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는 낯선 어휘들 때문에 어쩐지 어렵고 먼 이야기일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친숙한 면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가 베다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업과 윤회 그리고 해탈에 대한 개념들은 사실 불교 고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고대 인도의 베다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우파니샤드》와 불교는 기본적인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래서 《우파니샤드》를 처음 읽을 때에도 낯선 단어들 속에서 친숙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우리에게 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너의 생각과 행위는 업을 만들어내고, 업은 너를 다시 윤회하게 할 것이다. 이번 생에서 욕망을 내려놓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면 너는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에 이르러 궁극적인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이렇게 공통된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지만, 불교와 《우파니샤드》는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입장 차이다. 우선 《우파니샤드》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고정불변한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만약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면서 업에 따른 결과를 수용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연속저이며 불변해야만 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교의 영혼과 같은 존재다. 그 영혼이 새로운 육체 속으로 옷을 갈아입듯 들어가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 본질적인 자아를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반면 붓다는 아트만을 부정한다. 우리가 윤회계를 떠도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고정불변의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은 아니다. 붓다는 무아無我를 주장한다. 영원한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여태껏 사람들이 품어온 가장 기만적인 망상이다. 이를 ‘아나트만Anatman’이라고 한다. 이것은 얼핏 타당하지 않은 결론처럼 보인다. 고정불변의 자아가 없는데 어떻게 전생의 업을 인계하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붓다에 따르면 고정된 자아나 영혼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행했던 업에 의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의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밧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밧줄은 하나의 긴 끈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낱알의 짧은 실들이 서로서로 얽혀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새롭게 탄생한 존재는 그 전에 소멸한 존재와 완벽히 똑같지는 않지만, 또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존재는 영원히 변화하는 요소들의 연속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는 자아가 존재하느냐에 대한 유아有我와 무아의 대립, 아트만과 아나트만의 대립,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오랜 대립은 생각보다 먼 거리에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밧줄을 하나의 끈으로 보는 것도 옳고, 밧줄을 하나의 끈으로 보지 않는 것도 옳으니까.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서라고 할 수 있는 리그 베다는 이에 대해서 너무도 현명하게 말해준다.
하나의 진리를 두고, 여러 현명한 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