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주의는 인간 외부의 세계에 필연적인 법칙이 있어서, 세계와 제대로 관계하려면 그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 주관주의는 인간 자신이 세계에 법칙을 부과하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객관주의적 경향은 세계가 안정적인 질서로 유지될 때 강화되고, 주관주의적인 경향은 세계가 낯설거나 불안정할 때 대두하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안정된 세계에 산다면, 그냥 그 세계의 법칙이나 규범을 따라서 살면 된다. 반대로 불안정한 세계라면 우리는 그 세계에 자신이 생각한 법칙을 부과해야만 한다.
객관주의적 사유가 안정된 농업 공동체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주관주의적인 사유가 유목민, 여행자, 혹은 상인들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16세기 유라시아의 양 끄트머리를 살펴보면 우리는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그것은 상인 계층의 등장과 그에 따라 확대되었던 그들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다. 그러니까 이미 삶의 차원에서 16세기 이전에도 변화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단지 그 변화가 16세기 들어 인간의 내면에까지 영토를 넓혔을 뿐이다.
객관주의니 주관주의니 하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16세기에는 말할 필요도 없는 합의 사항이 존재했다. 바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절대자의 존재이다. 그것이 기독교처럼 인격적인 신일 수도 있고, 유학에서처럼 비인격적인 태극太極일 수도 있다.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기독교 사유는 신God이라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주자학이든 양명학이든 유교적 사유는 태극 혹은 이理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객관주의적 사유 경향은 객관을 거쳐야만 절대자의 뜻이나 법칙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이고, 반대로 주관주의적 사유 경향은 객관을 거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마음을 통해 절대자의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인 셈이다.
그러니까 16세기의 지적 변화를 이해하는 객관주의나 주관주의라는 용어는 조심스럽게 쓸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외부 세계의 법칙을 알아야 신의 뜻을 안다는 입장, 혹은 사물의 법칙을 알아야 전체 법칙을 지배하는 하나의 법칙, 즉 태극을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 바로 이것이 가톨릭과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16세기의 객관주의다. 반대로 외부 세계나 사물들을 거치지 않고도 자기 마음을 통해 신의 뜻이나 태극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당시 새롭게 대두하던 프로테스탄티즘과 양명학이 표방한 주관주의적 사유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질서를 긍정하는 탓인지 가톨릭과 주자학은 중앙집권적 체제를 신이나 태극의 명령이라고 긍정한다. 가톨릭에서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를 일이다. 반면 프로테스탄티즘과 양명학에서 중앙집권적 체제는 절대적인 필연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우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주관주의적 경향에서 중요한 것은 절대자와 자신의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 개인이 성경이나 기도를 통해 교황의 개입 없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톨릭에서 프로테스탄티즘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잠시 16세기 유라시아 동쪽 끝에서 펼쳐진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이행, 그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주자학과 양명학 사이의 차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서 중 하나인 『대학』에 등장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구절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物이라는 동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인 셈이다.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는 ‘격’을 ‘궁리窮理’라고 독해한다.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주희에게 격물치지는 ‘사물의 이치를 철저하게 파악해 앎을 이룬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지만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은 ‘격’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격’이란 글자에 ‘자격’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에 주목한 왕수인은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는 뜻을 가진 ‘정기부정正其不正’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왕수인에게 격물치지는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해서 앎을 이룬다.’는 뜻이 된다.
이런 해석 차이 때문에 물物의 의미도 심각하게 달라진다. 주희에게 ‘물’은 내 마음과 무관한 객관적인 사건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반면 왕수인에게 ‘물’은 ‘바를 수도 있고, 바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그러니까 이미 인간적 가치가 부여된 것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객관적인 사물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왕수인이 평상이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心外無物”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모든 것은 마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와 무관한 객관적인 사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신의 주저 『전습록傳習錄』에서 왕수인은 주희를 비판하면서 말했다.
“무릇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한다는 것은 가령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理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
이제야 우리는 왜 왕수인이 ‘격’을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게 한다.’로 해석했는지, 그리고 ‘물’을 나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부모를 모시는 데 불효한 것이 바로 ‘바르지 않은 것其不正이라면, 이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로잡아正‘ 효를 행하는 것이 바로 ’격물‘이었던 것이다.
외부의 사물로부터 내면의 마음으로 시선 돌리기, 즉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일어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바로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그것을 바로잡으면 된다. 이런 강한 주관주의적 경향은 부를 축적하는 데 성공하며 등장한 상인 계층에게 크게 환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마음만 바로잡으면 성인聖人이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사농공상의 말단에 있다고 천대받던 상인들에게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춘하추동 사계절의 법칙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 법칙을 어기고서 어떻게 농사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반면 상인들에게는 객관적인 법칙보다는 주관적 결단이 더 중요한 법이다. 무엇을 팔 것인지, 어디 가서 사고팔 것인지, 그리고 가격을 어떻게 책정해야 하는지, 이런 주체적인 결단에 목숨을 거는 계층이 바로 상인들이니까 말이다.
양명학에 환호했던 또 하나의 계층도 상인처럼 개인적 결단을 강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농부처럼 안정된 문신文臣들이 아니라 상인처럼 불안정한 전쟁에 뛰어들어 매사 신속하게 결단할 수밖에 없는 무신武臣들이었다.
중앙집권적이고 객관적 질서를 중시했던 사람들, 즉 관료, 관료 후보자들, 혹은 농민들은 주자학과 공명하는 경향을 강하게 띤다. 반면 상인 계층이나 무신들처럼 다원적이고 주체적인 역량을 긍정하던 사람들은 양명학에 깊은 호감을 피력하곤 했다. 분명히 16세기 이후 조선과 일본의 사상사적 경향을 변별해 주는 요소도 없을 것이다. 문신과 농민의 정치적 우월성을 강조했던 조선은 개항 때까지 집요하게 주자학적 사유를 고집했지만, 무신과 상인이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일본은 개항 때까지 양명학적 사유를 면면히 이어 갔다.
16세기에 유라시아 대륙 양 끝에서 자본주의를 예감하는 주관주의적 사유 경향이 대두하게 된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프로테스탄티즘과 양명학, 그것은 정착민적 사유에서 유목민적 사유로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농민적 사유에서 상인적 사유로의 이행이랄 수도 있다.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서면 독일의 막스 베버Max Weber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을 출간하고, 중국의 위잉스 余英時가 『중국 근세 종교 윤리와 상인 정신中國近世宗敎倫理與商人精神』이란 책을 출간해 이 문제를 탐구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