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를 거슬러 오르다보면 지금의 우리 모습과는 다르지만 그 이전의 과거와도 다른 어느 순간을 만나게 된다. …학문, 교육, 정치, 행정에 이르기까지 뿌리깊게 베어있는 관념적 사회관, 지식인의 룸펜적 기질과 거대담론에 의한 사회 비판 버릇, 유행과 스타일에 대한 맹목적 집착, 현실과 동떨어진 여성주의와 이에 대응하는 일상의 보수적인 시각, 유교의 봉건성과 결합되었음에도 현대적인 사고로 둔갑한 문화교양주의, 취미론에 머물고 있는 예술에 대한 태도 등등. 우리의 현대사회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그래서 더욱 미심적은 부분들이 공유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을 ‘현대가 형성된 곳’이라고 말하거니와 시기로 말하면 1930년대이다. 그 곳을 바라보면 어색하고 촌스러움이 배어 있어 낯선 과거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꼼꼼히 들여다보면 현대가 굳건히 자리를 잡으면서 사라져버린 솔직한 현대인의 모습이 거기 있다.
현대가 시작될 무렵의 상황을 상상하기 위해 간단하지만 널리 알려진 두 개념축을 마련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나(주체)’와 ‘나에게 다가오는 다른 것(타자)’이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좋은 것(현대, 서구)’과 ‘낡은 나쁜 것(봉건, '통)’이라는 개념이다. 그 두가지 각기 다른 줄기는 서로 교차하면서 여러 가지의 가능한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예를 들면 ‘낡은 나’와 ‘새로운 남’을 가정하면 이에 대응하는 ‘나쁜 나’와 ‘좋은 남’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며, 이런 공식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듯이 필연적인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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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이야기하듯이 식민지 상황의 경제, 사회적인 억압과 이에 따른 식민문화 정책의 조작적인 측면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현대성을 향한 걸음은 자꾸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려야 했다. 오히려 서구화라고 불리는 문화적 대체를 통한 ‘발전의 차용’이 일상화된 곳에서 전통에 근거한 문화적 반발(그것은 현재까지 민족주의의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씨받이>에서 <서편제>에 이르기까지, 더 크게는 80년대의 민족문제의 해법에서부터 최근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류에 이르기까지)은 오히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문화적 반발을 ‘우리 것’으로 아낌없이 받아들인다면 어쩌면 현대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현대 mondern’란 특정한 역사 속에서 발전해온 특정한 삶의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 특정한 역사란 ‘우리의’ 역사가 아니며, 특정한 삶이란 ‘우리’의 삶을 규준으로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성이란 서구의 계몽사상가들이 객관적 과학, 보편적 도덕률, 자율적 예술이 그 자체의 논리에 따라 발전되도록 하기 위해 구사한 독특한 지적 노력(하버마스)일 뿐이다. 현대란 서구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혹은 삶의 변화)을 지칭하기 위한 용어이며 따라서 그런 현대는 우리에게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일단은 ‘우리’라는 현대의 사회공동체가 인류적 보편성으로서 현대를 체험하고 있다는 모순된 가정은 접어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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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대화 과정에 대한 피치못할 오해는 현대화와 서구화를 등치시켰을 때 나타나는 것 뿐 아니라 오히려 현대화가 곧 서구화가 아니라는 강변 속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서양에 대한 오해는 서양의 동양에 대한 오해만큼이나 뿌리깊다. 서양은 동양의 반대편 쪽에 있는 국가들이 아니다. 서양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발전된 결과이며 산업화, 도시화, 자본주의화된 사회를 가리키는, 현대적인 사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서양은 동시대적이며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사회현상을 일컫는 하나의 개념이다. 그렇게 본다면 현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등치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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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현대에 대한 개념을 말하기에 앞서 현대를 ‘현재와 유사한 무엇’으로 가정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현대의 상은 현대와 동시대적 유사성을 지니는 그 어떤 지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과거의 일상성에 대한 주목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그 일상성의 재구에 의한 ‘현대적 개념’이 새롭게 찾아지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현대에 대한 상은 시작된다. 스스로 가늠하기 어려운, 조각조각들로 들씌워져 있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삶의 조건들이, 그리고 그 조건들을 형성하기 위한 일상의 과정들이, 현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현대이다. 따라서 현대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그 삶의 조건과 마찬가지로 누더기일 것을 요구한다. 물질적인 삶의 형태와 정신적인 삶의 변화가 서구화주의의 이식된 혹은 강요된 결과에 의한 것일 뿐이더라도 그 누더기 또한 분명한 색깔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비록 누비고 접혀져 재봉선이 가물거리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