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상실이란 곧장 시간에 대한 이야기에 종말을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발생시켰다. 미래를 상상할 수 없고 서사화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시간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식민 말기 소설에서 미래는 부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그에 대한 후대의 역사 서술에서 미래는 너무나도 압도적으로 존재한다. 식민 말기 한국을 다루는 역사가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부딪힌다. 이후 언급될 다수의 작가들이 식민지 시대의 마지막 단계에 작품을 발표하고 불과 삼사 년 후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갑자기 식민 지배가 종식된다. 후대의 역사가는 이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식민 말기의 역사를 쓰게 된다. 또 해방 후 한반도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경합을 벌였으며 지금도 양자는 휴전 상태에 있다. 육십 년 이상 지속된 냉전 세계의 역사를 관망하면서 또 한편으론 여전히 그 역사 안에 머물러 있는 채로 역사는 쓰인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논의되는 작가들은 삼중의 검열에 처한 셈이다. 그들이 실제로 글쓰기를 하고 있던 시대에 작용했던 식민 당국의 검열, 그들의 협력 행위에 대한 해방 이후 두 국가의 검열, 그들이 분단과 더불어 남북 중 어느 한쪽을 택한 이후에는 반대편 냉전 국가의 검열이 그것이다. 그들이 대면하고 있는 재현의 위기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냉전이 첨예하게 분기하고 있는 20세기 한국 근대사의 한 부분이다. 그러한 위기는 역사주의의 논리 때문에 더욱 악화될 뿐인데, 역사주의의 논리란 역사를 현재의 전주곡쯤으로 치부하는 도구이며, 식민 말기의 작가와 작품을 읽는 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온 도구인 것이다. (20~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