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누구와 아파트를 공유할지는 결정할 수 있어도 이 지구상에서 누구와 함께 살지는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 지구적 관점에서 누구와 함께 살지를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종족이나 인종 학살로 귀결될 것이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 같은 비극을 낳게 됩니다. 우리는 먹고, 자고, 걷고, 뛰는 몸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배고프고, 목마르고, 피곤하고, 다치고, 상처받으며 늙어 가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상처나 노화에 취약한 사람들은 서로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택받은 사람이 있어 상대적으로 선택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런 선민과 비선민의 구분에서 위계가 생기고, 그런 위계가 생기면 동등한 의존과 지원의 가능성이 없어집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만 인정받고 성공하는 세상은 사실상 남자다운 여자, 여자다운 남자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적 배경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여자다운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회적 금기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인간으로서의 인식 가능성마저 박탈당할 수 있습니다. 동성 간 결혼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해 동성 파트너의 재산, 친권, 시신 등을 양도받을 수 없다는 것은 평생을 함께 배우자로 동고동락해도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단순히 나와 다른 별종들의 독특한 취향과 관련된 특이하고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인식 가능성 혹은 인정하게 하는 인정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삶은 삶으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은 삶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과 ‘덜 된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가 비평성이나 비평 의식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비평성이 미래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