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은 흔히 부자가 된 후에도 장시간씩 일한다.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임금 노동자들에게 여가를 준다는 생각에 분개한다. 실업이라는 가혹한 벌이 내려진 경우만 제외하고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자기 아들들이 여가를 누리는 것조차 싫어한다. 대단히 기묘한 일은 아들들에겐 제대로 배울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길 바라면서도 아내나 딸들이 일하지 않는 데 대해선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사인 양하며 실용성 없는 것을 예찬하는 이 같은 태도는 귀족주의 사회에서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었고 금권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국한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태도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여가의 현명한 이용은 문명과 교육에 의해 가능하다.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 이상 없다. 다만 우매한 금욕주의 ― 그나마 자기는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나 강요하는 ― 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과도한 노동을 주장케 할 뿐이다.(24~25쪽)
“나는 육체노동을 즐긴다. 그것은 내가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이 지구를 얼마만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즐겁기 때문이다. 내 몸이 주기적인 휴식을 요구하는 건 사실이므로 최선을 다해 채워 넣어야 하겠지만, 아침이 오고 내게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노고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갈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나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일을 생계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것이든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바로 여가에서 나오는 것이다. 잠깐의 여가야 즐겁겠지만 하루 24시간 중 4시간만 작업하게 된다면 그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를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만일 현대 세계에서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문명을 모욕하는 것이다. 과거 그 어느 시대에도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속편하게 노는 것에 대한 수용력이 있었다. 그러나 능률 숭배로 인해 그러한 부분은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인간은 모든 일이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해 행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일하는 법이 없다. 예를 들어 진지한 사람들은 영화 보러 가는 습관에 대해 끊임없이 비난하며 그런 버릇은 젊은이들을 범죄로 이끈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영화를 만드는 노동은 훌륭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이기 때문에, 또한 돈을 벌게 해주기 때문에.
이익을 가져오는 것만이 바람직한 행위라는 관념이 모든 것을 뒤바꿔 버렸다. 당신에게 고기를 제공해 주는 정육점이나 빵을 제공하는 빵집 주인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공해 준 음식을 즐길 때의 당신은, 일하는데 필요한 힘을 내기 위해 먹지 않는 한 불성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란 얘기다. 그 두 가지가 거래의 양 측면이란 점을 생각할 때 그 같은 얘기는 모순이다. 차라리 열쇠는 선이고 열쇠 구멍은 악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품 생산에서 나온 가치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 물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의해 획득된 이익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이윤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의 사회적 목적은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는 데 있다. 생산의 개인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 사이의 이 같은 분리야말로 이윤 창출이 산업을 자극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명쾌한 사고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이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고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생산을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기쁨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얘기는 하루 4시간 노동으로 생활 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나는 지금 소위 ‘지식인’으로 만드는 따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부들의 무도회는 외진 시골 지역들을 제외하곤 사라져 버렸지만 그들을 도야시켜 주던 그 충동은 여전히 인간의 본성 속에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도시 사람들의 즐거움은 대체로 수동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영화를 보고, 축구 시합을 관전하고, 라디오를 듣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들이 모조리 일에 흡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여가가 더 있다면, 그들은 과거 적극적인 부분을 담당하며 맛보았던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28~30쪽)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33쪽)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사회평론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