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2. 1. 칭찬 연설에 대하여(70~82)]
칭찬하고 비난하는 방법은 잘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명예롭게 사는 것과도 연관이 크다.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그렇지만 칭찬과 비난이 생겨나는 출발점에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덕과 관련된 것 모두는 전적으로 칭찬받아야 하고 악덕에 묶여 있는 것은 비난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에서 겨냥해야 하는 바는 명예이고, 후자에서 노려야 하는 바는 수치이다. 이 칭찬[-비난] 연설은 일어난 사실 기술과 열거로 구성된다. 이 연설은 [청중을] 믿게 만들거나 그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기보다는 논증 없이 [청중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데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에 확실한 것 혹은 확실한 것으로 인정받는 일을 키우고 확장하는 연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서 논의한 ‘사실 기술’과 ‘강조’의 규칙들이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게다가 이러한 연설 종류(칭찬 연설)에서 사용되는 모든 방법은 대개 청중의 즐거움과 기쁨을 겨냥하는 것이므로, 이 연설에서는 문장[-구성]에는 장식을, 개별 단어의 사용에는 선명함을 부여해야 한다. 특히 선명함은 (귀를 붙잡는) 큰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신조어나 고어나 비유를 종종 사용한다면, 이 매력은 생겨날 것이다. 아울러 문장 구성에 있어서도 [또한 마찬가지인데, 이를 위해서는] 같은 수의 음절의 대칭isocolon이나 같은 격 변화homoioptoton와 같은 철자로 끝나는 단어들의 호응homoioteleuton이나 의미상 대구antithesis나 같은 단어 연속 반복geminata이나, 문장 시작과 끝이 같은 율격을 유지하면서 문장이 반복된 호흡rythmus으로 둘러싸여야 한다circumscripta. 이 율격은 노래처럼 해서는 안 되고 청각을 만족시키기에 적당한 어떤 산문의 흐름에서 생겨나는 반복적 호흡이어야 한다.
사안들의 장식들도 더 자주 이용해야 한다. 만약 그것들이 놀라움을 자아내거나, 뜻밖이 것이거나, 기이한 현상, 전조와 신탁에 의해 표현된 것이거나, 해당 사건과 연관된 것으로 신적이면서 운명적인 사건으로 여겨지는 것이라면 말이다. 모든 청중은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바를, 경이로움을 주는 바를, 그리고 뜻밖의 결론을 접하게 될 때, 듣는 와중에 어떤 즐거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음이나 나쁨은 다음 세 부류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외부에서, 신체에서, 마음에서]. 먼저 혈통의 좋음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이는 간략하고 겸손하게 칭찬해야 한다. 만약 불명예스러운 것이라면 건너뛰는 것이 좋고, 미천하다면 그냥 지나가거나, 만약 칭찬하는 사람의 명예를 키우는 것이라면 언급해야 한다. 이어 사정이 허락한다면 운복運福 좋음과 재산[과 권세]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다음으로 신체의 좋음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 이 좋음 중에서 [외모는] 마치 [그 자체가 덕의 얼굴인 양] 덕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처럼 여겨지므로, 외모가 가장 쉽게 칭찬의 대상이 된다.
다음은 업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배치하는 것은 세 가지 방식이다. 즉 시간의 순서를 유지하거나 가장 나중 일을 가장 먼저 말하거나 종류 상 여러 가지이고 성격상 다양한 업적들의 경우,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든 고유 덕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유도-배치해야 한다. 그러나 덕과 악덕에 대해서는 그 논의가 너무 광범위하므로, 지금은 넓고 다양한 논의는 피하고 주제 범위를 간략하게 좁히고자 한다.
그러니까 덕의 본질은 두 종류이다. 덕은 앎에 의해서 혹은 행위에 의해서 식별되기 때문이다. 분별력, 영리함, 가장 큰 명칭인 지혜라 불리는 것들은 오로지 앎을 통해서만이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욕망을 조절하거나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칭찬받게 되는 일의 담당은 행위이다. 이 행위를 칭하여 절제라고 부른다. 저 절제가 개인 업무와 집안일에 사용되면 사적인 분별력, 공동체의 일에 적용되면 공적 분별력이라고 불리곤 한다.
그런데 절제도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일과 공적인 일에 분류-적용되는데, 순경에는 두 가지 행동 양식에 의해서 구별된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자 추구하지 않음을 통해서와 자기 책임 하에 있는 물건의 처리와 권한의 사용에 있어서 엄격한 자제를 통해서 [절제의 분별력]이 드러난다. 역경에서도 절제는 마찬가지로 두 가지 행동 양식으로 나타난다. 다가오는 불행과 흉사에 맞서는 것이 용기이고, 이미 닥친 어려움을 감당하고 끝까지 참고 견디어내는 것을 인내라 부른다. 이 모든 덕목들은 ‘큰 마음’(도량이 크고 아량이 넓은 관대한 마음magnitudo animi이라는 한 개념에 포함되는데, 돈을 쓰는 데 통이 큼liberalita, 손해를 보거나 불의를 겪음에도 의연하고 꿋꿋한 마음의 고고한 지조altitudo animi, 이러한 종류의 [진지함, 안정된, 소란스럽지 않음] 모든 [마음-모양]이 이 ‘큰 마음’에 속한다.
한편 공동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덕은 정의正義, 의당 해야 할 바라고 불린다. 이 ‘정의’는 신에 대해서는 경의敬義, 부모에게는 효의孝義, [통상 훌륭함이라 표현되고], 거래에서는 신의信義, 형량을 조절함에 있어서는 관의慣義, 호의를 베푸는 경우에는 우의友義로 불린다. 이 덕목들은 실은 행行함 안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마치 지혜의 집행자 같은 그리고 동반자 역할을 하는 덕목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논의 중에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하고, 어떤 것을 전제로 삼았을 때, 무엇이 뒤따르는지를 판단하는 덕목(변증론)인데, 이 덕목 전체는 변증론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수사학에 해당하는 덕목이다.
사실, 수사학이란 다른 아닌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풍부하고 [청중의 범위에 있어서] 넓게 말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실은 원천에 있어서 변증론과 같은 곳에서 흘러나왔지만, [사용하는 표현과 주제의 범위가] 더 풍부하고 [대상 청중의 범위가] 더 넓으며 마음을 움직이고 일반 대중의 감각과 취향에 더 가까이 가 있는 덕목일 뿐이다.
이 모든 덕목을 지키는 파수꾼이 수치를 피하고 특히 명예를 추구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verecundia이다. 그렇지만 이 덕목 모두는 대개 마치 마음의 어떤 버릇habitus animi인 듯이 자리 잡고 있으며, 덕목 각각은 덕 고유 속성에 의해서 상호 간에 구별되도록, 구축되어 있다. 이 덕목에 의해서 행해진 일이 명예로운 것이고 최고의 칭찬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한편 제대로 된 공부와 기술을 통해서 미리 가꾸어지고 갖추어져서 덕 수행을 돕기 위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습관들이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문(법)학, 산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 기마술, 사냥술, 무기 다루는 법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특히 덕을 닦거나 신을 섬기거나 부모를 모시거나 친구를 위하거나 우선적으로 그리고 각별하게 대접해야 할 손님에 대한 예의禮義를 닦는 공부와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까지가 실은 덕에 관한 논의이다. 악덕의 종류는 정반대이다. 그런데 덕으로 보이는 악덕들이 우리를 속이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영악함이 분별을 흉내 내고, 육체적 탐닉을 멀리함에 있어서 둔감함이 절제와 비슷하게 보이고, 명예를 과도하게 예찬하면서 갖게 되는 오만함과 명예를 지나치게 낮추어 봄에서 생겨나는 고고한 척하는 무시가 도량이 큰 마음인 양 간주되며, 돈을 헤프게 쓰는 것이 통이 큰 것인 양 여겨지고, 무모함이 용기를 모방하고, 둔감한 무던함이 인내를 흉내 내고, 가혹함이 정의인 양 간주되며, 미신(맹신)이 종교(신앙)인 양 받들어지고, 유약한 마음이 유연함으로 비쳐지며, 소심함이 신중함으로 간주되고, 말 트집과 말꼬리를 잘 잡음이 논리적으로 따지는 능력(변증론)인 양 받아들여지며, 알맹이 없이 늘어놓는 청산유수가 바로 이 말 잘하는 능력(수사학)인 양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실은 같은 종에 속하지만 정도를 넘는 과도한 현상들이 훌륭한 노력인 양 간주된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칭찬과 비난의 모든 원천은 덕과 악덕의 분류에 있다. 그러나 연설문을 전체적으로 맥락 잡아 구성할 때에는 다음의 사실이 부각되어야 한다. 어떤 이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길러졌는지, 어떤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어떤 과정을 통해 성격이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중요한 일이 혹은 경이로운 뭔가가 일어났다면, 그리고 특히 그것이 신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뭔가라면 말이다. 그다음으로 어떤 사람의 판단과 말과 행동은 앞에서 논한 바의 덕목에 걸어 부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과 결과 및 사진 추이 경과의 경우는 ‘발견’ 논고에 문의하면 된다. 그런데 그 인생이 예찬받을만한 사람의 죽음은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만약 죽음의 종류 자체에 뭔가 주목할 만한 뭔가가 있다면, 혹은 사후에 후속 영향이 뒤따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