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차가 되면서, 한 대리는 휴게실에 종종 간식거리와 음료들을 넣어 놨다. 핫팩도 챙겨 주고 발을 쬘 수 있는 소형 전열기 하나도 갖다 놨다. 간식과 음료, 핫팩은 회사에서 구매하는 지급품이었지만 소형 전열기는 한 대리가 직접 인터넷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가끔씩은 일부러 가장 마지막에 퇴근해 공유기와 중계기를 켜 놓고 가기도 했다. 다음 날 소장이나 위에 차장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했다. 모든 것을 아는 한 대리는 미안했다. 그래서 망설이던 끝에 소장에게 이제 그만 선길을 현장에 돌려보내자고 건의도 했다.
소장은 서류를 넘기며 반장이 뭐라 하더냐고 되물었다. 그런 것이라면 나름 또 계획이 있었다. 선길 없이도 이 정도는 해 왔으니 이제 푹 절인 배추 같은 선길을 보내 주면 그보다 더,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말해 볼 만했다. 당연히 말대로 된다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말을 해 놓는 것, 그것으로 어느 정도라도 그렇게 해 보겠다는 답을 들어 놓는 것은 요긴했다. 일단 말을 뱉어 놓으면 알아서 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소장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노예를 부려 본 적이 없어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시키기만 해서는 능률이 안 오른다. 인간이란 뭐든 자기 스스로 움직여야, 그렇다고 착각이라도 해야 효율을 낸다. 부려 보면 안다. 그래서 한 대리가 반장이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해서 말한 것이라고 했을 때 소장은 확 짜증을 냈다.
한 대리는 소장이 무서웠지만 꾹 참아 내며 준비한 대로 말했다. 한창 바쁘고 모두 열심히 하고들 있는데 사람이 하나 더 늘면 사기도 오르고 그만큼 성과도 더 나지 않겠냐고, 그렇게 하는 것이 소장님이 평소 늘 강조하신 관리자의 역할이자 책임인 것 같다고. 하지만 말도 어조도 뒤로 갈수록 흐릿하게 뭉개졌다. 소장이 무슨 돼먹잖은 소리를 지껄이냐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인마, 해 줄 거 다 해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주는 게, 그게 관리야? 그게 시중드는 거지, 관리야? 해 줄 거 다 해주고 챙겨 줄 거 다 챙겨 줘야 일하겠다는 놈은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놈이야. 관리는 그런 놈들부터 제일 먼저 솎아 내는 게 관리고. 걔네들은 관리가 안 되니까! 황 반장도 그런 놈이니까 내 진즉 솎아 낸 거야. 알겠어? 그런 놈들은 해 주고 챙겨 줄수록 지가 상전인 줄 안다고. 아쉬운 게 있어야, 뭐 하나 빠지고 부족한 데가 있어야, 그걸 내가 쥐고 흔들 수 있어야 관리가 되는 거야.”
한 대리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명백한 거짓말이 있었다. 한 대리는 탄원하듯 소장을 봤다. “그게, 그게 없잖습니까…….”
소장은 기가 찬다는 듯 한 대리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네가 어떻게 알아?”
“네?”
“저 산에 정말 멧돼지가 한 마리도 없는지 있는지 네가 알아? 산 타고 다니면서 찾아보기라도 했어? 정말 오늘 밤에라도 멧돼지가 내려오면 어떻게 할 거야? 내일이라도, 아니면 모레라도 내려와서 비닐하우스 작살내면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책임질 거야?”
한 대리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봐라, 너부터 당장 그러고 있잖냐.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소장은 흡족하게 웃었다. 즉흥적으로 한 말이었지만 퍽 마음에 들었다. 멧돼지를 떠올렸던 그때처럼.
― 이혁진, 『관리자들』, 민음사2021, 44~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