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8년 팔기八旗 한군 정람기의 무관이었던 동국강은 그의 민족 출신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기 위해 강희제에게 청원서를 제출했다. 그의 종조부 동복년은 1580년경 요동에서 태어났지만 화중華中의 무창武昌으로 이주했다. 그는 무창에서 1616년 전시殿試에 급제하여 명을 위해 지현知縣으로 일했으며, 후에 명군을 지휘하여 중국 동북 지역에서 방어했다. 불운한 패배 이후 동복년은 반역죄로 기소되었지만, 1625년 감옥에서 사망하면서까지 명에 대한 충성심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아들 동국기는 무창에서 자랐고, 영웅적인 명나라 군인들의 10대 후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그의 아버지의 애국심을 변호할 수 있는 족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동국기는 1645년 양자강 유역에서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와 그의 가족들은 팔기 한군 정람기로 편입되었다.
나중에 밝혀지듯이 동국기가 그의 족보에 올렸던 요동 출신의 동씨 남자들은 동복년이 명나라를 방어한 것처럼 청군의 정복으로 인해 영웅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들 중 한 명은 강희제의 외조부가 되었고, 동국강은 강희제의 삼촌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강희제는 청원서를 받아들여 동국강을 만주족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촌수가 먼 수많은 친족들까지 동일하게 행정적으로 재분류하는 것은 곤란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동국강과 그의 일부 친척들만이 만주족이 되었고, 다른 친족들은 한족으로 남겨졌다. 이러한 시공간적 상황에서 민족 정체성은 유전학적으로 운명 지어진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불명확하고 협상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은 1644년에 중국의 왕좌를 이어받은 청 통치자들의 새로운 역사적 이해의 중심에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만주족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은 만주족과 같은 종족은 생물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한번 결정되면 끝가지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관점은, 중국 2000년 역사의 필연적인 종점이 20세기 한족의 민족 국가였다고 보는 목적론적인 한족 민족주의 역사 서술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이민족들의 통치를 포함한 모든 중국 왕조들은 대체로 유사한 것이었다. 즉, 몽골족이나 만주족같은 이민족들이 한족의 영토를 정복할 수는 있었지만, 그들이 중국을 계속 점유하려고 한다면 중국인으로서 통치를 해야 했고, 결국 그들 스스로가 중국인이 되어야만 했다.
이러한 청의 통치에 대한 가정에 따르면, 만주족 또는 만주 사람들은 명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모든 면에서 ‘야만족’이었고 한족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했다. 일단 정복이 이루어지자 만주족들은 약간의 내부적 논쟁 후에 유가적 개념인 천자로서 중국을 통치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결정은 필연적으로 문화적 ‘동화同化’를 초래했고, 또한 만주족이 생물학적으로 소멸되는 결과도 가져왔던 것 같다. 건륭제를 비롯한 몇몇 만주 통치자들은 만주족이 차별성을 상실했다는 위기감을 인식하고 ‘만주족의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서 방어적 조치를 취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911년 청이 중화민국으로 대체되었을 때 진정한 만주족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만주족들은 완전히 중국인 안으로 녹아들어갔던 것이다. 이러한 담론을 잘 보여주는 실례는 1930년대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 동북 지역에 만주족의 민족 국가로서 세운 만주국이 본질적으로 일본의 괴뢰 정권이었다고 비난을 받은 것이다. 중국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청의 멸망 이후 만주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면 청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이 담론을 고쳐 쓰기 시작했고, 근본적으로 뒤엎었다. 문화 연구에 대한 영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종족과 같은 생물학적 범주의 개념들에 대해 의혹을 갖게 되었고, 민족적 분류 대신에 특별한 역사적 상황, 사회·정치적 협상 과정의 산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에 따르면, 17세기에 실제로 만주족은 없었고, 명 제국의 동북 변경을 따라서 다양한 혈통과 문화 전통을 가진 민족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들 중 꽤 많은 민족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한족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명에 이어 용의 왕좌를 이어받은 집단은 만주족이 아니라 정복의 목적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의 조직이었다. ‘청의 정복 조직’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몽골인, 한족 군인, 그리고 만주족 등과 같은 민족 정체성을 그들의 구성원에게 배정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배정은 이전부터 존재했던 생물학적 실체보다는 정치적 편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동씨 일가의 경우를 볼 때 이러한 초기의 배정은 상황에 따라서 쉽게 폐지되거나 변화되었을 것이다.
기존의 관점이 본래부터 분별 가능한 만주족이 시간이 지나면서 한족에 동화되거나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면, 신청사 담론은 왕조가 흘러가면서 만주족이 실질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건륭제를 비롯한 황제들의 노력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그 민족의 문화를 방어했다기보다는 기원 신화, 민족의 언어와 문학, 일련의 뚜렷한 문화적 특색을 규정하여 만주족의 문화를 창조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계획을 통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가정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1644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족이 1911년에는 분명히 존재하게 되는 셈이었다. 이러한 시각과 부합되는 만주국의 이야기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의 대작 ⌜마지막 황제⌟에 잘 드러나 있다. 영화에서 부의는 동북 지역에 있는 만주족의 국가를 통치해달라는 만주족 백성들의 요청에 진심으로 감동을 받아, 이에 응대하기 위해서 퇴위 이후에 상해에서 한량으로 지내던 것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일본의 만주국 수립 계획에서 위선적이었던 것은 만주국의 기반이 되는 진정한 만주족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꾸며냈다는 것이 아니라, 만주족들이 실질적인 자결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담론 자체도 과장되어 있다. 만주 중심주의 학자들의 2세대는 적어도 동시대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왕조가 건국되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 민족적 또는 인종적 차이가 실재했다고 주장한다. 청조의 전 기간을 범주로 하는 만주족의 근거지에 대한 연구는 만주 거주자와 주위 한족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민족적 긴장이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기존의 담론보다 새로운 담론을 선호하고 있고, 그 일련의 가정들은 이 책의 밑바탕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