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설
근대의 책 읽기와 소설 독자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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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을 읽었을까?
일제시기 책들은 대상 독자의 문화적·사회적 경험에 따라 아주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우선 표기 자체가 순한글·일어·한문·국한문 등으로 달랐고, 방각본·구활자본딱지본·활자본 등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차이는 소설의 향유방식뿐 아니라, 생산과 유통 방식의 차이와 곧장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어떤 독자들은 평생 단 한 권의 책도 사 보지 않을 팔자를 타고나 장바닥이나 동네 사랑방에서 구연口演되는 이야기를 듣다가 복된 생을 마쳤다. 이는 인류사가 시작된 시점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범세계적인 ‘읽기 방식’의 하나였던 ‘공동체적-음독’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일제가 초현대식으로 꾸민 도서관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우편환으로 동경의 출판사에 주문하여 받은 책을 자기 방에서 고독하게 읽었다. 이와 같은 ‘개인적-묵독’ 또한 책이 존재한 이래 이미 개발되어 있는 방법이었으나, 그 전까지 이 방법을 훈련하여 몸에 익힌 이들은 특별한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말없이 혼자 읽는 것’이 모든 책 읽기의 원칙이 되었다. 이러한 ‘차이’는 그저 특정한 시간에서 공존한 다름이 아니라, 책 읽기 문화의 변화가 매우 짧은 시간 속에 응축한 결과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범주화와 명명은 필연적으로 실재하는 현상의 복잡함과 풍부함을 찌그러뜨리고 허상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책의 표기법, 내용, 발표형태 등을 기준으로 1920~30년대 소설 독자층을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①구활자본 고전소설딱지본 및 일부 신소설의 독자, 구연된 고전소설과 일부 신소설 등의 향유자 : ‘전통적 독자층’
②대중소설, 번안소설, 신문 연재 통속소설, 일본 대중소설, 1930년대 야담, 일부 역사소설 등의 향유자: ‘근대적 대중 독자’
③신문학의 순문예작품, 외국 순수문학 소설, 일본 순문예작품 등의 향유자: ‘엘리트적 독자층’
이러한 구분은 여러 자료에 나타난 복잡한 ‘구별’을 통해 추론한 결과이다. 예컨대 언론사·출판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어온 『조선출판물개요朝鮮に於ける出版物槪要』조선총독부 경무국, 1930의 〈연도별·종별 조선문 출판물 허가 건수〉는 문학 관계서적을 ‘구소설’ ‘신소설’ ‘문예’ 등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구소설’ ‘신소설’은 구활자본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가리키고 ‘문예’는 신문학 영역에 속한 작품집들을 지칭한다■자료실: 표2 〈1920~30년대 총독부 경무국 허가 문학 관련 출판물 건수〉 참조.
독자층 분화의 양상을 알려주는 여러 자료 중 하나를 보자. 다음 그림은 1930년 잡지 『소년』에 실린 「중앙인서관 도서목록中央印書館 圖書目錄」인데, 이 광고는 400여 종의 책을 분야에 따라 나누어놓아 당시 독자와 출판인의 책에 대한 분류감각과 장르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즉 1930년 현재의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이 목록을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림은 세 장으로 이루어진 광고의 두 번째 페이지를 다시 둘로 나눈 것으로 여기에는 ‘문예 신소설과 구소설’ ‘경서·시율詩律·구교과舊敎科’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보는 것처럼 각종 소설 단행본들을 ‘문예 신소설’ ‘구소설’로 구분하고 다시 그 속에서 비슷한 종류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을 묶어놓았다.
문학에 관한 한, 당대 광고에서 이처럼 상세한 분류목록을 보기란 쉽지 않다. ‘신문학’에 해당할 (1)의 “만히 읽고 잘 팔니고 평판 높흔” ‘문예 신소설’의 선두에는 문학독본과 외국문학 ‘걸작집’ 류가 있고 다음으로 이광수 소설의 작품목록이 있다. 이어 1920년대 중반에 발간된 『만세전』 『환희』 같은 주요 ‘신문학’ 소설 작품집들이 등장하고, 인기작가 노자영의 시집·서한문집인 『영원의 몽상』 『청춘의 광야』 『사랑의 불꽃』 같은 책이 함께 있다.
(2) 영역은 모두 당대에 인기 있던 번역 또는 번안소설들이다. 『해당화』는 『부활』톨스토이의 번안물이며 『인육人肉장사』의 원작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다. (4)에도 번역·번안소설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2)에는 1910년대 중·후반부터 1920년대 초에 발간되어 인기를 검증받은 번역·번안작품들이 주로 포함되어 있고, (4)에는 1920년대 중반 이후에 번역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4)에는 『여등汝等의 배후에서』 『나나』 『악마와 갓치』 등 다양한 외국소설과 함께, 『추월색』 『능라도』 『빈의 루』와 같이 (1)에 속하지도 않고 구소설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좁은 의미의 ‘신소설’ 작품들이 있다. 그리고 『조선 문사의 연애관』 『이성관계의 혁명』 등 ‘문예 신소설’과 무관해 보이는 책들도 포함되어 있다. (3)에는 1920년대 중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사랑~’ 시리즈의 책들이 따로 묶여 있다. 이 책들이 소설인지 서한문집인지는 불분명하다.
(5) ‘구소설舊小說’에는 오늘날 문학사에서 신소설로 분류되는 『구마검』 『목단화』 『쌍옥루』 등의 소설들, 『옥중가인』 『옥중화』 등 춘향전 계열의 소설들, 그리고 『구운몽』 『조웅전』과 『삼국지』 『수호지』 등 인기 있는 다양한 고전소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노처녀의 비밀』 『미인의 루淚』 등과 같이 새롭게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들도 실려 있다. 『추월색』 『능라도』 『빈의 루』 등이 ‘신소설’로 분류된 데 반해, 『구마검』 『목단화』 『쌍옥루』 『노처녀의 비밀』 『미인의 루』 등이 ‘구소설’로 분류된 것을 보면 문학사에서 ‘신소설’과 ‘구소설’의 구분이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으며, 신·구소설을 분류하는 당대의 감각이 지금과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6)은 ‘경서經書·시율詩律·구교과舊敎科로서 사서삼경과 천자문, 조선과 당나라의 한시집 등 한적들의 목록이다. 1930년 현재의 독서인구 중에도 이러한 책을 찾는 독서가들이 여전히 많았던 것이다.
‘전통적 독자층’ ‘근대적 대중 독자’ ‘엘리트적 독자층’이 병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식민지시대 독자층을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병존은 전통적인 것과 박래적인 것, 전근대에 속하는 것과 근대적인 것 사이의 동시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소설을 읽었는가를 기준으로 나뉘는 세 가지 독자부류에, 각각 다른 사회적 지위와 계층에 소속된 사람들을 대응시킬 수 있다.
‘전통적 독자층’에는 ‘노동자와 농민’ ‘양반’ ‘부녀자’로 표현되는 존재들이 상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근대적 대중 독자’는 ‘전통적 독자층’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보다 근대적인 계층에 속하는 존재들, 즉 도시 노동자·학생·‘신’여성 등이 대표한다. 그리고 주로 ‘신문예의 순문예작품, 외국 순수문학 소설, 일본 순문예작품 등의 향유자’들인 ‘엘리트적 독자층’은 ‘전통적 독자층’과 ‘근대적 대중 독자’에 속할 직업인과 계층 구성원들 중에서 특별히 육성된 존재들로 이루어진다. ‘문자’의 훈련과 외국어 습득을 기꺼이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근대적인 의미의 지배층과 지식인층을 구성하는 존재들이 수적으로 소수인 ‘엘리트적 독자층’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엘리트 계층 자체를 이루는 존재는 아니기에 ‘엘리트적’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경향일 뿐이며, 따라서 제한적인 타당성 만을 지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각 부류는 명확한 ‘층’을 구성하기보다는 서로 복잡한 교집합을 가질 것이기에 ‘ ’를 써서 지칭하고자 한다.
위와 같이 분화되기까지 전체 소설 독자층의 확대와 재구성은 다음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변화가 근대 소설 독자층의 규모와 구성상의 특징을 전체적으로 규정한다.
첫째, ‘전통적 독자층’ 즉 고전소설 독자층의 재편과 확대18세기 이후~1910년대 및 신소설 독자층의 형성1890~1910년대.
둘째, 신소설 독자층의 확대와 와해1910~20년대, 그리고 이에 이은 대중소설·번안소설·신문연재 통속소설1920년대·일본 대중소설 독자의 형성1930년대과 변화.
셋째, 신문예의 순문예작품·외국 순수문학 소설·일본 순문예작품 등의 향유자층과 관련된 ‘엘리트적 독자층’의 새로운 형성1920년대과 분화1930년대.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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