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과정에 있어서 상업의 역할
위의 예들이 말해주듯이 직물생산은 일련의 활동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천연 목화가 조면된 이후에도 생산의 주요 두 단계 - 실잣기와 베짜기 - 가 하나의 공정으로 통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직물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대다수를 공급하는 시골의 방적공과 직조공이 상인들이 수행하는 (그리고 거의 통제하는) 교역의 도움을 받아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인 단계로 작업을 하는 것이 더 흔한 형태였다. 상인들은 방적공에게 팔기 위해 조면한 목화를 샀고, 방적공이 뽑아낸 실을 사서 직조공에게 팔았으며, 직조공이 짠 면포를 매입하여 도매상에 넘겼다. 주권전朱國楨, 1557~1632은 고향 후저우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생산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후저우에서는 인근 여러 부에서 온 면포 상인들이 조면한 목화를 주민들에게 팔았고 “주민들은 그것을 실을 잣거나 베를 짰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 그것을 들고 시장에 나가 다시 목화와 교환했고 집에 와서 실을 잣거나 베를 짰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교환을 위해 시장으로 들고 나갔다.” 장난의 시장은 물품을 아주 잘 구비하고 있어서 전적으로 베 짜는 일에만 매달려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생필품을 구할 수 있었다. 직조공은 “면사로 면포를 짜고, 면포를 은으로 바꾸고, 은으로 쌀을 사고, 쌀을 나라에 바치고” 병사들은 조량을 수도까지 운반했다. “한 가족의 조용租庸, 식량, 옷, 일용품, 그리고 사교(社交)나 육아 또는 장례에 소용되는 모든 것이 목화에서 나왔다”고 한 회고록은 전한다. 일일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밤에도 등잔불을 켜 놓고 일하는 집이 있었다.
명대사 연구자들은 유럽이 산업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선대제先貸制가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선대제를 통해 상인들은 시골의 노동자들에게 원료의 형태로 자본을 이전시켰고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통제했다. 일부 연구자는 이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섬유노동자들도 선대제에 흡수됨으로써 자본주의적 관계에 들어선 것이라고 암시해왔다. 주권전의 글을 보면 ‘교환’(易)이란 단어가 ‘팖’賣이라는 단어를 대신하고 있다. 이런 단어 선택은 생산자가 매일같이 판매를 위해 흥정하지 않고 이 과정의 모든 절차 - 조면의 공급에서 완성된 면포의 배포 -를 처리해주는 한 사람의 대리인과 일했음을 뜻할 수 있다. 장난 면직공업에 대한 다른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상인의 힘이 지방시장을 독점하고 조종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힘에서 나온다고 보는 이론이다. 전대 상인은 단지 직조공에게 아침 일찍 원료를 팔고 이튿날 생산품을 사들이는 단순한 방법으로 분업을 이용한 것이 아니다. 원료를 제공하여 노동력을 구매하고 생산의 속도를 정했으며 내부에서 생산과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명말에 상인들이 가내 직물생산을 통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생산과정 외부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이득을 취했고, 방적공과 직조공이 그들의 생산물을 교환할 수 있는 지방 시장을 독점했고, 생산자를 고리대로 묶어놓았다.
이 견해를 가장 설득력 있게 주장하고 있는 다나카 마사토시田中正俊는 유럽의 선대제와 중국의 원료-생산물 교환제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후자는 생산관계를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발전의 자극요인으로 간주될 수 없다”(여기서 발전은 자본주의로의 발전을 뜻한다)고 했다. 많은 중국역사가들은 방직공업을 명대 후기 ‘자본주의의 맹아’라 말하며 이것이 중국을 자본주의의 방향으로 진행시켰다고 생각한다. 마사토시는 이런 관점에 의문을 보인다. 분명 명말의 상업경제는 명초의 자급자족적 경제와 다르고 명 중기에 진행된 잉여의 대규모 재배분과도 구별된다. 하지만 이 시기 유럽에서 출현한 선대제와는 아주 많이 다르다.
장난을 벗어나면 명대 후기의 경제상은 더 단순해진다. 대부분의 지역경제는 전국적 시장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푸젠 성 후이안 현의 지현인 예춘지는 1570년대 초반에 현의 생산물을 지방 소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도에 따라 서열을 정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곡물로, 이것은 명대 후기 중국의 거의 모든 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현 바깥으로 거래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중요한 것’에는 봉나무, 목화, 삼, 모시 등 직물 생산원료가 있었다. ‘부차적인 것’은 소금, 옷, 식용유, 목재, 설탕, 과일, 채소, 어류, 가축으로 이들만이 현 외부에서(대부분은 촨저우 부성 근처였다.) 거래되었다. 예춘지는 푸젠의 다른 현에서도 그렇듯이 외부인의 교역을 좌우하고 있는 것을 보고, 상업적 이익이 지역 바깥으로 부를 빼내가는 경향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마을로 들여온 삼으로 생산하는 마포가 “외부의 돈을 내부로 들여올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후이안의 나머지 교역품은 공산품이 아니라 천연자원인 “산과 바다에서 얻는 것”이었다. 예춘지가 전하는 우이안의 인상은 생산의 대부분을 스스로 소비하는 자급자족적인 농업경제에 가깝고 지역의 상업망과는 단지 약간의 관계만을 맺고 있다.
페르낭 브로델은 근세 유럽의 상업발전을 설명하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유형의 경제가 동시에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시장경제가 농촌의 잉여를 정기적인 교환으로 끌어들이긴 했지만 “인프라 경제infra-economy, 즉 경제활동의 비공식적인 절반”은 “자급자족의 세계이며 재화와 용역을 아주 작은 반경 안에서 교환했다.” 두 경제는 통합되어 공존했고 시장경제는 잉여를 끌어내고, 그 잉여를 재배분하는 인프라 경제가 사전에 작동해야만 가능했다. 규모를 조정하면 이 경제모델은 명말 중국에 더 잘 맞는다.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인프라 경제 안에서 생산하고 소비했다. 후이안 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소비품과 생산품의 일부가 시장경제를 통해 들어오거나 나갔지만, 시장경제가 인프라 경제를 인수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용해시킬 정도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장난 지역 내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 피륙을 짜는 가구 안에서 생산과 소비의 분리는 이런 가구들을 그들의 인프라 경제로부터 떼어놓았다. 후저우의 어떤 작가는 이 분리가 낳은 명대 후기의 모순에 다음과 같이 어리둥절해한다. “후저우의 비단은 전국으로 팔려나가는데 후저우 주민 중에는 평생 비단 옷 한 번 입어보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다.”
브로델은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이해라는 커다란 지적 의문 안에서 근세 유럽 상업의 성장모델을 정식화했다. 그는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의 확대에 따라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현명한 주장을 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의 최상부에 형성되는 사회적 신분질서 안에서 형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특정한 사회구조와 시장경제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산물이다. 유럽 자본주의의 진화는 유럽 역사에서만 보이는 유일한 것이다. 사회구조가 다를 경우에는 경제의 발전과정 역시 다르게 이루어진다. 이 부분에서 근세 유럽과 명대 중국사에 대한 해석은 갈라져야 한다. 엘리트 형성의 맥락이 서로 다르고 국가권력의 영향도 다르다. 명대 후기의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은 아니다. 물론 이 말이 중국이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다른 어떤 경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경제는 국가의 통신망을 이용하여 지역간 경제를 연결시킨 확대된 시장경제로서, 일부 지역에서는 농촌과 도시의 노동을 연속적인 생산과정으로 조직했다. 하지만 농촌가구가 그대로 기본 생산단위로 유지되었으며 생산과 소비의 완전한 분리는 일어나지 않은 채 소비 패턴을 재편했다. 경제의 변화는 더뎠지만 확실하게 신사층 내부에 침투하여 상업에 대한 유교적 경멸을 불식시켰다. 이런 신사층의 변화는 엘리트의 이익이 청대에도 온존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럽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