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이 군사에 미친 영향, 1789~1840년
…프랑스와 영국에서 18세기 말엽에 구체제의 패턴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요인은 인구증가였을 것이다. 유럽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주로 치명적인 각종 감염증의 발생률이 낮아짐에 따라 인구가 늘었던 것 같다.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1697년에 2만6,481명이던 인구가 1789년에 4만9,948명으로 늘었는데 그 가운데 20%가 빈곤층이었다. …
런던의 군중을 반동으로, 파리의 군중을 혁명으로 몰아간 정황의 차이가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그 후의 전개에 비추어보건대 그 차이는 인구증가와 도시 확대로 야기된 새로운 문제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이 서로 다른 대응을 낳았다. 그 차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무장한 남자들을 수출하여 유럽 곳곳에 제국을 세웠다. 반면에 영국은 (무장하거나 무장하지 않은) 남자와 물자를 수출함으로써 시장을 바탕으로 국력을 기르는 시스템을 수립했다. 그리고 프랑스인이 수많은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이 시스템은 프랑스인들이 이룩한 어떤 성과보다도 견고했다.
인구압을 완화하는 프랑스의 방식
인력의 과잉과 경제적으로 생산성 있는 일자리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프랑스가 취한 혁명이라는 해결책은 1794년까지는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다가,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전국 삼부회로부터 국민의회가 결성되어 왕권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 이루어진 1789년6월부터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하며 벨기에와 라인란트로 전진한 1793~1794년까지의 몇 년 동안, 구체제로부터 이어져온 육군과 해군에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변화는 혁명의 대의가 성공을 거두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변화로 인해 육군이 혁명군으로부터 구체제를 방위할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프랑스 육군의 병사들, 특히 파리 시내와 그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이 그토록 갑작스럽게 수도의 주민들을 끓어오르게 한 혁명적 열광에 감염되었다는 점이다.
…병사들 사이에 새로운 사상이 침투하는 것을 분명히 촉진한 두 가지 상황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주둔지에서 프랑스군의 장교들은 하급 장교의 경우도 대부분 자기 부대의 병사들과 함께 지내지 않고 일상적인 훈련이나 그 밖의 일과를 하사관에게 맡겨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병사들을 일상에서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귀족계급에 대한 혁명적 공격에 공감하기 쉬운 하사관들이었다. 이들은 귀족들의 인사상 특권에 가로막혀서 장교로 승진할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
육군 내의 정치적 견해가 일반 사회의 정치적 견해와 통합되도록 촉진한 두 번째 사정은, 육군의 전투단위가 외부와 격리된 병영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각 도시의 시가지에 숙영하면서 비번일 때는 도시사회의 하층민에 섞여서 생활했다는 점이다. 때로는 봉급을 보충하기 위해 수공업 직인의 일을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
그러나 전장에서는 프랑스 병사들도 구체제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두고 온 시민사회와 아주 빈약한 연결고리를 유지한 채 외부와 차단된 자치적인 사회를 이루게 된다. 1794년 이후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이야말로 나폴레옹을 등장시킨 조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1789~1792년의 상황에서는 병사들과 도시 혁명가들 사이의 거리가 거의 업어지다시피 했고, 그것은 루이 16세의 왕정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
…
혁명의 첫 번째 국면에서 새로운 군사력의 적은 국내 반혁명세력이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국내의 적과 손을 잡고 혁명파를 공격해온 1792년 4월 이후로 프랑스 군대의 역할과 성격은 다시 한 번 변용되었다. 한편으로 부르주아 의용병으로 국민방위군을 편성한다는 방침은 더 넓은 범위의 프랑스 국민을 무장시킨다는 방침으로 바뀌어야 했다. 혁명 지도자들이 파리의 하층계급에 더욱 의존하게 됨에 따라, 이 같은 방침의 변화는 그들이 계속 권력을 유지하도록 보장해주는 지극히 현명한 조치로 여겨졌다. 다른 한편으로 국외의 적에 대해서는 전국민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구체제로부터 이어받은 정규군과, 이와는 별도로 의용병으로 구성된 혁명군을 굳이 구별하는 것은 국내의 적이 아니라 외국의 적에 맞설 때는 무의미했다. 따라서 국민공회는 1793년 2월에 법령을 정하여 정규군과 의용군을 통합했다. …
이렇게 해서 옛 육군과 혁명군 사이의 기본적인 연속성은 유지되었다. 그리고 옛 육군은 저 유명한 1793년의 국민총동원령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해 8월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프랑스 국민은 군복무를 위해 징발된다. 젊은 남성은 전선의 전투부대에 참여하고,
기혼남성은 무기를 만들거나 군수품을 수송하며, 여성은 천막이나 의복을 만들거나 병원
에서 복무하고, 어린이는 낡은 아마포로 붕대를 만들며, 노인은 광장에 나가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의 단결과 국왕에 대한 증오를 선전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국가를 위해 군사적 봉사를 해야 한다는 혁명의 원리를 이보다 더 확실하게 선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법령의 단호한 문구를 그대로 실행하려는 노력은, 종종 대혼란을 수반하긴 했지만 대단히 정력적으로 추진되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성공에는 정치적 이상이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징병이라는 법률적 형식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국민총동원이 그토록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시민사회가 흉작과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전반적인 경제불황으로 인해 극도의 빈곤과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이 확산되어 있었으므로 찢어지게 가난한 청년들은 징병 대상자가 되면 기꺼이 입대했다. …
…처음에 몇 차례 승리를 거둔 후 혁명군은 외국으로 이동했다. 그 후 혁명군의 유지비용은 주로 프랑스 국경 밖에 사는 사람들이 부담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국내에서는 다시 경제가 회복되었고,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시장체계의 복원이 가능해졌다.
이것이 1794년까지의 대략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시민사회가 비교적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는 전망이 보이기 시작하자, 위기가 한창일 때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혁명 테러와 가격통제, 무력에 의한 사적 소유권 침해에 대해 강력한 반동이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파리에서조차 군중들의 열광적 분위기와 에너지가 사라졌다. 경제불황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 남자들이 대부분 입대하여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위기에 처한 정치가들이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한 번 군중행동이라는 요정을 불러내려고 해도, 이미 예전과 같은 힘과 열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1794년 7월에 로베스피에르의 동료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파리의 군중에게 호소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
인구압을 완화하는 영국의 방식
…
그레이트브리튼 섬이 어떻게, 왜 산업혁명의 요람이 되었는지를 연구해온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영국의 오래된 경제적 균형상태를 뒤엎은 중요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 인구증가였다는 주장이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구증가는 한편으로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국내시장의 확대를 가져옴으로써, 새로 발명된 기계(면사를 뽑아내는 뮬 방적기든 철광석을 제련하는 용광로든)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켰다. 이 전체적인 발전과정에 있어서 명화 등의 원료를 해외에서 수입하기 위해서든 상품을 국내외에 유통시키고 재유통시키기 위해서든 값싼 수상운송은 꼭 필요했다. 우선 맨체스터에서 싹트기 시작한 면직물공장에 석탄을 실어 나를 수 있게 해준 브리지워터공의 운하(1761년 개통)는 맨체스터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이 유료 운하가 큰 돈을 벌어들이자 영국에서는 열광적인 운하 건설 붐이 일었고, 그 열기는 1790년대까지 이어졌다.
…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육해군의 징병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원이 최고수준에 이르렀던 1814년에 육해군의 병적에 올라 있던 인원은 약 50만 명으로 당시 영국의 경제활동인구 전체의 4%였다. 육군에 입대한 병사 중에는 가난한 스코틀랜드 고지 출신의 비율이 특히 높았고, 해군의 경우에는 연안 항구도시 출신이 많았다. 이 항구도시들에서는 신체가 멀쩡하면서 일정한 주거나 직업이 없는 성인 남자를 강제 징병관이 닥치는 대로 붙잡아갔다. 이것은 18세기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정치적 불만이 격화되기 쉬웠던 이 두 지역에서 많은 실업 및 반실업 상태의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로 1794~1795년에 프랑스의 파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일이었다.
…스코틀랜드 고지에서는 주민을 군대에 보냈고, 얼스터 지방에서는 노동력의 일부를 해외로 보냈으며, 아일랜드 남부에서는 목초지를 경작지로 바꾸었던 것이다. 한편 상업적 농업과 ‘집약농업’이 훨씬 더 진전되어 있던 잉글랜드에서는 빈민법 행정의 개선이 인구증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대응책이었다. …스피넘랜드 제도는 영국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후 잉글랜드 내부의 인구이동은 경제적 기회와 임금의 차이를 좇아 이루어졌고, 이러한 인구이동은 다시 18세기 후반의 인구증가에 대한 영국 사회의 특징적이고 근본적으로 중요한 자기적응방식에 기여했다. 그것은 상공업 부분에서 경제적이고 생산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었다. 신기술을 도입하면 제품가격이 낮아지고, 가격이 낮아지면 시장이 확대되고, 시장이 확대되면 생산의 규모도 커지고, 생산규모가 커지면 더욱더 많은 공장노동자, 운송노동자, 그리고 교환경제를 원활히 움직이기 위한 다종다양한 용역노동자가 필요해졌다. 이 성장 과정은 누군가가 작성한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었으며, 대(對)프랑스 전쟁 중에는 심각한 경제위기가 몇 차례나 경제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영국 정부와 사업주와 경영자들은 이내 활동을 재개했고 위기는 사라졌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창조적인 영국인의 성향으로 인해 조기에 재난을 극복했던 경우가 특별히 세 차례 있었다. 1797년에 영국인들이 불환지폐를 받아들인 일, 1799녕에 소득세 부과를 인정한 일, 그리고 1806년 이후 유럽 대륙에 대한 영국 제품의 판로가 심하게 제약당하자 무역사들이 라틴아메리카와 레반트에 새로운 수출시장을 개척한 일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