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와 과타리가 ‘미크로micro'라는 말을 쓸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게 그런 지점들입니다. ‘마크로macro’와 ‘미크로’를 구분할 때, 우리말로 ‘거시’와 ‘미시’라고 하든, ‘거대’와 ‘미세’라고 하든 상관없이, 어떻게 부르든 간에 미크로 수준에서 진행되는 것만이 진짜 일이고, 무의식에 대한 탐구이자 동시에 실천입니다. 마크로 수준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별 쓸모가 없습니다. 물론 정치의 경우에는 ‘미시 정치’와 ‘거시 정치’ 둘을 나눌 수 있지만,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미시 변화가 거시 변화로 이어지도록 하는 게 관건이지만, 거시 수준의 전략으로는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게 요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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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철저하게 의식의 여집합 전체를 가리킵니다. 정신이라는 바깥 경계를 특별하게 설정하지 않습니다. 이러면 무의식이 정신 영역을 넘어서서 몸과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됩니다. 의식이란 우주 전체의 결과물입니다. 우주 전체가 빚어내는 어떤 효과에 해당합니다. 물론 정신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무의식은 정신적psychic이기보다도 더 나아가 물질적material이라는 겁니다. 물론 ‘의식’이라는 말도 굉장히 여러 함의가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의식’은 본래 ‘함께 안다’는 뜻의 라틴어 ‘콘스키엔티아conscientia'에서 유래한 말로 ’양심‘이라는 뜻도 포함합니다. 심리학이나 인지과학에서는 보통 의식을 ’자각awareness'이라고 봅니다. 저도 그 정도 수준에서 이해합니다. ‘아, 이거구나!’라고 자기가 자기를 느끼고 파악하는 겁니다. 내가 ‘아, 뭐다’라고 깨달으면 의식한다고 하는 거죠. 의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걸까요? 의식을 형성하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 이게 ‘무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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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전에, 들뢰즈가 왜 감각을 택했는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다른 많은 수단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감각을 택했을까요? 들뢰즈 자신이 직접 표현하지 않았지만, ‘로고스logos’와의 대결이 중요했던 것으로 저는 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기도 하고, 합리적인 말이기도 하고, 논리이자 서명이기도 합니다. 들뢰즈는 이 로고스와 대결하려 했습니다. 짧게 정리해 보죠.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요? 말이나 논리적 설득을 통해서는, 또는 이성적 이야기를 통해서는 절대로 안 바뀝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이 들뢰즈의 중심 고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뢰즈의 작업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쓸모가 있기도 합니다. 정치는 타인을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좋게 바뀔지, 나쁘게 바뀔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원한다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법은 없으니까요. 실천철학은 윤리와 정치로 크게 나뉩니다. 윤리는 자기를 바꾸는 실천이고, 정치는 타인을 바꾸는 실천입니다. 정치가 효력을 발생시키려면, 그런데 단지 이익과 이해관계를 통해서는 타인을 바꿀 수 없다면, 무의식적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을 통한 전략, 이것이 필요합니다. …무의식적으로 혁명적 실천인 예술을 통해, 말로 포착되지 않는 어떤 지점을 포착해, 타인을 바꾸는 일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 해석입니다. …니체는 음악에 대해 아주 중요한 진술을 남겼는데, 이 진술은 사실상 예술 전반에 다 해당하는 말입니다. ‘음악에는 언어가 파악하지 못하는 작고 미시적인 것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놓치고, 언어의 그물을 빠져나가고, 그래서 언어를 통해서는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또는 언어가 추방하기만 했던 것들을 예술은 포착하고 파악하고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미시적인 것, 아주 작은 것이라는 표현은 들뢰즈가 쓰는 ‘미시’라는 말과 사실상 연결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언어에 교집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전시회에서 그림을 보고 나서 다른 사람한테 그 그림에 대해 말로 설명하고 전달한다고 해 보죠.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언어를 동원해도 듣는 사람은 그 그림에 대해 절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음악은 더 그렇지요? 색과 형태조차 없으니까요. 결국 예술이란 자기가 직접 체험해야 그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각과 언어가 서로 비켜 가는 지점입니다. 현대의 거의 모든 활동들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놓고 보면, 이런 의미에서 감각을 통한 접근은 대단히 혁신적인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감각은 진부한 감각이어선 안 됩니다. 그런 감각은 별 효과가 없어요. 그래서 예술가의 창조 활동의 중심에는 진부하지 않은 감각을 만드는 일, 즉 프랑스어로 ‘클리셰cliche’라고 하는 진부한 감각을 제거한 ‘순수 감각’을 찾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이런 일은 오로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의식, 이성, 설명 같은 것들을 비켜 간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