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설과 어둠 때문에 창문을 아무리 내다봐도 밖의 사정을 정확하게 살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보이지 않아 더 초조하고, 조바심 나고, 불안했다. 상상은 현실보다 늘 끔찍했다. 상상이 잔인할수록 무리 없이 현실을 받아들여 견딜 수 있었서였다. 갑작스런 재난이나 위험이 닥칠 때마다 사람들이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건 희망 따위가 아니라 상상이란 끔찍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표정을 보니 그도 지금 나만큼이나 잔인한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불을 꺼뜨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난로 옆에 딱 붙어 앉아 장작만 넣고 있었다. 불이 꺼지면 환상도 사라질까 봐 동이 날 때까지 성냥을 켰던 성냥팔이 소녀처럼 불꽃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컨테이너 박스 안은 따뜻하고 따뜻해서, 나중에는 좀 나른한 기운까지 더해졌다. 그러자 이 안이 전쟁통 같은 바깥 상황과 분리되어 딴 세계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남은 건 이곳과 우리뿐인 것 같았다.(41~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