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국민과 모든 사회는 예로부터 이상적 인간을 염원하고 형성해왔다. 이상적 인간은 한 나라, 한 사회의 도덕성과 문화의 이상理想을 상징하고 구현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문화 엘리트 또는 권력 엘리트와는 크게 구별된다. 유교 문명권에 속한 한국과 중국에서 선비와 군자가 이상적 인간으로서 받들어졌다면 근대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오네톰, 영국의 젠틀맨이 이상적 인간으로 여겨졌다. 동서를 가리지 않고 공통된 사실은 선비이건 군자이건, 오네톰이건 젠틀맨이건 모두 교양인이었다.
‘교양’이란 무엇이며 ‘교양인’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 물음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는 유럽의 경우 교양은 옛 그리스·로마의 고전 중심의 인문학적인 배움과 취향이며, 교양인은 고전에 밝은 사람이었다.
교양 이념의 원천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파이데이아(교양)와 후마니타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은 마음과 몸, 삶 전체의 반듯하고 조화로운 구현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그 실현을 파이데이아와 후마니타스의 지知를 뜻하는 인문학에서 찾았다. 그만큼 그드이 자각한 교양의 핵심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문제였다.
교양culture, education, Bildung이란 문자 그대로 ‘경작’ ‘교육’ ‘형성’을 뜻하며 결코 자명한 규범 혹은 이상, 영구불변의 보편적 원리가 아니다. 교양은 시공時空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조각탁마彫刻琢磨되고 자기 변모를 거듭한다.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 이래 인문학적 지知의 중심에는 철학과 수사학(문학)이 자리했다. 교양인이란 파우스트처럼 끊임없이 묻고 탐색하는 인간이다. 그 배움은 광장이나 살롱에서 나누는 담론을 통해 배양된다. 그러므로 교양인은 서재의 인간이 아니다.
인문학적 교양과 함께 교양인상으로 떠오르는 것은 세련된 몸가짐, 우아한 말씨, 예의 바른 사교인의 이미지이다. 지난날 전사戰士 집단이던 기사사회는 트루바두르(음유시인)의 세례를 받고 문학과 예술의 애호가가 되면서 귀부인을 받들고 교양 있는 귀족으로 새 삶을 누리게 되었다. 학예와 그 배움은 본래 ‘기쁨으로서의 지’였거늘 교양은 사람을 심미적인 취미와 놀이의 인간으로 만든다.
공자께서 선비, 군자를 일컬었던 ‘예(학예·교양) 속의 놀이’遊於藝의 진실이 유럽의 교양인들에게도 바로 적중한다.
일반교양general education이라는 표현 그대로 교양이 인간과 인간사를 둘러싼 모든 배움을 귀히 여길진대 교양인은 ‘모든 것을 갖춘 사람(몽테뉴), 삶의 스타일리스트가 되고자 한다. 교양인은 단순한 학식자도 단순한 문인도 아니며 더욱이 특정한 영역에 능한 전문가도 아니다. 교양인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함몰되는 지식인과도 구별된다.
유럽의 교양·교양인상은 흥미롭게도 유교사회의 선비나 군자의 위상과 거의 겹쳐진다. 그들도 경전經典에 밝고 사예四藝 놀이를 즐긴 ‘놀이’와 ‘예절’의 인간, 군자불기君子不器의 표현 그대로 모든 것을 갖춘, 갖추기를 바란 사람들이었다.
교양인의 고전적 초상은 그렇듯 교양을 개인의 자기 실현 또는 자기 완성을 위한 덕목으로 여기며 유연자재, 삶을 즐기는 고답적인 개인주의자로서 비쳤다. 그러나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떠올릴 것도 없이 교양인은 개개인 동시에 ‘사교적, 사회적’socialbles 존재이다.
그들의 인문학의 기본을 이룬 7자유학예는 자유인의 학예이며 자유를 위한 학예였다. 교양으로 인해 사람은 자유에 눈뜨고 자유로 인해 사람은 이웃과 사회를 의식한다. 그리스의 애지자愛知者는 폴리스 공동체를 사랑하는 자유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플라톤을 비롯한 많은 교양인들이 망명과 유배의 나날을 보냈으며 그들의 멘토였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어야 했다.
자명한 규범이거나 이상 혹은 불변의 원리가 아닌 교양이라는 텍스트는 역사의 진운에 슬기롭게 응답함으로써 새로 쓰이고 그 콘텐츠와 이념의 지평을 확대하고 심화한다. 유럽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에서 그렇듯 교양이 간단없이 타는 미완성의 거대한 심포니이다.
우리는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후예인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이 스콜라주의의 어둠을 파헤친 것을, 즉 그들이 치열한 르네상스 정신을 알고 있다. 유럽 전체를 종파 싸움으로 몰고 간 종교개혁 속에서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었던 에라스뮈스와 몽테뉴가 신구 양파의 성전聖戰에 맞섰던, 고독한 싸움을 알고 있다. 교양은 어떠한 십자군도 교회나 국가, 어떠한 도그마나 권위도 부정하며 그것들이 깔아놓은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자유롭다. 도그마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야말로 교양의 탁월성의 징표, 교양이 베푸는 최대의 공덕이자 축복이라고 할 것이다.
교양이 ‘정신의 육성’cultura animi, 키케로을 뜻하건대 교양인은 바로 마음을 ‘경작’cultura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교양의 토포스를 마련한다. 중세 가톨릭 교권의 체제 속에서 이룩된 가롤링거 르네상스와 12세기 르네상스, 그 토양 위에 세워진 대학이라는 교양 공동체, 그렇듯 정신을 기르는 교양은, 밭을 가는 노동과 함께 인간의 본성을 이룬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교양 지향적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교양인의 가장 향기롭고 훌륭한 요람은 아무래도 시문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문학적 교양이라고 하지만 그 핵심을 이룬 것은 시문학, 특히 라틴어 문학이었다. 유럽의 교양계층은 전통적으로 키케로의 문장,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읊으며 자랐다. 학교란 라팅어를 배우는 곳이었다. 대학 또한 라틴어 고전 중심의 교양공동체였다. 교양인이란 라틴어를 말하며 시문학을 애호하고 버젓한 문장가이기도 한 ‘문예공화국’의 주민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16, 17세기 이후 여러 나라에서 국어가 제자리를 찾고 국민문학이 형성된 뒤에도 지속되었다. 뛰어난 문장, 뛰어난 문예작품은 사람을 명석하게 하고 품위 있게 한다지만 라블레와 세르반테스 이래 근대문학은 애독자들에게 지상과 천상 사이를 훨훨 넘나드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고 ‘일탈’이라는 악덕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무대의 배우들처럼 세상의 악덕을 미덕으로, 미덕을 악덕으로 바꿔치기 하면서도 박수갈채를 받는 비상한 비법을 지녔다. 이미 인문학적 교양은 사람을 도그마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으며, 소설과 무대를 즐기면서 교양의 정념이 발산한 일탈의 미학은 가부장적 윤리에 등을 돌리는 한편 그 질서 위에 구축된 억압의 사회와 권력에 맞서기를 마음먹는다. 지난날 교양과 교양인이 의지했던 귀족사회는 서민사회와는 전혀 별개의 세계였다. 중세 말 베리 공의 『호화시도서』가 묘사했듯 귀족이 놀이의 인간인 데 반해 서민은 노동하는 인간이었다. 지배와 복종의 체계를 이룬 그들 사이에는 일상적인 말씨도 다를 만큼 인간적인 유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전통적 교양은 유전적으로 혈연을 이룬 귀족의 놀이문화와도 같이 체제에 의해 조절되고 보호받는 엘리트의 문화였다. 그러나 12세기 이래 시민의 문화, 시민적 교양은 체제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 비판적인 교양의 전형적인 토포스가 근대소설과 극장문화였다.
시민 출신인 작가와 무대 연출가들은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삼으면서 그 사정射程 내에서 귀족의 퇴폐와 탐욕을 즐겨 고발하고 그에 반항하는 민중의 순정과 진실을 추켜세웠다. 그러나 그 사랑 이야기와 풍자의 재미에 홀려 독자와 관객들은 문학과 무대가 분출하는 ‘파괴적 요소’는 미처 몰랐다. 소설과 극장은 시민과 귀족, 때로는 노동자도 섞인 폭넓은 독자층·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여론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담론하는 공중公衆을 낳았다.
그 공중 속에서 교양인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어디 그뿐일까. 문학적 진실이 바로 교양적 진실이 되었다. 근대 저널리즘의 발전 및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공중의 폭을 날로 넓혀 문학적 공중은 사상적·정치적인 공중으로 변신했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사회참가를 서슴지 않는 모반謀叛하는 교양인이 집단적으로 탄생했다.
교양인은 이제 더 이상 ‘선민’the elite이 아니었다. 사회 속에서 우애의 인간, 연대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789년 이래 여러 혁명을 겪으면서 시민계급과 함께 인권과 인민주권을 부르짖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사회주의자 및 유대인과 연대했다. 1920년대 30년대의 인민전선과 스페인 전쟁에서는 교양 있는 좌파로서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섰다.
교양이란 무엇이며 교양인이란 진정 누구인가. 이 물음은 고도의 기술산업 정보사회에서 존재의 망각, 인간 상실현상이 날로 격심해지고 있는 오늘날 더욱 더 절박한 문제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진정 오늘날 교양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