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읽기의 네 가지 축
어떤 글이든, 그것이 칸트의 글이든, 괴테의 글이든, 그 글을 읽는 독자에게는 고려해야 할 4개의 축이 있다. 칸트의 글 <계몽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예를 들어보자.
첫째, 칸트가 이 글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다로, 각 개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를 어떤 외적 권위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주체가 스스로 묻고 질의하며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것은 이 때문에 중요하다.
둘째, 칸트의 이 텍스트가 나온 1800년대를 전후한 시대상황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는 물론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사회정치적 현실이 급변하던 시기였다. 어디서나 자리하는 미신과 몽매를 일깨우고, 우둔함과 편협성에 저항하는 지적 운동이 전 유럽적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사상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으로도 일어났고, 사회 집단적으로도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적어도 양식 있는 지식인의 경우에, 확인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계몽주의 기획의 시대적 지성사적 의의를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항으로 칸트의 문제의식은 고갈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마땅히 그 책을 읽는 나 - 독자의 실존적 관심과 그 현실에 이어져야 한다. 이것이 세 번째다.
셋째, 우리는 나의 관점에서 칸트의 텍스트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각 개인의 개별적 성향과 실존적 관심이 큰 역할을 한다. 아무리 중요한 텍스트라고 해도 독자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과 실존적 절실성에 메아리를 울리지 못한다면, 그 글은 독자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설득시키기 어렵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2500년 전의 고대 그리스 비극을 읽는 것은 그것이 인간 삶의 어찌할 바 없는 난경難境을 묘사함으로써 우리의 무디어가는 심금(心琴)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가 읽는 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 말하자면 2018년 이후의 한국에서 유의미한 것이어야 한다. 무엇을 읽건, 그것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현실적 적실성은 무엇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하고, 그렇게 읽은 사상의 세부 항목은 그런 현재적 물음의 지속적 검토를 이겨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별 쓸모없을 것이다.
모든 글 읽기는 이 네 개의 축을 고려해야 하고, 이 축들에서 이뤄지는 검증을 이겨내야 한다. 이때 이 네 가지 축은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논의가 수렵되어야 할 것은 세 번째 - 글을 읽는 나/자기/개인/주체다. 모든 변화의 싹은 나로부터 트기 시작하고, 결국 나로 돌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