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과거제도
한국에서는 이미 고려시대인 958년 이래 관리등용제도로서 과거가 정기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고급관리로 나가는 방법으로 음서蔭敍제도, 즉 고관 자제들을 등용하는 제도가 큰 의미를 가졌다. 과거의 비중은 그만큼 낮았던 것이다. 조선왕조를 연 이성계는 그가 즉위한 해에 과거 실시를 선언하였고, 다음해에 조선시대의 첫 과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그 후 차차 제도를 정비해서, 1894년 폐지될 때까지 500년에 걸쳐서 과거가 실시되었다.
과거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문관을 선발하는 문과,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 전문 기술자를 선발하는 잡과雜科가 그것이며, 무과는 고려시대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문과가 가장 중시된 것은 중국과 똑같다.
문과에는 3년에 한 번 실시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 외에 여러 가지 명목의 문과가 있었다. 국왕의 즉위나 세자 탄생 등을 명목으로 한 것들이 그것이다. 식년문과는 지방마다 실시되는 향시鄕試, 수도에서 실시되는 회시會試, 왕이 친림親臨하는 자리에서 실시되는 전시殿試 세 단계로 시험이 실시되었고, 전시 합격자의 정원은 33명으로 규정하였다. 33명의 합격자는 그 성적에 따라 을과乙科 3명, 병과丙科 7명, 진사進士 23명으로 순위를 정해서, 을과 제1인을 장원壯元이라고 불렀다. 갑과甲科를 만들지 않은 것은 조선 초기에 보이는 명나라에 대한 예우 때문이었다. 1467년부터는 갑·을·병의 세 순위로 고쳐지고 진사의 칭호는 다음에 논하는 바와 같이 문과 예비 시험에도 쓰이게 되었다.
문과와는 달리 이 예비단계 시험으로서 사마시司馬試 제도가 있었다. 정규 사마시도 3년에 한 번 실시되어, 지방마다 1차 시험과 수도(서울)에서의 2차 시험을 실시해서 합격자를 결정했다. 사마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문학의 재능을 보는 진사시進士試와 경서 이해의 재능을 묻는 생원시生員試가 그것이며, 양쪽 모두 정원이 100명이었다.
하버드대학의 와그너Edward W. Wagner 교수에 따르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 문과 합격자는 1만 4592명, 필자의 계산으로는 1만 4333명이다. 유성춘·희춘 형제는 이 1만 4000명 중 두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 두 사람의 어깨에는 그들을 둘러싼 많은 친척들의 희망이 얹혀 있었다.
중국과의 비교
미야자키의 견해를 참고하면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중국과 조선의 과거를 비교해보기로 한다. 조선 과거의 최대 특징은 특정한 소수 가문에서 많은 합격자를 배출했다는 점이다. 가문이란 애매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우선 최대의 친족집단 단위인 동족집단이라고 보기로 한다. 동족집단이란 성씨와 본관을 같이하는 부계 혈연집단을 일컫는다. 유희춘의 경우, 그는 선산을 본관으로 하는 유씨, 즉 선산 유씨란 동족집단의 일원이다.
조선왕조에는 300명 이상의 문과 합격자들을 배출한 동족집단이 다섯이나 존재했다. 왕족인 전주 이씨 843명을 비롯해서 안동 권씨 354명, 파평 윤씨 330명, 남양 홍씨 317명, 안동 김씨 304명이 그들이다. 이들 다섯 집단만으로도 모든 문과 합격자들의 15퍼센트를 차지한 셈이다.
또한 10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동족집단으로 범위를 넓히면 38개 집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문과 합격자들의 합계는 4502명으로 전체 합격자들의 반수를 넘는다. 조선시대 동족집단이 얼마나 존재했는가 알 수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3000여 개의 성씨를 기준으로 삼으면 약 1퍼센트이 종족집단들이 모든 문과 합격자의 반수 이상을 배출한 셈이다. 극심한 과점寡占 상태이며, 수십 명의 문과 합격자들을 배출한 종족집단을 찾기 어려운 중국의 명·청 시대 상황과 비교하면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동족집단과 중국의 종족을 단순히 비교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양쪽 모두 한 조상을 모시는 부계 혈연집단이긴 하지만 그 조직 원리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친족집단의 범위를 조금 좁혀보자. 예컨대 조선시대에 한 인물을 조상으로 해서 그 남계男系 자손들만으로 구성된 집단(이는 보통 문중이라고 불린다)을 단위로 보아도 100명 이상의 문과 합격자들을 배출한 가계는 3개가 알려져 있다. 박소(반남 박씨)의 자손 129명, 서성(대구 서씨)의 자손 120명, 홍인상(풍산 홍씨)의 자손 111명이다. 수십 명의 문과 합격자들을 배출한 문중이라면 흔치는 않아도 그리 드문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바로 명문의 자격이었다.
뛰어난 인재를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등용한다는 원래 과거의 취지에서 보면 이러한 사태는 꺼림칙한 일이었다. 미야자키의 눈에는 그것이 허술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 원인을 살피기 전에 좀 더 조선시대 과거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시대에 상응하는 중국 명·청 시대의 전시殿試 합격자 수는 5만 1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인구수를 보면 조선시대 인구는 400만에서 1200만 명 정도로 증가했고, 중국의 인구 추이는 명초 6000만 명에서 청말 3억이며, 조선의 인구수는 중국의 20분의 1 정도 규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구 비율로 보면 조선시대 문과 합격자 수는 중국의 다섯 배나 많았던 것이다.
중국의 문과는 정원이 결정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 회의 문과 최종 합격자 수는 300명 정도였다. 인구 비율로 보면 조선의 반 정도이며, 이것이 조선의 합격자 수가 많아진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에서는 정규 문과 외에 임시 시험이 빈번하게 실행된 점이다. 그 결과 1만 4000여 명의 합격자 중 정규 식년문과 합격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40퍼센트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명·청 시대 내내 임시 문과는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시대 과거는 중국과 비교해서 소수의 혈연집단에 의한 과점 상태, 인구 비율로 볼 때 많은 문과 합격자 수 등,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실로 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실시 일정이 애초에 결정되어 있는 식년문과와는 달리, 임시로 실시되는 문과는 일정 공표에서 시험 실시까지가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게다가 임시 문과에서는 지방마다 실시되는 초시初試 없이 처음부터 서울에서 실시되는 경우가 많아 지방 수험생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불리했던 것이다. 채점 역시 짧은 기간에 이루어져서 보통 시험 당일에 결과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엄격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 때문에 특히 세력 있는 가문들에게는 임시 문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같은 과거제도를 채용하면서도 조선과 중국은 그 양상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과거와 양반
조선시대 과거는 이렇게 허술한 면들이 있었다 해도, 널리 인재를 뽑는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기존 연구에서 거의 간과된 점으로 새로이 주의를 환기시켜야 할 부분이다. 필자의 집계에 따르면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동족집단은 834개다. 그중 한 명밖에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집단이 325개 존재했다. 또 15~16세기를 중심으로 문과 합격자들 중에는 본관을 알 수 없는 자들이 많이 확인된다. 이들은 본인이 소속되는 동족집단을 아직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관이 분명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451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스스로가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처음으로 동족집단을 형성한 존재, 즉 새로운 동족집단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수치들은 이름 없는 가문에서도 문과 합격자를 계속 배출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즉 많은 문과 합격자를 배출한 집단들이 존재하는 반면 좁기는 하지만 과거를 통해서 입신출세하는 길도 결코 막혀 있지 않았다. 유성춘·희춘 형제의 경우를 보자. 그들의 생가는 그들 아버지의 행장行狀을 보면 결코 무명 가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성춘·희춘 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쾌거가 없었더라면 선산 유씨라는 동족집단의 형성도 없었을 것이다. 동족집단이라는 조직은 과거에 합격한 자가 자신의 출생의 유서가 정통함을 과시하기 위해서 조상 중 특정한 인물을 시조로 삼아 시조로부터의 계보에 본인을 자리매김하면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성춘·희춘 형제 중 특히 홍문관 부제학이란 명예직에 있었던 유희춘이 바로 선산 유씨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는 것이다.
유희춘 형제와 같은 예는 15~16세기에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학문적 재능이 있는 다수의 젊은이들이 과거, 특히 문과에 도전해서 합격함으로써 출세길로 나아갔다. 양반이라는 조선시대 독특한 사회계층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양반이란, 조상 중 과거 합격자가 있는 부계혈연집단의 구성원을 일컫는 계층 개념이다. 과거야말로 바로 양반의 도약대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조선시대 과거의 특징 중 하나로 소수 가문에 의한 과점 상태를 지적했으나, 이 과점 상태도 시대적 변화가 있었다. 표 2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과점 상태도 심해진다. 16세기까지는 과점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고, 과거 본래의 취지가 잘 살아 있던 시대였다. 『미암일기』의 필치에 나타나는 유희춘의 신선함은 당시 양반들의 신선함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림파 정권 성립의 의의
유희춘의 가까운 친척들 중에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거듭된, 이른바 사화士禍에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 우선 형 유성춘이 그러했다. 유성춘은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쫓겨났고, 그 후 복귀할 수 없었다. 유희춘의 외할아버지 최부도 1498년 무오사화로 관직을 박탈당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되었다. 유희춘 부인의 외할아버지인 이인형과 그의 사돈인 김종직도 무오사화 때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체가 난도질당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 형에 처해졌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이다.
사화란 보통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흥정치세력인 사림파士林派에 대한 탄압사건을 일컫는다고 보통의 개설서에 설명되어 있다. 그럼 사림파란 무엇인가? 이것도 개설서에서는 당시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하던 훈구파勳舊派의 부패를 비판하여, 유교적 도덕정치 실현을 주장한 지방 출신 신흥세력이라고 설명한다. 이들 개설서의 설명은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개 무난하다. 그러나 어딘지 애매한 감이 든다. 그들은 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인가, 그들과 대립한 훈구파들도 주자학 신봉자들이 아니었던가 등등의 의문이 충분히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림파 등장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좀 더 넓은 시야에서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문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은 건국 이래 왕권과 신권, 특히 왕권과 재상권의 각축이 거듭되어왔다. 초기의 각축전은 세조 때 왕권 우위의 형태로 일단 결말을 보았지만, 이것은 세조의 강력한 개성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재상권의 우위를 지향하는 고위관료들 중에서도, 왕가에 비해서 손색이 없는 명문 출신 개국공신의 가계들은 대다수 몰락해버렸다. 사림파란 동요를 거듭해온 왕권과 재상권의 관계를 보다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정치 그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림파의 정계진출 무대가 된 것은 삼사三司로 일컬어지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이었다. 그중 앞의 두 곳은 언관言官이라고도 하며, 국왕에게 간언하는 직책이었다. 언관은 시정時政에 대한 자유로운 발언이 인정되었으나, 인사권은 국왕과 재상에게 있었기 때문에 왕권·재상권에서 독립된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 언관에 대한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는 데 큰 의미를 지닌 것이 바로 홍문관의 지위 상승과 그 인사권의 독립이었다.
홍문관은 원래 경서와 사적史籍의 관리 및 국왕의 자문諮問에 답하는 것이 직무였다. 홍문관은 애초 언관들의 간언에 대한 국왕의 자문에 답하는 역할만 하다가, 성종 때 독자적인 언관으로서의 권한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사헌부-사간원에서 다루지 않는 문제들에 관해서도 홍문관이 국왕에게 의견을 올리는 권한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홍문관은 문과 합격자들 중에서 우수한 인재를 뽑아 홍문록弘文錄이란 명단을 만들어, 거기에서 홍문관원을 보충함으로써 인사면에서도 독립성을 인정받았다. 홍문관의 이러한 변화는 사헌부·사간원의 언관 활동을 지원·강화하게 되었고, 이에 삼사 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삼사 체제는 성종 때 정비되었는데, 거기에는 재상권을 억제하려는 성종의 의도가 작용하였다. 성종은 삼사 관원에 신흥 양반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재상권을 떠맡을 공신 세족의 힘을 봉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림파는 왕권의 비호 아래 세력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또한 사림파의 약점으로 작용했다. 즉 사림파 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왕권과 재상권이 손잡아 사림파를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표출된 것이 바로 사화였다.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희대의 폭군이었는데 그의 폭정을 비판하는 삼사의 존재가 눈엣가시가 되어 이때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삼사 체제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 낭관郎官의 권한 강화였다. 낭관이란 육조六曹의 정랑政郞(정5품)·좌랑佐郞(정6품)을 일컫는데, 상급 관료들의 지시를 받아 정책을 구체화하는 일이 본래 업무였다. 그러나 연산군을 추방하고 즉위한(중종반정) 중종 때에 낭관이 정책 입안 자체에 관여하는 권한을 쥐게 되고, 또 후임을 스스로 추천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낭관과 삼사 간에 인사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재상권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사림파 등장의 배경에는 이상과 같은 정치 운영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사림파 등장의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즉 왕권과 재상권의 대립을 축으로 한 양극 구조에 사림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세력을 더함으로써 보다 안정된 정치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신권이 재상권과 삼사·낭관권으로 분리됨으로써 왕권의 상대적 강화를 이룰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왕권 강화에는 크나큰 제약이 있었다. 사림파는 스스로의 주장을 항상 ‘공론公論’이라고 주장했다. 사림이라는 말 자체가 지식인 집단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림파의 등장으로 인해 정치 참여층이 현저하게 확대됨으로써 왕권은 공론의 크나큰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