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글을 쓴다고 고통이 말끔하게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선명하게 다가와 괴로운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고통을 말했을 때와 말하기 전의 상태가 똑같다고 할 수는 없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은 씹지 않고 그냥 삼켜서 목 안에 걸려 있는 느낌을 내사introjection로 설명한다. 내사는 외부의 대상을 비판 없이 내면에 수용하는 심리적 행위다. 소화되지 않는 이물감이 목 안에 남아 있을 때 사실상 심리적 뇌사 상태, 소위 여성적 우울증이라고 불리는 증상의 기저 원인이 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무얼 참고 있는지 아는 사람보다 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위태롭다. 내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자기를 갉아먹게 되니까.
고통을 스스로 언어화하지 못할 때 속이 썩는다는 말은 정확하다. 고통의 원인인 모든 부정의가 오로지 나라는 존재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꺼내 읽고 해석하는 일은 혼자 속 썩이며 참는 일보다 나에게는 참을 만한 고통이었다. 그런 면에서 글쓰기는 내 이야기가 단지 사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 사소하지 않다는 것, 내가 경험한 고통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폭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각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75~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