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가 (생물학적 원인 또는 사고에 의한 것이라는 발상에 근거해서) 사회적 책임의 문제가 아닌 개인이나 가족의 문제라는 태도는 장애를 만들어 내는 문화적 요인이며, 장애인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사회정책에 강하게 역행하는 요인이다. 장애인이 역경을 극복하고 자기 스스로의 특별한 노력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기를 기대받을 때 장애를 개인적 문제로 생각하는 태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엄청난 역경을 딛고 ‘장애를 극복’했다고 여겨지는 몇 안 되는 장애인 영웅에게 보내는 대중의 찬사는 장애인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설명해 주며 또 거기에 일조하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가족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른 가족구성원의 엄청난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가족이 제공해야 한다고 기대받을 때, 장애를 가족의 문제로 보는 태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바버라 힐리어는 어머니나 돌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장애가 있는 가족구성원(특히 장애아동)의 삶을 ‘정상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면 무엇이든 할 것이라 여기는 기대가 강하다는 점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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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을 위한 자선사업은 엄청나게 많은 비장애인 전문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거대한 사업이다. 이런 자선사업은 장애인이 직면하는 어려움에 응하는 것이 가족 외의 사람에게는 의무사항이 아니며, 정부가 앞서야 할 사회적 책임도 아닌 선의에 기반한 행동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더욱이 자선사업가와 (역시 많은 비장애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대부분의 정부 관료조직 모두가, 다양한 신체적·정신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되고 조직된 사회에서라면 필요 없을 법한 지원을 뿌려댄다. 이렇게 장애에 대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잠재적 저항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장애를 ‘개인적 불운’으로 보는 접근 방식은 내가 인생에 대한 ‘요행식’ 접근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러한 접근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의 능력, 요구와 한계, 고통의 분배를 실질적으로 처리하는 사회 계획이 개인의 행운을 바라는 것으로 대체된다.