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말로는 학교를 마치려면 몇 년이 걸린다고 한다.
학교는 내가 상상한 것과 달랐다.
어쨌든 우리 선생님의 이름은 네겔리다.
네겔리 선생님은 바다가 스위스를 떠났다고 말한다.
바다가 떠나고 산이 왔다.
땅 전체가 오고 그리고 간다.
학교에서는 전 세계가 책에 있다.
만약 어머니가 우리 이야기를 쓴다면 아이들은 네겔리
선생님에게 그걸 배울 것이다.
나는 서커스로 돌아가고 싶다.
다른 아이들은 겁내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 역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건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나는 꽤 많은 단어를 외국어로 쓸 줄 안다. 하지만 쓰는 언어와 말하는 언어는 좀 다르다. 심지어 히츠 선생님조차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는 다르게 말한다. 과연 선생님이 우리가 배우는 것처럼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하다.
언니와 나는 우리의 언어로 말한다.
내 언어로 내가 쓸 수 있는 단어는 입맞춤뿐이다.
나는 매일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나중에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러 오면 그때 한꺼번에 줄 편지다. 나는 입맞춤이라고 쓰고 그림을 그린 다음 내 이름과 이모를 위한 두 번째 이름을 색연필로 적는다. 때로는 학교에서 배운 몇 마디를 쓰면 언니가 그 밑에 우리말로 번역해 준다.
어머니가 외국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 내가 전화로 네겔리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른다.
어머니는 항상 말한다. 그래, 그래, 참 좋다!
하지만 그건 전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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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것이 곧 진실은 아니다.”(앙리 마티스)
페터라니의 글은 두 번의 탈출에서 나온다. 첫 번째는 국가라는 감옥에서의 탈출, 두 번째는 가족이라는 게토에서 자신의 삶을 향한 탈출. 그러면 언어는? “혈관으 ㄹ흐르는 피의 언어”에서 배워서 익혀야 하는 외국어로, 가족과 고향의 언어에서 학교와 국가의 언어로, 말하는 언어에서 쓰는 언어로의 이주. 어머니의 언어에서 외국인들의 언어로의 이주.
다수의 언어로 발화되는 소수의 언어.
쓺으로써 거리를 유지하는 언어.
“어머니가 외국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이 책 110쪽)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 곧 배반의 길임을 안다.
그런데 작게 축소된 언어는 축소된 존재인가?
나는 쓴다.
“나는 삶을 위해서, 마치 미친 여자처럼 썼다.”(아글라야 페터라니, 한 인터뷰에서)
메데이아의 아이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희생한다. 어머니의 나라는 어머니의 언어와 어머니 자신으로 가득하다.
“아이는 폴렌타 속에서 끓는다, 왜냐하면 아이가 어머니 얼굴에 가위를 꽂아 버렸기 때문이다.”(125쪽)
집시와 서커스는 오래전부터 문학에 들장하는 대표적인 유랑자였다. 이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태생 외국인, 혈통뿐 아니라 정신까지, 문화와 기억 모두 타고난 외국인이며 모태 외국인인, 영원히 동화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불안한 신분과 언어를 가진 이방인들.
(<옮긴이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