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본질은 그 이름 속에 내장된 회로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한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을 지칭하거나 기술하는 어휘의 문법으로 결정된다. 한 어휘에는 그 어휘의 사용을 위한 사용 규칙들 또는 문법이 들어 있다. 문법보다 더 적절한 어휘로 우리는 회로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어휘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수세대에 걸쳐 누적되어 만들어진 고집적 회로가 음각되어 있는 반도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의 “본질은 문법에 의해 표현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을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사물의 본질은 그 사물을 명명하는 어휘 속 회로에 의해 결정된다. 어휘 속에는 겹겹의 회로가 정교하고 깊게 파여져 있기에 무수히 많은 다른 어휘들과의 다양하고 복잡하며 섬세하고 중층적인 관계망을 구성해낼 수 있고, 이 관계망은 우리의 사유와 의식의 흐름에 방향을 잡아주며, 우리의 행위를 인도하고 제약한다. 우리는 어휘를 사용하면서 마치 우리가 주체인 데 비해 어휘는 사용 대상이나 객체라고 생각하지만, 사용되며 객체적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과 사유의 흐름 또는 사유 질료이다.
어휘는 복잡하고 정교한 회로를 지닌 반도체와 같은 것이기에 우리의 마음을 깊이 울리고, 멀리 가는 겹겹의 반향을 만들어내며,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고,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 어휘의 기억들이 회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듣는 이의 마음, 정서, 생각, 행동에 영향을 끼치고, 다른 어휘들과의 관계 방식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생각, 정서, 나아가 다른 어휘들을 연루시킨다.
사물의 본질은 문법 또는 회로이므로, 한 사물의 본질은 그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다른 것들과의 다기적인 관계 방식을 보여준다. 한 사물의 본질을 안다는 것은, 그 사물을 대리하는 어휘의 사용 방식 또는 다른 어휘들과의 총체적 관계 방식을 아는 것이다. 본질이란 한 사물이 그 자체 홀로 지니거나 홀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은 다른 것들에 의존하여, 다른 것들과의 관계망에서만 형성될 수 있다. 사물은 발견되기보다 기존 사물들이나 이들을 대리하고 있는 어휘들의 문법 또는 회로를 수정하고 재조정함으로써 새로이 구성된다. 소위 ‘발견되는’ 사물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어디엔가 홀로 있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언어 관계망 위에서 점차적으로 구성·형성된다.
생명의 세계에서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이 한 자연종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고 다른 생명체와의 연관성을 더 밀접하게 한다. 창조론에 따르면, 사과는 사과일 뿐이고, 무화과는 무화과 이상이 아니지만 진화론에 따르면, 한 자연종은 모든 자연종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물고기, 양서류, 원숭이의 행태를 조종하던 유전자의 회로가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유전자적으로 인간은 물고기, 양서류, 유인원 등과 인천 관계에 있다. 인간은 유전학적으로 98.4퍼센트가 침팬지이고, 40퍼센트 가까이는 나무이기 때문에, 봄이 되면 몸 어딘가에서 싹이 움트는 듯하고, 마음의 분자들이 아지랑이처럼 따스한 봄날의 공기 속으로 나들이하고 싶어지는지 모른다.
그와 같이 비트겐슈타인의 의미 사용론 또는 우리의 의미 진화론은 전통의 지칭론이나 아담적 언어관보다 어휘들의 의미나 사물들 사이의 연관 관계를 더 밀접하고 풍부하게 한다. 화엄종이 설파하듯이 사물들은 상즉, 상입, 연기적 관계에 있으며, 아낙사고라스의 통찰대로 모든 것이 모든 것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어휘의 의미들이 상즉상입의 관계에 있기에, 그 어휘들로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하는 모든 사람들 또는 그들의 의식은 그 어휘를 공유의 매체로 하는 한, 상호 소통하면서 전일적 총체성의 일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자연 언어에는 그를 사용해온 언어 주체들과 언어 공동체의 역사가 완벽하게 내장되어 있다. 언어 이외의 그 어느 문화적 유산도 언어만큼 한 문화 공동체의 역사를 온전히 담고 있는 것이 없다. 생득적으로 주어지는 동물들의 통신법과는 달리, 인간의 언어는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하며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기에, 인간의 언어에는 역사가, 그를 통신 매체로 사용한 인간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 세계가 국제화되어가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무수히 많은 지역의 자연 언어들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종류의 제국주의, 즉 언어 제국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 언어권의 자연 언어가 소멸된다는 것은 그 언어권의 문화 전체,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미술관 전체가 없어지는 것보다 더 많은 정보량이 소실되는 것이라 한다. 언어 제국주의가 확산되는 만큼, 인류 문화의 내실은 더욱 빈약해질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