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권
제7장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
[1] 행복이 탁월성에 따르는 행복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최고의 탁월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의 탁월성은 최선의 것에 대한 탁월성이다. 이것이 지성(nous)이건 혹은 다른 어떤 것이건, 이것은 본성상 우리를 지배하고 이끌며, 고귀하고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 자체가 신적인 것이든 아니든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적인 것이든, 자신의 고유한 탁월성에 따르는 이것의 활동이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이 활동이 관조적인 것임은 이미 말한 바 있다. [2] 이것은 이전에 논의했던 바에, 또 진리에 일치하는 것 같다. 이것이 최고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지성이 최고이며, 지성이 상대하는 대상 또한 앎의 대상들 중 최고이니까. 게다가 이 활동이 가장 연속적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행위하는 것보다 더 연속적으로 관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또 우리는 행복에는 즐거움이 섞여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탁월성에 따르는 활동들 중 ‘지혜(sophia)’에 따르는 활동이, 동의되는 것처럼 가장 즐거운 것이다. 여하튼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philosophia)’은 그 순수성이나 견실성에서 놀랄 만한 즐거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앎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앎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그러한 관조에서 더 즐겁게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하다. [4] 더욱이 우리가 논의하는 자족(自足)도 다른 무엇보다 관조적 활동과 관련한다.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나 정의로운 사람, 다른 탁월성을 가진 사람 모두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들을 필요로 하지만, 이것들이 충분히 갖춰졌을 경우, 정의로운 사람은 그가 그 사람에 대해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상대방, 혹은 그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행동을 하게 될 동반자를 필요로 하며, 절제 있는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 또 그 밖의 탁월한 사람들 각각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철학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혼자 있어도 관조할 수 있으며, 그가 지혜로우면 지혜로울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가 동반자를 가지면 아마 더 잘 관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가 가장 자족적이다.
[5] 또 이 관조적 활동만이 그 자체 때문에 사랑받는 것 같다. 관조적 활동으로부터는 관조한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 반면, 실천적 활동으로부터는 행위 자체 외에 무엇인가를 다소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6] 또 행복은 여가 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여가를 갖기 위해 여가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탁월성의 활동은 정치나 전쟁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것들에 관련한 행위는 여가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쟁과 관련한 행위들은 전적으로 그런 것 같다. (누구도 전쟁을 위한 전쟁을 선택하거나 시작하지는 않으니까. 만약 누군가 전투와 살육이 생겨나게 하려고 친구를 적으로 만든다면, 그는 완전히 피에 굶주린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정치가들의 행위 또한 여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행위들 자체 이외에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하거나 자기 자신과 동료 시민들에게 행복을 마련해 주려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정치적인 행위와는 실로 다른 것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그렇게 다른 것으로서 추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7] 그래서 만약 탁월성에 따른 행위들 중 정치적인 행위들과 전쟁과 관련한 행위들이 그 고귀함이나 위대함에 있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이 행위들은 여가와 거리가 먼 것이며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자체 때문에 선택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반면에 지성의 활동은 관조적인 것으로서 그 진지함에 있어 특별한 것이며 활동 자체 이외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즐거움을 (이 즐거움이 그 활동을 증진시킨다) 가지는 것이라면, 또 [마지막으로] 만약 인간에게 가능한 한 자족성과 여가적인 성격, 싫증 나지 않는 성질, 그리고 지극히 복된 사람에게 귀속하는 모든 성질들이 바로 이 활동에 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다면, 이활동이 삶의 완전한 길이를 다 받아들이는 한, 이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행복에 속하는 것들 중 불완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8] 그러나 이러한 삶은 인간적 차원보다 높은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인 한 이렇게 살 수 있다기보다는 인간 안에 신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는 한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신적인 어떤 것이 복합적인 것에 대해 차이 나는 바로 그만큼 신적인 것의 활동 또한 다른 탁월성에 따른 활동에 대해 차이를 가진다. 그러므로 만약 지성이 인간에 비해 신적인 것이라면, 지성을 따르는 삶 또한 인간적인 삶에 비해 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9] 그런데 각 개인은 바로 이 최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지배적이고 더 좋은 것인 한, 그렇기에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의 삶을 선택한다면, 사리에 맞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이 지금 이야기와도 잘 연결될 것이다. 각각에게 고유한 것이 본성적으로 각각에게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지성이 ‘인간’인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