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광고 대행사들은 모든 고객들이 꿈의 고향이라 생각하는 미국을 마음껏 이용하고 있다. 독일 시청자들은 이미 광고를 통해 뉴욕이나 서부의 거친 지역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락물을 주로 방영하는 에르테엘(RTL) 방송사에서조차 분데스 리가 축구경기 결승전을 중계하면서 광고의 절반 이상을 미국 상투어들을 써 가며 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 결과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의 광고 장면조차 카프리 해변을 배경으로 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같은 장면이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금문교 뒤편 바다에서 독일 브레멘산 벡스 맥주를 마시면서 나오는 것으로 보게 된다. 콘티넨탈 타이어 선전도 독일 라인 강변의 자동차 경주용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아닌, 뉴욕 맨해튼의 고층 빌딩 숲 사이로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여주면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지구촌이 점점 좁아지고 여러 문화 사이의 동화작용이 촉진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그 결과 문화계에서는 필연적으로 범지구화된 단조로운 미국식 문화가 일률적으로 전세계 문화를 휩쓸게 된다. 뉴욕의 비디오 예술가인 쿠르트 로이스톤이 이미 이런 경향을 ‘스크리치’(TV를 처음 켰을 때처럼 아무런 특색 없이 시끄럽고 단조로운 소리가 칙- 하고 계속 나는 현상)라고 예언한 바 있다.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수년 전부터 한참 앞서나가는 젊은 문화부대가 시베리아 톰스크나 오스트리아의 빈, 포르투갈의 리스본 등 지구촌 여러 곳에서 떠들썩하게 나와 뉴욕에서 이미 20년 전에 유행했던 것들을 흉내내고 있다. 이러한 문화의 특징은 한마디로, 야단스럽게 꾸미고 나와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 요란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든 것이 공허하고 지루하다.
- 한스 페터 마르틴 · 하랄트 슈만, 『세계화의 덫』, 강수돌 역, 영림카디널, 2008, 49-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