지도 늘어간다. 이름란에는 이름대신 책제목을 적는다. 어느새 내게는 사람들을 책 내용으로 기억하고 책제목으로 부르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기억하고 부르고 싶은 제목은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클림트!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밭은 숨을 내쉰다. 그러나 절망은 아직 이르다. 다음주부터는 저녁 근무다. 나는 처진 어깨를 다시 단단하게 끌어올린다.
**************************************************
4
대학생들과 나란히 교문으로 들어선다. 가방을 메고 모자를 쓴 나는 누가 봐도 대학생으로 보인다. 나는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책을 읽거나 깊고 잔잔한 캠퍼스 호수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대학생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가끔 나도 모르게 진짜 대학생처럼 행동할 때가 있는데 바로 도서관을 출입할 때다. 이 국립대학은 전국 최초로 일반인에게 도서관 개방을 허용한 대학이다. 대학이란 기관은 사회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수만 권의 책을 일반인과 공유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치즈처럼 딱딱하게 굳어 가는 뇌에 기름칠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가장 먼저 이 도서관을 찾았다. 간단한 서류절차가 끝나자 대학은 곧바로 도서대출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나는 내 얼굴과 이름이 박힌 카드를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대출카드는 언뜻 보면 학생증처럼 보였다. 이 카드 하나면 도서관 출입은 물론이고 관내 시설 이용도 자유로웠다. 그러니까 이 도서관 안에서만큼은, 나도 그들과 똑같은 머리 말랑한 대학생이었다.
2층 열람실로 들어서자 엄숙한 정적이 감돈다. 나는 열람실 특유의 이 정적을 좋아한다. 정적 사이로 들리는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소리와 예의를 갖춘 소곤거림과 도둑처럼 사뿐히 걷는 발소리도 좋아한다. 그리고 이곳의 정적을 닮은 그녀도 좋아한다. 그녀는 오늘도 변함 없이 창가 쪽 책상에 앉아 있다. 그녀 옆에 자리 하나가 비어 있다. 앉을까 말까 고민이 오간 짧은 사이에, 빡빡 머리 청년이 그 자리를 향해 느럭느럭 걸어간다. 오늘은 기필코 저 자리를 사수하리라. 나는 얼결에 청년보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 옆에 처음으로, 앉았다. 나는 심장 박동 소리를 들킬까봐 번번이 그녀의 옆자리를 겁냈었다. 그렇다고 지금, 심장 박동이 느슨해진 건 아니다. 심장은 여전히 전력 질주하고 있고, 지금은 용기를 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서가에서 골라온 책을 펼쳐 놓고 읽는다. 도중에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페이지가 나오면 접어둔다. 그녀는 내가 페이지를 접을 때마다 힐끗 쳐다본다. 정적을 닮은 그녀에게는 페이지 접는 소리도 귀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솔직히 내 집중력도 과도하게 떨어져 있는 상태다. 책장이 날리듯,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뜨려놓는다. 머릿결에서 흘러나온 샴푸향은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을 그대로 전해준다. 눈에 들어오는 글자들은 점점 윤곽을 잃어가고 잠잠하던 심장이 다시금 요동친다. 이토록 선명하게 들리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그녀에게 안 들릴 리가 없다. 소리가 더 커질까 봐 나는 절반도 읽지 않은 책을 들고 화장실로 간다.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 접어 둔 페이지를 찢는다. 한 장 한 장 찢을 때마다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떨까, 찌익찍. 그녀의 하얀 피부와 까만 눈동자, 찌직.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 찍. 그녀의 샴푸향, 찌익찍. 그녀의 취향, 찌익. 더 이상 접어 둔 페이지가 없자 아무 페이지나 손에 잡히는 대로 찢는다. 페이지 찢기는 소리가 좁은 화장실에 환호인 듯 비명인 듯 울려 퍼진다.
나는 서가에 책을 꽂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어디를 갔는지 그녀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책상 한쪽에 프랑스 소설 한 권과 구스타프 클림트 화집이 놓여 있다. 그녀는 공부 틈틈이 소설책과 화집을 본다. 그녀를 처음 본 것도 미술서적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였다. 그녀는 미술책을 고르고 나면 어김없이 불문학 코너로 자리를 옮겼다. 어떤 종류의 책을 읽는지를 알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녀는 한국적 정서보다는 이국적 정서를 동경한다.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물으면 반드시 프랑스라고 답할 것이고, 그 나라 문화에 대해서도 해박할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 이름을 대라면 프랑스 이름을 줄줄이 늘어놓을 것이고, 프랑스 신간 소설이 나오면 가장 먼저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할 것이다. 그녀는 또 그림에 소질이 있거나 그림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화가가 되려고 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화가의 길을 포기했을지 모르고,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스스로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좋아하는 화가는 클림트처럼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한 예술가이고, 한번 좋아하면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오래도록 변치 않는다.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그녀는 남자 친구를 고를 때도 ‘강한 개성’을 강조할 것이고, 한번 빠져들면 ‘깊고 변함 없는 사랑’을 유지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프랑스 소설과 클림트를 기억해뒀다가 똑같은 책을 구입해 읽고 또 읽었다. 관계를 맺는데 취향이 비슷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다. 사람들은 상대의 풍부한 지식이나 비슷한 취향에 관심을 보이기 마련이고, 그게 좀더 농후해지면 금방 친해질 수 있다. 어느 순간 깊이 빠져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와 만나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한번만이라도 주어진다면 나는 그녀를 매혹시킬 자신이 있다. 이제는 클림트에 관한 책을 한 권 써낼 수 있을 정도고, 그녀의 소설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 또한 이미 마쳐놓은 상태다.
바다처럼 머리를 출렁이며 그녀가 온다. 나는 고개 숙인다. 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은 채 책을 덮어놓고 다시 나간다. 손목시계를 본다. 벌써 점심 시간이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열람실을 나간다. 프런트 직원도 자리를 비운다. 도서관은 완벽한 정적에 휩싸인다. 열람실에 남아 있는 건 나뿐이다.
나는 두리번거리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자리로 옮겨 앉는다. 소설 『아름다운 비밀 이야기』에 볼펜 한 자루가 끼워져 있다. 읽다 만 부분이다. 벌어진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책을 펼친 후 그녀가 앞으로 읽게 될 페이지 서너 장을 쭉, 찢는다. 정적에 금이 가기 시작하고 손바닥에는 땀이 찬다. 나는 잽싸게 포스트잇을 붙이고 『구스타프 클림트』에서도 고즈넉한 풍경화 두 점을 도둑질한다. 횟수로는 열한 번째이자 장수로는 서른 두 장째인 그녀의 페이지. 나는 페이지를 반듯하게 접어 호주머니에 넣는다. 호주머니가 듬직한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오른다.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아름다운 비밀 이야기』를 펼쳐 읽는다.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손놀림에 집중한다. 곧 있으면 그녀가 나의 포스트잇과 조우하게 된다. 책장이 넘겨질 때마다 속으로 남은 페이지 수를 센다. 절정의 순간을 이렇듯 가까이서 맛보다니.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제 포스트잇까지는 딱 두 페이지 남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다. 드르륵, 드르륵. 젠장! 책상 위 그녀의 핸드폰이 몸부림친다. 사람들의 불만스런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꽂힌다.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집어들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한참 있다 돌아온 그녀는 급하게 책상을 정리한다. 나는 안타깝게 그녀만 쳐다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격렬하게 출렁이며 멀어져가고, 반대쪽에서 뚱뚱한 여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호주머니에서 그녀의 페이지를 꺼내 펼쳐본다. 클림트의 풍경화가 더없이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
5
나는 이 주마다 다섯 권씩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도서관 책들은 대부분 낡고 지저분했다. 그러나 차갑고 기름투성인 기계보다는 부드러웠고, 아무도 없는 빈집보다는 따뜻했고, 울리지 않는 휴대폰보다는 다정했다. 나는 공장에서 돌아오면 틈틈이 그것들을 펼쳤다. 가장 기분 좋을 때는 대출인기 순위에 랭크된 책을 손에 넣을 때였다. 그 순간에는 마치 인기 많은 여자를 차지한 듯한 쾌감에 빠져들었다.
그날도 나는 『사진으로 보는 몸』이란 책을 세 달을 벼른 끝에 차지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낡을 대로 낡았고 군데군데 페이지가 낱장으로 끼워져 있었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곧바로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소문대로 필력 좋은 작가는 사진에 대한 설명을 독특하고도 유쾌한 시각으로 풀어놓고 있었다. 제3장 ‘여성의 몸’이란 소제목을 달고 있는 페이지에서 작가는 이런 문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필자의 설명을 듣기 전에 독자 여러분은 ‘사진 25. 사자의 뱃속으로 들어간 나체 여인’을 봐주시길.
나는 작가의 요구대로 ‘사진 25’를 찾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제목이 붙은 사진은 없었다. 나중에야 페이지가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건너뛰고 있다는 사실과 사자 갈기처럼 찢겨 나간 페이지 일부에 남아 있는 ‘사진 2’라는 쌀톨 만한 글씨를 찾아낼 수 있었다. 여자 몸을 흠모한 놈의 짓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사진 25’를 포기하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똑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었다. 화가 난 나는 욕을 씨부리며 천장으로 책을 던졌다. 어떤 돼먹지 못한 인간인지 당장 찾아내 멱살을 움켜쥐고 싶었다. 그때, 책에서 빠져나온 페이지 한 장이 깃털처럼 가볍게 내 발등으로 떨어졌다. 나는 페이지를 집어들어 이상한 물건이나 되는 듯 한참 동안 그것을 들여다봤다.
맹물을 홀짝이며 창 밖을 내다본다. 약속 시간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아 있다. 나는 테이블에 『오렌지』를 올려놓는다. 진한 오렌지색 표지가 유난히 눈에 띄어 누구라도 금방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단발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카페 자동문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문 앞에 서서 카페 안을 둘러본다. 여자가 비켜서지 않은 통에 자동문은 그대로 열려 있다. 에어컨 바람이 소모되는 게 염려된 종업원이 팔을 뻗어 여자를 안쪽으로 안내한다. 여자는 종업원을 따라 걸으며 누군가를 찾는다. 여자의 눈이 내 테이블 위로 꽂힌다.
오렌지는 지적이고 품위 있는 여성이다. 목소리와 눈빛에서 그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막무가내로 화부터 낼 사람은 아니다.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마친 오렌지는 페이지부터 달라고 한다. 오렌지는 내게 페이지를 받자마자 집중해서 그것을 읽기 시작한다.
『오렌지』는 독특한 스토리와 탄탄한 구성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한국소설이다. 한밤중 엘리베이터에 갇힌 생면부지의 여자와 엘리베이터 밖의 남자가 문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소설 어디에도 오렌지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제목의 의미를 스스로 찾도록 한다. 작가가 독자에게 부여한 일종의 과제인 셈이다. 그 과제는 마지막에 이르면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하지만 역시나 작가는 불친절하다. 오렌지는 지금 페이지를 읽으며 오렌지란 단어를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다. 내가 찢어낸 페이지는 『오렌지』의 마지막, 결말 부분이다. 결말이 몹시 궁금한 소설이기에 오렌지는 포스트잇을 발견하자마자 내게 메일을 보냈을 것이다.
“결국 이렇게 끝나네.” 오렌지는 고래를 갸웃거리며 페이지를 테이블에 올려놓고는 눈을 살짝 흘긴다.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오렌지』를 슬그머니 건넨다. “그쪽이 읽던 건가요?” “깨끗하게 봐서 새책이나 다름없어요. 사죄의 의미로.” 오렌지의 성난 눈이 조금 누그러진다. “왜 찢었어요?” 나를 만나면 누구나 하는 질문을 오렌지도 역시나 꺼낸다. 나는 매실차 한 모금을 마신다. “미치도록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덕에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만났죠.” 오렌지는 호기심 담긴 표정으로 내게 또 당돌하게 묻는다. “이 소설에서 오렌지가 의미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기다렸다는 듯 신명나게 입을 뗀다. “생각하기에 따라 의미는 달라져요. 영민한 작가는 그 점을 노리고 있어요. 알다시피 결론은 미완이에요. 독자들은 당연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거라 생각하지만 결국 문은 열리지 않죠. 열린 결말로써 독자 몫으로 남겨두겠다는 거예요. 단단한 오렌지 껍질을 벗기면 달콤한 알맹이가 나오듯,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여자가 나온다고 상상할 수 있겠죠. 안에서 여자는 계속 갈증을 호소해요. 그러나 여자는 물이라고 직접 언급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혹시 그게 오렌지는 아닐까요?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자에게 문밖의 남자는 오렌지 같은 존재예요. 어둡고 답답한 곳에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건 남자의 상큼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죠. 남자 또한 여자의 목소리에서 상큼함을 느껴요. 전 전체적인 스토리며 구성에서 오렌지를 씹을 때의 상큼함을 느꼈어요. 작가는 소설의 이미지를 오렌지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귀는 사람 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당황한다. “네? 전, 대학도 안 나왔고,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근무하고, 또…” 방금 전과 다르게 말이 자꾸 더듬어진다. 나는 잔을 감싸고 있던 기름때 묻은 손을 테이블 아래로 감춘다. 찻잔에 올려둔 스푼이 손가락에 걸려 테이블로 방정맞게 떨어진다. “전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는데.” “아직 없지만.” “좋아하는 분은 계시군요. 그분도 페이지?” 나는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오렌지 뒤에 걸린 액자만 쳐다본다. “그분한테서는 연락이 없나봐요?” 오렌지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내가 준 『오렌지』를 가방에 넣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책을 꺼내 앞장을 펼친다. “처음엔 친구가 장난친 줄 알았어요. 그 친구한테 선물 받은 거라 이러면 안 되는데.” 오렌지는 친구의 마음이 적혀 있는 첫 장에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 건넨다. “대신 이 페이지는 제가 가질게요.” 오렌지는 페이지를 흔들며 소리 없이 웃는다. 나는 송아지처럼 눈만 끔뻑인다. “이 페이지가 필요하면 메일주세요.”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자동문을 통과하는 오렌지를 바라 보다, 오렌지가 주고 간 책을 펼친다. 페이지에서 오렌지 향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것 같다.
손목시계를 본다. 두 번째 주인공은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는 게 내 의무고 예의다. 종업원이 커피를 리필해 주고 있을 때 승용차에서 양복차림의 남자가 내린다. 남자는 입에 담배를 꼬나 물고 카페로 들어선다. 『성공을 위한 12가지 조건』에 어울리는 남자란 생각이 든다. 내가 책을 높이 들어 보이자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 성공은 늦어서 죄송하단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죄송합니다. 무례했다면 이 책으로 바꿔드리겠습니다.” 내 책을 밀어주자 성공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새 담배를 꺼내 문다. “내가 그깟 책이나 받자고 나온 줄 압니까?” 성공은 다소 공격적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는 나를 범죄자로 취급하는 부류다. 꿍꿍이가 없더라도 내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게는 얼굴 맞대고 얘기를 나누다 보면 누그러지기 마련이었다. 한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연락이 되어 나간 자리에 서점 점원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책 주인이 서점에 신고를 해서 사장의 명을 받고 대신 나온 것이었다. 속 깊은 대화가 오간 사이에 쌀쌀맞던 점원은 자주 웃었다. 점원은 사장에게 내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고 둘러댔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 후 내가 서점에 나타나면 점원은 비밀스럽게 윙크를 했고, 책값을 할인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점원은 서점을 그만뒀다.
“몇 푼 되지도 않은 거 다시 사면 그만이야. 당신 같은 비도덕적인 사람 때문에 이 사회가 곪아 가는 게 문제라고. 알아?” 성공을 위한 12가지 조건은 성공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이 책을 고른 것부터가 그 사실을 입증해준다. 성공은 고등학교 때도 성공욕이 강한 학생이었다. 기필코 일등을 해야 했고 반드시 반장을 해야 했다. 성공은 욕심대로 일등을 했고 반장을 했다. 성공과 당당하게 반장 선거를 치를 사람은 없었다. 단독 후보로 나선 성공은 대신 찬반투표로 자질을 검증 받아야 했다. 50표 중에서 찬성표는 47표가 나왔다. 성공은 반대표 세 표를 찾아내기 위해 연습장에 50명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고는 한 명씩 지워나갔다. 내 이름은 열 번째로 지워졌다. 성공은 나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성공은 공부 못하는 사람은 생각도 주관도 없을 거라고 단정지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 성공은, 대표 자질이 없는 학생이었다. 동창 얼굴도 기억 못하는 놈을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하고 있네. 에이 씨!” 성공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자는 게 규칙이지만 주먹이 자꾸 올라가려고 한다.
나는 주먹을 안추르며 ‘성공을 위한 8번째 조건’이 제시된 페이지를 내민다. 성공은 내 이야기에도, 페이지에도 관심 없다. 그저 흘러가는 시계바늘에만 신경 쓸 뿐이다. “세상은 당신처럼 한가하지 않아. 이런 유치한 장난할 시간 있으면 책이나 읽어!” 성공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분연히 일어난다. 성공은 없어진 한 가지 조건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딴 거 몰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걸까. 성공은 자신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조건 한 가지를 테이블에 놓고 간다. 11가지를 갖추었대도 놓고 간 한 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그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테이블을 본다. 성공의 담배에서 떨어진 잿빛 담뱃재가 페이지 위에 점점이 박혀 있다.
**************************************************
6
나는 책상 한쪽에 쌓여 가는 페이지들을 본다. 찾아가지 않은 페이지들이다. 나를 찾지 않는 페이지들을 보면 가끔 화가 난다. 저들은 왜 내가 ‘바라’는 ‘연락’을 하지 않는 걸까. 뭐 물론 ‘안 찾고 싶으시니까’ 안 하는 거겠지만, 아마 게을러서 책을 사놓고도 아직 읽지 않았을 것이다. 건성으로 읽어 페이지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거나 나 같은 사람에게 너그러울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니면 나 같은 인간을 상대조차 하기 싫거나 혹 판권장에 적힌 ‘잘못된 책은 바꿔드립니다’라는 문장에 책임을 물어 새책으로 바꿔갔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라면 용기가 없어 그냥 서점에서 사라진 페이지만 찾아 읽어버렸든가, 어쩌면 아직 아무도 안 사간 건지도 모른다. 책을 찢는 인간을 좋은 인간이라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니 나쁜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그저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남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찢어낸 페이지는 탐독으로 얻어낸 중요한 부분들이다. 책의 핵심인 그 페이지를 읽지 않으면 전체적인 내용 연결이 불완전해, 읽어도 읽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한 맛을 남기는 부분들. 만약 책을 읽었다면 징검다리처럼 놓인 페이지를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웬만큼 성질이 원대하지 않고서는 나처럼 책을 집어던지거나 소리지를 것이다. 나 또한 그 페이지들처럼 중요한 사람이고 싶고 나로 인해 그들이 완전해졌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은 페이지가 쓸모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쓸모 없는 인간이 없듯, 책 한 권을 이루는 모든 페이지는 나름의 역할이 있다. 아무런 글씨도 페이지 표시도 없는, 맨 앞장과 뒷장의 면지조차도 나름의 필요성이 있다. 아름다운 시구나 마음을 적어 넣을 수 있고, 저자에게 사인을 받을 수도, 독후감을 쓸 수도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페이지도 제 위치가 있고 그 위치가 지켜질 때 비로소 책은, 완성된다.
나는 페이지들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내 영혼…』, 『살인에 대한…』, 『색채 심리…』, 『잃어버린 역사…』. 이제 나는 페이지만 보고도 책제목을 알아맞힐 수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컴퓨터를 켠다.
잃어버린 역사님에게. 안녕하세요. 전 님의 페이지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보관중인 페이지는 『잃어버린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페이지입니다. 절 바라지 않으면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혹시 절 증오하시나요? 그렇지 않다면 왜 연락을 안 주는 거죠?
편지 ‘보내기’ 단추를 클릭 한다. 화면이 바뀌고 파란색 문구가 여백을 채운다.
메일 전송이 실패했습니다. 입력하신 아이디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디거나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은 휴면 아이디라 전송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디를 다시 한번 더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편지를 쓴다.
클림트님에게. 전 오랫동안 님을 지켜…
나는 더 이상 쓰지 못한다. 가운데 손가락이 백스페이스 키를 지그시 누른다. 커서는 야금야금 글자들을 먹어간다. 다 먹어치운 커서는 숨만 헐떡헐떡 쉬고 있다. 덩달아 내 숨도 헐떡거린다. 나는 책꽂이에 꽂아둔 다섯 개의 파일에서 페이지들을 모조리 끄집어낸다. 한데 모으니 분량이 상당하다. 나중에 이 페이지들을 하나로 엮어 책으로 만들 계획이다. 다 만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읽을 참이다. 갑자기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내용 연결이 불완전하더라도 참고 읽어나갈 것이다. 그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아마도 나는 페이지에서 수많은 제목과 얼굴을 만날 것이다. 주인 없는 페이지를 만나면 그 페이지를 통해 성격과 취향을 짐작하고 상상할 것이다.
그때 스피커에서 메일 도착을 알리는 효과음이 흘러나온다. 짧으면서도 강렬한 효과음에 가슴이 흔들린다. 두 통의 메일이 도착해 있다. 누굴까? 심호흡을 하고 편지를 개봉한다. 제목부터 살핀다. 한 통은 내가 방금 전송했다 실패해 반송된 편지고, 나머지 한 통은 『현대사회의 두 얼굴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이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린다. 현대사회의 두 얼굴? 생소한 제목이다. 나는 그런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없다. 혹시 읽었는데 기억 못 하고 있는 걸까. 편지를 읽어본다. 내용으로 봐서는 나를 찾고 있는 페이지가 분명하다. 현대사회의 두 얼굴은 당장 만날 수 있겠냐며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일단 페이지를 찾아본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런 제목으로 기억되는 페이지는 없다. 모르는 사이에 어디다 흘린 걸까. 아니면 제목을 다른 것과 혼동했거나 잘못 알고 있는 걸까. 난감하지만 일단 만나겠다는 답장을 보낸다.
**************************************************
7
약속 장소인 공원 입구에 다다른다. 현대사회의 두 얼굴은 카페보다 공원이 좋겠다고 했다. 식수대를 지나자 하얀색 벤치가 나온다. 현대사회의 말대로 다른 벤치는 모두 빨간색인데 그 벤치만 하얀색이다. 벤치에 중씰한 남자가 앉아 있다. 남자는 무릎에 책을 펴놓고 고독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실례지만 현대사회…?” 내가 다가가자 현대사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악수를 청한다. 나는 손을 잡아 흔들며 현대사회가 들고 있는 책을 힐끗 쳐다본다. 책 장정을 보면 기억이 날 것 같았지만, 책표지는 노란색 비닐 책가위로 꼼꼼하게 덮여 있다. 입힌 지 얼마 안 됐는지 책가위는 아주 깨끗하다. 더욱 난감하다. 페이지를 갖고 오지 않은 걸 알면 무척 실망할 텐데. “페이지는…” “죄송합니다. 제가 새벽 근무를 마치고 곧장 온 터라.” 실망시키는 것보다 거짓말쟁이가 되는 게 나겠다 싶어 일단 둘러댄다. “잠시 책 좀.” 내 요구에 그가 선뜻 책을 내준다. 나는 책을 펴 내용과 찢어진 부분들을 면밀히 살핀다. 메일 주소가 적혀 있는 포스트잇도 보인다. 내가 읽었던 책이 분명하다. 프로필 사진 속 아리따운 젊은 여자가 나를 향해 웃고 있다. 해사한 웃음이다. 때마침 그가 음료수를 사오겠다며 벤치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 틈에 책가위를 살짝 들춰 책표지를 살핀다. 다행히도 결정적인 단서가 거기 숨어 있다. 바퀴벌레. 어둠 속에 숨어 있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서가에서 책을 빼들었을 때 책표지를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여섯 개의 다리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털과 자신의 몸을 휘감을 만큼 길게 뻗은 더듬이, 그리고 키틴질의 딱딱한 몸통에 흐르던 반질한 광택의 느낌까지. 바퀴벌레는 솜씨 좋은 누군가가 펜으로 그려 넣은 것이었다. 너무 정교해 진짜 바퀴벌레인 줄 알고 손등으로 옮겨 붙을까봐 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었다. 뒤이어 이 책에서 찢은 페이지들도 기억난다. 그녀의 페이지를 처음 찢던 날, 그녀의 반응을 살피느라 너무 긴장한 탓에 절반도 읽지 못했고, 제목은 물론이고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책.
현대사회가 음료수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벤치로 돌아온다. “도서관 책에 왜 책가위를.” 나는 음료수를 받아들며 내내 의문이었던 질문을 던진다. 그는 한숨부터 내쉰다. “애인이 쓴 책입니다. 시간 강사였는데 책을 내는 게 꿈이었지만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없어 자비 출판을 했지요.” 판권장에 출판연도가 1998년으로 나와 있으니 그와 저자 사이의 관계도 그 만큼 오래되었단 뜻이다. 저자를 애인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직 결혼은 안 한 모양이다. “결혼은…?” 그는 음료수 한 모금을 소리나게 꿀꺽 삼킨다. “교수 임용되면 하자고 계속 미뤄오다 사고로… 장례식에 다녀오고 나서야 저한테 책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찾으니 없더군요. 천 권이나 되는 책이 어디로 다 사라져버린 건지.” 그의 얼굴이 시멘트처럼 굳어진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게 도서관이었습니다. 제목을 본 순간 어찌나 설레던지. 그 친구 처음 봤을 때처럼 심장이 뛰더군요. 그 친구를 10년이 지나서야 읽었습니다.” 그는 자책하듯 음료수 캔을 손으로 찌그러뜨렸고, 나는 저자의 죽음에 할 말을 잊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한다. 이제야 모든 게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날 페이지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집으로 돌아와 벗은 바지를 옷장에 처박아뒀었다. 그게 6개월 전의 일이니 겨울옷을 정리한답시고 세탁기에 넣고 돌렸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장에서 코르덴바지를 찾아 뒷주머니를 확인한다. 추측대로 아무렇게 접힌 두툼한 페이지가 뭉치로 나온다.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오지만 물 속에 빠졌다 나온 페이지는 거칠 정도로 빠닥빠닥 말라 있다. 너무 딱 들러붙어 있어서 펴기조차 힘들다. 접힌 부분을 펼 때마다 관절 꺾기는 소리가 난다. 더 이상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다 펼치자 표면에는 우글쭈글한 주름들이 깊게 패어 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손수건으로 페이지를 덮고 다리미질한다. 빳빳하게 편 페이지는 새 파일에 낱장으로 끼워 넣는다. 다행히 활자가 손상되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택시를 타고 공원에 도착한다. 한여름에 현대사회는 낙엽이 다 떨어진 나무처럼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다. 내가 파일을 건네자 그가 눈을 깜빡이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마지막 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중년의 현대사회가 뒤돌아 나를 한번 쳐다본다.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그가 내게 페이지를 찢은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것을.
**************************************************
8
오늘은 그녀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근무 시간이 바뀌면 당분간은 도서관에 올 수 없다. 저기 그녀가 보인다.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간다. 이번에는 과감하게 그녀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모자챙을 내리누르고 책을 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모자챙 아래에서 꼼지락거린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연락이 없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녀의 페이지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그녀는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일까. 미친 듯 화를 내는 부류일까, 재밌다고 좋아하는 부류일까, 정신병자나 범죄자로 취급하는 부류일까. 아니면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부류일까? 나는 그녀를 선뜻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아끼는 것을 빼앗겨놓고도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한두 번도 아닌데 그녀는 내가 궁금하지도 않는 걸까. 그녀는 나의 쓸모를 왜 아직도 모르는가. 갈수록 그녀는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녀의 책상 한쪽에 새 프랑스 소설과 현대미술 서적이 놓여 있다. 오랜 침묵은 내 신경을 긁어놓는다. 나는 숨을 고르며 모자챙 아래 조용히 숨는다.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포획물을 노려보다 적당한 시기를 가늠해 조금씩 간격을 좁혀나간다. 그러나 욕망은 간격보다 더 빠르게 포획물로 접근한다. 이성적이지 못한 욕망은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큰 포효와 함께 순식간에 날아든 나는 벌떡거리는 가슴의 진동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몸을 연다. 검은 털이 보송보송 돋은 새하얀 피부가 눈앞에 펼쳐진다. 뒤떨고 있는 피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손으로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몸이 버둥거리더니 자신을 닫으려고 애쓴다. 나는 발톱으로 지그시 내리눌러 닫히는 걸 막은 뒤 이빨을 박는다. 단단한 턱과 이빨이 자물쇠처럼 야무지게 채워지자 살점 뜯기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린다. 톱날처럼 찢긴 부위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제야 내 손은 거둬지고 몸은 고요하면서도 천천히 어깨를 닫는다. 그러고 기다린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의자 끄집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다.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한다. 그녀도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그녀의 자리로 가 고개를 꺾고 앉는다. 그녀의 책들이 내 모자챙 아래 꼼짝없이 갇혀 있다. 내 손놀림은 빨라지다 못해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의 눈을 확실하게 사로잡기 위해 이번에는 페이지 절반을 갈피에 남겨놓는 과감함까지 보인다. 땀 한 방울이 페이지로 떨어진다.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가 자리에 앉는다. 그녀의 하얀 손이 내 모자챙 아래서 천천히 움직인다. 그녀에게는 엄지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짓누르는 버릇이 있고, 페이지는 절대 접지 않으며 밑줄도 긋지 않는다. 기억해둘 페이지가 있거나 맘에 드는 문구가 나오면 수고롭게도 수첩에 옮겨 적는다. 나는 책장을 넘기는 척하며 한 번씩 그녀의 페이지를 확인한다. 그때 그녀가 포스트잇이 붙은 페이지를 펼친다. 심장이 춤춘다. 나는 모자챙을 조금 올려 그녀의 얼굴을 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찾듯 주변을 살핀다. 눈이 마주칠까봐 얼른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손만 쳐다본다. 그러나 손은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포스트잇에 가 닿지도 않는다. 그녀는 불안하게 손톱으로 엄지손가락만 짓누르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그녀의 집게손가락이 천천히 포스트잇으로 접근한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포스트잇을 떼어내려는 것일까? 그녀의 손가락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예상대로 손가락은 포스트잇을 떼어내고 그녀는 그것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때 갑자기 그녀가 손가락을 오므려 그것을 순식간에 구겨버린다. 공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포스트잇은 그녀의 손에서 버림받아 바닥으로 떨어진다. 미친 듯 화를 내는 부류인가? 나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것을 급히 좇는다. 그러나 지나가던 사람의 발부리에 채여 그것은 어디론가 금세 사라져버린다. 나는 고개 들어 그녀를 똑바로 쳐다본다. 무표정한 그녀는 없어진 페이지에 상관하지 않고 책을 읽는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부류인가? 허탈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나는 엎드려 책 깊숙이 얼굴을 파묻는다. 모자챙이 절망에 빠진 내 눈을 가리고, 그녀의 하얀 손을 가로막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허탈감이 가시지 않아 나는 그녀를 뒤밟는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가 깨물어지고 주먹이 쥐어진다. 내 눈에는 오로지 그녀의 뒤통수만 보인다. 당장 그녀를 돌려 세워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다. 저기요! 라고 부르려는 찰나에 그녀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이곳은 열람실 맨 끝에 있는 서가다. 나는 책을 고르는 척하며 서가 틈새로 그녀를 노려본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두툼한 책 두 권을 빼들고 걸음을 옮긴다. 그녀를 또 따라간다. 그녀가 들어간 곳은 여자 화장실이다. 나는 길 잃은 사람처럼 벽에 걸린 도서관 안내도를 쳐다보며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10분이 지나자 그녀는 가슴에 품고 나온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고 열람실을 나간다.
나는 그녀가 꽂아둔 책을 빼들어 안을 살핀다. 자극적인 색상의 포스트잇과 ‘페이지를 찾고 싶으시면…’이란 낯익은 문구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페이지를 본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곳의 페이지는 사납게 찢겨나가고 없다. 형광색 포스트잇은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일 것만 같다. 머릿속으로 새카만 어둠이 밀려들어온다. 나는 책을 덮고, 분류 주제가 적혀 있는 서가 모서리를 올려다본다. 검은색 테두리 안에는 ‘의학’이라고 진한 고딕체로 적혀 있다. 그녀에게 쓸모 있는 페이지들의 집합. 어떤 부류에도 속하지 않는 그녀. 내 가슴에 펼쳐져 있던, 비밀스럽게 아름답던 책 한 권이 탁, 닫힌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는다. 망설이다 파일에서 두꺼운 종이로 장정된 책 한 권을 꺼낸다. 아주 얇은 책, 그녀의 페이지 서른 아홉 장으로 만든 책이다. 제목 같은 건 없다. 그냥, 그녀의 책이다. 그녀의 페이지들이니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 책상에 그 책을 던져놓고 열람실을 나온다. 그녀가 계단에 서서 깔깔대며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도서관을 나와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
9
땀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서점으로 들어선다. 퇴근 무렵이라 서점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책을 고르는 사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 책을 보며 애인을 그리워하는 사람. 그들은 모두 나의 잠재적 페이지들이다. 언젠가 나의 쓸모를 알아 봐주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
나는 베스트셀러 목록이 붙어 있는 벽으로 간다. 지난번에 1위였던 베스트셀러는 9위로 밀려나 있다. 1위는 생소한 제목의 외국 서적이 차지했다.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1위 외에도 낯선 제목의 책이 여섯 권이나 랭크되어 있다. 나는 베스트셀러 코너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은 역시나 사람들이 울타리처럼 둘러서 있고 사람들의 손에는 1위를 차지한 똑같은 책이 들려 있다.
나는 베스트셀러 코너를 무심히 지나 한산한 인문학 코너로 간다. 책을 고르기 위해 진열대를 훑는다. 친근한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잃어버린 역사』. 그것을 집어들어 페이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장을 날려본다. 종이와 잉크 냄새가 연기처럼 퍼져 나온다. 숫자들은 돈 세는 기계처럼 빠른 속도로 몸을 부풀린다. 페이지가 일으킨 바람이 땀으로 축축이 젖은 손바닥을 시원하게 식혀준다. 빠르게 넘어가는 페이지 사이에서 언뜻 시퍼런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것 같다. 앞으로 되돌아가 다시 천천히 페이지를 넘긴다. 페이지에 푸른색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페이지를 찾고 싶으시면 연락바람. pagepages@hanmail.net
안 사갔구나. 왠지 간절하게 느껴지는 ‘바람’이다. 나는 씩 웃으며 호주머니에서 페이지를 꺼낸다. 그녀의 마지막 페이지. 『잃어버린 역사』의 찢겨나간 부분에 그녀의 페이지를 끼워 넣고 계산대로 간다.
서점을 나오자 어두워진 거리는 집을 향해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붐빈다. 휴대폰 시계를 본다. 어느새 회사에 출근할 시간이다. 나는 『잃어버린 역사』를 손에 쥐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뛴다. 책 날개가 양쪽으로 펴지면서, 깃털 같은 하얀 페이지들이 바람에 휘날린다. 그래도 이 책의 페이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쓸모를 계속 바라리라. (*)
<문예중앙> 2008년 여름호, 통권 122호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