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학적 성취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1976년에 천연두를 퇴치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을 줄여보고자 노력해왔던 세계보건기구가 올린 최대의 성과였다. 하지만 그 후 전염성 유기체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에이즈의 출현은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주목할 만한 중대사건이다. 그리고 에이즈를 일으키는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 즉 HIV-1 바이러스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아직까지 이렇다 할 치료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20세기에 들어 의학은 우리 몸에 기생하는 미생물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결과 오랫동안 유지되던 인간숙주와 병원체 사이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이런 현실을 보여주는 두 번째 징후, 하지만 여러 면에서 더 의미심장한 징후는 말라리아나 결핵을 비롯한 낯익은 전염병의 변종들이 발달한 것이다. 20세기가 끝나가는 무렵에 전염병들이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던 종래의 파괴력을 회복하면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의학자들은 자신들이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깊이 개입할수록 병원체들도 끊임없이 쏟아지는 화학적 처방에 내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생물학적 진화를 재촉한다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숙주와 기생생물의 오래된 균형이 인간의, 그리고 모든 다세포 생물의 생명에 내재하는 본질적 특성이라는 이 책의 결론이 에이즈의 출현뿐 아니라 저항력이 강한 기존 전염병의 변종들이 등장하는 배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사실 아직까지 이 견해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래서 나는 이 책의 결론부분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에이즈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몇 가지 이론이 세워졌고 에이즈라는 전염병이 미국 및 세계 각지에 얼마 만한 규모로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통계수치도 나왔다. 그래서 나는 에이즈에 관한 몇 가지 관찰결과를 간략히 소개하고, 이 병의 양상이 우리에게 친숙한 생태학적·사회학적 패턴과 일치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에이즈의 기원부터 살펴보자. 1980년대에 에이즈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의사들은 HIV-1 감염에 대응하는 손쉬운 치료법이 곧 개발될 것으로 기대했다. 때마침 아프리카 원숭이의 한 종에서 HIV-1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 바이러스가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숙주를 바꾸는 과정에서 최근에 일으킨 질병이 바로 에이즈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곧이어 이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에서 아이티를 거쳐 미국으로 전파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로써 에이즈의 출현과 확산이 그럴듯하게 설명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이론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었다. 아프리카의 원숭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바이러스는 비교적 독성이 약한 HIV-2의 형태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1 바이러스는, HIV-2와 세부적인 구조가 전혀 달랐기 때문에 일부 아프리카 원숭이와 인간에게 나타나는 감염증의 형태로부터 최근에 파생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이 점을 고려한 크로아티아 출신의 저명한 의학사가 미르코 그르메크는 1989년, 에이즈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인간의 감염증으로 지구상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환자들의 증상이 매우 다양하고 그리 자주 발생하지 않아서 의학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르메크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의학상의 변화가,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행동양식의 변화가 에이즈를 전염병으로 출현시킨 배경이었다.
지난 50여 년 동안 발달해온 분자생물학의 기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HIV-1 바이러스를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나중에 에이즈와 관련이 있다고 인정하게 된 증상들은 1868년 이른바 카포시육종이 빈에서 진단되고 명명되었을 때 이미 관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1930년대부터는 생소한 감염증에 직면한 의사들이 앞으로 과학이 발달하면 수수께끼가 풀리기를 희망하면서 조직 샘플을 보관해두기도 했는데, 그런 조직을 분석한 결과 에이즈가 최초로 인식되기 수십 년 전에 이미 HIV 감염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HIV-1이 인간을 오랫동안 감염시켜왔다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지구 곳곳의 인간집단들에게 서로 다른 바이러스와 그 변종이 존재하며 이 개체들이 유전자의 재조합을 통해 전지구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토착적인 변종이 뒤섞이면서 생명력이 강한 튼튼한 바이러스는 증식하고 생명력이 약한 변종은 도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에 주목받게 된 에이즈 발생 자체도 오래된 바이러스 변종의 재조합으로 인해 기존의 바이러스로부터 HIV-1 이라는 새로운 바이러스가 태어나면서 빚어진 현상일지 모른다. 물론 현 단계에서는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지만, HIV가 아프리카의 보균자한테서 근래에 전이되었다는 설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먼 과거에서부터 HIV 바이러스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왔든, 1970년대에 에이즈가 돌발한 것은 인간의 행동양식이 숙주 간의 바이러스 전파를 용이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변화해온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변화 가운데 하나는 미국 및 세계 각지에서 동성애자의 인권이 옹호되면서 그들 사이의 무분별한 성관계가 증가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1970년대부터 값싼 플라스틱 주사기가 나오면서 헤로인을 비롯한 향정신성 의약품을 정맥에 주사하는 일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런 행위들이 일반화되면서 HIV 바이러스는 예전에 비해 훨씬 쉽게 전파될 수 있었다 과거에는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의 혈관으로 직접 침투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감염되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다. 지난날 HIV 감염의 사슬이 산발적이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치명적인 후천성 질병(곧 에이즈)에 감염되었다 하더라도 숙주들이 사망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염된 개인들이 주사기를 사용하고 무절제한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감염자로부터 새로운 숙주로 바이러스가 전이될 기회가 갑자기 많아졌고,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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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여행의 확산은 비단 HIV-1뿐 아니라 인간과 동식물에게 나타나는 그 밖의 모든 감염증과 질병의 균질화과정을 더욱 촉진한다. 이는 새롭게 등장하는 강력한 형태의 감염증을 순식간에 지구 곳곳에 확산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거의 매년 새로운 변종으로 진화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다. 다른 미확인 바이러스들도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인간과 기타 동식물을 감염시키는 질병은 유난히 빠른 속도로 진화한다. 이는 인간의 행동양식이 변하면서 다양한 변종의 미생물이 교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끊임없이 개발되는 신약과 살충제는 병원체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물론 에이즈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유일한 감염증은 아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에는 숙주와 기생체가 서로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생태적 균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독성이 강한 세균 대신 치사율이 낮은 변종과 만성질환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유행성 감염증이 풍토병으로 정착되는 경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동식물도 우리처럼 질병의 균질화과정을 겪는다. 그 중에서도 눈부시게 발달한 운송수단으로 인해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각종 질병에 노출되는 토착 야생동물이 가장 위험하다. 주로 인간의 활동에 기인하는 서식지의 변화도 야생 동식물에게 영향을 미친다. 전반적인 결과는 개별 종의 멸종으로 나타나며, 장기적인 파급효과는 예측조차 할 수 없다.
요컨대 오늘날 유기체의 진화는 인간이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킨 탓에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인간이 감염성 질병에 노출되는 양상도 급변하고 있으며, 이는 생태적 관계가 폭넓게 조정·재조정되는 과정의 일부이며, 미래의 궤적은 여전히 신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결국 생물학적 진화는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개입함에 따라 - 한편으로는 현대과학에 이끌려, 다른 한편으로는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쫓겨 - 역사상 유례없이 가속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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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과학과 기술은 [석유나 석탄 같은 유기 에어지원이 아닌] 무기 에너지원을 개발함으로써 경쟁관계에 있는 생명체들 사이의 자연적인 균형을 바꿔놓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능력을 엄청나게 신장시켰다. 로베르트 코흐가 처음으로 콜레라균을 확인한 1884년부터 세계보건기구가 천연두 퇴치에 성공한 1976년까지, 인간이 전염병을 정복해온 것처럼 보였던 것은 인류의 역사보다 장구한 생태적 균형을 가장 극심하게 어지럽힌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염성 질병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제아무리 입맛에 맞게 환경을 바꾸고 다른 종들을 몰아낸다 하더라도 생명이라는 그물에 걸려서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