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국민들의 형성
국제정치와 국내정치가 이 시대 동안 서로 밀접히 결부되어 있다고 할 때 그 둘이 서로 묶이게 되는 가장 명백한 기반이 19세기 중반에는 아직 ‘내셔널리티의 원칙’이라고만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내셔널리즘’이라 부르는 그것이었다. 그러면 1848년부터 187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국제정치는 어떤 것이었던가? 서유럽의 전통적인 역사 서술은 이 점에 관하여 거의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다. 즉 여러 국민국가nation-states들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유럽 세계 창출이 당시 국제정치의 중심과제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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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의 봄’이었던 1848년은 국제적 시각으로 볼 때 명백히,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들의 자기 주장의 시기였다. 아니 그보다는 서로 경쟁하는 민족들이 자기 주장을 하는 시기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일인, 이탈리아인, 헝가리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등은 체코인, 크로아티아인, 덴마크인들과 마찬가지로, 독립할 권리와 그 민족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묶는 통일국가를 형성할 권리를 그들을 통치하는 압제자들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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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밖에서도 국민국가의 건설은 극적으로 눈에 두드러졌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분열에 반대하여 아메리카 합중국의 국가적 통일성을 지키려는 시도가 아니고 그 무엇이었겠는가. 또한 메이지 유신은 새롭고 긍지 높은 ‘국민국가’가 일본에 출현했음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겠는가. 배젓Walter Bagehot, 1826~1877이 ‘국민국가 형성’이라고 불렀던 사태가 세계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그것이 이 시대의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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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가 형성되어간 이 시대에는 그것은 ‘국민들’nation을 주권적 ‘국민국가’nation-state로 개편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한 개편은 논리상 필연적일 뿐 아니라, 필요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국민국가는 ‘국민’의 성원이 정주定住함으로써 지역이 확정된, 한결같이 일관된 영토를 가지는 것이었다. 또 ‘국민’이란 그 과거의 역사, 공통의 문화, 그 인종적 구성, 그리고 더욱더 그 ‘언어’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함축적인 의미에는 논리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일련의 여러 기준에 의하여 다른 집단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하는 서로 다른 인간집단이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또 그것은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된 일이지만, 그것이 19세기에 ‘국민성’nationhood이라고 간주되었던 바로 그것을 함축적으로 의미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부인 못할 일도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 하물며 그러한 인간집단 - 마침 한 국가의 판도가 그 국민들의 정주지와 일치되어 있었던 기성국가의 경우는 별개의 사실로 치고 - 이 19세기적인 영역국가territorial states를 구성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그러하다. 비록 약간의 오래된 영역국가 - 잉글랜드, 프랑스, 에스파냐, 포르투갈, 그리고 아마도 러시아까지 - 들을 큰 무리 없이 ‘국민국가’라 규정할 수 있었다고는 하지만 19세기적인 영역국가란 비교적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었던 것이다.
하나의 일반적 강령으로서나마 국민국가가 아닌 것 중에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고 하는 소망은 그 자체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의 시기에 국민 및 ‘내셔널리즘’의 성립과 국민국가의 창출을 더욱 명확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유럽은 두 그룹, 즉 옳건 그르건 간에 그 국가 내지 국가를 세우려는 열망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민족들’과 그 점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민족’의 두 갈래로 갈려 있었으니 말이다.
…프랑스, 잉글랜드, 에스파냐, 러시아는 그 나라 사람들이 곧 프랑스, 영국 등의 국가와 동일시될 수 있었으므로 틀림없는 ‘국민’이었다. 헝가리와 폴란드가 ‘국민’인 것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안에서나마 헝가리 왕국이 별개의 실체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며, 폴란드국은 18세기 말에 망하기 전까지 오래도록 존재했기 때문에 그러했다.
독일이 국민인 까닭은 그 수많은 공후국들이 비록 단일한 영역국가로 통일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이른바 ‘게르만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을 오래도록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 독일연방을 형성했다는 것, 그리고 배운 것이 있는 모든 독일인들이 같은 문자와 같은 문학을 공유해왔다는 것 등의 이유들 때문이었다. 또 이탈리아는 정치적 통일체는 아니었지만, 그 엘리트층에서는 아마도 가장 오래된 공통의 어문語文 문화를 가졌기 때문에 하나의 국민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 국민의 성립 여부에 관한 ‘역사적’ 기준에서는 지배층 또는 교육받은 엘리트층의 제도와 문화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그들의 제도와 문화가 일반 민중의 그것들과 일치하거나 적어도 명백하게 상충하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서 그러하다. 그러나 내셔널리즘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적인’ 입론立論들은 이와는 매우 달라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또 민족적·혁명적인 내용의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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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의미의 국민적 독자성의 기초는, 반드시 당장 식별될 수 있는 육체적 외견外見의 차이라는 의미의 ‘인종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으며, 또 언어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발생한 아일랜드인(그들의 대부분은 영어를 사용했다)의 운동, 노르웨이인(그들의 성문언어는 덴마크어와 별로 뚜렷이 구별될 것이 없었다)의 운동, 그리고 핀란드인(그 내셔널리스트들은 스웨덴어도 사용하고 핀란드어도 사용했다)의 운동은 기본적으로 언어적인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이 아니었다. 또 문제가 문화적인 경우라도, 그러한 요구는 이른바 ‘고도문화’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민족들이 그러한 고도문화라고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한 요구들은 오히려 구전문화 - 노래, 민요, 서사시 등 - 와 민중folk - 서민, 즉 사실상 농민들 - 의 습속과 생활양식에 입각하고 있었다. ‘국민적 부흥’의 제1단게는 민중적 유산을 수집·재발견하고 그 속에서 민중적 긍지를 찾아내는 일이었다(『혁명의 시대』, 제14장 참조). 다만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정치성이 없었다. 이는 흔히 있었던 일로, 그러한 일의 선구자는 발트 해 연안에서 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농민들의 민화와 고래의 풍습을 수집했던 루터파 독일인 목사들과 지성적인 향신들 같은 교양있는 외구구 지배층 또는 엘리트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아일랜드인들이 민족주의자가 된 것도 그들이 (아일랜드 전설의) 소요정小妖精, leprechauns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어찌하여 내셔널리스트(즉 민족주의자)이며, 또 얼마만큼 내셔널리스트였던가 하는 데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형적으로 ‘비역사적’ 내지 ‘준準역사적’인 민족이 역시 ‘소규모’의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세기 내셔널리즘은 지금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어떤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국민국가’의 주창자들로서는 국민국가란 단순히 국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즉 궁극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경제와 기술, 국가조직과 군사력을 발전시켜나갈 만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 다시 말하면 적어도 어느 정도는 큰 국민이라는 것을 전제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민족은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사실상 부르주아적인 사회발전의 ‘자연적’ 단위라야 했던 것이다.
‘독립’ 못지않게 ‘통일’이 그 원리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통일의 당위성에 관한 역사적 논의가 존재하지 아니한 곳에서도 - 예컨대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 가능한 한 하나의 강령으로서 통일문제를 공식적으로 표방하였다. 사실 발칸 반도의 슬라브계 민족들이 그들 스스로 하나의 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참고할 만한 증거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이나 현실이 아닌 ‘일리리라’(국)를 염두에 둔 ‘유고슬라브’국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스니아인, 마케도니아인, 그리고 그 밖의 인민들을 통합하는 국가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고슬라브 내셔널리즘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으로서의 그들 감정과 상충·갈등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드럽게 표현해서 상충·갈등인 것이다.
‘여러 국민의 유럽’Europe of nationalities을 가장 웅변적으로 주창한 전형적인 인물인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는 1857년에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유럽 지도를 내놓았는데 그것은 11개의 국민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확실히 분명한 것은 마치니가 생각한 ‘국민국가’는, 우드로 윌슨이 1919~1920년에 베르사유에서 민족의 원칙에 의거한 유럽 판도의 재책정을 주재했을 때 제시했던 유일한 체계적인 구상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윌슨의 유럽 지도는 26개국 내지 (아일랜드를 포함시키면) 27개국의 주권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윌슨의 기준 그대로 한다면 몇 개의 국가가 더 생겨날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마치니의 경우, 소수민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들은 형태나 성격이 분명치 않은 어떤 자치와 같은 것을 허용받거나, 그것마저 없이 연방제나 그 밖의 방식으로 자립할만한 국민국가에 통합되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이때에 스위스를 사부아, 티롤의 독일어권, 캐른텐, 슬로베니아와 통합시킬 것을 제안하는 사람은 이를테면 합스부르크 제국이 민족 원칙을 짓밟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마치니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국민국가를 진보의 개념과 결합시켜 양자를 동일시한 사람들의 가장 단순한 논법은 소수의 후진민족에게, ‘실재實在하는’ 민족으로서의 성격을 부인하거나, 역사의 진보에 따라 그들은 더 큰 ‘실재하는’ 민족 내부의 한 지방적 특질 정도의 것으로 되고 말아야 한다고 논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어떤 문화민족Kulturvolk에 동화시킴으로써 실제로 소멸시켜버려야 한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이었다.…
…알자스가 문제가 된 것은 또 하나의 대국민국가 - 독일 - 가 그들의 복속服屬을 요구했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나아가 그와 같은 소규모 언어집단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거리낌없이 모국어의 소멸을 기대하기까지 한 실례도 여럿 있었다. 많은 웨일스인들은 19세기 중반 이 문제를 체념하고 있었고, 일부 웨일스인들은 그것이 뒤떨어진 지방에 대한 진보의 침투를 촉진시킬 것이라 하여 환영하였다.
이와 같은 거론에는 반反평등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깔려 있고, 또 그보다도 훨씬 강한 자기 변호가 깔려 있다. 어떤 민족들 - 그러한 논자論者 자신이 속하는 나라도 거기에 포함되지만 수가 많고 튼튼한 지위를 확보한 민족들 - 은 이겨서 남을 지배하도록, 혹은 (다윈주의적 용어를 좋아하는 논자의 표현을 빌리면) 생존경쟁의 승리자가 되도록 역사에 의하여 그 운명이 정해져 있고, 다른 민족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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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족적 감정이나 민족적 충성심(민족이 국가를 이루게 되었건 그 반대이건 간에)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네이션’이란 자연발생적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산물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운 것이었다. 아니, 비단 새로울 뿐 아니라 사실 ‘네이션’은 새로이 건설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국민적 통일성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가 결정적 중요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 제도란 무엇보다도 먼저 국가state를 의미했으며, 특히 국가적 교육, 국가적 고용, 그리고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병역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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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큰 변화는 초등교육 분야에서 일어났다. 초등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읽고 쓰기와 산수의 기초를 가르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도들에게 사회의 가치(여러 덕목, 애국심 등)를 심어주는 데 있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종전에는 세속적 국가가 등한시했던 분야이며, 이 초등교육의 성장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이 일은 영국에서 1867년의 선거법 개정 3년 뒤에 국립 초등교육제가 확립되었던 사실, 또 프랑스의 제3공화국 아래에서 최초의 10년 동안 초등교육제도가 크게 확충된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이 진전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으니, 1840년부터 1880년대 사이에 유럽의 인구가 33퍼센트가 늘어난 데 비하여 취학아동수는 145퍼센트나 늘어났다. 비교적 학교 교육이 발달된 프로이센에서도 1843년부터 1871년 사이에 초등학교 아동수가 50퍼센트나 늘어났다. 하지만 이 시기에 취학아동수가 가장 빨리 늘어난 나라가 이탈리아였던 것은 비단 이탈리아가 교육 면에서 뒤떨어져 있었던 탓만은 아니었다.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무려 460퍼센트나 늘어났는데, 이탈리아 통일 이후 15년 동안만도 초등학교 취학아동수는 2배가 되었다.
새로운 국민국가에서는 이러한 교육제도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왜냐하면 이러한 교육제도를 통해서만 ‘국어’(일반적으로 그 전부터 민간의 개인적 노력으로 형성되고는 있었다)가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쓰고 대화하는 데 사용되는 언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몇 가지 용도에서 그러했다. 또 여기서 국가기관의 유관有關부분을 통제하려는, 예컨대 그들 자신의 언어로써 학교 교육을 한다든가, 행정상의 공용어로서 그들 자신의 언어를 사용한다든가 하는 ‘문화적 자치’를 쟁취하려는 투쟁과 같은 민족운동의 결정적 중요성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부르주아지가 되면 자기네의 옛 언어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들 주변의 귀족계급과 중산계급의 언어, 즉 영어, 프랑스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헝가리어, 그리고 특히 독일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계에서의 유대인은 민족주의자라 할 수 없다. 그들이 ‘민족어’를 중히 여기지 않았던 점은, 그들이 고유한 영토를 가지지 못한 점과 아울러 유대인을 하나의 ‘국민’nation이라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문제는 중산계급과, 후진적 내지 종속적 지위의 민족 출신인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공용어’를 배워서 쓰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위세 있는 자리에 특권적으로 채용되는 일에 특히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강제적인 이중 공용어 체제(체코인의 경우처럼)가 독일어밖에 모르는 보헤미아의 독일인에 비해 유리한 출세의 기회를 실제로 그들에게 주고 있었던 경우에도 그러하였다. 또 크로아티아인이 오스트리아의 해군장교가 되는 데 무슨 이유로 소수언어인 이탈리아어를 배워야만 했단 말인가?
나아가 국민국가가 형성됨에 따라, 그리고 진보적인 문명 아래서 공적 지위나 직업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또 학교 교육이 더 일반화됨에 따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골사람들이 도시로 옮겨가 도시화함에 따라 이러한 반감은 한층 더 널리 그 폭을 더해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학교나 고등교육기관들이 교육에 쓰는 언어를 하나로 정하여 강요하는 것은 곧 하나의 문화, 하나의 국민성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어떤 정부가 그 정부의 바탕이 되어줄 국민을 형성하는 데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법이다. 그런데 여러 정부들이 이러한 학교 교육을 마자르화, 독일화, 또는 이탈리아화를 위한 도구로서 체계적으로 이용한다고 하면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한 내셔널리즘이 어떤 고유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에서 동화同化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열위劣位의 소수민족임을 감수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던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 내셔널리즘counter-nationalism을 자동적으로 낳게 했다는 것은 내셔널리즘의 역설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 자체 안에서 이민 공동체는 주로 시(市 ) 선거의 후보자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그 존재 자체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가장 광범하고 뿌리 깊은 정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지만 미국 시시내티나 밀워키의 독일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와 같이,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은 아직도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낼 수 있는 문제, 그리고 그것과 양립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졌다. 여러 국민의 세계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될 것이며, 자유주의 세계는 여러 국민들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이 양자간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