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민중반란은 일찍이 ‘동학당東學黨의 난’이라고 불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명칭은 역사적인 단계 규정의 개념 없이 단지 완미頑迷융통성이 없이 고집이 세어 사리에 어두움한 비밀결사종교단체에 의한 반란이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어, 오늘날 사어死語가 되어가는 중이다.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이라는 명칭이 오늘날 일부에서 인정받고 있지만, 그것은 동학의 종교적 역할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이 책의 입장도 동학의 종교적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학 자체를 높이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학에 스스로 공명해간 민중의 창조적 이해에 착안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이라는 의미에서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갑오농민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농민전쟁인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독일농민전쟁』에서 비롯된 ‘농민전쟁’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농민봉기와는 확연히 다르게 사용된다. 필자가 이해하기에 농민전쟁이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닌다.
①특정 영주와 지방관에 대한 투쟁 범위를 넘어 전체 영주와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이라는 내란의 성격을 띤다.
②농민 계급뿐 아니라 영주 또는 지방관과 모순관계에 있는 여러 계층이 광범위하게 참가한다.
③지도력의 강약 차이가 있다 해도 중앙지도부가 존재하고, 통일적인 강령과 요구조항을 갖고 있다.
④신분제(농노제)의 폐기=평등주의와 빈부의 해소=평균주의를 지향하며, 농민적 윤리를 기초로 하여 전개되고, 민중구제民衆救濟를 위한 유토피아 사상을 갖고 있다.
⑤농촌에서 이미 상품화폐경제가 전개되고 있어서 땅의 분할 소유에 의한 봉건적 지배체제와 폐쇄적 지역경제는 해체되어가지만, 아직 근대적인 관리체제에 의한 지배는 이루어지지 않는 단계에서 일어난다. 즉 유럽에서는 14~15세기부터 17~18세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나는데, 그 시기는 절대주의 전야前夜부터 절대주의 단계까지이다.
본론에서 밝혀야 할 내용이겠지만 갑오농민전쟁 시기에 일부에서 농민전쟁 노선에 반하여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갑오농민전쟁은 위의 지표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에 농민전쟁이 틀림없다. ⑤번 항목에서 드러나듯 농민전쟁은 명확한 시대 구분 속에서 일어나는데, 조선 역사상 이들 전부를 충족시키는 민중반란은 갑오농민전쟁뿐이다. 일부에서는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반란을 농민전쟁으로 평가하지만, 이 반란은 궁극적으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지향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위 항목 중 ④번의 성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 농민전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서 일어난 반란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다. 중국 역사에서는 왕조 교체기에 수많은 농민반란이 일어났지만 그것들은 결국 역성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설령 그 과정에서 농민의 계급적인 성격이 반영된 요구조항들이 등장했다 할지라도 결국은 역성혁명의 열매를 얻고자 하는 자에 의해 이용되었을 따름이다. 고지마 신지小島晉治가 지적한 것처럼 가경嘉慶 연간에 일어난 백련교白蓮敎의 반란에서는 명明 왕실의 부흥이 주창되었으며,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반란 역시 홍수전洪秀全을 ‘천왕天王’으로 추대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결국은 새 왕조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 중국의 경우, 지주제도와 관료제도를 부정하는 사상은 19세기 후반까지도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연 중국 역사에 농민전쟁이 존재했는지 여부는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야스마루 요시오安丸良夫가 지적한 것처럼 중세 말기로부터 근세 초기에 걸쳐서 일향종一向宗과 기독교도들에 의한 격렬한 투쟁이 있었지만, 그 역시 ‘민중적인 종교 왕국의 관념’ = 유토피아 사상은 미숙했다. 더욱이 그것들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정권과 막번체제幕藩体制의 성립에 의해 뿌리째 뽑혀버림으로써, 막부幕府 말기와 유신기維新期의 민중들에게는 ‘민중적 종교 왕국’의 구상을 계승할 만한 전통이 없었다. 비록 일향종과 기독교도들의 투쟁 방향이 농민전쟁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약한 정도에 그쳤고 이후는 더욱 위축되었다. 결국은 일본에도 엄밀한 의미의 농민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아시아 3국 가운데 조선만이 확실한 농민전쟁의 전통을 가진 유일한 나라로, 갑오농민전쟁 연구는 3국의 비교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 근대 형성기의 전 단계에 모종의 종교적 이단에 의해 조직된 민중운동이 사회 변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갑오농민전쟁 연구는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럽에서 일어난 농민전쟁의 경우, 재세례파再洗禮派의 영향 아래 일어난 독일동민전쟁을 비롯해 대부분의 농민전쟁이 종교적 이단과 결부되어 일어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영국의 와트 타일러Wat Tyler 반란은 교황권의 지상성至上性을 비판한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교설을 신봉하는 롤라이드의 영향 아래 일어났으며, 프랑스의 자크리 반란은 천년왕국론千年王國論의 일반적 전개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 천년왕국론은 독일농민전쟁과 와트 타일러 반란의 사상적 배경이기도 하며, 그 이후에도 이 사상에 근거한 민중운동이 수없이 전개된다. 이슬람 세계로 눈을 돌리면, 아라비아의 원리주의적 왓하브 운동과 수단의 구제 신앙에 근거한 마후디 반란 등이 모종의 이단운동으로 평가된다. 다시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농민전쟁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가경 연간의 백련교의 반란과 태평천국 반란이 이 범주에 든다. 일본의 경우는 예외적이어서 민중운동의 종교적 성격도 희박하지만, 미성숙한 형태로서 ‘오카케마이리에도시대에 벌어진 이세 신궁으로의 집단적 참배운동’와 ‘에에자 나이카'좋고 말고'란 뜻을 지닌 말로, 종교적 형태를 취한 집단 난무를 일컬음’ 운동이 있다. 또 제대로 뜻을 펼치기도 전에 끝난 감이 있긴 해도 흑주교黑住敎·금광교金光敎·천리교天理敎·마루야마교丸山敎·오모토교大本敎 등의 신흥종교운동들이 있다. 분명 갑오농민전쟁은 세계사적으로 이러한 이단의 민중운동과 상통하는 논리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전쟁의 논리를 해명하는 것은 조선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민중변혁운동의 논리 해명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