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라는 말의 역사
1. 가정경제
경제economy라는 말의 어원은 ‘가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oikos와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합성어근 nem-이 합쳐져서 생긴 말이다. 그대로 풀이해보면 ‘가정관리’라는 말이 된다…가정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나 라틴어 파밀리아 familia는 ‘자급자족의 경제단위’라는 의미가 훨씬 더 강하다. 로마의 파밀리아는 오늘날의 가정처럼 아버지, 어머니나, 동생으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다. 일정한 크기의 장원莊園처럼 경제적 자급자족이 가능한 단위에서 동일한 가부장 pater-familias의 권위와 지배하에서 생계를 함께 해결하는 모든 사람의 집단을 일컫는다…이 가부장은 혈연으로서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모든 파밀리아 구성원 위에 군립하는 권위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법에서 가부장의 권위는 첫째,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권한cominium, 둘째,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손주) 며느리들에 대한 권한manus, 셋째, 자신의 자녀들과 노예들에 대한 권한 potestas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가부장은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서도 노예와 마찬가지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의 가정이라 하면 ‘재산’을 의미하는 셈이다.
최초의 경제학 저작이라고 할 아테네의 크세노폰이 쓴 《가정관리학Oikonomikos》은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라는 형식을 빌려 재산을 잘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에게 필요한 덕목, 노예 훈련 방법, 마누라 다루는 법, 농업 경영 기술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이 oikonomia라는 말은 경제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관리와 경영 일반’이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oikonomiai'에는 아무 재주가 없는자”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로마의 시인 퀴틸리아누스는 이 말을 “시詩의 구성이나 설계”라는 뜻으로 썼다고 한다. 심지어 몇천 년이 지난 후에도 애덤 스미스와 함께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케네는 자신의 저서 《동물의 생체 구성에 한 생리학적 소고Essai phyique sur l'economie animale》에서 이 말을 동물 신체 구성의 합리적 성격을 일컫는 데 쓰고 있다.
이런 ‘가정관리’로서의 경제라는 말의 의미는 이후 몇천 년에 걸쳐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경제 즉 가정의 관리Yconomie or Howsolde keepynge'라는 1510년의 용례가 나타나 있다. 또 ’우화의 구성Oeconomy of fabe'(1610), '두뇌의 구성Economy of the brain'(1704) 등의 예에서 보이듯 경제는 ‘(예술 작품 등의) 적절한 구성’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학문적인 인식에서도 크세노폰의 저서에서와 같은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애덤 스미스의 스승이었던 글래스고 대학의 프랜시스 허치슨이 1742년에 발표한 《도덕철학 입문요강Short Introduction to Moral Philosopy》이라는 좀 엉뚱한 제목의 책은 내용에서 크세노폰의 저서와 별 차이가 없다. 허치슨은 이 책에서 결혼과 이혼, 부모와 자식 그리고 주인과 하인의 도리와 함께 재산, 상속, 계약 등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결국 그 기원에서 경제라는 말은 단지 가정의 살림살이라는 뜻이었다. 가정이라는 구체적이고도 독특한 인간관계 속에서 그 내용이 규정되는 것이 경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경제와 경제학의 내용은 윤리나 도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2. 정치경제(학)
초기 근대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이 말은 ‘나라polis의 살림살이’라는 뜻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은 원래 프랑스어의 l'onomie politique라고 쓰였으며 이것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 political economy이다. 이미 16세기 초반부터 영국에서도 싹트고 있었으며, 독일에서는 이 말에 해당하는 사고방식이 ‘살림살이 단위로서의 국가’라는 생각이 드러나고 있었다. 독일어 특유의 표현인 ‘국민경제’는 Volkswirtschaft 또는 Nationaloekonoie로 쓰이는데 이 말은 정치경제라는 말보다 국가라는 사회적 맥락을 더욱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슘페터는 정치경제학에 해당하는 말로 더욱 노골적으로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국가학Staatswissenschaft이라는 말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렇게 정치경제를 국가관리와 완전히 동일시하는 일은 독일의 관방학官房學, Cameralwissenschaft적 전통에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거의 2천 년 간 가정관리라는 뜻으로 쓰던 말이 어떻게 근대 초기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이러한 정치경제라는 규모로 거창하게 확장되었을까. 여기서 중요한 출발점이자 원인은 근대 절대주의 국가 확립이다. 중세 유럽의 군주나 영주들은 자기네 신민들의 살림살이가 어떠한가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는 일이 드물었다. 16세기 초에 띄어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군주가 나라의 살림살이 같은 내부 사정에 관여할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도 암시하지 않는다. 국가는 영토를 정복하여 확장하거나 취득하고 또 빼앗기도 하는 일종의 재산 같은 것으로, 그저 군주가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그 영토를 빼앗기지 않고 확실하게 자기의 지배하에 있도록 묶어두는 것뿐이었다. 실제로 마키아벨리의 글에서 국가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스타토stato가 쓰인 수백 개의 용례를 조사해보았더니 두세 번의 예외를 빼고는 모조리 목적격으로 쓰였다고 한다. 군주에게 국가는 어원이 같은 부동산estate처럼 그저 뺏고 뺏기는 어떤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실제로 당시 스타토는 매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16세기 중반 이후 일정한 영토에 뿌리박은 근대적인 국가가 나타나면서 군주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관념은 크게 바뀌게 된다…옛날에 이 지역 저 지역 쓸고 다니며 땅따먹던 시절의 군주를 바람둥이 놈팽이에 비유한다면, 한 지역에 정착한 군주는 조신한 가장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에 따르면 16세기 중반 이후 군주들은 집안을 잘 보살피는 훌륭한 가장에 비유하여 그들이 아나갈 바를 논하는 정치 논설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군주와 국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틀이 집안에서 가부장과 식솔들의 관계에 적용되던 경제라는 틀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중 최고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의 군주도 나라를 집안 돌보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는 그냥 일반 가정의 경제가 아닌 국가의 경제를 뜻하므로 정치경제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3. (순수)경제(학)
자유주의 경제사상이 풍미하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경제란 가정이든 국가든 그 어떤 사회적 맥락도 전제로 하지 않는 그야말로 독자적인 인간 행동의 영역이라는 사상이 뻗어갔다. 또한 이를 연구하는 경제학도 정치경제학이 아닌 순수 경제학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가 강하게 제기되기 시작한다. 이른바 한계혁명을 겪으면서 신고전파 경제학이 나타난 후 1890년 마셜이 《경제학 원리Principle of Economics》라는 제목의 저서를 출간하면서 처음으로 앞부분에 ‘정치’가 붙지 않은 경제학이라는 용어가 쓰이게 된다.
여기에는 새로운 용어가 나왔다는 것 이상의 혁명적 변화가 숨어 있다. 인간의 경제적 행동은 사회적 관계와 독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회는 그러한 경제활동의 결과물로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회와 경제의 관계가 완전히 거꾸로 역전되어버린 것이다…항상 질문은…당위의 문제로 제기되기 마련이다…정치경제 문제에서…대답에는 갖가지 정치·사회·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고려된다.
그런데 경제(학)에서는 그 반대다. “하인에게 얼마만큼의 임금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하인의 임금은 (시장에서) 어떻게 결정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 답은 사회적 맥락과 무관하게 인구 증가율이나 경제성장률 등과 관련된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으로 ‘과학적·객관적’으로 주어지게 된다…정책 권고는 “이러저러하게 임금과 이자율이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오래 살고 싶으면 이걸 따르는 게 좋다. 윤리적·정치적 고려 때문에 딴짓 하는 거야 자유지만, 나중에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는 식으로 제출되고 만다. 즉 사회와 경제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어 경제는 여타의 사회적 관계에 순응해야 하는 객관적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경제학은 더 이상 윤리학이나 정치학의 일부분이 아니라 객관적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이 되어버린 것이다.
홍기빈 (지은이) | 책세상 | 2001-08-05 | 초판출간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