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차가 크지 않고 식사 환경도 비슷한 아시아권 참가자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어쨌거나 다들 훌륭하다. 음악을 들은 지 20여 년밖에 되지 않은 가나데가 이렇게 말하면 거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5, 6년 전까지는 혼자 심취해 엉뚱하게 해석한 곡을 연주하는 참가자가 꽤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참가자가 없다. 다들 어엿한 음악을 이루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다양한 음원과 정보를 입수할 수 있게 된 지금, 분명 세계적으로 평균 수준이 올라간 게 아닐까? 그 때문인지 좋으나 싫으나 전보다 격차가 줄었지만, 그래도 국가색이라는 건 재미있다.
중국 참가자들은 대륙의 기상이라고 해야 할까, 뻥 뚫린 시원한 맛이 있다. 이렇게 콩쿠르에 나올 만한 참가자는 일단 예외 없이 부유층 혹은 중산층인데 중국의 중산층은 일본의 부유층에 해당하니 당연히 다들 유복한 가정 출신이다. 유리한 입장에 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이점을 최대한 향유하는 중국 특유의 힘차게 곧게 뻗어나가는 연주 스타일은 매력적이지만, 요즘은 익숙해져서 어떤 초절기교를 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그보다 부러운 건 중국 참가자에게서 느껴지는 탄탄한 자기 긍정이다.
일본인은 좀처럼 갖기 어려운 정신이다. 일본인이 말하는 ‘본연의 모습’은 타인에 대한 콤플렉스나 자신감의 부재, 불안한 자아 정체성에서 달아나기 위한 핑계다. 다양한 갈등을 거쳐 손에 넣을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을 저들이 처음부터 당연하게 갖고 있는 건 혹시 중화사상과 일당독재 체제 때문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만다. 어쩌면 국내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해 거기서 살아남은 순간 그런 갈등은 이미 해소되는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다른 아시아 각국의 참가자들은 훨씬 나약하다. 어째서 내가 여기에 있는가, 왜 이 무대에서 피아노를 치는가, 그런 의문과 갈등이 그대로 보일 때가 있다.
이번에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이 눈부신 한국 참가자들이다.
흔히 말하는 한류 스타를 볼 때도 드는 생각인데 가나에는 그들에게서 올곧은 정열과, 이런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일종의 ‘처연함’을 느낀다.
그들이 민족적으로 갖는 ‘격렬함’과 ‘처연함’은 드라마틱한 클래식 음악과 궁합이 좋다.
― 온다 리쿠, 『꿀벌과 천둥』, 김선영 옮김, 현대문학2017, 182~1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