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성과 수동성
지금까지 서술한 의미의 존재양식에는 능동의 능력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수동성은 존재를 배척한다. 그러나 “능동적”이라든가 “수동적”이라는 말은 심히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그 의미가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어 중세를 거쳐서 르네상스 이후에 들어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쓰인 의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쓰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능동성과 수동성의 개념부터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적 언어관용에서는 능동성[활동성]이란 일반적으로 “에너지를 써서 눈에 보이는 효과를 노리는 태도”로 정의된다. 이를테면 땅을 가는 농부, 컨베이어 벨트 앞의 노동자, 고객에게 구매를 설득하는 판매원, 자기의 돈이나 남의 돈을 투자하는 투자가,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 우표를 파는 우체국 직원, 그리고 서류를 정리하는 관리를 일러 우리는 “능동적[활동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활동 가운데 어떤 것은 다른 활동보다 더 많은 관심과 집중력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능동성”이라는 측면에서 달라지는 점은 없다. 일반적으로 정의 내리자면, 현대적 의미의 능동성이란 사회적으로 유용한 변화에 부응하는, 사회적으로 인정된 합목적적 태도이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능동성은 단지 태도에만 상관되며 그 태도를 지닌 인물과는 무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노예처럼 외부의 힘에 떠밀려서 활동적인지, 불안감에서 오는 내적 강박에 의해서 활동적인지에 대해서는 구별이 없다. 목수나 작가, 학자나 정원사의 경우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든, 아니면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린 노동자나 우체국 직원처럼 맡은 바 일에 대해서 아무런 내적 연관이나 만족감 없이 그 일을 경험하든 간에, 그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능동성은 활동과 단순한 분주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활동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소외된” 활동과 “소외되지 않은” 활동 사이의 구별과 같은 것이다. 소외된 활동을 할 때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하지 않고 나의 활동의 결과로 경험한다. 다시 말하면, 나와 분리되어 나를 초월하거나 나와 대립된 “저편에 있는” 무엇으로 경험한다. 근본적으로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고, 내적 혹은 외적 힘이 나를 통하여 행동한다. 이렇게 나는 나의 활동의 결과에서 떨어져나온다. 소외된 능동성의 가장 명백한 예는 정신병리학 분야의 강박신경증 환자에게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의지에 역행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 계단을 헤아린다든가 어떤 관용구를 외운다든가 개인적 의식儀式을 수행해야 한다는 - 내적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이렇듯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하는 데에는 지극히 “능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적 여러 연구사례들이 보여주듯이, 그럴 때 그들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어떤 내적 힘에 휘몰린다. 소외된 능동성을 드러내는 또 다른 명백한 예는 최면과정에서 볼 수 있는 태도이다. 최면상태에서 어떤 지시를 받은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결단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고 최면사의 지시를 따른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고서,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도 그 지시를 수행한다.
소외되지 않은 활동의 경우,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한다. 소외되지 않은 활동은 탄생과 생산의 과정이며, 이때 나와 나의 생산품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는 또한 나의 활동이 나의 힘과 능력의 표출임을, 나와 나의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가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소외되지 않은 활동을 생산적 활동productive activity, produktives Tatigsein이라고 부르기로 하자(필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1941]에서 “자발적 행동spontaneous activity, spontanes Tatigsein”이라는 개념을 쓴 바 있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저서에서는 “생산적 활동”이라는 말을 써왔다).
지금 쓰는 의미에서의 “생산적”이라는 말은 어떤 새로운 것이나 독창적인 것을 창조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이며, 따라서 예술가나 과학자의 창의성과 동의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활동의 질質이다. 그림이나 과학논문은 극히 비생산적인 것, 즉 불모不毛의 것일 수 있다. 반면, 스스로를 깊이 의식하는 사람, 나무 한 그루라도 그냥 지나쳐서 보지 않고 진정으로 “투시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이 표현한 느낌들을 뒤따라서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비록 그 어떤 “창조”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해도 생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산적 활동이란 내면적 능동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이 굳이 어떤 예술작품이나 과학적 업적 또는 “유용한” 무엇과 묶일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생산성은 정서적으로 불구가 아닌 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성향이다. 생산적 인간은 자기가 접하는 모든 것의 생명을 일깨운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리며 다른 사람과 사물에게도 생명을 부여한다.
“능동성”이나 “수동성”은 각기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단순히 바쁘다는 의미에서의 소외된 능동성은 실제로는 “수동성”, 즉 비생산성이다. 반면, 단순히 바쁘지 않다는 의미에서의 수동성은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이 점을 이해하기가 심히 어렵다. 왜냐하면 많은 종류의 능동성이 소외된 “수동성”인 반면, 생산적 수동성을 체험하는 기회는 극히 드물어져가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보는 능동성과 수동성
산업사회 이전의 철학적 전통에서는 오늘날의 능동성과 수동성의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노동의 소외현상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마저 “능동성”과 단순한 “분주함”을 전혀 구별하지 못했으며, 그 이유는 같은 것이다. 아테네에서는 “실천Praxis”이라는 개념에 자유인이 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포함했으되 육체노동은 제외했던 것 같다. 소외된 일은 오로지 노예의 몫이다. “실천”이라는 말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일컬어 사용했던 용어이다N. Lobkowicz, 1967을 참조할 것. 그런 사회적 조건으로 볼 때 주관적으로 무의미한 일, 소외된 일, 틀에 박힌 일로 야기되는 문제는 아테네의 대부분의 자유민에게는 거의 일어날 수 없었다. 아테네 자유민에게 자유는 - 그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므로 - 스스로에게 의미 있고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천, 즉 활동의 극상의 - 정치적 활동보다도 높게 간주된 - 형태는 진리추구에 전념하는 정관적靜觀的 삶이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능동성과 수동성에 관한 오늘날의 이해를 공유하지 않았던 점이 극명해진다. 정관이 비활동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관을 우리 내면의 최상의 부분, 즉 누스nus, 정신지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활동으로 간주한다. 노예 역시 자유민과 똑같이 관능적 쾌락만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행복은 향락에 있지 않고 덕목과 화음을 이루는 활동에 있다(『니코마코스 윤리학Ethica Nicomachea』)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토마스 아퀴나스도 능동성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와는 대비되는 입장에 있었다. 그에게 역시 내적 평온과 정신적 인식에 전념하는 생활, 즉 정관적 생활vita contemplativa이 인간 활동의 지고의 형태이다. 물론 그는 보통 사람의 일상생활, 즉 활동적 생활vita activa도 소중한 것임을 인정하기는 했다. 개개인의 모든 일상적 활동이 복지에 이르려는 목표를 향해 있고, 그가 자신의 격정과 육체를 다스릴 능력을 지닌 인물인 한 - 이와 같은 조건이 극히 중요한 것이다 - 베아티투도beatitudo, 즉 복지로 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신학대전Summa Theologica』Ⅱ-Ⅱ, 182, 183 ; Ⅰ-Ⅱ, 4. 6을 참조할 것).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어느 정도 타협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는 반면, 에크하르트 수사의 동시대인인 『미지의 구름』의 저자는 활동적 생활의 가치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는 논의를 폈고, 그런가 하면 에크하르트 수사는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립은 얼핏 보이는 만큼 그렇게 첨예한 것은 아니다. 세 사상가 모두 활동은 그것이 지고의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신념에서 나와서 그 신념을 표현하는 한에서만 “유익한” 것이라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본 입장을 근거로 할 때, 이들 스승들은 모두 분주함, 즉 인간의 정신적 “바탕”으로부터 동떨어진 활동을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활동적 생활과 정관적 생활의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통찰은 특히 랑게W. Lange, 1969, 로브코비츠N. Lobkowicz, 1967, 미트D. Mieth, 1971를 참조할 것).
한 인간으로서 사상가로서 스피노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보다 약 4세기 전인 에크하르트 시대에 통용되었던 약 4세기 전인 에크하르트 시대에 통용되었던 가치들을 구체화시킨 인물이다. 동시에 사회와 보통 인간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화들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이기도 했다. 그는 현대과학 및 심리학의 창시자이자 인간의 무의식 차원을 최초로 간파한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깊은 통찰에 힘입어서 그는 앞선 모든 사상가들보다 한결 더 엄밀하고 체계적으로 능동성과 수동성의 차이를 분석했다.
그의 『윤리학Ethica』에서 스피노자는 능동성과 수동성(행하는 것과 감수하는 것)을 정신생활의 두 가지 근본 측면으로 구별한다. 능동성의 첫째 기준은 행위가 본성에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내부나 외부에서 우리 스스로가 마땅한 원인이 되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다시 말하면(앞의 정의에 따라서) 오로지 본성이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우리 내부나 외부에서 본성의 결과로서 일어날 때, 우리는 행동하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반면에 우리 자신이 단지 부분적인 원인이 되는 어떤 일이 우리의 내부에 일어나거나 우리의 본성의 결과로서 일어날 때, 우리는 견디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윤리학』, Ⅲ, 정의 2)
현대독자에게는 이런 구절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인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개념은 논증할 수 있는 그 어떤 경험적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고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오늘날의 신경생리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들 가운데서도 일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말馬의 본성이 말의 특징을 이루듯이 인간의 본성은 인간의 특징을 이룬다고 확신했다. 또한 한 인간의 덕성이나 악덕, 성공이나 실패, 행복이나 고통, 능동성이나 수동성은 인간이라는 종種 특유의 본성이 그에게 어느 정도 잘 실현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인간의 본성의 전형에 접근할수록, 그만큼 우리의 자유와 행복도 커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스피노자가 구상하는 인간의 전형에서는 능동성이라는 속성이 또 다른 속성, 즉 이성理性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우리가 우리의 실존적 조건들에 맞게 행동하고 그 조건들을 필연적이며 실재하는 것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어떤 것은 능동적으로 행하고 어떤 것은 수동적으로 감내한다. 말하자면 우리의 정신이 적합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며, 부적합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 부득이 어떤 일을 감내한다.”(『윤리학』, Ⅲ, 명제 1)
스피노자는 정서적 욕구 역시 능동적 정서actiones와 수동적 정서passiones로 분류한다. 능동적 정서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병적으로 왜곡된 상태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고, 수동적 정서는 형태를 일그러뜨리는 외적 또는 내적 영향에서 야기된다. 전자는 우리가 자유로운 정도만큼 이미 존재하며, 후자는 내부 또는 외부의 강박의 결과이다. 모든 “능동적 정서”는 원래 그대로 좋은 것이며, “격정passiones”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활동성, 이성, 자유, 행복, 기쁨, 자기완성은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으며, 마찬가지로 수동성, 불합리성, 속박, 슬픔, 무력감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반(反)하는 모든 성향들도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윤리학』, Ⅳ, 개념정의 2, 3, 5 ; 명제 40, 42).
격정과 수동성에 대해서 스피노자가 펼친 사고과정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사고의 마지막 - 그리고 가장 현대적인 - 단계, 즉 불합리한 격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이라는 그의 견해를 유념할 필요가 있다. 최선의 성장成長을 이루는 정도에 따라서 우리는 (비교적) 자유롭고 강하며 이성적이고 기쁨을 누릴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부자유스럽거나 나약하며 합리적이지 못하고 억압을 느낀다. 내가 아는 한 스피노자는 정신적 건강이나 질병이 생활방식이 올바르냐 그릇되었느냐의 결과라는 문제점을 제기한 최초의 현대적 사상가였다.
스피노자가 보는 정신적 건강은 궁극적으로 올바른 삶의 발현이며, 반면 정신적 질병은 인간의 본성이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지 못하는 삶의 징후이다. “그렇지만 탐욕스러운 사람이 오로지 이득과 돈만을 생각한다든가 야심가가 명성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정신병자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부담스럽게 흔히 존재하는, 미움을 사는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탐욕이나 야심, 욕정 등도 일종의 정신병이다. 비록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더라도 말이다.”(『윤리학』, Ⅳ, 명제 44에 대한 해설) 우리 시대의 통념과는 거리가 먼 이런 진술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성의 요구에 어긋나는 격정들을 병적이라고 단정하고 심지어는 일종의 정신병의 형태로 분류한다.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견해는 산업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이다. 무엇보다도 돈, 재산, 명성에의 욕구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을 정상적이며 적응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오늘날의 지배적 통념과는 반대로, 스피노자는 그런 사람들을 지극히 수동적인 인간으로, 근본적으로 병든 사람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스피노자 자신이 몸소 구현했고, 그가 의미했던 바의 능동적 인간유형은 지나간 역사 동안 이미 예외적인 인간이 되어버렸을 뿐더러, 이른바 정상적 “활동”에는 적응능력이 없기 때문에 흔히 “신경증”의 의심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마르크스는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은 인간 종種의 특성”(K. Marx, 1932, Ⅰ, 3, 88쪽)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은 인간의 활동을 대표하며, 인간의 활동은 곧 삶이다.
반면에 마르크스에게 자본은 축적된 것, 궁극적으로 죽은 것(K. Marx, 1974 참조)이다. 마르크스가 품었던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의 정서적 치열함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것이 그에게는 생존과 죽음, 현재와 과거, 인간과 사물, 존재와 소유의 싸움이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르크스에게 그 문제는 곧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 삶이 죽은 것을 지배하는가, 죽은 것이 삶을 지배하는가의 문제였다. 사회주의는 그에게는 삶이 죽음을 이기는 사회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면적 비판과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적 환상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인간의 “능동성”이 마비된다는 것, 따라서 인류의 목표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되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고전경제학파의 영향을 놓고 볼 때 오로지 그 시대의 시각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발언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마르크스는 결국 인간을 역사 및 경제의 수동적 객체로 규정하고 인간에게서 능동성을 빼앗은 숙명론자였다”라고 하는 상투적인 평은 그이 본래 신념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는 문맥에서 뽑아낸 몇몇 구절을 읽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마르크스를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견해를 확연히 드러내주는 마르크스 자신의 발언이 있다. (『신성 가족Die heilige Familie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역사는 이렇다 할 무슨 엄청난 부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아무런 투쟁도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행하고 소유하며 투쟁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다.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역사’가 - 마치 별개의 한 인격인 것처럼 - 그 나름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에 다름 아니다.”(K. Marx 1962, 777쪽)
20세기 사상가 가운데서는 알베르트 슈바이처만큼 현대적 활동의 수동적 성격을 예리하게 투시한 사람이 없다. 그는 『문명의 몰락과 재건Verfall und Wiederaufbau der Kultur』(1973, 33-44쪽)에 관한 고찰에서 현대인의 특성을 “부자유스럽고”, “집중력이 없고”, “불완전하며”, “병적으로 종속적이며”, “사회에 떠맡겨져 있다”라고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