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역사적인 폭력이라 불리는 나치의 전쟁범죄와 관련해서 모두가 죄인이라는 비판과 책임자였던 당신들이 죄인이라는 비판 사이에는 의심스러운 동질성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죄를 희석시킴으로써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온정주의로 나아가고, 후자의 경우는 특정 인물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 두 가지 딜레마를 다루면서, 전쟁에 가담하지 않은 독일인이라 할지라도 회피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죄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국가의 통치행위를 결정하는 주권자로서 시민이 국가의 행위가 초래한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정치적 죄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친구와 이웃에 대해서 마땅히 했어야 하는 행위를 거부하거나 외면한 도덕적 죄이다. 이런 점 때문에 독일인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자신의 죄를 냉철히 통찰하고 변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그것은 외부의 상황이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져야 할 속죄의 방식이라고 야스퍼스는 설명한다.
야스퍼스가 제시한 이런 죄의 책임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독일 작가를 꼽자면 단연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제발트는 1944년에 출생한 전쟁 이후 세대이며,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전쟁 세대가 아닌 후속 세대가 물려받은 전쟁의 유산과 그로인해 짊어져야 하는 역사적 책임의 문제와 이어진다. 부모 세대의 국가범죄에 대해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천착하는 것이 90년대 독일의 전반적인 문학적 경향과 거리가 있다는 점뿐 아니라 영국으로의 ‘자발적 망명’을 선택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제발트에게 독일은 용서할 수 없는 분노와 기이한 불안감을 발산하는 낯선 고향이다.1
1 삼심 년 가까이 떠나있던 유년시절의 고향을 불쑥 찾아갔을 때의 기록을 담은 「귀향」『현기증. 감정들』 수록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감정의 출처들을 제시하고 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엥게 플레트는 2차 대전 막바지에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조국을 위해’ 전사했다는 군인들의 묘지가 있으며, 마을의 첫 번째 집으로 들어가는 석조다리 근방으로 펼쳐진 들판은 집시들의 야영지가 세워졌던 곳으로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폴란드 침공 기념물이라며 가져온 집시 캠프의 사진들을 연상시킨다. 가족이 몇 년간 거주했던 건물의 바로 그 옛 공간에 숙소를 잡았을 때에도 그를 사로잡은 것은 가족들과의 다감한 추억이 아니라 제국군에 복무하던 아버지가 막 하사관 승진을 눈앞에 두고 시골출신의 자신이 획득한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기기 위해 당시 통용되던 취향의 규범에 따라 꾸며놓은 가구들과 장식품들이 발산하는 중압감이었다.
영국으로의 이주는 이런 점에서 전쟁의 무게로 짓눌린 과거로부터의 도피였지만, 결국 그는 어디에 머물더라도 독일이 만들어낸 고통의 흔적들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다. 영국 동남부 노리치의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근현대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던 제발트는 자신의 과거와 고국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문학작품들로 펼쳐내는데, 이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44세부터 본격화된다. 그 자신이 산문시라고 명명한 첫 번째 작품 『자연을 따라. 기초시』1988를 발표한 이후, 제발트는 소설 장르라고 할 수 있는 『현기증. 감정들』1990, 『이민자들』1992, 『토성의 고리』1995, 『아우스터리츠』2001를 연달아 내놓는다. 이 4편의 소설작품들이 공유하는 전반적인 특징은 철저한 답사와 전문 연구서, 실제 기록물들에 근거한 사실적 고증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소회와 일화를 담고 있어 자전적인 에세이의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의도적인 변형과 허구적인 개입, 가상의 인물들을 주요한 모티브로 하고 있어서 픽션과 논픽션의 의도적인 모호함을 갖는다는 점이다. 또한 중간 중간 삽입되어 있는 사진, 그림, 도면, 도판, 지도, 원본 기록들은 언어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어떤 중단 앞에서 이미지가 나머지 몫의 말하기를 계속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소설형식을 따르기보다 충만한 현전을 위한 대리보충의 관계로 언어와 이미지를 엮어내고 있다. 구성적이고 형식적인 특징들 외에도 그의 작품들은 역사의 진행 속에서 망각되고 사라져가는 과거의 흔적들을 최대한 섬세한 그물로 잡아놓고자 하는 박물지의 성격을 지니는데, 그로 인해 근대문명사와 문학사, 예술사, 건축사, 자연사, 조류학과 곤충학, 어류학, 식물학, 원예학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들이 총 동원되고 있다.
이 네 편의 소설들 중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장 깊게 천착하고 파고든 작품은 『아우스터리츠』을유문화사, 2009다. 『현기증. 감정들』이 스탕달과 카프카, 카사노바 같은 앞선 세대 작가들에 대한 제발트의 애정 어린 탐구와 자전적인 성격의 기행문으로 엮여져있다면, 『이민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유들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상실감과 내면적 공허, 현실과의 괴리를 다룬다. 사유의 깊이와 폭이 가장 심원하게 펼쳐지는 『토성의 고리』는 제발트 자신의 인류 문명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인류의 역사를 자연사 안에 편입시킴으로써 계몽주의 이후 기술의 발전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전쟁 같은 몰락을 예고하는 허무한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허무주의적 시선으로 관찰한다. 2011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함으로써 제발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아우스터리츠』는 구조와 플롯에 있어 가장 소설적인 방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이전 작품들에서 다져진 산문시적인 문장구조와 어휘들이 만들어내는 차분하고 어두운 정조, 사물들에 대한 비수어린 세계관이 아우스터리츠라는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한다.
1인칭 시점의 독백적인 말하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1967년 늦여름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중앙역에서 화자인 ‘나’가 아우스터리츠라는 인물과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후 런던에서 그와 인연을 맺어오다가 1997년 9월에 파리에서 마지막 만남을 가진 것을 끝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나’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만남을 통해 아우스터리츠라는 인물의 비밀에 쌓인 삶에 다가가게 되는데, 아우스터리츠는 유년기에 잃어버린 기억으로 인해 정체성과 소속감의 혼란을 겪고 있으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안과 공포의 감정들에 자주 휩싸인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 대학의 교수로 건축문명사를 가르치던 아우스터리츠는 우연히 리모델링 공사를 위해 폐쇄된 리버풀 스트리트 정거장의 대합실에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자신이 어린 시절 어디로부턴가 이 역에 도착한 적이 있으며 이곳에서 자신을 입양하고자 하는 부부에게 맡겨졌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 아이는 혼자 옆쪽을 쳐다보며 벤치에 앉아 있었지요. 무릎까지 오는 흰 양말을 신은 그의 다리는 바닥에 닿지 않았고, 가슴에 안고 있는 배낭이 없었다면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내가 회상할 수 있는 한 처음으로 그 순간에 나 자신을, 반세기도 더 전에 영국에 도착해서 내가 이 대합실에 분명히 와 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낼 수 있었어요. 이것을 통해 내가 빠진 상황이란 많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기술할 수 없는, 내 속에서 느끼는 일종의 강탈이고, 수치와 염려, 혹은 당시 그 낯선 두 사람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다가왔기 때문에 말문이 막혔던 것처럼 그것에 대한 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었어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아우스터리츠』, 153쪽)
이후로 아우스터리츠는 자신이 1939년에 네 살의 나이로 유대인 어린이 호송 작전kindertransport을 통해서 프라하에서 런던으로 왔으며, 그곳에서 웨일즈 지방의 칼뱅파 목사의 집에 입양되었다는 정보들을 찾아내게 된다. 이를 통해 비로소 그는 자신이 왜 그토록 ‘정거장 마니아’라고 불릴 만큼 역사驛舍들과 철도 시스템에 매료되었는지,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토록 자주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으면서도 독일에는 한 번도 발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는지, 독일의 유럽정복과 유대인 수용소들과 관련된 자료들에 대한 관심을 금지했었는지, 건축문명사에 대한 남다른 열정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이후로는 연구범위를 넓히려 들지 않고 자신을 격리 혹은 방어하려 했었는지 깨닫게 된다. 부모와 친척들의 소재를 알기 위해 아우스터리츠는 프라하를 찾아가고, 주민 명부에 기록된 어머니의 주소에서 자신의 유모였던 베라 리샤노바를 만나게 된다. 그녀로부터 부모의 출신과 삶의 여정, 자신이 어린이호송열차에 타게 된 사연 등을 알게 된 아우스터리츠는 유대인 게토로 이송된 어머니의 행적을 쫓아 테레진을 찾아간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몰락한 도시가 되어버린 체코의 테레진과 과거의 흔적을 말끔하게 지워내고 깨끗하게 정비된 독일의 뉘른베르크와의 대조 속에서 여행은 마감되고 런던으로 돌아온 아우스터리츠는 히스테리성 발작으로 쓰러져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내가 느끼는 혼란의 근원을 찾아내었고, 모든 지나간 세월을 넘어 스스로에게 익숙한 삶에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 자신이 고립된 아이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그때 이후 나 자신에 의해 억눌려 왔지만, 이제는 강력하게 몰려오는 쫓겨난 존재와 지워진 존재라는 느낌 앞에서 이성은 속수무책이었어요. 가장 간단한 활동을 할 때, 신발끈을 묶을 때, 찻잔을 씻거나 주전자의 물이 끓기를 기다릴 때, 이 같은 끔찍한 불안이 나를 엄습했지요. 금세 내 혀와 입 안이 말라 버려서 마치 며칠 동안 사막에 누워 있는 것 같았고, 점점 더 숨이 가빠졌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목 아래까지 차올라서 온몸과 심지어 떨리는 손등에까지 식은땀이 솟았으며,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검은 선영으로 감싸여 있었어요.” (252쪽)
퇴원 후 두 번째 프라하 방문에서 아우스터리츠는 정치인사로 분류돼 위험에 처해있던 아버지가 홀로 피신했던 파리의 소재지를 알아내게 되었고, 이후 파리로 가서 그가 머물렀던 마지막 주소지를 실마리로 자료를 뒤지는 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나’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1942년 말쯤에 부친이 구르스 수용소로 이송된 기록을 전달받았다며, 자신은 남쪽의 피레네 산맥 부근에 있는 그곳을 찾아갈 예정이라고 알리면서 자신의 런던 집 열쇠를 맡기는 것으로 아우스터리츠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