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의 창조는 ‘신’臣과 ‘민’民의 계급적·신분적 격차를 사회적으로 평준화하고, 모든 권력을 국가라는 하나의 점으로 응집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경우, 국가라는 비인격적 조직이 아니라 천황이라는 초월적 인격으로의 ‘귀일’歸一에 의해 권력을 일원화하려 했다. 즉 ‘일군만민一郡萬民을 실현함으로써 천황 앞에서 모든 신민의 평등이 이루어진다는 허구가 성립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화족華族, 사족士族, 평민平民, 신평민新平民이라는 차별의 체계를 온존시킨 채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민으로서의 국민의 탄생은 분명히 일본에서 근대의 결정적인 시작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국체’는 단순히 고색창연한 ‘복고’로서가 아니라 근대적인 헌법·정치학의 용어로서 채색되었던 것이다.
이 절박한 작업의 최대 ‘공로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1991년 정변 때까지 “일본 근대화의 선두에 서 있던” 메이지 정부의 최고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제일 신경을 썼던 것은 막번체제가 해체한 뒤에 출현한 “가공할 정치적 원시상태”(자유민권운동!)를 견제할 제도적 보장으로서 국권國權의 강화·확대를 이루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민적 통합의 창출’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국가의 기축機軸’을 창조하고 이를 구심점으로 해서 국민을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향토애patriotism, 전통적인 습관, 종교적 심성이 단지 동심원적으로 확대됨으로써 국민이 창출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국가적 질서는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작위作爲에 의해 창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이토 히로부미는 하시카와 분조가 말한 것처럼 “자연적 존재로서의 국체에서 헌법을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체의 헌법을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다. 뒤집어 말해서 이토에게는 “정치적 실체성을 결여한 전통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기축’이 되어야 할 것은 ‘자연적·전통적 천황’과는 다른 ‘초월적 통치권자’로서의 천황을 창출하는 것이어야 했다. 여기에는 분명 정치적 작위로서의 근대에 대한 이토의 예민한 자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국체의 헌법’이라는 난제가 노출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헌법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거기에 최종적으로 근거를 부여하는 절대적 존재로서의 천황과, 헌법체계의 제약을 받으면서 이른바 그 ‘내부’에 편이보디는 입헌군주로서의 천황, 이 모순이 좋은 싫든 헌법, 즉 ‘국체’의 알력으로 드러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한 대일본제국헌법 제1조는 ‘국체론’의 천황 절대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4조(“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장악하고 이 헌법의 규정에 의거해서 이를 행한다”)와 제55조(“국무 각 대신은 천황을 보필하여 그 책임을 진다”) 등에 규정된 바와 같이, 입헌군주로서의 천황은 헌법과 의회, 정부에 의해 제약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후자에서 보는 한, 천황은 헌법의 ‘내부’에 갇힌 입헌군주였고 국가의 최고기관으로서 자리매김되는 것이다. 게오르그 옐리네크G. Jellinek 식의 국가법인격설에 입각해서 천황을 국가의 최고기관으로 간주하는 미노베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天皇機關設은 이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다. 하지만 전자의 천황은 분명히 헌법의 ‘외부’에 우뚝 선 절대자였다. 게다가 그 절대성은 왕권신수설에 입각한 절대주의와는 다르며, 오히려 ‘신으로서의 신성제사왕神聖祭祀王’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모순’을 정합적인 해석 시스템으로 확립하기 위한 의장意匠, 바로 그것이 ‘현인신’現人神으로서의 천황이었다. 야쓰키 기미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메이지 헌법’ 속에 <신>으로서의 신성제사왕과 <왕>으로서의 정치권력의 주체성이 ‘현인신’이라는 사상적 의장으로 통일되어 완성된다”고. 바꿔 말해서 ‘헌법/(교육)칙어’체계로서의 ‘국체’의 근대에는 입헌군주제를 규정한 헌법의 근대성과, 바로 그 헌법의 규정에 포함된 ‘만세일계’와 <교육칙어>에 명문화되어 있는 ‘황운皇運과 같은 자구字句가 환기시키는 신화성이 겹쳐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중층성을 일원화하는 존재야말로 ‘현인신’으로서의 천황이었다. 구체적인 천황이라는 인격이 그대로 ‘현인신’이 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황위’의 연면連綿한 무궁성이 그러한 구체적인 인격을 ‘현인신’으로 현재화시켰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여기에 이르러 헌법은 국가권력을 제약하는 입헌주의적 텍스트라는 성격을 벗어나 이른바 “‘조종祖宗의 유훈遺訓’, 선조들이 남긴 가르침”으로 자리매김됨으로써 ‘현인신’으로서의 천황이 절대성을 알리는 ‘성전’聖典이 되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구상했던 ‘국체의 헌법’은 결국 ‘현인신’으로서의 천황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황조신皇祖神의 궁극적인 근거가 이미 ‘사적’事跡 속에 드러난다고 간주했던 노리나가적인 ‘간나가라’의 세계와 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국체의 헌법’의 작위적 근대성은 한없이 <자연>이라는 자태를 걸치고 나타났던 셈이다. 그것은 이른바 ‘작위적 <자연>’으로서의 ‘국체’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